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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7일 02시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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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분당샘물교회 차혜진


<아프가니스탄으로 단교선교를 다녀왔던 분당샘물교회 차혜진 자매>


<뉴욕한인연합교회 오영관목사>

<편집자주: 2007년 분당샘물교회의 23명의 선교팀이 아프카니스탄에 선교를 갔다가 피납되었던 사건이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43일간 억류되었던 인질 중에 차혜진자매가 뉴욕을 방문해 본사와 단독인터뷰했다. 차혜진씨는 뉴욕에서 뉴욕한인연합교회, 뉴저지한인장로교회등에서 간증을 해 진한 감동을 던져주었다. 인터뷰는 미주기독교방송 홍준혁 아나운서가 맡았다.>

Q) 자기 소개를 부탁 드릴께요.
A)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 분당샘물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차혜진입니다. 2007년에 분당샘물교회에서 파송 되어 아프가니스탄으로 단기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현재는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Q) 뉴욕에 계시는 동안, 여러 교회에서 간증집회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A) 외삼촌이 뉴욕한인연합교회에서 시무하시는 오영관 목사님이세요. 외삼촌을 뵙기 위해, 뉴욕에 왔습니다. 뉴욕에 있는 동안, 여러 교회에서 초대해 주셨어요. 뉴욕한인교회와 뉴저지한인장로교회, 부룩클린의 주는 교회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경험을 간증했습니다.

Q)왜 아프가니스탄으로 단기선교를 떠나셨나요? 
A) 분당샘물교회에서는 매년 7개 국으로 단기선교를 떠나왔습니다. 샘물교회에서 단기 팀 외에도, 파송 한 장기 선교사님들께서 각 국에 많이 계십니다. 그분들을 돕기 위해서, 단기 팀들이 매년 지원해서 가고 있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도 이 중 한 국가이고, 2007년 이전부터 몇 해간 단기선교를 떠났던 지역입니다.

저는 본래, 처음에는 아프가니스탄을 사랑하고 소망하는 마음이 큰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당시 2007년 우간다에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가 그 당시에 신앙적으로 도와주던 한 형제가 아프가니스탄에 간다고 지원을 했습니다. 그 형제를 위해, 우간다가 아닌 아프가니스탄에 갔었습니다.

Q)위험을 몰랐던 것은 아닐 텐데, 어떤 심정으로 감수하고 가셨습니까?
A)아프간이 어려운 나라고, 위기의 나라이기 때문에 더욱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죽음을 준비할 신앙과 힘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프간 사람들에게는 죽음을 준비할 신앙의 여지도 없고, 어려움에 노출 된 상황입니다. 때문에 더욱 가서 그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갔습니다.

Q)피랍 되기 전 전반적 선교상황에 대해 나누어 주시겠어요?
A)2007년 7월 13일에 아프간으로 단기선교를 떠났습니다. 저희 일행은 20명이었어요. 일반적으로 이렇게 많은 숫자가 아프간으로 단기선교를 가는 일은 흔치 않지요. 하지만, 2007년 여름에는 많은 형제 분들도 아프가니스탄 단기선교에 지원하시어 20명의 인원이 함께 단기선교를 떠났습니다.

선교지에 도착해서 3명의 현지 선교사님들께서 저희 팀에 합류하셨고, 총 23명의 인원이 함께 활동하였습니다. 선교 일정은 북부의 마자리샤리프에서 3박 4일, 남부에 있는 칸다하르에서 3박 4일, 그리고 이동시간 까지 해서 10일이었습니다. 저희의 선교 방법은 직접적인 복음전파 보다는 의료봉사나, 아이들과 놀아주기, 우물을 파주기, 워십 등의 봉사활동의 형태를 띄고 있었습니다.

Q)아프간에서의 활동이 선교보다는 봉사에 가깝다는 비난이 있었는데, 답변해 주시겠어요?
A) 많은 분들이 그 것이 정말 선교였는지, 아니면 봉사였는지, 질문을 많이 해오세요. 사실, 불신자들의 눈에는 저희가 한 활동들이 선교라고 보이지 않겠지요.

