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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7일 01시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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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이 이단 세미나에 대한 소감(1)
1. 영적 엘리트의 기준은 무엇인가?
세상에는 싫어도 부인할수 없는 엘리트 그룹들이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학문 예술 스포츠등 다양한 엘리트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종교에도 엘리트층이 있다. 그런데 종교적 엘리트들은 대개 그 자격에 있어서 세상적 엘리트들과는 사뭇 다르다. 내적 환경조차도 다르다.
그들은 자신 속의 엘리트 영성으로 인해 많은 고난을 당하고 스스로 자랑할수 없는 자들이다. 그래서 신앙 엘리트들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비난과 경멸과 핍박의 대상이 되기가 쉽다. 그래서 이들은 스스로 존재론적 아이러니를 운명적으로 지닌 인생들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선택하실때 세상의 기준에 의해 제자들을 부르시지 아니하셨다. 왜 예수께서는 세상의 이목에 대한 통찰을 지니시지 않으셔서 그러셨는가? 그렇지않다. 그러면 왜 그러셨는가? 그 이유는 본질상 신앙은 세상의 기준에 반()할수 밖에 없는 것이고 무엇보다 그들을 그렇게 선택하기로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이 사실을 망각하면 안된다. 창세기에 나오는 멜기세댁 왕은 부모도 족보도 시작도 끝도 없는 오리무중의 인물이었지만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를 멜시세댁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으로 표현하고 있다(7:).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신앙의 눈은 육체를 통해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통해 보는 것이라는 진실이다.
육체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세상미련한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들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천한 것들과 멸시받는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2.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성경을 벗어나는 직통계시인가?
깨어있어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늘 하나님과의 교통인 대화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무의식적인 간구도 포함되는데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와 소통을 통해 교제하시길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말씀과 기도와 찬양뿐만 아니라 생활속에서 늘 우리속에 속삭이시는 분이시다. 
IHOP의 사역자인 마이클 비클목사는 어느 날  다음과 같은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됨으로 IHOP의 사역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에 관한 동부 이대위의 발표내용은 다음과 같다:
"캔자스시 'IHOP'(International House of Prayer-Kansas City)의 여정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범세계적인 기도 운동을 일으키고 계신다는 것을 이해함으로 시작된다. 1979년 5월 주님께서 마이크 비클(Mike Bickle)의 마음에 누가복음 18:7~8과 이사야 62:6~7의 성경본문을 사용하여 '너는 중보자이며 주야(24시간)로 중보기도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어지는 동부 이대위의 다음의 비판의 내용을 보자:
"성경과 맞지 않는 내용의 음성을 직통으로 들려주는 영이 하나님의 영일까? 성경과 더불어 일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일하는 영은 성령이 아니다. 그런데 왜 마이크 비클에게 그 음성을 들려준 영은 66권의 성경의 그 많은 말씀 중 하나도 인용하시지 않고 직통으로 다 해 버렸을까? 성경과 어울리지 않는 내용의 음성이었고, 더 자세하게 말하면 그 정체가 하나님의 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부 이대위의 위와같은 비판내용의 문제는 유감스럽게도 비판자의 말씀에 대한 해독과 연관되어 있는것으로 보인다. 먼저 비클의 마음에 감동을 일으킨 성경의 본문 말씀들은 당시 받은 사명의 음성과 더할나위 없이 일치하는 내용인데 어떻게 성경과 맞지 않고 어울리지 않는 내용의 음성이란 말인가?  
그러면 비클 목사의 마음에 들린 성경 말씀은 무엇인가 보자. 그가 들은 누가복음의 말씀은: " 하물며 하나님께서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원한을 풀어주시리라그러나 인자가 때에 세상에서 믿음보겠느냐 하시니라 "는 것이었고 ,

이사야서의 말씀은: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계속 잠잠하지 않게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세워 세상에서 찬송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는 말씀이었다.
성령이 비클 목사에게 생각나게 한 메시지를 간단히 요약하면 "기도하라 찬양하라 전도하라"는 내용인데, 보다 구체적으로" 24시간의 중보기도"의 메시지였다. 이에 관해 동부 이대위의 발표자는 비클이 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성경외의 직통계시라 비방하며 성경의 말씀과 동떨어진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판의 중대한 오류는 성령이 우리에게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일을 하신다는 사실은 간과한채 그가 표현한 "음성"만을 떼어놓고 집착하는 것이고, 또 다른 오류는 들린 음성의 내용이 토씨 하나도 다르지 않은 꼭같은 말씀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고있는 것인데 성경만 보더라도 얼마나 다양한 버젼이 있는가 말이다. 
