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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7일 01시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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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인의 소망(4)
이들은 예루살렘 남문의 성벽 위에 올라서서 멀리서 일어 나는 모래 먼지를 쳐다 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사람들은 유대인 모두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많던 송사도 사라졌다. 성안에 남아 있는 자들은 저들뿐이었다. 보낸 정탐꾼이 가져오는 보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임을 확신하게 만들 뿐이었다.
두려움 보다 더한 두려움은 불안이었다. 하나님 보다 예수님이 더 무서웠다. 후회나 회개는 오히려 사치였다. 그럴 수나 있으면 다행이었다. 저들은 자신이 죽지는 않을 것을 알았다. 죽음으로 하나님의 벌을 받는 일은 일반 인이나 받는 형벌이었다. 저들의 형벌은 죽음도 무서워서 비켜 가는 형벌이 될 것이었다. 이를 피하는 길은 한가지 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증거가 필요 하였다. 증거만 있으면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어느 정도 하나님에게 말할 핑계가 되었다.
 
예수가 바닷가를 거닐 때는 자주 맨 발로 걷는다는 보고가 연이어 들어 왔다. 이를 듣는 제사장들은 긴장 되었다. 하지만 누구나 맨발로 다녔다, 신이라고 해 보아야 갈대로 만들었으므로 금방 해져서 맨발이나 다름 없었다. 어느 제사장은 예수에게 가죽으로 된 신발을 가져다 주겠다고 하였으나 이는 곧 철회 되었다. 그러면 오히려 이 편의 의도를 나타낼 뿐이었다. 불안이 엄습했다.

도대체 예수가 굽에 대한 율법을 알고 있는지 아니지를 알고 싶었으나 가서 직접 물어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두개인들을 보냈으나 답변을 듣지 못하고 예수만 멀거니 쳐다 보다 돌아 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율법 학자를 보냈다.

그리고 예수에게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물었다. 굽에 대한 율법 대신 사랑하라는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답변을 하자 저윽이 안심이 되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을 꾸짖었으나 이들은 개의치 않았다. 굽에 대해서만 언급이 없다면 다른 어떤 꾸지람이나 비난도 참았다.
 
예수가 제자들 앞에서 신발에 대하여 언급이 있었다는 보고가 급히 올라 왔다. 한 사람에게도 아니고 무려 칠십 명에게 전대나 주머니나 그리고 신발도 가지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는 즉시 대제사장에게 전달 되었다. 칠십 명 앞에서 말을 꺼냈으니 예사롭지 않았다. 유대 땅에 제사장이라고 해 보아야 칠십 명이 조금 넘었다. 마침내 저희가 오해할 수 밖에 없었다는 증거를 찾았다고 믿었다.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발이 저렸다. 신발을 신은 발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다들 괜스리 신발을 신었다고 후회 하였다. 이들이 처음부터 신발을 신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도 신발이 귀해서 구하기 힘들었다. 제사장이 되어 치르는 면접에서 신발을 신으면 떨어졌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신발을 벗은 것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각자의 회당에 들어서면 누군가가 장에 가죽 신발을 마련해 두었다. 선물이었다. 이를 거절하면 사람들로부터 촌스럽다고 놀림을 받았다. 율법을 다루려면 그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대해야 함을 보여 주었다. 율법과도 대등하게 맞설 수 있음을 나타내어야 사람들은 의지하고 따랐다.
 
조심스럽게 인내를 가지고 기다렸다. 더 확실한 도전이 필요하였다. 자칫하다간 오히려 자신들이 신발을 잃을 지도 몰랐다. 조금 더 확실한 증거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탐꾼의 보고가 있따랐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제는 전대와 주머니를 가지며, 심지어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 것을 허용하셨지만 신발을 다시 신으라고는 언급 하지 않았다. 예수의 말에 어느 하나라도 헛 점이 없음은 이미 널리 알려졌다. 토씨 하나라도 권세와 능력을 느꼈다. 신발은 앞으로도 절대 허락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였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제자들 중에도 이를 감지 했다. 회당장과 제사장들은 낙담하였다.
이들이 예수를 죽이려는 결정적인 동기는 발로 제자를 씻겼다는 보고였다. 이는 유대인이 자랑하는 조상인 모세에 대한 모독이었다. 이 정도의 증거면 하나님도 마지 못해서 받아 들이실 것이라고 믿었다. 이들은 하나님이 저들의 조상인 모세에게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떠 올렸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은 모세의 신발을 벗기우고 흙으로 그의 맨 발을 씻기셨다. 후에 모세는 이를 두고두고 회상을 하였다.
제사장들이 신발을 신은 이유는 하나님이 씻긴 발을 간직하기 위해서라고 핑계를 삼았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굳이 씻긴 이유에 제사장들은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다. 요한이 머리에 물로 세례를 주었는데 예수는 발에 물로 세례를 주다니 이를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는 표면 상의 이유였다.
실은 자신들에게 신발을 벗으라는 명령을 제자들의 발을 씻김으로써 행동으로 선포하신 예수님에 대한 저항이었다. 마침내 때가 되었다. 더 이상 내 버려 두면 자신들은 맨발로 예루살렘 거리를 활보해야 될 처지였다. 그들은 발에 못질하는 데 특히 신경을 곤두세웠다. 저들의 속셈은 손보다는 예수님의 발에 못질 하는데 있었다.
 
