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라의 하나님

뉴스일자: 2015년02월02일 19시17분

                데라의 하나님      창 31: 43-55       2. 1. 15

고대근동에서는 겨울 우기가 끝난 직후인 봄에 양털을 깎는 ‘목동들의 추수기’를 맞는다. 목동들의 양털 깎는 일은 한 해의 경제를 좌우하는 일이어서 많은 손이 필요하기 때문에 온 식구와 친척친구들까지 함께 모여 양털을 깎았고, 양털을 깎은 후에는 일꾼과 손님을 초청해 큰 잔치를 배설하고 축제를 벌인다(창 38: 12, 삼상 25: 1-4, 삼하 13: 23)

많은 짐승을 목축하는 라반의 숙영지와 야곱의 숙영지는 사흘 길이나(Three day's journey; 대략 50마일)떨어져 있었는데(창 30: 36) 때 마침 라반의 양털 깎는 축제가 있게 되자 기회를 기다렸던 야곱은 라반이 이런 축제 분위기에 젖은 틈을 이용해 자기 아내들과 의논한 후, 식솔들과 짐승 떼를 이끌고 야반도주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와 오빠들이 남편에게 품삯을 열 번이나 사기치고 사사건건 괴롭혀서 부모형제 혈육들에 대한 불만이 많아 그들에게서 멀리 떠나고 싶었던 야곱의 아내들은 하나님께서 ‘네 식구들과 종들과 짐승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음성을 들려주셨다’는 남편의 말을 듣자마자 야곱과 긴급 가족회의를 한 후, 그 날 밤으로 짐을 싸 야반도주를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살아계신 벧엘 하나님을 믿는 야곱, 믿음의 조상의 한 사람인 야곱으로서는 당당하지 못한 졸렬한 처사였다.

야곱이 가솔들과 종들과 수많은 짐승들을 데리고 도망쳤다는 소식을 삼일 만에 들은 라반은 대노하여 가신들과 친족으로 구성된 임시추격대를 이끌고 밧단아람에서 칠일 동안 300마일(480Km)을 달려서 열흘 만에 발걸음이 느린 야곱 일행을 길르앗 산에서 만난다. 당시 라반의 추격이유는 ⑴ ‘야곱이 작별인사도 없이 식구들과 몰래 도망쳤다는 것’과 ⑵ 자기의 가족수호신인 드라빔(Teraphim, 테라핌 : ‘편안히 산다’는 뜻의 사람형상을 닮은 반신상(半身像)으로 ‘가정수호신 우상’이다. 나무나(삼상 19: 13-16) 은으로 만들어졌고(삿 17: 4), 작은 것에서 사람 키와 맞먹는 큰 것까지 있는데, 집안에 안치하고 구복(求福)과 점술(占術)과 신탁(神託)에 관여됐다. 최근 발견된 누지(Nuzi) 서판에 의하면 당시 드라빔을 소지한 자는 ① 가장 큰 몫의 유산상속을 받을 권리가 있었고 ② 한 씨족 내의 지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을 훔쳐갔다는 이유였다.

본문은 도망자 야곱과 추격자 라반이 팽팽하게 맞서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먼저 라반이 아무 연락도 없이 야반도주한 야곱을 죽이고 짐승과 자식들과 종들까지 빼앗아 돌아갈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어제 밤 꿈에 나타나 야곱가족을 해치 말라고 하셨기에 그만둔다고 말한 내용과 이러한 라반의 말을 들으면서 위기를 모면한 것을 감지한 야곱이 가솔을 데리고 야반도주한 자신의 허물은 돌아보지 않고, 자기를 변명하면서 지금까지 섭섭했던 감정을 모두 털어 놓으며(31, 32, 36-41) 지난 20년간 쌓였던 라반에 대한 불만을 한꺼번에 토로한 내용이다. 그래서 두 사람이 부딪히는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극적으로 화해가 이뤄진다.