현실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는 선교를 할 수 없는 상황의 국가입니다. 그래서 직접적인 복음제시는 불가능 하지요.

하지만 저는 저희가 진정으로 흘렸던 눈물, 아이들과 놀아주며 간절히 드렸던 기도들,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되기를 바라는 소망, 다시 이 땅을 찾아 다음에는 학교를 세워 주자하고 하는 각오는 봉사라기 보다, 이 땅에 씨를 뿌리는 선교활동이었습니다. 기독교들이라면 누구나 갖는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가 사랑 받은 자로서 해야 하는 일이 선교와 봉사라는 단어로 나누어 질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Q) 어떻게 피랍 되셨는지, 또한 피랍기간 동안의 생활이 궁금한데요?
A) 북부 마자리샤리프에서 3박 4일간의 선교 활동을 마치고, 남부 칸다하르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칸다하르 지역은 탈레반에게 많이 노출되어 위험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희가 피랍 된 날은 7월 19일이었고, 장시간 버스로 이동하며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 조금 아래에 위치한, 카르박이라는 마을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약 오후 1시 20분경, 갑자기 밖에서 탕 소리가 났습니다. 탈레반이 저희 버스를 향해서 쏜 총 소리였어요. 탈레반이 저희 버스에 쏜 총 2발을 맞고 버스를 갓길로 멈춰 세웠습니다.

이 순간, 현지에 계셨던 여자 선교사님께서 ‘이 상황을 보면, 지금 우리는 피랍된 것 같다. 저 밖에 있는 사람들은 탈레반 같다. 마음으로 기도하라, 이것은 실제 상황이다’라고 상황을 분석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탈레반이나 알카에다라는 단어는 쓰지말라. 그들이 이해하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도록 하라’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곧 무장한 탈레반이 버스로 올라왔고, 저희를 버스 밖으로 내밀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보니 무장한 탈레반 약 10여 명 정도가 저희를 향해 총 뿌리를 겨누고 있었고, 저희를 포위해 왔습니다.

피랍 후 처음 5일 동안은 23명이 같이 있었어요. 그러나, 5일 후에는 23명이 다섯 팀으로 흩어져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이 후 한 곳에 머물렀던 것이 아니고, 매일 밤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녔습니다. 밤에 장소를 옮길 때 마다, ‘너희가 풀려나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이다’라며 거짓말을 했어요. 나중에는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믿지 않았죠.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저희가 어느 창고 같은 마구간 같은 곳에서 동물과 같이 잔 적이 있었는데요, 아침에 일어나니 문이 반쯤 열려 있었어요. 늘 문을 잠그고 다니는데 그 날 따라 문이 열려있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밖도 너무나 조용했지요. 그래서 저희는 ‘탈레반이 우리를 미군에게 넘기려고 우리를 두고 떠났나 보다. 우리가 직접 미군을 찾아 나서야 하나보다’라고 해석하고 마구간 밖으로 나갔어요. 그러자 저 쪽에 있던 탈레반이 낫을 들고 뛰어오더라고요. 정말 무서웠습니다.

이렇게 저희의 43일간의 피랍사건이 진행되었습니다.

Q) 막상 총 뿌리를 들이댔을 때는 어떤 심정이셨습니까?
A) 처음에 탈레반을 맞닥뜨렸을 때는 실감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피랍이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어요.

처음에는 자신들이 탈레반이 아니라, 정부군이라고 저희를 속였습니다. ‘탈레반이 너희를 납치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너희를 보호하기 위해 정부군이 손을 쓴 것이다’라며 자신들을 소개를 했었어요. 실제로도 처음에는 자신들이 정말 정부군인 양 저희에게 잘 대해 주었고요.
 
제일 무서웠던 순간은 실제로 죽음의 위협이 저희를 덮쳐왔을 때이지요.

