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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7일 01시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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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이 이단 세미나에 대한 소감(2)
(1번에서 계속)

6.  
인격체이신 성령 하나님을 성부 유일신론으로 축소하거나 성령의 역사를 방출(released)하는 힘(force)의 개념으로 비판하는 것이 옳은가?
동부 이대위의 발표문을 보면 신사도와 IHOP의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1) 성부 유일신론과 2) 뉴 에이지적 개념의 두 측면에서 바라보고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들의 주장은 양태론적 단일신론이요, 아리우스를 따르는 것이며 이미 초대교회에 이단으로 정죄된 사벨리언주의와 다를 바 없다. United Pentecostal Church 에서는 하나님은 한분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요, 아버지와의 관계성에서는 성부로, 능력으로 나타날 때에는 성령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유념해야 할것은 유일신 성부만을 고집하고 성자를 성부에서 창조된 피조물로 보아 성부와 성자와의 본질적 차이를 극대화한 아리우스의 주장은 비록 삼위의 존재와 이름을 뚜렷이 구별하지 못했지만 성자를 성부와 동일하게만 보았던 시벨리우스의 주장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시밸리우스에게 있어 신의 본질은 하나이며 삼위는 하나님이 당신을 나타내시는 계시의 모양일 뿐이었다.
아무튼 성령의 은사와 기사와 이적이 현저히 일어난다고 해서 성자와 성령을 분리시켜 성자를 도외시함으로  성부 유일신론(Unitarianism)으로 신사도와 IHOP을 몰아가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위격에 대한 편견 즉, 성령 하나님을 상대적으로 가치절하 하고있는 동부 이대위의 삼위일체에 대한 그릇된 관점에서 나온것으로 보여진다.
성령의 능력의 역사하심은 복음을 온전히 전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신 것인데(롬 15:18), 성령의 임재를 예수의 부재로 보는 시각은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약화시키고, 나아가서 무력화시키는 사이비 신학을 낳게될것이다.
두번째는 성령의 역사를 방출되는 힘의 개념으로 보는 시각이다. 유일신인 인격적 하나님과 삼위일체를 믿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의 다른 위격인 성령 하나님을 비인격적인 힘이나 에너지로 본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성립이 될수 없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신학과 범신론의 구분은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정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와 뉴 에이지적인 사고는 범신론(pantheism)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범신론적 사고의 기원은 창조론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범신론은 세상의 모든 것을 신성하게 봄으로 모든 존재가 신이 될수 있다고 주장하여 하나님과 인간과 우주의 구분을 두지않는다.
그러나 천지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엄연히 피조물과 구분되시며 지정의를 가지신 인격적인 분으로 성령 하나님 또한 그러하시다. 삼위일체에 대한 논란 또한 유일한 인격적인 신을 믿는 신학(Theism)안에서 벌어진 것인데 이것을 비 인격적인 신을 믿는 범신론(Pantheism)적 관점에서 의심하고 비판하는 것은 신학적인 기본 전제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동부 이대위의 위와 같은 표현은 신사도와 IHOP의 성령사역의 이단성만을 부각시키기 위한 과장되고 합당치 못한 표현일 뿐만 아니라 이를 이유로 성령 하나님을 범신론적인 힘으로 간주할만한 어떤 근거도 성립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유사해 보인다해서 성령의 강한 힘의 역사나 표적과 기사와 능력의 나타남을 타종교의 비인격적인 힘의 역사와 비교하거나 동일시해서는 안될일이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신비로운 신성이 성육신을 통해 구체적 역사의 현장에서 나타난 사건이 기독교의 핵심인데 이러한 역사적 현장이 배제된 여타의 신비적인 종교현상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또 IHOP에서의 말씀찬양과 함께 지속적인 기도 속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어떤 에너지의 방출이나 증폭으로 바라보는 시각 또한 마찬가지로 주변인적 영성에 기인한 것으로 진단된다. 이에 대한 분별은 객관적인 현상이 아닌 주관적인 믿음에 의해 판단되어지는 것이다. 즉 관찰이 아닌 영적체험의 문제인 것이다.