그리고 간신이 화해한 두 사람이 ‘이제 이후 서로 경계를 침범해서 다투거나 해하지 말자’며 돌기둥을 세우고 돌기둥주위에 돌무더기를 쌓은 후, 라반은 그것을 “증거의 돌무더기”란 뜻으로 여갈사하두다(Jegar-sa-ha-dutha)라 부르고, 야곱은 “증인의 무더기”(The heap of witness)란 뜻의 갈르엣(Gale-ed)과 “지켜본다”란 뜻의 미즈파(Mizpah)라고 불렀다. 그다음 라반은 ‘이제 우리가 피차 헤어지더라도 네가 내 딸들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여자를 아내로 취하면 사람은 우리와 함께 할 자가 없을지라도 보라, 하나님이 너와 나 사이에 증거하실 것이다(See, God is witness between you and me; 50절)라며 야곱에게 맹세언약을 촉구한다.

그다음 마지막으로 라반은 야곱에게 “내가 너와 나 사이에 둔 이 돌무더기와 돌기둥을 보라(Behold this heap and behold the pillar which I have set between you and me) 이 돌기둥과 돌무더기가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돌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돌들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않을 것이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判斷)하옵소서(The God of Abraham and the God of Nahor, the God of their father, judge between us; 51-53)”라며 맹세를 선언한다. 그러자 야곱도 자기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이름으로 맹세한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화친언약(和親言約, The Covenant of Peace)이 성립된다.

야곱의 장인이요 외삼촌인 라반은 지난 20년 동안 자기아들들과 야합하고 공모하여 야곱의 약점을 이용해 결혼과 품삯에서 야곱을 속이고 가족을 미끼로 삼아 야곱을 노예처럼 부려 먹으며 재산을 착취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야곱이 힘을 키워 훗날 자기를 쳐들어와 복수할까 불안하여 '돌무더기 맹세언약'을 서둘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언약을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나홀의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나홀의 아버지 데라의 하나님이름으로 된 맹세 화친언약이라 선포함으로 두 사람 사이에 맺어진 평화언약은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언약으로 강조한 것이다. 나는 오늘 “데라의 하나님”(The God of Terah)이란 명제로 말씀의 은혜를 나눈다.

