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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7일 01시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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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표 ( 1 )
여리고를 엿보라
해가 저물어 가는 초저녁 어느 날

여리고 성에서 한 여자 아이가 태어났다.  같은 시각, 멀리서 커다란 굉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젊은 사자가 포효하는 소리 같기도 했고 많은 물 소리처럼 들렸다.

어른들은 언덕으로 올라가 지평선 너머 멀리있는 애굽 땅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서편 멀리 홍해에서 들려 왔다.  밤이 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애굽의 박사들에게는 모세의 지팡이에 의해 홍해가 반으로 갈라지는 소리로 들렸고, 사막 부족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이 홍해 물을 마르게 하니 바다가 고통에 부르짖는 소리라고 알렸다.

모세가 이끄는 군대가 애굽을 벗어나 광야로 들어 와서 장막을 세우는 촌락에는 반드시 이름을 새로 지었다. 이름이 선포 될 때 마다 사람들은 이름을 지어 주는 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소망을 지니게 되었다. 모세가 이끄는 군대가 가나안 남쪽까지 다가 왔을 때에는 소망이 커지고 구체화 되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아이가 없는 여인에게 태가 이어지는 일도 있었고 병든 자가 치유 되는 일도 물론 다반사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의 이름을 서로 불러 주었다.

여호와..
 
여리고 성 사람들은 점차 자신의 성으로 다가 오는, 홍해를 마르게 한 신의 이름을 두려움에 떨며 입에 올렸다. 그래서 여리고 성의 소녀는 자연스럽게 신의 이름을 들으며 자랐다.  
 
모세의 군대가 하나님의 분노를 사서 다시 광야로 물러 갔다. 그러자 이름을 불러도 병든 자가 고쳐지는 일이 다시 일어 나지 않았다.  아이가 없던 여인은 여전히 자식을 갖지 못했다.  사람들은 실망이 컸다. 하나님의 분노를 살 정도로 장대한 아낙 자손들은 여호와를 능가 하는 부족이라고 칭찬을 받았다. 여기 저기서 초대를 받았다.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그 이름을 서서히 잊었다. 
 
그렇게 사십년이 흘렀다. 그녀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듣기만 하지는 않았다.  우물가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이름을 속으로 불렀다. 처음에는 낯설고  생소했다.  날이 지나니 많이 친숙해졌다. 인간의 이름은 부르면 친해졌다. 하지만 신의 이름은 부를 때마다  지혜가 쌓였다.

어느 날 광야로 물을 길러 나가면서 여느 날과 다름 없이 이름을 속으로 불렀다. 누군가 자신이 부르는 이름을 듣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 살폈다.  혼자 뿐이었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마음에 소망이 쌓였다.  부르는 횟수가 점점 늘었다.  소망은 처음에 희미했으나 이름을 부르면 좀 더 뚜렷이 되었다. 고난과 좌절에 빠져 이름 부르기를 잊으면 소망은 전에처럼 색이 옅어졌다. 생소한 경험이었다. 

어려움에 휩쌓여 그 이름을 오랜 동안 부르지 않으면 희미함 조차 아주 사라졌다. 기운을 차리면 다시 이름이 기억났다. 불러 보았다. 잊혀졌다가 다시 기억난 이름은 희미하지 않았고 잊기 전 보다 조금은 구체적이었다. 그러기를 되풀이하며 세월이 지났다. 

소망은 확실해져서 다시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뜨는 해 보다는 해가 막 지려는 초저녁에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서 그녀는 순종을 배웠다.

그러는 중에 히브리 부족 사이에서 회자 되는 에덴 동산을 떠난 여인의 얘기도 들었다. 이제는 그녀가 이해 되었다. 동산의 주인인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었다.

신에 대한 자신의 마음도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겼으므로 여리고 성의 라합은 에덴 동산을 떠난 이브를 동정하지 않았다. 순종은 여인이 동산을 떠나면서도 부르짖지 않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위로를 받지는 않았다.  그런 것은 남자에게나 필요하였다. 

히브리 여인은 에덴 동산을 떠나므로 해서 하나님에게 순종하였고 자신은  그와는 반대로 성을 지키리라 마음을 굳혔다. 그래야 여호와에 대한 복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리고 성에 머물러서 오시는 여호와를 기다리는 것이 충성이라고 믿었다.

강한 나라가 세워지면 많은 사람들이 그리로 옮겼다. 모세의 나라가 세워 진다는 소문에 사람들은 귀를 세웠다.

하지만 모세가 세운 광야의 나라는 물도 충분치 않고 벽돌로 성을 세우지 않는다고 들렸다. 사람들은 실망해서 저들의 나라에 머물렀다. 성벽 위의 집에 사는 여인은 그들과 생각이 달랐다.

여리고 성과는 달리 에덴 동산에는 성벽이 없었다.  여리고의 성은 어두워지면 성문을 닫았다. 동산에도 성벽이 있었으면 어두워져서 문을 닫았고 동산을 떠나라는 하나님에게, 성문이 닫혔으니 문이 다시 열리는 다음 날 떠나기를 간청하면 하나님도 이는 들어 주셨다.

밤을 지새면 사람들은 마음이 누그러졌다.  하나님도 마음을 누그려 뜨려서 다음 날 아침이 밝아 오면 이브는 용서를 받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동산을 떠난 그녀가 아쉬웠다.

하지만 이는 복종이 아니었다. 그러면 충성을 나타낼 기회는 없었다.

성벽은 삶의 끝이었다. 동시에 고난의 끝이 되기를 바랬다. 자신이 쌓지 않은 성벽은 남이 결정지은 운명과 다름 없었다. 성은 여인의 고달픈 삶이었다. 자신이 세운 성벽도 아니었고 이를 허물 힘도 없었다.