어느 날, 저희 모두를 집 밖으로 몰아내더니 벽에 한 줄로 쭉 세웠어요. 한 발자국 앞에는 큰 웅덩이가 파져 있었고, 저 앞에는 완전 무장한 탈레반들이 저희를 향해서 조준을 하고 있었어요. 온몸에 총알을 칭칭 감은 탈레반, 박격포를 맨 탈레반도 있었어요. 게다가 탈레반들이 너무너무 흥분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저희에게 ‘너희가 한 교회 출신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었다. 너희가 선교를 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라는 것도 우리가 알게 되었다. 이제 너희를 죽여도 우리에게는 죄가 없다. 이것은 알라의 뜻이다’ 라며 위협했습니다.

흥분한 탈레반들에게, 선교사님께서는 ‘우리는 남부 칸다하르에 있는 병원을 후원하고 지원하러 온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이에 탈레반이 너희의 종교는 무엇이냐고 되물어왔고, 선교사님은 ‘우리는 기독교인이다. 하지만 너희에게 그것을 강요하지 않지 않았느냐’며 저희를 변호하기 위해서 애쓰셨습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니 탈레반들이 더 흥분하였고, 심지어 한 자매의 얼굴에 침을 뱉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정말 그 순간 ‘이렇게 죽게 되는 거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순교해야 한다면, 그래도 한방에 죽게 해주세요. 만약에 저 사람들이 쏜 총에 맞아서도 죽지 않거나, 저 사람들이 총으로 쏘지 않고 칼로 찔러서 죽인다면 정말 배교하지 않을 자신이 없습니다. 정말 한방에 죽을 수 있도록 해주세요.’ 라고 기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었어요. 피랍되기 얼마 전 독일의 한 선교사님께서 칼에 150여 번 찔려서 돌아가신 적이 있기 때문에, 혹여나 살아날 수 있을까 하시는 희망조차 가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칼에 150여 번이나 찔려서 순교하신 분도 있는데 차마 그 순간 살려달라는 기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Q)40일 간 어떤 기도를 하셨나요?
A)사실, 저희는 40여일 간 압류되어 있을 거라고 예상치 못했었습니다. 일주일이 넘어갈 것이라고도 생각지 못했었어요. 첫 열흘 동안은 ‘우리를 왜 이렇게 잡아두시나요? 우리를 빨리 한국으로 돌려보내시거나, 주님 나라로 데려가세요. 벌써 열흘이 되었습니다.’라는 기도로 일관했었습니다. 또한 곳곳에 떨어져 있는 나머지 팀원들의 안전과 협상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열흘이 넘어가자, 이것이 장기전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저희를 감금한 탈레반들이 가장 먼저 예수님을 믿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이동한 모든 집들이 먼저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또한 세계교회와 한국교회, 샘물교회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Q)풀려났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어떤 심정이었나요?
A) 매일 밤 이동 할 때마다, 너희는 이제 풀려난다고 거짓말을 했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정말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정말 풀려나던 날에는 낮에 탈레반들이 우르르 방안으로 들어왔어요. 그러더니 핸드폰으로 정부기관에 있는 누구와 통화를 시켜주겠다며 저희를 이동 시키더라고요. 그래서 ‘아, 오늘은 진짜 인가보다.’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었지요. 그래도 매번 속아서 반신반의했었어요. 그리고 어떻게 인질교환이 이루어질까에 대해서도 궁금했었고요.

Q)두 분이 순교를 당했어요. 그 두 분이 돌아가신 이유가 딱히 있나요?
A) 배목사님께서는 저희 리더셨어요. 저희가 처음 피랍되었을 때, ‘저들이 정부군이 아니고 탈레반이다’시며 ‘저들이 협상을 위해 한두 명은 반드시 죽일 것이다. 그 때에는 내가 가장 먼저 나아가겠다고’고 말씀하셨었어요. 그러면서 저희에게 배교하지 말고 신앙을 지키라고 당부하셨지요. 그런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배목사님의 안위에 대해 늘 걱정스러웠었어요.