                               데라의 하나님

   1. 온전한 순종

아담과 하와의 죄는 한마디로 불순종이었다. 하나님이 아담하와에게 “에덴동산 각종 나무실과는 네가 맘대로 먹되 선악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을 것” (For in the day that you eat from it you shall surely die ; 창 2: 17)이라고 한 말씀을 선악과를 따 먹으므로 불순종한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아담 한 사람이 불순종한 죄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지구촌인류에게 왔다’고 말했다(롬 5: 12- 19)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에서였다. 그래서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고, 한 사람 예수님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살아났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류가 죄인된 것같이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류가 의인이 된 것이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은 살아있는 산 영(靈)이 됐었다가(The first man, Adam, became a living soul) 불순종의 죄로 영혼이 죽은 자가 되고 모든 사람들까지 죽이는 영이 됐지만, 마지막 아담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 돼(The last Adam became a Life-giving Spirit) 예수를 믿는 자마다 모두 살아나는 기적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구주로 믿으므로 살아난 영이 된 성도는 크게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예수님의 순종은 온전한 순종, 전폭적이고 완전한 순종, 100%의 순종이었다. 바울의 선언대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의 완전 복종’(빌 2: 8)이었다. 순종하는 흉내만 낸 것이 아니다. 처음에 순종하다가 중간에 바뀐 것도 아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완전한 순종이었다. 알파와 오메가의 순종이었다. 마지막 십자가 운명 시,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Are You not the Christ?)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Save Yourself and us!; 눅 23: 39)”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기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마 27: 40)는 강도들의 조롱 섞인 유혹과 “이스라엘의 왕이여, 자기를 구원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If You are the Son of God, come down from the cross, and we shall believe in You)”, ‘네가 이스라엘의 왕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렇게 비참하고 초라하게 죽지 말고, 실력을 보여 십자가에서 당당하게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그것을 믿겠다!’며 조롱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의 마지막 유혹을 물리치며 묵묵히 죽기까지 복종하고 순종했다. 100% 완전 순종이다.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 70년 동안 안치됐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려던 다윗의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다(삼상 7: 1-2, 삼하 6: 3-11, 대상 13: 1-14) 그러나 이 실패는 처음부터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말씀대로 순종했다가 나중에 불순종하므로 실패한 것이다. 다윗이 처음에 아비나답의 집에서 언약궤를 운반하기 시작했을 때, 언약궤를 새 수레에 싣기까지는 어깨에 메고 옮기므로 하나님 말씀에 잘 순종했다. 그러나 언약궤를 수레에 싣고 난 후, 짐승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부터 불순종은 시작됐다. 이것이 다윗의 언약궤 모심 실패이다. 처음은 순종했다가 나중은 불순종한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 해야 하는 순종은 완전한 순종, 100% 순종이어야 한다. 처음엔 순종했다가 상황에 따라 불순종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 일이년, 삼사년 주일성수 십일조 성수 작정헌금 성수 일천번제 성수들을 잘 순종하다가 멀리 이사를 가서, 장사가 잘 안 돼서,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주일날 일거리가 생겨서, 형편이 나빠져서 이빨 빠지듯 슬그머니 주일성수 십일조성수, 약정헌금을 불순종해 빼먹는 것이 아니다. 주일성수와 십일조성수와 작정헌금인 일천번제 건축헌금 선교헌금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다. 마땅히 지켜야하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약속한 후, 얼마동안 건축헌금 선교헌금 일천번제를 순종 잘하다가 흐지부지 불순종하는 것도 바른 신앙이 아니다. 순종은 시작했으면 끝까지 해야 한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됐고,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다”고 했다(히 5; 8-10)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에도 육체의 모든 고난을 견디시고 순종하심으로 온전케 됐고,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됐으며,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대제사장이 됐다(히 7: 17, 21, 24-25)는 말씀이다.

그렇다. 순종은 고난과 고생을 요구한다. 고난이 없는 순종은 순종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몸인 교회와 예수님의 종인 주의 종에게 순종하려면, 헐벗고 굶주리며 잠을 못자고 불이익과 손해를 당하며 궁핍과  곤란과 역경을 당하는 육체의 고난과 고생이 있고 경제적인 고난도 있으며 정신적 고난에서 영적인 고난까지 많은 곤란과 고난과 고생이 있는데 그러한 고난들을 견디고 순종해야 한다. 여러 가지 고난을 잘 견뎌내며 100% 순종하므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으리라”(If you be willing and obedient, you shall eat the good of the land; 사 1: 19)는 약속대로 ‘땅의 좋은 소산을 풍족하게 먹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2. 데라의 하나님과 나홀의 하나님

라반은 젊은 장정들을 시켜서 세운 큰 돌기둥과 돌기둥주위에 쌓아놓은 돌무더기를 바라보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아버지 데라(창 11: 27)의 하나님이름으로 너와 나의 맹세언약이 성립됐다’고 야곱에게 선언한다(53절)

창 11: 26을 보면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은 데라가 70세에 낳은 세쌍둥이 아들이다(Terah lived seventy years, and became the father of Abram, Nahor and Haran) 그런데 셋째 아들 하란은 외아들 롯을 낳은 후,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아버지 데라와 두 형들보다 먼저 죽는다.
그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달 신을 섬기면서(수 24: 2) 우상을 만들어 파는 것을 생업으로 하던 데라는 어느 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 우상제조업을 포기하고 가산을 정리해 가족들과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출발해 오다가 도중에 살기 좋은 하란 땅을 보자 그곳에 정착해 살다가 205세를 향수하고 운명한다.