다음은 IHOP의 신앙고백중 삼위일체에 관한 내용이다:
"우리는참되신 한 하나님이 영원토록, 삼위 –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 안에서 존재하시며, 이 분들은 한 하나님으로서, 신성과 능력과 영광이 동일하심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지탱하시며, 유지하시며, 다스리시며,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을 섭리로 인도하시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온전하게 성취하셔서 그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게 하심을 믿는다. (시104, 139; 마10:29-31, 28:19; 행17:24-28; 고후 13:14; 엡1:9-12, 4:4-6; 골1:16-17; 히1:1-3; 계1:4-6)"
 
7. 사도적, 선지자적 영성의 종결인가 혹은 실종인가?
이 시대의 교회 사회의 영적 침체는 사도적 영성과 선지자(예언자)적 영성의 실종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도적 영성과 선지자적 영성을 회복하려는 것이 과연 동부 이대위가 비판하는 대로 "성경만을 중심으로 믿어야 하고, 성경의 말씀을 묵상하고,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대하고, 늘 기도하고, 오직 성경 안에서만 만족해야 한다."는 것에 반()하는 일일까? 사도와 선지자직의 종결이 진리의 시대적 흐름이라고 간단히 천명하는 그 마음 속에 한번이라도 사도성과 선지자성에 대한 조용한 사색의 여지가 들어있을까?
사도적 영성에 대한 의견을 필자는 예전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한 바 있다(사도와 예언의 본질성):
"오랜 세월 그리스도로부터의 사도권의 직접적인 임명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있어서 그 시초의 위대한, 시공을 초월한 영적 의미보다는 국한된 시공(時空)적 의미에만 너무 가치를 둔 나머지 ‘사도성’의 ‘박제화(剝製化)’현상이 오랜 세월 진행되어 온 결과를 낳았다고 볼수있다. 그 부작용으로 동전의 앞뒤같은 사도적 목회성에 사도성이 제외되거나 결여되어 목회관의 불투명함과 불확실성이라는 누수현상이 생겨온것 같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도권은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며 인내하는 것”이고(고전9:12)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되는” 역설적인 권리다(:19). 사도의 직분이란 다름아닌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의 직분인 것이다(고전4:1). 사도적 목회관은 교인들을 “예수안에서 복음으로 난” “사랑하는 자녀”로 여기는 “아비”로서의 목회관이었으며(:14-15), “모친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은 목회관이었으며, 베드로의 사도적 목회관은 목자장인 주님이 맡기신 하나님의 양무리를 자원하는 심정으로 순수한 기쁨으로 치는 목자로서의 목회관이었다(벧전5:2)".  
그러면 선지자(예언자)적 영성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듣고 전하는 일이란 신약시대의 우리에게는 시대착오적인 일인가? 이것은 성경을 벗어나는 직통계시의 문제를 낳는 일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로 인해 구속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은 제사장적 특권과 선지자적 특권을 함께 누리는 자들이다. 우리는 완성된 성경말씀 속에서 날마다 새로운 음성을 듣고 새로운 계시를 받는 자들이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위로부터의 새로운 말씀을 권세있게 사람들에게 전해야한다. 설교자라는 의미엔 예언자적인 의미도 포함되는 것이다. 
얼마 전 어떤 선교사가 한국에 대해 예언했던 내용들을 보면 죄악이 관영했던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때마다 말씀하셨던 성경의 내용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늘 예언이 있니 없니 맞니 틀리니 하면서 이론적 잣대를 갖다대기에만 분주하다. 왜 그런가? 
평소 성경을 읽어도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실체로 심령에 부딪히지 않는다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여 마음에 깨달을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말하고 비판하기는 좋아하지만 듣지 못하는 세대를 향하여 말씀하시길,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백성들이마음이완악하여져서귀는듣기에둔하고귀로듣고마음으로깨달아돌이켜내게고침을받을까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13:14-15)"고 하셨다.
그러면 주님이 인용하신 이사야서의 예언말씀은 어떤 이들이 주장하듯이 요엘서의 예언처럼 주님의 때에 성취되었으므로 오늘날 우리에겐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할수 있겠는가?  아마도 경직된 신앙적 사고인이라면 자기안의 이론에 매여서 이미 알고 있고 이미 성취되었다는 생각때문에 여전히 닫혀 있을수밖에 없을것이다.
그러기에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정 사도적이고 선지자(예언자)적인 영성이 필요한 시대임을 절감하지 않을수 없다.