성경 본문이 그대로 들려오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고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장래일을 알려주시기 때문이다(요16;13).
성령은 우리를 옆에서 도와주시는 분으로 신령한 일을 알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영분별을 주시고, 진리를 떠나지 않게 하시는 분이다. 비클과 함께하신 성령은 그에게 사역의 내용을 지시하시므로 사역의 방향을 잡도록 도우셨으며, 중보기도의 중요성을 알게하셨고, 연관된 구체적인 말씀의 장과 절을 생각나게 하셨고, 그것이 성령의 음성임을 분별하게 하셨고, 지금껏 진리가 되시는 말씀만을 붙들게 해오시지 않았는가 말이다.
분별이 필요한 것은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내용상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될 때가 아니겠는가?  비난의 촛점을 삼고있는 "24시간 365일"은, 기도에 대한 성경적 표현인 "주야로", "쉬지말며", "항상"의 문자적인 충실한 표현으로써 아무 하자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평소 마이클 비클의 어리숙해 보일 정도로 융통성이 없는 듯한 성실하고도 철저한 성품을 읽을수 있는데, 비클의 기도사역의 특징은 너무 고지식하게 백 퍼센트 충실한 것으로서 너무 성경과 맞는 내용의 음성을 듣고 또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또 비클목사는 평소 성품대로 내적으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고 확신하기 위하여 오랜 세월을 기다리며 철저한 음성에 대한 검증의 과정을 거친 것을 알 수 있다. 비클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평소 말씀 묵상에 훈련이 되어 있었고 또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임을 충분히 짐작할수 있다.  
기도 중인 사울을 찾아가 안수하였던 아나니아나 기도중인 베드로를 찾아가 온 집안과 이방인들을 구원하였던 고넬료 모두 항상 기도하는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이다(행9, 10).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도 제자들이 모두 다 한곳에 모여 기도하는 중에 일어났다. 전자의 경우는 골방기도요, 후자의 경우는 집단기도의 예이므로 기도의 본질을 필요 상황을 무시하고 골방의 은밀한 기도에만 국한하는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난다(마 18:19-20).    
말씀은 삶속에서 경험되어 질 때 비로소 나의 양식이 되는 것이고 나의 능력과 힘이 되는 것이다. 문자적인 말씀이 경험 되어지는 말씀과 동떨어지게 인식되는 이유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에 대한 묵상이 빈곤하기 때문일 것이다.  말씀이 삶가운데 살아서 역사하는 생명력을 상실하고 골동품처럼 교리적 사고에 머물러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말씀의 홍수속에 영혼의 기갈을 느끼는 아이러니가 생겨난다고 본다.  
이렇게 고정된 사고의 틀에 묶여있는한 말씀이 들리고 나타나고 경험 되어지는 일도 없을 뿐더러 따라서 바른 분별도 힘들어지고 말씀을 받고 따르고 수용하는 일도 생기지 않게될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바라(요일:1)"고 말씀하고 있다.  즉, 지금도 말씀은 우리에게 들리고 나타나고 경험 되어져야 하는 살아있는 진리여야 한다.
3. 마지막때의 복음전파와 영적 추수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라고 하셨다.
동부 이대위의 발표를 보면 "신사도운동가들은 종말에 성령이 무한이 방출 또는 분출(그들은 이런 용어를 사용한다)되어 사도행전의 시대보다 더 큰 부흥과 영적추수가 일어나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또 요엘서의 성령에 대한 예언의 최종적인 성취가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데 비클 목사는" '주께서 다시 돌아오시는 세대'에 일어난다"고 주장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면 종말에 배도와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는 일이 예언되고 있는 블루무드 가운데(살후2) 왜 비클은 영적 대추수라는 핑크 무드를 등장시킨 것일까? 
계시록에서는 일곱나팔 재앙과 일곱대접 재앙 사이에 전후 3년 반 교회가 받을 환난과 함께 교회의 승리와 악인의 심판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11-14) 여기에 "마지막 추수(The Harvest of the Earth)" 장면이 나온다(14:14-20).