창세기 12: 1-3과 사도행전 7: 2-4의 기록을 종합하여 Visualize해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 부모형제 모든 가족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오게 한 것처럼 보이지만, 창 11: 31절과 ‘데라의 하나님’이란 본문기록 과 연결하여 재조명해보면, 가족들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까지 와서 그곳에 정착한 것은 데라가 했던 그의 믿음의 행동이었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출발한 것은 아브라함이 했던 믿음의 행동이었다.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70세에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 세쌍둥이아들을 낳고, 어느 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출발했다가 살기 좋은 하란에 정착해 살다가 205세를 향수하고 죽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떠난 나이가 75세였으니, 그때 하란에 살던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의 나이는 145세였고,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출발한 후에도 데라는 하란에서 60년을 더 살다가 205세에 그곳에서 죽어 뼈를 묻은 것이다.

그리고 그 60년 동안에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이 창 13장에서 25장까지의 기록이다. 제일먼저 아브라함과 셋째 동생 하란의 아들인 조카 롯이 사업상의 문제로 서로 헤어져 분가한다. 그다음, 최초 세계전쟁인 북부 메소포타미아 동맹군과 남부 사해 연합군의 전쟁이 있었고, 그 전쟁에서 롯과 그 가족이 포로로 잡혀간 것을 아브라함이 318명 군사로 북부동맹군을 격퇴하고 조카 롯을 구출한다. 그다음 가나안 이민생활 25년 만에 외아들 이삭을 낳고 다시 25년 후엔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는 믿음의 시험이 있었다. 이렇게 많은 시련을 통과하면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된다.

그다음, 145세에 아브라함과 헤어진 아버지 데라가 하란에서 20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2년 후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향년 127세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사라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아브라함은 38년을 더 살면서 젊은 여인 그두라를 두 번째 부인으로 얻어 여섯 아들을 낳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행복과 천수를 누리다가 175세에 죽는다.

이제 데라의 하나님을 알아본다. 데라가 직접 하나님을 만나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 즉시 우상의 도시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출발했는지, 아니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난 후 아들의 영향을 받아 야훼하나님 신앙을 갖게 됐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데라의 하나님’이란 표현을 볼 때, 데라가 야훼신앙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다. 성경을 유추(類推)해 볼 때, 데라가 아브라함의 영향을 받은 것보단 데라가 직접 하나님을 만나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솔들을 거느리고 수천리 길 가나안으로 가다가 풍경이 화려하고 자녀들 교육하기에 문화 환경이 좋으며 사람들의 인심도 좋고 정붙여 살기 좋은 하란을 만나자 그곳에 이삿짐을 풀고 정착한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어쩌면 나이 많은 데라가 하란에 도착했을 때, 먼저 죽은 셋째아들 하란과 이름이 같은 도시에 향수와 애정을 느끼고 매력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래서 하란에 정착했고 거기서 205세까지 살다가 죽는다. 그래서 Haran (하란)은 데라가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조상이 될 뻔했던 기회를 놓친 장소가 된다.

그렇다. 데라의 하나님은 100% 순종하지 않고 일부만 순종한 사람에게 순종한 것만큼만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 교회 안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데라의 하나님에 멈춰있는 교인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그들이 순종한 것만큼만 복을 떼어 주시고 나머지 축복을 덩어리 채 들고 안타깝게 서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교인들이 많다. 그 큰 질병치료의 기적, 각종난치병과 불치병 치료와 건강의 축복, 사업과 자녀가 잘되는 형통의 축복, 부부가 행복해지는 축복, 기도가 응답되고 신령한 은혜가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영적인 축복, 깊고 오묘한 말씀의 비밀을 깨닫게 하시는 은혜 위에 은혜, 각종 소원들이 이뤄지는 축복들을 가져오셨다가 그 중에 부스러기 조금만 떼어 주시고 나머지는 손에 들고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조금만 더 순종하면, 조금만 더 인내하면, 조금만 더 충성하고 기도하면 넘치도록 받을 기도의 응답들과 축복을 받지 못하는 교인자신들도 안타깝겠지만 하나님은 더 안타까워하신다.