성벽은 올무였고, 또한 계략이 숨겨져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복종을 가로 막으려는 음모였다. 그래서 라합은 성벽이 싫었다. 성벽은 무언가를 지키는데 훌륭한 역할을 맡았다. 심지어 지금은 홍해를 마르게 한 여호와를 막는 역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성벽의 문을 닫으면 에덴 동산의 여인이 용서 받는 데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이 들어 오라고 간청하여도 성문이 닫히면 들어 올 길이 없었다. 성은 사단이 자랑하고 의지하는 강력한 왼손이었다.  동시에 뱀의 은신처였다.

라합은 여리고 성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을 굳혔다. 

그 대신 하나님의 군대가 성으로 들어 오기를 기다렸다.  그것은 일종의 초대였다.  지난 날 여호와는 자신의 동산에서 여인이 나가도록 했으니 이번에는 하나님이 방문 할 차례였다. 
 
무리한 요구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럴만하다고 여겼다. 언젠가 성벽과 한 판 할 날이 오면 성의 약점을 여지 없이 드러 내기로 결심하였다. 견고한 여리고 성의 약점을 알고 있는 자신이 그녀를 대신하여 에덴 동산을 떠나게 만든 뱀의 목을 조를 날이 오기를 바랬다.
 
그리고 이를 여호와에게 보이고 싶었다.

창문...

이는 여리고 성의 약점이자, 동시에 사단의 약점이었다.

도시를 빙 둘러싼 성벽에서 창문이 있는 유일한 곳은 성벽 위에 지은 집뿐이었다. 더군다나 창문은 성벽 밖으로 나 있었다. 자신이 성벽 위의 집을 고집하는 이유이기도 하였다. 창문은 그녀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두려움을 주는 성벽의 약점이었다.

여리고 왕과 그의 군대가 성벽을 의지하듯이 사단도 믿는 바가 있었다. 단지 여리고 성만을 의지 하지는 않았다.  요단 강이었다.

여리고 성안의 백성은 히브리 군대가 요단 강을 건널 수 없다고 확신을 가졌다.

요단은 그리 쉬운 강이 아니었다. 모두가 요단 강을 존중하였다. 강을 건너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강은 오만하였다. 인간의 행로를 막았다.

강의 양안에는 각각의 나루터가 있었다. 두 나루터는 서로가 만난 적이 없었다. 이 편의 나루는 여호와의 나루였고 저편의 나루는 여인 라합의 나루였다. 두 개의 나루터가 이어지면 이는 더 이상 나루터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다리라고 불렀다.

다리 세우려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요단 강의 강한 반발에 부딪쳤다. 요단 강은 두 개의 나루터가 이어지는 것을 질투하였다.  다리를 놓으려고 강에 나무 기둥을 세웠지만 그럴 때마다 맥추절이 되어 강이 언덕으로 범람하였고 세워 놓은 기둥도 거센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 갔다. 요단 강의 노여움에 질린 여리고 왕은 다시는 다리를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다리가 없어서 불편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여호와의 군대를 막아 주었다. 사람들은 요단 강의 지혜에 감탄하였다. 그래서 요단강은 여리고 성을 지켜주는 의지처였고 여인에게는 길을 가로막는 장해물이었다.

요단 강은 물을 준다는 이유로 인간의 삶을 제압했다. 물은 마셔도 갈증이 없어지는 것은 한 순간뿐 이었다. 그래서 곧 다시 물을 찾았다. 요단 강은 인간의 그러한 약점을 잘 알았다.

조그마한 샘이더라도 가진 자는 물을 얻으러 오는 상인에게 친절하였다. 여인네들은 물 떠 마실 그릇을 건네 주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샘의 주인이 겸손하다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하지만 결코 겸손이 아니었다. 우물을 소유한 부족의 거만함이었다. 물에 기대는 의지를 더욱 강화할 뿐이었다. 이는 하나님에게는 불손이며, 교만이었다.

여호와가 애굽에서 일으킨 기적에 누구도 의심은 없었다. 
 
단지 물을 마르게 한 사실이 싫었다. 홍해가 마르자 이방인들은 질겁하였다. 일부는 귀한 물을 마르게 한 신을 섬길 수 없다며 등을 돌렸다. 많은 물이 있으면 그만큼 풍족할 수 있었다. 부족도 더 모으고 잘 만 하면 나라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면 믿음도 한결 쉬울텐데 굳이 물을 마르게 한 이유를 모르겠다고 불평이었다. 몸의 일부가 마르는 고난을 겪은 홍해를 위로 하는 자도 있었다.

물은 광야에서는 생명이었으므로 살벌한 전쟁에서도 적의 우물은 덮지 않았다. 그러니 물을 마르게 한 여호와에 대한 공포는 배가 되었다. 애굽의 왕은 모세가 뿌린 열 가지 재앙에 대한 악몽이 지워지지 않았지만 사막의 부족에게는 왕이 겪은 재앙 보다는 홍해 물을 마르게 한 것이 더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 왔다. 

기근이 들면 애굽으로 곡식을 구하러 가면 되었지만 말라서 바닥이 보이는 우물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모세가 가나안 남쪽까지 거의 다 왔다가 다시 광야로 돌아 갔다는 지난 날의 얘기를 들으며 애를 태웠었다.  여리고 성으로 온다면 그럴 일은 없으리라 위로를 삼았다. 그녀는 여호와를 생각하면 마음이 녹았고 설렘이 일었다.

해가 뜨는 요단 동편 싯딤에 진을 세웠단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다. 여인은 그 소식에 잠을 이루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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