심성민 형제는 착하고 내성적인 형제였습니다. 그래서 탈레반이 심성민 형제보다 다른 형제들을 공격할 것이라 예상했었습니다. 심성민 형제가 순교 당하던 날, 탈레반이 들어와서 다른 형제 한 명을 오랫동안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더니 심성민 형제를 끌고 나가더군요.

탈레반이 어떤 이유로 배목사님과 심성민 형제를 축출하여 끌고 나갔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무작위로 축출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Q) 순교 당하신 배목사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A) 배 목사님께서는 인간적인 모습으로는 매력 있는 분은 아니셨어요. 카리스마가 있거나, 리더십을 기대할 수는 없는 분이셨지요. 하지만 그 분과 30분만 대화해봐도, 그 분이 얼마나 순도 깊은 사랑을 가지고 계신 분인지, 그 인생을 얼마나 선교와 청년 사역에 열정적으로 헌신하고 계신 분인지 알 수 있는 분이셨어요.

배 목사님은 배 목사님 생신에 돌아갔어요. 7월 25일이었는데, 저희가 피랍되어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배목사님 생신을 기억하며 기도했던 기억이 나요. ‘하나님, 오늘 배목사님 생신인데, 배목사님만큼은 생일 선물로 한국으로 보내주시지 않으시겠어요?’ 라고 기도했었습니다. 왜냐하면 배목사님은 할일 이 정말 많은 분이셨기 때문이에요.

청년들을 위해서도 정말 많은 일을 하시던 분이셨기 때문에, 세상적인 눈으로 봐도 배목사님만큼은 살아계셨어야 했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직도 배목사님을 잃었다는 사실은 마음이 아프지만, 하나님께서 배목사님의 생일 선물로 더 좋은 곳으로 데리고 가셨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Q)돌아가신 선교사님에 대한 소식은 압류기간 동안 접했었나요?
A) 보통은 탈레반이 사살 할 때에 그 장면을 일행에게 노출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희에게는 절대 노출하지 않았고, 심지어 모든 일행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저희를 안심시켰습니다. 만약 저희가 두 분의 피살소식을 들었더라면, 제 정신으로 40여 일을 버틸 수 없었을 것입니다.

풀려나서 카불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순교 사실을 알지 못했었습니다. 저희를 취조하던 분들이 두 명은 먼저 더 좋은 곳에서 지낸다고 이야기했지, 순교했다고 알려주지 않았어요. 결국, 호텔에 있던 텔레비전으로 뉴스를 보던 중 두 분의 살해 소식을 접했습니다.

Q)탈레반에서 풀려 나온 다음에도, 한국 사회에서 박해를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A) 피랍되어 있던 40여일 동안에 못 먹고, 씻지도 못하고, 옷도 못 갈아입었습니다. 게다가 공포에 휩싸여 있었고, 배교를 강요당했습니다. 이러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피랍되어 있는 동안은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가 곳곳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피납 당시를 회상할 때 ‘아 너무 힘들었다, 죽을 것 같았다.’로 회상되기 보다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은혜가 더 많이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와서, 사회에서 받은 박해가 저희에게 더욱 상처로 다가왔습니다. 불신자들이 하는 비난들은 오히려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눈으로 일면만 바라볼 뿐이지, 영적인 해석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같은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저희를 비난하고 비방하는 이야기는 정말 상처로 다가오더군요. 심지어 어떤 분들은 ‘순교를 해야지 왜 살아서 나왔느냐?’고 조롱 했어요.

‘왜 죽지 않았는가’하는 비난을 들을 때에는, 배목사님과 심성민 형제의 죽음이 떠올라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사실, 저희는 살아 나왔음에도 죄책감에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저희를 선택하지 않아서 순교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지만 저희 동료들은 죽었고 나는 살아나왔구나, 내가 그들의 몫까지 정말 잘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너무나 부담스러웠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믿는 가정에서 지냈기 때문에 견뎌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신자가정에서 자란 팀원들은 가족들로부터도 비난을 받았어요. 이런 팀원들은 마음에 상처가 마음이 불편함이 더욱 컸죠.