내가보니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있고 손에는 예리낫을가졌더라(14)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에 휘두르매 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16)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18)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19)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20)"
 
이 말씀은 신자와 불신자의 상반된 결국을 너무도 극명하게 설명하고 있는바,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길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러셨던 것처럼 임박한 종말의 때에 심판경고를 통해 시급한 회개촉구를 일으키실것이라 예측된다(요엘2).
그러므로 영적인 부흥은 다름아닌 신자와 불신자의 회개운동이 될 것이다. 회개운동은 곧 기도의 운동이며 기도의 열정은 능력의 말씀과 성령의 권능을 더욱 힘입으로서만 불붙게 될것이다. 
더불어 종말에 일어나는 미혹의 역사를 이기는 길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사랑을 회복함으로만 가능할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고 알려주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우리를 인내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케하는 능력이다.  
역사적으로 시대에 따라 기도열정과 함께 더 풍성히 부어주시는 성령의 부흥의 역사가 있어온 것을 볼 때에 성령 부흥의 종말적 역사를 소망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환난과 핍박의 역사 속에서 순교자적 영성이 기치를 올리고 기독교가 더욱 부훙되어 전파되었던 역사를 되돌아 보건데 성경이 말씀하는 종말론적인 환난의 시기에 일어나는 성령의 부흥의 역사는 필연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한편 동부 이대위의 "결국 재림을 일으키는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고 신사도운동가들인 셈이다." 라는 비평에 대하여 느끼는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때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주님의 말씀에서 마지막 때에 더 큰 영적인 부흥과 추수가 일어난다는 소망을 갖는다면 그래서 더 열심히 전도열에 불탄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아름다운 마음이며 성경적인 메시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전도하고 선교하는 행위를 주님의 재림을 위한 인위적인 준비나 재림을 일으키는 주체가 되는 것으로 비난한다면 이는 매우 답답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전도와 선교의 동기는 첫째, 주님의 지상명령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고 둘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때문에 하는 것이고 그래서 결국 이러한 노력이 주님 오실 날을 예비하게 되는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만약 선교를 하거나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선교사역을 불순한 것으로 비난한다면, 이는 마치 절대예정에 관한 칼비니즘을 구실로 구원은 하나님이 예정하시는 일인데 왜 우리가 전도를 해야하느냐는 식의 우문적이고 비생산적인 토론을 반복하는 일과 같을 것이다. 
동부 이대위의 더욱 심각한 사고의 오류는 마지막 때에 저들이 품은 성령부흥의 역사에 따른 영적 대추수의 비전을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는 인간의 노력과 잠재력의 극대화로 본 나머지 번지수가 다른 뉴 에이지적 진화론으로 까지 비약시키고 있는 점이다. 즉 저들은 자신들을 인류구원의 주체적 신격으로 간주한다는것이다.  그러나 IHOP의 "신앙고백"을 보면 이런 우려는 기우임을 알수있다:  
"우리는 이 시대의 끝에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 재림 하실 것을 믿으며, 그때 그는 그의 왕국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친히 그리고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지구에 돌아 오실 것을 믿는다. 우리는 교회가 큰 능력과 승리로 대환난을 통과할 것을 믿는다. 우리는 교회가 대환난 끝에 휴거할 것을 믿는다. 우리는 또한 종말의 거대한 영혼의 추수와, 성령님 안에서 전례없는 연합과 순결함 그리고 능력을 경험할, 승리하는 교회의 출현을 믿고 기도한다. (시2:7-9, 22:27-28; 요14:12, 17:20-26; 롬11:25-32; 고전15:20-28, 50-58; 엡4:11-16; 빌3:20-21; 살전4:13-5:11; 살후1:3-12; 계7:9-14)"
4. 열 처녀의 비유 해석의 중요성
동부 이대위의 어떤 목사가 IHOP의 열처녀의 비유에 대한(마 25:1-13)성경해석을 두고 단골처럼 비난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름부음을 받아 친밀한 신부가 되는 사람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일부라는 것이다"
"등불을 켜지 못하여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는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구원받을 믿음이 없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신자들이다. 등불을 준비하여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믿음을 가짐으로 천국에 가는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 이것은 너무나도 기본이 되는 성경해석인데, 마이크 비클은 어째서 이런 기본기를 익히지 않았던 것일까? 신학교에 다닌 적이 없어서 그럴 것이다"
유대사회의 결혼 풍습을 배경으로 한 열처녀의 비유중 신랑은 주님을, 등은 신앙의 외관을, 기름은 참 신앙을 유지시켜 주는 성령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경건의 능력을 가지고 늘 영적으로 깨어있는 성도를 말하고, 미련한 다섯처녀는 경건의 능력은 없이 경건의 모양만 갖춘 신앙인을 말한다.