어떠한 못이 적합 한지에 대하여 많은 논의가 있었다. 이는 중요하였다. 동으로 된 못은 녹슬지 않았다. 그러니 예수의 발에 자유를 주려면 철로 만든 못이 좋았다. 때가 되면 녹슬어 부러질 것이고 그러면 예수의 발은 자유를 얻게 될 것이 확실 하였다.

철로 된 못은 대제사장의 창고에 그득 쌓였다. 오랜 전 그들이 자랑하는 왕 다윗이 성전을 짓겠다며 수 많은 못을 예비해 놓았으나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 못은 고스란히 보관이 되었다. 자랑스런 다윗 왕에게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 않은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었다. 언젠가 다시 하나님 앞에서 보란 듯이 다시 사용할 날을 기다렸었다. 지금이 그 때였다.
 
내가 제사장의 집 앞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늦었다. 정원은 텅 비었다. 대문은 활짝 열려 있지만 허락 없이는 못 들어 가는 문이었다. 문을 지키던 여종이 날카로운 눈길을 나에게 보냈다.
 
예수님의 일을 묻느라고 숨어 있던 제자중의 한 명을 만났을 때 그가 말한 여종이었다
저 여인에게 아무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문도 아닌 남의 문을 지키면서 위세는 당당하였다. 자신의 믿음도 아니면서 남의 믿음을 지키는 자였다.

자신의 법도 아닌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대제사장의 문은 집 안에 있는 명예와 권세와 질투와 음모, 정결함을 지키는 문이었다. 단순한 모양에 흰색의 회 칠 한 높은 담과 철 창살로 모양을 낸 커다란 대문은 겸손하게 보였다.
인간은 겸손과 겸양과 절제 그리고 우아함, 경쾌함, 누림, 도덕, 청렴하고 도도함 등에 순종하였다. 이해. 아량, 자비, 합리성, 체계, 결백, 의지, 이러한 단어가 들어 가면 사지에 힘이 빠졌다. 절차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다. 그래서 제사장의 문은 더욱 절제 된 형상으로 만들었다.
그렇지만 회당 장이라도 이 문을 들어설 때는 반드시 저 여종과 마주쳤다. 그러면 괜히 주눅이 들었다. 주눅이 들면 몸이 차가워졌다. 그날 밤 잡혀가는 예수님을 뒤따라 몰래 제사장의 정원에 들어온 제자는 숯불을 쬐느라 모욕을 당하였지만 이해가 되었다. 주인을 잃으면 더욱 추운 법이었다. 율법이 있으면 그나마 위로가 되었는데, 그가 스승에게 들은 마지막 율법은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였다. 
 
그 때 동편 성문을 지키던 파수꾼이 동풍이 분다고 소리쳤다.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은 황급히 천으로 창을 막았다. 나그네는 겉옷을 뒤집어 쓰고 머리에 두른 두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도 무릎을 꿇고 땅에 납작 엎드렸다. 동풍은 하나님의 바람이었다. 무언가를 실어 왔다. 하나님의 소망도 날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 것도 싣지 않은 날 바람인 채로 불었다. 대신 길에 쌓여 있는 먼지와 모래를 불어 제꼈다. 드러났다. 먼지나 흙에 덮여 있던 모든 것이 드러났다. 매우 강하지만 짧은 동풍이 지나갔다. 땅에 엎드려 바람을 피했던 사람들은 동풍이 지나가자 다시 일어나 제 갈 길로 떠났다.
 