계시록 19장에는 말세의 대 환난과 대 종말 사건 사이에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대한 묵시가 소개된다: 
밥 존스란 선지자는 위의 말씀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헌신한 자들이 지구상을 통털어서, 예수님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거룩함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 자들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나타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동부 이대위는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되어지는 것인데 교회 역사의 마지막 때에 열심있는 선택된 그리스도의 신부만이 들어간다고 주장하는 것은 왜곡된 종말론적 거짓 예언이라고 비난하였다:
 "밥 존스의 예언에는 성경적인 중요 개념들과 핵심 교훈들이 들어있지 않다. 그리고 그가 주장하는 예언들은 전혀 성경과의 연관성이란 없다. 그의 예언들은 사람 중심이요 독선적이어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세워나가는데 전혀 관심이 없다."
비판자들은 기도나 전도(선교)사역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원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은혜만에 안주하며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성경의 권위와 충족성에서 나오는 변함없는 말씀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할뿐 그 말씀대로 지키고 행해야 하는 신자의 의무엔 상대적으로 매우 무신경한 편이다.
그러나 성경은 주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주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으며(14:21),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수 있다고 말씀하신다(7:21).
동부 이대위의 비판자들은 스스로 교리적 이론에 파묻혀서 영성의 싹을 틔우지도 못하고 함몰되어 가고 있을 뿐 아니라 남들도 끌고 들어가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알아보고 배우고 노력하려는 자세보다는 약자처럼 방어와 공격에만 열심을 내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상기한 밥 존스의 예언의 내용을 한번 음미해보자. 그가 말한 "말씀에 깊이 헌신된 자들"과 연관하여 믿는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헌신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는 구약때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초지일관 성경에 흐르는 교훈이다. 또 주님을 향한 열정과 거룩함, 영적인 책임감에 관한 수많은 메시지 또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계명안에 함축되어 있는 핵심 요지이다.
이에 볼때, 하나님의 음성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생경한 말씀이 아니라 이미 성경의 말씀을 통해 가고 오는 세대들에게 전해오신 하나님의 한결같은 소원의 메시지임을 알수있 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세워가기 위하신 메시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위와같은 동부 이대위의 비판의 내용은 부적절하다고 판단된다.
또 다른 비판의 내용을 보자: "마이크 비클이 주장하는 젊은이들의 예언 운동에는 하나님의 신성이나 계획은 대수롭지 않게 본다. 이처럼 사람들의 운동은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강조되어지고, 하나님의 신적인 계획과 그분의 통치를 변질시키는 것은 기독교의 이단이다. 가장 핵심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신성과 계획, 그 분의 통치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신성은 성경과 만물에 계시 되어진 것으로 우리가 경외하는 신앙적 사고와 체험이며, 하나님의 계획은 유한한 우리가 다 알수 없지만 말씀을 통해 깨닫고 부지런히 기도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가운데 그에 따라 인도함을 받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기도나 예배와 선교에 또 사랑을 나눔에 노력을 경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통치를 위한 우리의 즐거운 참여와 드림이 아닌가? 이런 노력없이 막연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이루어지길 구하거나 하나님의 통치를 환영하고 체험할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때나 비판의 근거를 강화하는 재료로 사용해서는 곤란하다고 본다.  
8. 그리스도의 신부
그리스도의 신부에 관한 동부 이대위의 아래 발표사례를 보며 생각해 보기로하자: 
"IHOP(국제기도의 집)에서는 “신부”로서 “하나님과의 완벽한 사랑”을 강조한다. 이것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묘사한 성경과는 상관없이 (요 3:29, 엡 5:23, 계 19:7-9, 계21:9) 각각의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연인 관계로 들어가도록 가르친다.22)"

여기서의 문제점은 화자가 "교회'와 "각각의 성도들"을 별개의 것으로 보고 있다는 데 있다. 교회의 정의에 집단적인 개념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개념이 기본적으로 들어있는 것을 간과한 것으로 이런 모호한 이분법적인 신앙적 사고는 오늘날 교회사회에 팽배해 있는 지도자들의 무책임감과 부도덕성과도 무관치 않다고본다. 왜냐하면 성경은 음행을 경고하는 말씀중에서 바로 성도가 성전인 것을, 성령의 전인것을, 교회인 것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성도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 위함은 개인 뿐만 아니라 교회사회의 성결과 거룩함을 보전키위한 하나님의 뜻이건만 동부 이대위의 발표는 이를 말초적인 감각으로 해석하고 세속적으로 곡해하여 성경적 의미의 적용을 다음과 같이 변질시키고 있다:
"문제는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상상의 세계 속에서 행복하고 화려한 결혼식에 임하는 ’신부‘라는 말을 좋아하고 있는 바, 성경과는 전혀 상관없는 낭만적인 사랑의 관계로 설정해서 그 함정에 빠지고 있는...", "특히 '하나님과의 완벽한 사랑관계'라는 강조를 하는 것은 에로틱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신부 신비주의..." "IHOP의 가르침에서 핵심적인 “신부의 패러다임”은 남녀 사이의 관능적 관계와 유사한 "예수님과의 친밀함" 관념을 만들어내는 아가서의 풍유적 해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오염된 이성과 감성은 오염된 영성을 낳기 마련이다. 비판을 위한 비판은 진실에 눈을 감게하여 본질을 호도하게 한다. 과연 IHOP의 가르침엔 어떤 에로틱한 관능적 의미라도 들어있는가? 