1961년 1월 19일 새벽에 성령세례를 받은 10대 소년 세 사람의 처음 출발은 정말 멋이 있었다. 세 소년은 3년 동안 불신 부모형제들에게 많은 핍박을 받으면서 잘 이겨냈고 시험과 유혹을 이기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세 소년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열심히 성경을 읽어 내가 신약성경을 97번 읽는 동안 두 친구도 4-50번은 넘게 읽었다(셋은 매일 저녁마다 서로 성경을 얼마나 읽었나를 확인했는데, 당시 나는 친구들을 이기고 싶어서 50페이지를 읽고는 30페이지를 읽었다며 상대편을 안심시키는 선의의 거짓말을 했었다) 그리고 새벽과 저녁마다 산에 올라가 설교를 연습하고 산 기도를 했으며 거의 매일 저녁마다 교회에 나가 철야를 했다. 당시 우리는 철야기도가 무언지도 몰랐다. 밤마다 세 소년은 마루에 방석을 깔고 담요 한 장을 덮고 몸의 열기로 추위를 잊으려고 꼭 끌어안고 잠을 자면서 교회를 지키면서 목사 되는 꿈을 키웠다. 어느 때는 아무도 없는 교회 강단에 올라가 돌아가면서 설교를 연습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추위를 잘 타는 나를 친구들은 하나는 앞에서 하나는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따뜻하게 해주며 혈육처럼 사랑했다. 그래서 당시 시골 우리교회 성도들은 우리를 ‘새끼 목사 삼총사’라고 부르며 사랑해 주었고, 장차 멋있는 목사들이 될 것이라고 칭찬했다.

지난 한 주간 나는 오늘설교를 준비하면서, 시골교회 소년시절에서 50여년이 지난 오늘날, 세 사람 중에 나 혼자 목사가 돼, 아득하게 먼 옛날을 회고하면서 ‘데라의 하나님’을 생각해 보았다. 내가 22살에 전도사로 고향을 떠난 후, 두 친구의 소식은 두절됐는데, 70 고희가 된 지금, 그들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들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일까 아니면 데라의 하나님으로 남아 있을까...생각하니 마음이 아련할 뿐이다.   

지금 당신의 하나님은 100% 하나님께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조상, 축복의 근원으로 축복해주신 아브라함의 하나님인가? 아니면 40% 50%만 순종해 그만큼의 축복으로 끝난 데라의 하나님인가? 데라의 하나님이라면, 다시 일어나 순종의 길을 걸어가 볼 마음은 없는가? 나의 하나님이 데라의 하나님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는 믿음의 혁명, 순종의 역사, 축복의 기적들이 일어나길 축원한다. 

그다음 나홀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데라가 첫째아들 아브라함 부부와 손자 롯과 종들과 짐승들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출발했다가 하란에서 정착해 사는 동안, 둘째아들 나홀도 우상의 도시 갈대아 우르를 떠나 메소포타미아의 고원지대 밧단 아람(다른 이름은 아람 나하라임: “두 강들의 아람”이란 뜻으로 나하라임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을 의미하고 아람은 “고지”, “산지”란 뜻으로 아람 나하라임은 두 강 사이에 있는 고원지대를 가리키며 밧단 아람으로 부르고 훗날 세계 3대 문명발상지 중 한 곳이 된다)으로 옮겨 간다(창 28: 2, 24: 10) 그리고 거기서 밀가와 르우마 두 여자를 아내로 얻어 밀가를 통해 8명, 르우마를 통해 4명 도합 12명의 아들을 낳는데, 밀가를 통해 낳은 여덟째아들 브두엘이 딸 리브가를 낳고,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며느리, 이삭의 아내가 되며, 나홀의 손자 라반은 훗날 야곱의 장인이 된다(창 29: 5)