그리하여 결국 부지불식간에 신랑이 올때 열심히 기름을 준비하여 신랑을 맞을 준비를 했던 처녀들은 혼인 예식에 참여할수 있었던 반면, 겉보기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영적인 게으름과 잠에 빠져있던 처녀들은 버림을 받은 것이다.
위의 말씀은 주님께서 십자가 수난 삼일 전 감람산에서 세상 종말시 있을 주요 징조와 사건, 그리고 종말을 대하는 성도의 자세를 교훈하신 내용의 하나로서 달란트 비유와 양과 염소의 비유와 함께 엄중히 경고하신 내용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름을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간단히 해석하여 무사 안일주의에 빠질 것이 아니라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고(눅 18:8) 한탄하신 주님의 뜻을 새겨야 한다. 따라서 밤낮 주님께 기도하는 삶 - 늘 근신하며 깨어 행함있는 파수꾼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성령충만함으로 기름을 해석해야 지혜로운 것이다. 어쩌면 비클 목사는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것이 복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주님께서는 첫 사랑을 잃어버리면 촛대가 옮겨지고 미지근한 교인은 내침을 받는다는 경고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이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낙관적 구원론만 강조할뿐 신앙의 열정을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함으로써 자기도취적으로 신앙이 부요한 것으로 착각하여 곤고하고 가련하고 눈멀고 벗은 모습을 피차 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는가?(계2,3)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3:19)."

5. 향이 가득한 금대접의 기도는 무엇을 말하는가?
계시록 5장의 말씀과 관련하여 동부 이대위에서 IHOP을 비판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향로가 차기까지” 기도해야 한다는 말과 “그 후에라야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난다”라는 구절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기도에 대한 가르침 중에서 성경에 없는 것을 핵심 개념으로 삼아서 기독교의 기도를 본질적으로 왜곡하는 것이요, 기도를 마치 사람이 힘써서 하고 있으면 채워진다고 보는 인본주의적인 공로주의요, 감정적인 열정주의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다.
순수한 성도들의 종교적 열심에서 나온 열정을 다한 기도가 하나님의 응답을 가져온다고 하여, 결국 인본주의적 공로사상을 가미하고 있다."
그러면 계시록에 나오는 말씀을 보도록 하자: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계5:7-8)"
위 계시록에 나오는 '거문고와 성도들의 기도인 향이 가득한 금대접(golden bowls full of incense, which are prayers of the saints'이란 표현을 보고 "금 향로가 차기까지" 정성껏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분명 성경이 주는 지혜인 것으로 하자가 없는것이다.
성경은 기도에 대하여 쉬지말고 할 것과 은밀히 할 것과 부르짖어 할 것과 모여서 할 것과 감사함으로 할 것등을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금 향로가 차기까지 기도한다는 뜻엔 이 모든 경우의 내용들이 다 들어있는 것으로서 기도의 본질이 보존되어 있다.
기도는 실천적인 행위이므로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를 인본주의적이니 공로주의니 운운한다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하고 게으른 마음일 수 있다. 또 감정적인 열정주의라는 비난 또한 해서는 안되는 합당치 않은 표현인 것이다.     
주님은 재판장에게 응답받은 과부가 밤낮으로 부르짖었다고 비유로 말씀하셨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을 때엔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힘쓰고 애써 간절히 하신(눅22:42-44)기도였다. 이 기도를 통해,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수 있었던 것이다.
또 "그 후에라야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난다”라는 구절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라는 비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계시록 8장에서는 성도의 기도향연이 하나님 앞으로 상달된 후(:4) 천사가 번제단의 불을 향로에 담아 땅에 쏟았다는 내용이 씌여있다(:5). 이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바로 성도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난 사실을 시사하는 것으로 기도의 능력, 기도의 막강한 위력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의 수반은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과 징계를 나타낸다.
이로 볼때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세상을 섭리하실 뿐만 아니라 성도의 기도를 외면치 아니하시고 우리의 기도로도 세상을 섭리하신다는 것을 알수있다. 이는 바로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핵심진리를 입증하는 것으로 주님께서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8-19)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미동부 이대위에서 발표한 내용은 위 성경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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