Q)한국으로 돌아온 후 심경은 어떠하셨습니까?
A) 가끔은 정말 빨리 하나님께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무겁고 아픈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오히려 ‘아픔과 답답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기를, 내 부담이 아직 머물러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야 제가 아프간을 위해서 기도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더욱 중보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픔들이 망각이 되면, 아프간을 향한 사랑이 식을 까봐 두렵습니다. 가슴이 아프고 답답하더라도 그런 것들이 남아 있기를 기도합니다.

동시에 감사할 일도 일어나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팀원들의 부모님들 중, 불신자이셨던 분들이 주님께 많이 되돌아 왔습니다. 많은 부모님들이 처음에는 오히려 박해를 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는 않으셨지만, 지금은 대부분 복음을 받아들이시고 교회에 나오세요.

또 하나 감사할 일은, 순교한 심성민 형제의 가정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심성민 형제의 가정은 전통적으로 유교를 지키며, 한 달에 몇 번씩 거창한 제사를 지내는 집안이었어요. 성민이가 성경을 읽고 있으면, 아버님이 들어오셔서 성경책을 찢어버리시기도 하셨었어요.

성민이 부모님께서는 성민이가 순교한 이후로 한동안은 힘들어 하셨지만, 지금은 두 분다 복음을 받아들이셨어요. 성민이 어머니는 새벽기도를 나가며 아주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계시답니다.

이러한 증거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순교의 피가 아프간에만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한국에서도 열매가 열리는구나’ 깨달으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팀원들도 아픔을 딛고 일어나 일상으로 돌아와 잘 지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여전히 분당샘물교회에 함께 출석합니다. 몇 몇은 결혼을 하기도 하고, 공부를 하려고 방향을 전환한 친구들도 있습니다. 대부분 아직도 연락을 하고 지내고 있습니다.

Q)아프간 사건 후 자신의 신앙과 소신을 밝혀주세요.
A)아프간을 사건을 해석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정말이지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언젠가 성경을 읽다가 ‘미련을 것으로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신다’라는 구절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미련하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아시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시고 사용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교가 굉장히 미련해 보이고, 아프가니스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미련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상명령으로 남기신 일입니다. 우리 눈에 그것이 미련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면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또 선교 나갈 거냐고 질문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하나님께서 저에게 또 기회를 주시고, 성령을 부어주신다면 저는 또 나갈 것입니다.

배목사님께서 항상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신앙고백과 전도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사는 것이다’라는 말씀이지요. 저는 지금 일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지금 일상에서 삶으로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2007년에 피랍 되었다가 귀향했어요. 저는 이런 일을 겪은 기독교인이에요.’라고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2011년 이 순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로 내 신앙을 고백하려 합니다.

아프간 사건을 통해, 신앙은 다른 어떤 명제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삶으로 보이는 것이라는 교훈을 얻었고, 이에 입각하여 오늘 하루를 신앙고백으로 드려야겠다는 명제로 살고 있습니다.

Q)지금 기도 제목은 무엇인가요?
A)아프간이라는 나라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품게 하신 나라이기 때문에 아프간을 위해서 많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 출신의 선교사님들께서 모두 추방되셨지만, 다른 국적의 선교사님들은 여전히 아프가니스탄에서 선교하고 계십니다.

그 분들에게서 소식을 들어보면, 많은 아프가니스탄의 지하교회들이 활성화 되고, 많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합니다. 아프간사람들이 성경을 가지고 다닐 수 없으니, 통째로 외우고, 목숨을 담보로 하면서 까지 배교하지 않는 너무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땅에 복음이 더욱 전파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를 감금했던 아마드가 예수님을 믿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 것은 거기서 끌려 다닌 것 밖에 없고, 복음을 제대로 제시하지도 못했지만, 지금도 아프간에 순교의 피가 흐르고 있고 많은 분들이 뿌렸던 씨들의 열매가 지금 맺히고 있습니다.

아프간 사건을 통해 중보기도가 꼭 이루어진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아프간을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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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안드는 글은 삭제라..........

그런게 종교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대응이라는건지....하아...
 관리자 (2015-01-31 08:48:46)     31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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