나홀의 혈통에서 ‘천만인의 어미’(The mother of thousands of ten thousands;  창 24: 60) 리브가가 나왔고, 야곱의 두 아내 라헬과 레아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조상인 12아들이 나왔으니 나홀의 하나님은 믿음의 혈통을 잘 지킨 자에게 그 믿음을 보상해 축복하시는 하나님이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버지 데라와 함께 야훼하나님 신앙을 갖게 된 후, 비록 아브라함을 따라 가나안으로 내려가지는 않았지만 믿음으로 우상의 도시 갈대아 우르를 떠나 밧단 아람에 정착해서 홀로 자기 믿음을 지키며 자녀들을 신앙으로 키웠다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나홀, 그 사람 나홀을 통해서 우리는 그를 축복하신 나홀의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장.감.성.순.침(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 침례교) 주류교단 정통교회에서 화려하게 신앙생활 못하고, 비록 군소교단의 이름 없는 작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어도, 그리고 미국 한국 영국 독일의 큰 교회, 유명한 교회에서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신앙생활 하지 못하고 비록 작고 가난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중국과 이북의 지하교회와 작고 가난한 나라와 열악한 선교지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어도, 오늘도 나홀의 하나님은 리브가를 통해서 그리고 라헬과 레아를 통해서 12지파를 만드시고 하나님나라를 세우시듯, 묵묵히 자기 믿음을 지키는 주의 종과 성도들을 들어 세워 평지 위에 우뚝 솟은 거대한 산 같이 역사 위에 위대한 일을 만들어 내신다. 그렇다. 하나님은 큰 교회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다. 가난하고 작은 교회에도 계시는 하나님이다.

역사의 변두리 밧단 아람에서 리브가와 라헬 레아가 나오게 하셨고, 변두리 베들레헴과 나사렛에서 역사의 주인공 예수님이 나오게 하셨으며, 산헤드린 교권의 변두리 갈릴리에서 12사도가 나오게 하셨고, 12사도 외에 변두리 사도 바울을 들어 지구역사를 바꾸셨던 나홀의 하나님께서 ‘나 홀로 바른 믿음을 지키는 당신을 통해’ 위대한 역사들을 만드시는 기적들이 일어나길 축원한다.

   3. 축복의 근원, 아브라함(창 12: 1-3)

납득하기 어렵고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하나님도 사람을 편애(偏愛)하신다. 자녀들 중에 첫째 아들은 사랑하고 둘째는 미워하며, 첫째 딸보다 둘째 딸을 더 사랑하는 부모가 있고, 사원 중에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덜 사랑하는 직장상사가 있듯, 하나님도 편애하셔서 남보다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는 성도가 있다.

성경에 하나님이 편애한 사람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요셉 외에도 모세 다윗 솔로몬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등 시대마다 하나님이 특별하게 사랑한 사람들은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에 모래처럼 많다. 이렇게 시기질투가 날 정도로 하나님이 편애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은 오늘도 목사와 성도들 중에도 편애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목사라고 다 똑같은 목사가 아니고, 장로라고 다 똑같은 장로가 아니며, 집사라고 모두 동급의 집사가 아니다.

하나님은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Go forth to the land which I will show you!; 창 12: 1)는 말씀을 전폭적으로 믿고 순종해 멀고 험한 가나안,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허허벌판 가나안까지 갔던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셨고,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는 축복을, 아브라함을 저주하고 대적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직접 저주하시며,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받는 ‘축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다. 창 12: 2에 ‘축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You shall be a blessing)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예 베라카는 “너는 복이 될지라”는 뜻으로 아브라함 자신이 축복이 된다는 말이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명령으로 떨어질 때, 어떤 이유나 핑계나 조건을 대지 않고 아브라함처럼 믿고 100% 순종하는 사람에게 ‘아브라함의 복’, ‘너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 축복과 나를 인하여 나와 연관된 모든 사람이 복을 받는 역사들’이 일어나길 축원한다. 주기도문교회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 되는 성도들이 많이 일어나고, 축복의 근원 아브라함 같은 거룩한 성도들이 많이 나오기를 축원한다.