나는 바람이 휩쓸고 난 자리에서 희미하게 드러난 발자국을 보았다. 엎드려 손으로 모래를 쓸었다. 묻혔던 발자국이 드러났다. 나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언덕 건너 저 멀리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였다. 저들은 등돌리고 고개를 숙인 채 모여 앉았다. 십자가가 세워진 언덕에서 이천 규빗 떨어진 곳이었다.
 
흙 위에 드러난 발자국을 따라 갔다. 해가 지려는 초저녁이었다. 하루 중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때였다. 제사장의 정원에서 시작 된 발자국은 중간 중간 끊어져 애를 태웠다.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떨어지는 눈물이 예수님이 흙 위에 남기신 발자국을 지울까 염려 되었다. 무거운 십자가를 끄느라 패인 깊은 자국이 끊어진 흔적을 이어갔다.

언덕으로 향해 올라 갔다. 사람들이 해골의 언덕이라고 부르는 조그마한 동산이었다. 근처를 지나가기조차 꺼려하는 곳이었다. 처형장에는 죄인의 가족만이 찾았으므로 오해 받지 않으려고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죽음만이 남겨지는 언덕이었다. 태형에 처해지는 죄인은 이곳에 끌려 오지 않았다. 오직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 당하는 자만이 이곳으로 끌려 왔다. 그리고 나무에 매다는 형벌이더라도 못질의 형을 받는 죄인만 오는 곳이었다.
발자국은 기울어져 있는 십자가 아래서 멈추었다. 십자가는 비어있었다. 손을 뻗어 나무를 더듬었다. 겉은 매우 거칠었다. 진득하니 무언가 손에 묻었다. 흘리신 피였다. 손에 묻었으나 딱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릎이 떨려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땅바닥에 주저 않았다.
십자가 주의를 둘러 보았다. 여러 개의 발자국이 어지러이 나 있었다. 그 중에 어느 하나는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흙을 밟았던 예수님의 발자국 이길 바랬다. 안타까웠다.
 
마침내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굳이 나무 위에 매다는 형벌을 내렸다. 그럼으로써 이 땅 위에 어떠한 소유도 하지 못했음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들은 예수님의 발자국이 찍힐 때마다 유대 땅이 예수님의 소유가 될까 봐 두려웠으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의 흔적을 지운 자는 제사장들이 아니고 오히려 따르는 무리와 제자들이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뒤를 따르느라 저들도 모르게 예수님의 발자국을 지웠다. 심지어 어느 제자는 예수님의 자리는 정결해야 한다며 빗자루로 쓸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이 발로 밟는 땅을 소유하는, 제사장들이 두려워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발자국을 남기지 못하게 예수님을 묶었으나, 그 날 밤 병사에게 끌려 가는 예수님은 신발이 벗겨져서 선명한 맨 발자국을 남기셨다. 발자국을 지우며 따르던 사람들은 멀리서 지켜 보았고 제자들은 도망갔다. 그래서 더 이상 예수님의 발자국은 지워지지 않았다. 제사장들도 이는 몰랐다. 알았으면 어떻게 하였을 것이다. 이는 독생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였다.  
 
손에 못질을 한 것은 발에 못질하기 위한 눈가림이었다. 발에 박힌 못에 사람들의 눈길이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예루살렘 제사장의 계략이었다. 발에다 수많은 못질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잔인하다고 비난 받을 것이 두려웠다. 제사장이나 회당장들도 같은 생각이어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대 제사장의 잔인함을 물고 늘어질 것이 뻔하였다.
 
발가락 사이 마다 못을 박아서 갈라진 예수님의 굽을 감추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단 한 개의 못만이 허용 되었다. 세상의 법이 그랬다. 그래서 발에는 아주 커다란 머리가 있는 못을 사용하였다. 못의 머리가 얼마나 컸는지 발등의 거의 반이나 가렸다. 부어 오른 발은 다시 못의 둥근 머리를 가렸다. 흉칙하였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예수는 굽이 갈라지지 않았으며, 어서 신발을 신어서 자신들의 흉한 모습의 발을 가려야 되겠다고 다짐하였다. 신발도 신지 않은 채로 다니는 자신들이 부끄러웠고 마치 자신들이 십자가에 달린 듯이 머리를 숙이고 다녔다.
그들은 맨발이 되지 못한 데에 대한 두려움을 이렇게 드러냈다. 그래도 이는 너무 잔인한 처사였다.
 
