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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7일 01시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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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선생께 갚아야 할 빚
<칼빈의 성령관과 사도관>

<칼빈의 성령관과 사도관>

1. 성령의 내적 증거
 
십수년전 어떤 일을 계기로 심령의 금식을 단행하면서 사도행전을 읽는 중 말씀이 실제로 살아 움직이며 사도에게 임하였던 성령의 권능이 내게도 똑같이 임하는 초자연적인 귀한 체험을 한 적이 있다. 
 
매우 순간적인 일이었지만 당시 시공을 초월하는 말씀의 능력에 대한 체험을 은혜롭게 맛 보았던 것이다. 그때부터 말씀을 대할때마다 난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시인인 에즈워드의  "무지개(A Rainbow)"에 나오는 표현처럼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뛰노니(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 "라고 노래하는 심정이 되었다.
 
이 귀한 체험은 나에게 말씀과 성령이 본질상 하나요, 함께 역사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진리를 칼빈은"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7.4.)" 에서 "내적 증거"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웨스터 민스터 신앙 고백서중 구원의 확신에 해당되는 내용이기도 한데 "내적 증거"란  성경을 읽는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하여 비로서 살아있는 말씀으로 마음에 각인되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후 또 삼년 여 전 안수를 앞두고 체험한 초 자연적인 역사는 성자 예수님의 임재와 연합의 체험이었다. 당시 자신의 내적 상태는 역경속에서 "주님만을 오로지 즐거워하는 때"였다.  이 체험은 내게 주님의 임재의 경건함과 신비함 그리고 동시에 성령의 충만케 하심의 체험이었다. 또한 "보잘것없는 나를 언제나 기억하시고 기뻐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내게 닿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개인적으론 내적인 위로와 확신과 평안의 유익을 얻었다. 
 
"경건한 마음은 하나님의 임재를 인지하고 하나님에게 닿게 된다"라고 하였던(There, indeed, does the pious mind perceive the very presence of God, and almost touches him,)" (Inst., 1.13.13) 칼빈의 말은 공연한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내게 말씀과 주님의 체험을 가능케한 매개는 성령 하나님이셨다. 한번은 말씀 속에서 두번째는 말씀과 분리된 일상에서의 체험이었다. 그러나 두번째 체험은 외형적으로는 말씀과 분리된 것 처럼 보이지만 체험의 내용과 성격은 지극히 말씀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 후 이전에 성경을 읽을때 평소 막연히 추상적으로 생각되었던 어떤 개념이 -이를테면 "충만"같은- 이젠 문자 그대로 충만하고 산 경험으로 내 안에 각인되어 자리 잡게 되었다.  이렇게 성령께서 우리에게 때때로 주시는 초 자연적인 역사는 우리의 믿음을 부요케 하는 유익이 있다. 
 