   4. 불순종이 가져온 어려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Go forth from your country, And from your relatives, And from your father's house, To the land which I will show you!; 창 12: 1)고 하셨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란 땅을 떠날 때, “그 아내 사라와 그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출발했다(창 12: 5)

하란에서 가나안까지는 300마일(480km, 1200리)의 먼 거리였다. 당시 여행경로로 보면 아브라함은 많은 가솔을 거느리고 유프라테스 강변을 따라 시리아에 도착한 후 시리아 광야를 횡단해서 다메섹에 이른 후 다메섹에서 가나안으로 직진하는, 그 많은 사람들을 거닐고 수많은 위험을 무릎 쓰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광야를 횡단하는 대장정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가나안까지 삶의 터전을 옮겨 가므로 “너의 본토를 떠나라”는 지리적인 순종은 100% 했다. 그러나 죽은 동생 하란의 아들, 조카 롯을 데려가는 일로 “너의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사람까지 떠나야 하는 순종은 실패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먼저 죽은 동생의 핏줄을 생각하는 일은 훌륭하고 잘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거역한 대실수다. 인간의 생각과 인정으로 실패한 불순종의 결과를 보자.

   ⑴ 배반의 쓴잔을 맛보았다(창 13: 1-18)

짐승들과 종들이 많아지면서 서로 다투는 일이 자주 발생하자, 아브라함은 롯에게 “우리는 한 골육이다.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않느냐. 나를 떠나라 네가 왼쪽을 택하면 나는 오른쪽을 택하리라” 제안했다. 그러자 조카 롯은 짐승도 많고 종들도 자기보다 많은 아브라함, 자기를 거두어준 생명의 은인이며 아버지 같은 아브라함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 욕심 따라 방목하기에 비옥하고 좋은 땅, 푸른 초장이 융단처럼 펼쳐 있고 물줄기가 정맥처럼 퍼져 있는 동쪽의 요단 평야 땅을 선택한 후 자기 종들과 짐승들을 거느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브라함을 떠났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배반의 쓴잔을 마셨다.
 
   ⑵ 전쟁에 휘말리다(창 14; 14-16)

84세 때의 어느 날, 아브라함은 가나안 남북전쟁 소식을 듣는다. 북부 메소포타미아 네 나라 연합군이 질풍노도처럼 침공해 중립국인 가나안 부족국가 여섯 나라를 정복하고 여세를 몰아 남부 사해연합 다섯 나라까지 정복한 후, 소돔 땅에 살고 있던 조카 롯과 그의 가족과 재산까지 모두 탈취해 갔다는 소식이다. 아브라함과는 관련이 없는 전쟁이다. 그러나 조카 롯의 가족과 재산이 포로로 잡혀가고 탈취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브라함은 318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밤낮을 쉬지 않고 80km를 달려가 목숨을 걸고 북부 연합군을 격파하고 롯을 구출한다.   

