윤씨는 또 지난 2004년 1월에는 기독교복음 전파를한다며 워싱턴DC에서 라디오방송국을 매입하는 등 2개의 AM라디오 방송국을 사들였음이 연방통신위원회(FCC)를 통해 확인됐습니다. 매입가격은 1개 방송국당 1천만 달러에 조금 못미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뉴욕한인사회에서 손꼽히는 재력가로 알려진 윤씨는 비뇨기과의사이면서도 펜실베이니아 부동산의 전 소유주인 페이스신학교를 졸업한뒤 목사안수를 받은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입니다. 주중에는 의사로서 진료를 하고 주일에는 자신의 가족 등을 대상으로 목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특히 윤씨는 차지철 전 청와대 경호실장의 손아래 처남으로서 차씨의 부인인 윤보영씨, 그리고 부모인 윤원중, 정숙녀씨 등과 함께 공동명의로 뉴욕에 부동산을 많이 소유한 것으로 확인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윤보영이란 이름이 뉴욕시 등기소에 나타난 것은 1981년 12월 14일이었던 점으로 미뤄 윤씨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1981년께 미국에 이민을 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날 윤씨는 뉴욕 퀸즈의 한 주택을 윤원중, 정숙녀씨와 함께 3명이 각각 3분의 1의 지분으로 남동생 윤씨로부터 매입했으며, 12년뒤인 1993년 6월 29일 다시 남동생에게 소유권을 이전했습니다. 윤씨와 함께 집을 구입한 윤원중, 정숙녀씨는 차 전실장의 장인장모입니다. 이 당시까지 차 전실장의 처남이 소유한 부동산은 이 집이 유일했으나 누나의 이민 이후 크게 늘어나게 됩니다.
차 전실장의 부인 윤씨는 이 집을 매입한지 2년이 지난 1983년 11월 15일 뉴욕 퀸즈의 신축주택을 어머니 정숙녀씨와 공동명의로 매입했고, 14년이 지난 1997년 10월 15일 이 집을 세 딸에게 넘겼습니다. 차 전실장의 세 딸은 크리스틴, 다이애나, 주디였다고 부동산 매매서류에 기록돼 있으며, 세 딸은 2005년 2월 23일 이 집을 매도했습니다.
차 전실장의 장인장모는 공동명의로 1983년 6월 29일, 1984년 10월 15일, 1985년 1월 28일, 각각 1채씩 3채의 주택을 매입했습니다. 특히 이들 부부는 1987년 11월말부터 채 한달이 안 되는 기간에 아들 윤씨와 함께 3명 공동명의로 무려 8채의 부동산을 매입했습니다. 1987년 11월 23일, 12월 2일, 9일, 11일, 17일, 18일 각각 1채씩의 부동산을 샀고, 11월 25일에는 2채를 한꺼번에 사들였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차 전실장의 장모 정숙녀씨가 2004년 7월 6일 사망해 소유권을 가족에게 넘겼다는 사실도 부동산 서류에 기록돼 있었습니다. 차 전실장의 어머니 김대안씨는 차씨 사망뒤 어렵게 삶을 이어가다 1998년 12월 영락교회가 운영하는 경기도 하남시의 한 양로원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처가쪽은 미국에 적지 않은 부동산이 있었고 특히 처남의 재산은 놀랄 정도였습니다.
뉴욕주정부 전문직 라이센스조회 웹사이트 확인결과 처남 윤씨는 1964년 2월 26일 전남대 의대를 졸업했으며, 1976년 3월 5일 미국에서도 의사면허를 받은 것으로 미뤄 1976년 이전에 미국으로 이민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뉴욕에서 30년 이상 부동산 중개업에 종사했던 한 재미동포는 “한번은 차 전실장 처남이 주택 17채를 한꺼번에 팔아달라고 의뢰한 적이 있었다. 이 재산이 차지철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서울에서 윤씨 일가와 영락교회를 함께 다녔던 한 뉴욕동포도 “차 전실장 장인장모가 뉴욕으로 온 뒤 결혼 50주년을 맞아 금혼식을 할 때 참석했을 정도로 잘 안다”며 “차 전실장 처남이 아무리 의사라고 해도 이렇게 많은 재산을 가진다는 것은 미국에서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차 전실장이 돈과 여자 문제에서 만큼은 결백하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뉴욕에서 떠도는 이같은 소문과 의혹은 단순한 소문으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1987년 8월 당시 한 신용금고가 부도가 나면서 대주주의 횡령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차 전실장의 재산 일부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 당시 한국언론에는 차 전실장 부인 윤씨가 모상호신용금고 대주주인 김모씨 형제에게 14억원을 빌려준 뒤 돈을 떼였다는 기사가 대서특필됐습니다. 이들은 1980년께부터 윤씨를 비롯한 정관계 인사들의 검은 돈만 노렸다는 것입니다.
윤씨는 높은 이자를 준다는 말에 꾀여 차츰 돈을 더 빌려주다보니 14억원이 됐고 상환을 요구하자 이들 형제는 “그 돈이 어떤 돈이냐”며 은근히 협박하며 돈을 가로챘다는 것입니다. “그 돈이 어떤 돈이냐”는 말은 ‘부정축재한 돈 아니냐, 폭로하겠다’는 뉘앙스였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미뤄 윤씨가 김씨 형제에게 돈을 빌려준 것은 적어도 1981년 이전으로 추정되며, 이같은 협박에 소문이라도 날까봐 말한마디 못하고 1981년 이민을 가버렸다고 합니다.
1980년 전후 14억원은 그야말로 거액으로 경호실장 월급을 받아서 모을 수 있는 돈의 범위를 넘어가는 것입니다.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월급이 60만원이었음을 감안해 차 전실장도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가정하면 월급을 몽땅 모아도 1년에 천만원을 모을 수 없습니다. 1억원을 모으는 데도 10년 이상이 걸리고 14억원을 모으려면 150년 이상이 걸립니다. 그렇다면 이 돈의 대부분은 적법하게 모은 돈으로 보기는 힘듭니다.
여러 상황을 종합할 때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어도 차 전실장이 청렴결백의 대명사로 불리기는 힘듭니다. 합법적인 재산축적이라고는 보기 힘든 차 전실장의 돈이 사후에 미국으로 흘러들어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 [안치용의 시크릿 오브 코리아(Secret of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