필자가들어본 IHOP에서의 Mike Brumback의 아가서강의에는아가서의 주제를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첫째, 친밀함(intimacy), 둘째, 성숙함(maturity), 셋째, 순종(submission)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친밀함에는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의 즐거움, 나아가 주님께서 겟세마네 기도를 하시면서 경험하셨을, 그리하여 후에 십자가의 고난도 능히 감수하실수 있었던 주님과 하나님과의 절대적 친밀한 관계를,
2) 성숙함에는 주님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고난의 연단을 감수하는 성도의 영성,  주님을 배반하고 무장한 일당을 앞세워 잡으러온 제자에게 검을 빼어든 베드로를 만류하시는 주님의 가르치심을,
3)  순종함에는 주님과 동반자적인 관계로 신부의 인을 받게되는 성도,  십자가에 친히 달리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시므로 다 이루신 주님의 겸손과 인내의 내용이 담겨있었다.
강의 내용중 어디 한군데에도 관능적인 요소는 없었으며 강의는 시편 찬양과 기도와 예언과 함께 어우러져 방송 청취임에도 현장에 있는 것 같이 생생하고 깊은 은혜를 맛보았다.  특히 한국인의 "고아(孤兒)적인 영성"을 위한 강사의 치유사역이 인상적이었는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로서의 자긍감 고취와 회복과 치유의 손길이 극진히 느껴졌다:
아가서의 강의 내용안에는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가 함축적으로 깊이있게 새겨져있었다:
주님을 사랑함으로 인해 즐거이 고난을 감수하는 성도의 십자가의 영성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의 깊이까지 도달되도록 안내되고 있으며, 고난을 극복하므로 굳건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마침내 주님의 칭찬을 받는 엄위한 신부, 어떠한 도전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성령의 불로 인침받고 마침내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아 주님으로부터 사랑의 면류관을 쓰게되는 부활의 영성이 감동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므로 IHOP의 영성에 기독교의 기본 진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들어있지 않다는 동부 이대위의 비난은 매우 부적절한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는 들리는 단어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친밀하고 성숙하고 순종적인 관계속에서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삶속에서 오히려 웅변적으로 역사하고  깊히 새겨진 정금처럼 영롱히 빛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특히 오랜세월 음성적인 성 관념등 구시대적인 사고의 잔재가 남아있어 도덕수준이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는 한인 교회사회에서 아가서의 문자적인 해석은 의도적으로라도 더욱 지양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기에 IHOP의 밝고 은혜로운 로맨티시즘이 깃들어있는 깊이있는 영성적인 아가서의 강의 수강은 한인 남녀 목회자들을 비롯한 교인들을 위해 적극 장려되어야 한다고 본다.