   ⑶ 롯 가족의 비극을 본다(창 19장)

아브라함이 목숨을 걸고 롯을 구출한 후에 롯은 소돔에서 크게 성공해 잘 살았지만 롯이 아브라함에게 사례했거나 봉대(奉戴)했다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그러다가 동성애와 극심한 도덕적 타락으로 소돔 고모라가 유황불 심판을 받아 멸망당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사’(God remembered Abraham; 창 19: 29) 롯과 그의 가족을 구원해 주신다. 그러나 ‘절대로 뒤를 보면 안 된다’는 천사의 경고를 무시한 롯의 부인은 뒤를 돌아봤다가 소금기둥이 돼 죽었고, 두 딸은 아버지 롯에게 술을 마시게 한 후, 돌아가며 근친윤간을 해 모압과 벤암미란 아버지의 아들 사생아를 낳는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조카 롯을 데려오지 않았다면 롯에게 배반의 쓴잔도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롯 때문에 겪은 목숨을 건 전쟁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며 그리고 비참하게 깨져버린 롯 가정의 비극도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불순종의 결과는 이런 것이다. 그래서 순종은 100%해야 한다. 하나님께 온전한 100% 순종으로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유럽교회들의 문 닫는 소리가 미국과 한국교회에 경종으로 울리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에 유럽교회는 지구촌의 기후변화로 히말라야 만년설이 녹아내리고 빙벽들이 무너져 내리듯 교회 문 닫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점점 더 요란해지고 있다. 네덜란드 개신교회는 4년 내에 700교회 이상이 문을 닫았고, 덴마크에서는 200개, 독일은 515개 교회가 지난 10년간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는데, 놀라운 사실은 문을 닫은 교회건물이 서커스 훈련학교나 술집, 스케이트보트 연습장, 수퍼 마켓, 서점, 체육관, 꽃가게 등 상업용 건물로 바뀌었는데 더 놀라운 사실은 많은 건물이 이슬람사원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지난 10년간(2100-2010년) 새로 세워진 개척교회가 5000개나 되는데 출석교인은 3%나 감소됐고, 한국도 10개 교회를 개척하면 7-8개는 문을 닫는다고 한다.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추세여서 문제가 되고 있고 한국에서는 이슬람의 선교공세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최근 미국의 대표적 강해설교가인 존 맥아더 목사(캘리포니아 썬-벨리 지역 Grace Community 교회목사로 한 교회에서 45년간 목회)는 중앙일보기자와 인터뷰에서 “미국은 기독교의 가치를 잃는데 200년이 걸렸지만 한국은 몇 년도 걸리지 않았다”면서 “한국은 짧은 기독교역사 가운데 갑자기 교회가 커지면서 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 결과 기독교가치가 내부적으로, 사회적으로 뿌리를 내려 제대로 정착되기 전에 교회는 막강한 힘과 권위만 갖게 됐다. 그런 불안한 상태에서 한국교회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급격한 물결에 휩쓸리며 본질을 잃어갔다”는 충격적인 말을 했다.

맥아더목사는 문제가 되고 있는 한국교회 목사의 박사논문 표절과 3억 달러(약 3000억 원)짜리 교회 건물을 비롯해 교회세습과 목사들의 청빙문제, 이성문제와 금전문제 등 많은 비리를 지적하면서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는데, 물론 이것은 관록 있고 명성 있는 한 노목사의 주관적인 판단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예리한 지적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미국교회와 한국교회가 이미 위험수위를 넘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맥아더목사의 충고대로 “목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넓이보다 깊이”이다. 미국교회와 한국교회, 세계에 흩어진 6천여 한인교회와 3만 여명의 선교사들이 사는 길은 대형교회로 교회가 넓어지고 선교사역이 커지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갖는 영적 깊이를 추구하는 일이다. 이 일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오늘 미국과 캐나다의 40만 교회들이 섬기는 하나님, 한국의 7만 교회가 섬기는 하나님 그리고 여러분이 섬기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인가? 데라의 하나님인가? 나홀의 하나님인가? 오늘 당신마음에 모시고 섬기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그리고 당신은 자손들에게 어떤 하나님을 유산으로 넘기기를 원하는가? 우리 믿음들이 데라의 하나님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나홀의 하나님으로 변화되고, 우리의 삶의 역사도 아브라함의 축복과 나홀의 축복으로 바뀌는 오늘 예배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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