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박상원]6.25 잃어버린 고향의 건설자

뉴스일자: 2011년12월28일 23시20분

 

사람은 고향을 떠나서 사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고향을 그리워하며 사는 존재이다. 현대신학의 거장 폴 틸리히의 존재론적 구조 안에서 말한다면 실존적인 존재는 본질적인 존재를 그리워하며 거기로 되돌아 가려고 노력하는 존재이다.

아들과 딸은 어머니의 품을 떠나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 성장하지만 40이 되어도 70이 되어도 어머니는 언제나 그리운 존재이다. 그래서 남자가 행복할 때는 아내를 생각하고 불행할 때는 어머니를 생각하게 된다.

아담은 하와를 사랑하고 하와는 아담을 진정 위로하는 원시의 밤이 그들에게 있었고 농사 짓고 아들을 낳고 살았다.

그러나 실로 그들은 자기들이 개척한 에덴의 동쪽이

 

자기가 있어야 할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거리감을 안고 있는 것을 고대 철학가플라톤은 향수라고 했다. 그래서 아담 내외도 에덴에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갈 수 없었다.

예수님도 고향에 갔으나 고향은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고향에 못 가니 현대인들(특별히 이민자들은) 모두 정신적 실향민 셈이다.

 

언젠가 TV를 통해서 해외 여러 나라에 거주하는 교포들이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라고 노래하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물론 대도시의 아스팔트 위에서 나서 아스팔트 위에서 자란 그들의 고향이 모두 꽃피는 산골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의 봄을 부를 때 운다는 것은 고향이란 오히려 서러움과 외로움을 가지는 사람들의 추상적인 고향이요, 좌절된 욕망의 투영(혹은 그림자)이다. 정신적인(정확히 말하면 영적) 측면도 이 정도인데, 60여 년이 넘게 고향을 못 간 실향민들의 심정은 오죽할까?

 

기독교의 영원한 고향의 개념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과거의 복락원이요, 하나는 다가올 천국이다.

그러나 역사는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과거로 복귀하는 고향이 아니라 앞에 닥쳐 올 고향을 상상하며 그 고향 건설에 참여하기 위해 사는 것이 우리의 실제 삶이다(히 11:15-16). 구약성경에는 유태인들이 비록 고향을 강제로(전쟁 등으로) 읽어버렸지만, 그들이 회개하고 다시 고향을 찾았던 예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고향을 찾는 길은 과거와 현재의 역사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고 수고와 노력이 없이 그냥 될 수는 더더욱 없다. 반세기가 훨씬 넘도록 우리들은 민족의 고향을 다시 찾는 일을 먹고 사는 것이 시급해서 잠시 뒤로 했었다면 이제는 잃어버린 민족의 고향을 복원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앞에 두어야 한다.
 
이것만이 6.25로 잃어버렸던 것들을 진정으로 복원시키는 길이다. 디아스포라 한인들이 아직도 세계가 주목하고 기대하고 있는 평화의 고향, 동방의 잃어버린 고향의 건설자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히11:15)


박상원 목사(SAM 기드온동족선교 대표)

영원한 고향이라고 영원한 즐거움의 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은 비어있었고 어딘가 모르게 허전했다. 노스탤지어(Nostalgia직역하면 향수)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아름다운 비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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