가슴이 저렸다. 안에서 찌르는 아픔이 흘렀다. 율법을 읽을 때와 같은 아픔이었다. 날이 어두워지는 데도 불구하고 발자국은 내 눈에 뚜렷이 들어 왔다. 발을 내려다 보았다. 여전히 신발은 나의 갈라진 굽을 감추었다. 한심하였다. 신발은 제사장의 신분을 드러내었다.
 
언덕 아래에 있는 회당이 눈에 들어 왔다. 그리고 찬양 소리도 들렸다.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메시아를 보내 주기를 간청하며 부르는 찬양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왕으로 오시기를 간구하며 밤 새도록 기도 드렸다. 그리스도를 처형하고도 저들은 회당에 모여 메시아를 바라는 기도를 드렸다.
 
한 가닥 소망이 강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무엇인지 눈 앞에 아른거렸다. 발자국이었다. 십자가 아래 흙 위에 선명하게 찍힌 한 개의 맨 발자국이 눈에 들어 왔다. 발가락들은 뚜렷이 갈라졌다. 흔적은 모두가 신발 자국이었으나 그 중에서 십자가 아래에 한 개의 맨발자국이 섞여 있었다. 예수님의 발자국이 틀림 없었다. 죄인은 신발을 벗겼다. 십자가에 매달려면 신발이 필요 없었다.
선명함이 점점 더해져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발자국은 뚜렸하게 내 눈에 들어 왔다. 자국의 가장자리의 흙은 흩어져 무너져 있었는데 그러한 구분까지 뚜렸하였다. 흙 한 알갱이까지 보였다. 너무나 많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예수님의 발자국이 이처럼 많은 흙 알갱이로 채워졌음에 놀랐다. 그리고 이 많은 율법을 내가 과연 소화해 낼 수 있을지 두려웠다.
 
소망은 점점 확신으로 다가왔다. 가슴 어딘가에 부드러운 뜨거움이 불씨처럼 살아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매우 커졌다. 나는 이러다가 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보이는 뚜렷함으로 나는 한 순간 눈 앞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음이 차라리 잘 되었다. 감당하기 힘들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내가 그대로 따라 가기는 벅찰지 모르지만 이는 나의 서원이었다. 그리고 간절한 소망이었다. 나는 신발을 벗었다. 거친 흙이 느껴졌다.
간절한 소망은 표적으로 나타났다. 담대함이었다. 예수님의 발자국에 나의 발을 가만히 갖다 대었다. 두 발자국은 한치의 어긋남 없이 들어 맞았다. 커다란 감동이 일었다.
지난 날 천사와 새벽까지 씨름을 할 적에 야곱은 이겼었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이기는 믿음을 지녀야 하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하지만 야곱은 훗날 고백하기를 자신이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김을 주셨다며 민망해 하였다.
나 역시 쑥스러웠다. 나의 모든 것이 예수님 앞에 드러나서 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이 나의 발자국에 자신을 맞추셨음을 깨달았다. 항상 그래 왔었다. 내가 송사의 판결을 하나님으로부터 얻기 위하여 율법이 적힌 두루마리를 펼치고 서가의 침상 모서리에 앉으면 송구스런 마음이 일었다. 나의 믿음을 하나님의 율법에 맞춘 적은 없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중심을 나의 변덕스런 믿음에 맞추었다. 예수님도 나의 발자국에 자신의 흔적을 맞추셨다. 제물을 바칠 곳도 제사장들이 정해서 십자가를 세웠으니,
장소에 대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유대인에게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장소를 지명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이를 다행으로 여기셨다. 자신의 독생자가 죽음을 맞이 할 장소를 정하는 일은 하나님에게도 고난이었다.
 
십자가 세운 한 뼘에 불과한 땅이 선택할 곳이었으며 간절한 소망을 지닌 레위인이 살던 성읍을 떠나 첫 맏물을 바칠 곳이었다. 십자가 아래에 구덩이를 파고 메고 온 바구니를 묻었다.지명을 하지 않으셨지만 선택 할 곳에서 해야 될 일을 세밀히 알려 주셨는데 제사장들은 이미 이를 예수님에게 이행한 셈이었다.
 