다음은 IHOP의 주님에 관한 신앙고백이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가성육하신하나님이시며, 하나님과사람으로서, 동정녀에잉태되어탄생하셨고, 없는삶을사셨으며, 죄인들을위하여형벌을받으시고, 대신속죄를위하여자신을드리신분임을 믿는다. 그가십자가에서흘리신피로, 우리를위하여영원한구속과, 죄의용서, 그리고영생을이루셨다. 그는삼일만에육체로부활하셨으며하늘에오르사하나님우편에앉으셨고, 거기서성도들을위하여영원히중보기도를하신다. (1:18-25; 1:1-18; 8:34; 고전 15:1-28; 고후5:21; 3:10-14; 1:7; 2:6-11; 1:15-23; 7:25, 9:13-15, 10:19; 벧전2:21-25; 요일2:1-2)"

9.소감
금번 동부 이대위의 신사도와 IHOP에 대한 소견발표의 내용은 저들 사역의 핵심적 진의와 가치를 전격 외면한 매우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관찰과 부정적 정보에만 의존한 편파적인 비판일색으로만 되어있어 객관성과 공정성에 미달된 내용이라 판단된다.
발표문 전반에 걸친 대표적인 인상은 첫째로, 연구 대상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구비되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신학 없는 신앙은 없지만 신앙없는 신학은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한쪽의 신학의 잣대로만 상대의 신앙을 판단하려는 시도는 모험적이고 많은 시행착오를 안을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연구 발표 주체자들은 먼저 사전에 상대편 쪽 리더들과 만나 대화와 교류를 가지고 저들의 예배와 강의에 참석을 해보는 것이 마땅한 자세일 것이다.
둘째로 느낀 인상은 상대편 리더들에 대해 세상적 기준에 의한 판단과 인신 공격이 너무  난무하다는 느낌이다. "침대학교"니 "헛된 야심"이니 "교묘한 심리전술"이니 "영웅주의적 환상", "예언자 이용"이니 심지어는 "목회 초기부터 마이크 비클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존경하고 순종하는 믿음생활이 아니라, 자신의 영적인 힘을 발휘하는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음이 드러난다."라는 단언등이 그것이다.
상대에 대해 정확한 앎이 결여되어 있을수록 주변적이고 루머적인 억측과 반감이 모함과 인신공격적인 수준으로 까지 발전하게 되기 마련이다. 의도된 시나리오성 공격은 논리적 결함을 부추키고 신앙사회에 전혀 덕을 끼치지 못한다. 
적어도 같은 크리스찬으로서 기도사역에 생명을 걸고 헌신하고 많은 이들의 영성에 도움을 주고 선교의 열매를 맺는 상대방 사역자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는 갖추는 것이 도리라고 본다. 도리어 소수의 비판 내용에 의해 전체 한인 목회자들이 열악한 신앙인격과 빈곤한 영성의 소유자로 인식될까 심히 우려가 된다.
동부 이대위의 브리핑을 보면 그간 한인 교회사회의 일부 부끄러운 신앙 지도자들 보다 저들의 도덕 의식은 훨씬 정직하고 분명하고 엄격하다는 것을 알수있다.
셋째로, 동부 이대위의 신사도와 IHOP에 대한 비판 내용은 시종 두개의 평행선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비판 주체측은 믿음과 말씀의 코드를 가지고 비판 대상측의 행함과 성령의 코드를 겨냥하고 있다. 그러나 믿음과 행함, 말씀과 성령은 동전의 앞뒤처럼 본질상 함께 하는 관계이고 또 관계여야 한다.
그런 관계에 균열이 생길때 서로는 타자에 대해 소외된 관찰자, 고독한 주변인으로 남을수 밖에 없을것이다.  모든 이치가 그렇듯 서로를 견인하면서도 같은 방향을 향해 손을 잡고 달려나갈때 하나님의 나라는 끝까지 함께 지어져 갈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때라도 성숙한 신앙 엘리트들은 여전히 관용의 미덕을 베풀어 갈것이고 남모르게 빼앗긴 들의 봄을 위하여 주야로 눈물흘리며 기도하게 될것이다.  
마지막으로 브리핑에서 얻은 유일한 위안거리로 마이클 비클 목사가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교회 설립의 네가지 소박한 취지를 음미해본다:
1) 밤과 낮으로 드리는 기도 2) 마음의 거룩함 3) 흔들리지 않는 믿음 4) 가난한 자들에 주는 흡족하게 나눠주는 일
그리고 비클 목사가 들은 또 다른 음성 -  “이 한 세대 내에 교회의 이해와 표현을 내가 바꿀 것이다” - 은  비단 비 기독교인을 향하신 뜻만이 아니라 이 시대 기독교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도 담겨있는 것일지 모른다.  교회의 이해와 표현의 바뀜은 말씀에 대한 이해와 표현의 갱신 -  거듭남이 아닐까 하고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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