피는 반드시 부었고 그 다음에 먹는 것은 예수님의 살이 되었다. 택하신 곳은 멀었다. 유대인에게 골고다 언덕은 매우 먼 곳 이었다. 무거운 제물을 지고 가기에는 멀다고 투덜대었다. 그러면 돈으로 바꾸어도 무방하다고 하셨다. 대신 돈으로 바꾸면 반드시 포장해야 되었다. 삼십 냥과 바꾸었으니 죽이지 않고는 포장 할 도리가 없었다. 때에 관해서는 초저녁 해질 때였으며 지금이 바로 그때가 되었다.
굽고 나면 장막으로 돌아 갔듯이 처형이 끝나니 저들의 장막인 회당으로 기도하러 돌아 갔으나, 칠일을 넘기지 않았다.
아무나 그 곳에 있지는 못했다. 레위 인 만 초대 받았다.
 
그 곳의 지리적 위치는 올라 가는 언덕이었다. 올라 가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면 안 되었다. 언덕을 오르다가 한쪽으로 치우쳐서 이리 저리 굴러도 안되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언덕을 오르지 않았다. 골짜기로 향했다. 골짜기에는 숨길 데가 많았다. 세상의 모든 골짜기의 경사는 한 곳을 향하여 기울어 졌는데 아르논 골짜기라고 불렀다. 그 곳은 모압의 경계였다.
언덕은 죄를 진 사람들이나 오르는 곳이었다. 예수님은 골짜기로 가신 적이 없었다. 죄인이 언덕을 오르다 치우쳐서 구르면 안 되었다. 하지만 지은 죄의 무게에 눌려서 죄인은 언덕을 오르다 어느 한 편으로 치우쳤고 그러면 즉시 굴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제사장들은 죄인의 어깨에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얹으면 균형을 이룰 수 있음을 깨달았다. 참으로 잔인한 깨달음이었다.

십자가의 형벌이더라도 끈으로 손발을 동여 매면 되었으나, 저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못질까지 하는 형벌을 내렸다. 못질은 끔직한 형벌이었다
 
 밤이 늦었지만 지체 않고 남문을 나왔다. 예루살렘을 등 뒤로 하고 내가 살던 성읍을 향하여 밤길을 부지런히 걸었다. 늦은 밤에다 사람도 잘 다니지 않은 광야 길인데 앞에 가는 일행이 있었다. 나는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뒤를 따랐다.
 
예수님 생각으로 가득 찼다.
언덕에서 서둘러 내려 온 것이 아쉬웠다. 남의 눈에 죄인의 가족으로 여겨질까 염려 되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러한 부끄러움은 곧 사라졌다. 대신 차지한 것은, 아까 십자가 아래서 나의 발을 예수님이 남기신 발자국에 갖다 대었을 때 가졌던 자유함이 떠올랐다. 그 자유 함에는 시간의 자유 함도 있었다. 생소하였다.

증오로부터의 자유 함도 있었다. 나는 기뻐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매우 당황했었다. 길에서 만나는 누구도 용서하고 싶었다. 예수님을 믿으라고 외쳤다. 처형장에서 내려 오는 나를 모두 쳐다 보았다.
 
두런 두런 얘기 소리가 들려 눈을 들어 보니 앞에 가던 두 명에게는 언제 왔는지 한 사람의 일행이 더 있었다. 언제 일행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이 나누는 얘기에는 이사야라는 말도 들렸다.
유대인이 하나님의 이야기를 빼 놓고 다른 할 이야기가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었다. 길을 재촉하느라 발 걸음을 빨리 하여 그들과 거리가 가까워졌다.
눈이 갑자기 따가웠다. 쓰라렸다. 하나님의 응답이 있기 전에 다가오는 심한 고통이었다. 길 위에서 낯익은 자국이 눈에 들어 왔다. 발자국 이었다. 아까 십자가 밑에서 보았던 것과 똑 같은 흔적이었다.

점점 뚜렸해졌고 뚜렷함이 또다시 나의 눈을 아프게 찔렀다. 고개를 들어 맨 발자국을 내며 가고 있는 앞 사람을 보았다. 새로 일행이 된 그 사람의 발 자국이었다. 짙은 피 비린내를 맡았다. 그가 입은 가는 베로 짠 겉옷의 등 위에 흐르는 피의 냄새였다.
신발을 벗고 그 사람의 발자국에 나의 맨 발자국을 대어 보았다. 한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 가 말을 건넸다. 
 
내가 살던 엠마오에 다다르려면 아직 새벽까지 걸어 가야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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