2. 칼빈의 성령에 대한 설명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성령의 영원한 신성(The eternal deity of the Spirit)이 성령의 사역안에 나타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성령은 다른 것에 의해서가 아닌 바로 성령 자신의 에너지로 신자가 중생하도록 하시는 분이다("he is the author of the regeneration not by borrowing but by his very own energy...")"
"성령은 그 무엇에도 제한받지 않고 피조물의 범주를 벗어나 있으며 만물안에 그의 에너지를 스며들게하고 본질과 생명과 감격을 불어넣는데 있어 실로 분명하게 거룩하시다." ( ...but in transfusing into all things his energy, and breathing into them essence, life, and movement, he is indeed plainly divine.)(Inst., 1.13.14)
여기서 칼빈이 성령을 "에너지"로 또 "전이되는 것"으로 표현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의 성령의 "스며들게하는(transfusing)"의 뜻은 전달이나 주입, 혹은 퍼지게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to transfer or pass from one to another; transmit; instill; impart; spread; communicate). 
보이지 않지만 성령은 인격체 이시므로 그 안에 지정의뿐만 아니라 당연히 힘과 에너지도 지니시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성령의 에너지를 주입하는 주체는 성령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특이하게 성령님은 주어이면서 동시에 목적어가 되고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여있을때 성령의 에너지 곧 성령의 역사의 전이(impartation)를 바라고 기도할때는 인격체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나누어 주시기를 바라는 것으로서 지극히 성경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이와같이 말하였던 것이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롬 1:11)"
여기서 "나눠 주고"나 "견고케 하려함"의 표현은 바울이 주어처럼 들리지만 어원적인 뜻은 전자는 수동형으로 견고케 하는 주체가 하나님임을, 후자는 "남들과 함께 나누다"는 뜻으로 역시 은사의 주체가 하나님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이(impartation)"란 표현을 쓸때 성령을 인격이 아닌 물리적인 힘이나 에너지로 본다고 하등 오해할 필요가 없다.  
다수가 모여 성령의 역사를 간절히 사모할때 때로는 사역자가 성령의 충만한 에너지로 뜨거워져 자기도 모르게 열정적인 제스쳐를 쓰는 경우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역을 행하시는 주체는 성령 하나님이시며 사역자는 어디까지나 쓰임받는 도구인 것이다. 
성령의 사역에서 나타나는 힘은 물리적인 힘(force)이 아니라 능력을 나타내는 힘(power)이다. 그러기에 성경에서는 기적(miracle)을 능력으로 표현한다( 고후 12:12):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엡1:19)","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3:20)", '어떤 이에게는 능력행함(miraculous power)을(고전 12:10)",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고후4:14)"...
성령의 선택과 의지에 따라 은사의 나타나는 현상은 얼마든지 다양할수 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 안에 있는 같은 한 성령의 행함이라는 관점에서 칼빈은 "바울 사도가 성령의 내재된 특성을 매우 분명하게 거룩한 힘으로 본다(" Paul, therefore, very clearly attributes to the Spirit divine power")"고 하였다(Inst., 1.13.14). 
물론 칼빈은 사도행전적 성령의 역사가 종식된 것으로 보았지만 그가 당시 성령의 특성을 "거룩한 힘"이나 에너지"로 파악한 것은 매우 주목할만한 고무적인 점이라 여겨진다. 
또 하나의 다른 오해는 성령을 "release" 한다고 표현하는 것을 "방출"로 해석해서 성령을 물리적인 힘으로 본다고 비판하는 경우이다. 이 역시 성령의 주격과 목적격적 이해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 표현의 대표적 사용자로는 "영의 해방(The Release of the Spirit)"이란 저서를 쓴 Watchman Nee가 있다. 
Watchman Nee는 이 책에서 우리의 영(spirit)인 속사람에 성령이 거하신다고 설명하면서 이 속사람을 싸고있는 겉사람(soul)이 깨어질때 속사람과 함께 성령이 해방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release"란 표현은 겉사람인 자아의 파괴와 영의 해방 - 우리의 영이 성령과 더불어 우리 안에서 해방되는 것을 표현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Rom. 7:22; Eph. 3:16; 2 Cor.4:16; 갈 5:24).
그러므로 사역자가 성령의 "release"를 인도할때는 모인 자들이 자아를 내려놓고 성령 하나님을 환영하고 모셔들이라는 뜻이 될것이다. 
결론적으로, 성령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타 종교적 현상과 유사해 보인다해서 성령의 강한 힘의 역사나 표적과 기사와 능력의 나타남을 세상종교의 비인격적인 힘의 역사와 비교하거나 동일시해서는 결코 안되리라 생각한다.역시 여기서도 나는 칼빈의 "내적 증거"가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3. 칼빈의 사도적 목사 개념
칼빈은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4중 직제를 제시하여 장로교 제도의 신학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그런데 그의 기독교 강요를 보니 요즘 신사도 이슈와 함께 논란이 되었던 에베소서의 오중직에 대한 그의 견해가 매우 의외적으로 인상적이었다.
칼빈은 에베소서에 나오는 오중직에 대해 나중 두개 만이교회의 보통직이고 처음 세개는 하나님 나라의 초기에 세우셨는데 현재 필요한 시기마다 또 다시 부활시키신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Of these only the last two have an ordinary office in the church; the Lord raised up the first three at the beginning of his Kingdom, and now and again revives them as the need of the times demands ).(Inst., 4.3.4)
 
"이 세개의 직분은 (나도 바울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 교회에 영구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교회가 처음으로 설립되는 기간 동안이나 모세부터 예수까지 넘어오는 기간 동안에만 세워졌다. 그러나 아직 나는 하나님께서 때때로 그후 기간에도 우리세대에 일어난 것처럼 사도들이나 최소한 전도자들을 세워오신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Still I do not deny that the Lord has sometimes at a later period raised up apostles, or at least evangelists in their place, as has happened in our own day.)  
왜냐하면 적 그리스도의  횡포로부터 교회를 벗어나게 하기 위해선 그런 자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교회들이 있는 곳에선 적용되지  않으므로 난 이 직분을 예외적인 것이라 부르겠다."
"바울은 "선지자(prophets)"라는 명칭을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였던 자 모두들에게 적용시킨 것이 아니라 특정한 계시에 출중났던 자들에게 사용했다. 이 계급들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거나 덜 일반적이다(This class either does not exist today or is less commonly seen)."
물론 당시 종교개혁의  변혁기에 루터의 영향을 받으며  카톨릭 교회와 결별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옹호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서술한 것이지만 사도와 선지자의 출현 가능성에 대해 그가 아주 문을 닫지않고 어느정도  오픈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 자신 교리를 집필했지만 교리적 사고에 자신을 전적으로 속박하지 않았던 지혜와 명철함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시대와 역사를 주권적으로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겸손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된다.
칼빈은 또 사도의 의미와 유래로 보아  교회의 모든 사역자들을 합당하게 “사도(apostles)”들로 불릴수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모두가 주님에 의해 보내어졌고 그의 심부름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Now by the meaning and derivation of the world all ministers of the church can properly be called "apostles," because all are sent by the Lord and are his messengers.)(Inst., 4.3.5.)
칼빈은 물론 세상에 복음을 전하도록 주님에 의해 선택된  열두 사도들은  서열이나 계급(in order and rank)에 있어 다른 사도들을 능가한다고 했다. 그래서 설명하길, "실제로 바울은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를 사도들중 뛰어난 자로 불렀다 (롬16:7). 그러나 아주 정확히 말할때 는 원 사도들에게만 불렀다."고 분명히 한다.
또  칼빈은 사도들과 목사들의 차이는 복음을 전하는 범위에만 있다고 보았고 기본 임무나 책임은 똑같다고 보았다(Yet pastors have the same charge as the apostles.).
사도직은 한정된 구간이 없이  온 세상 어디라도 주의 이름을 듣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하고 (막 16:15) 교회를 세우는 것인 반면(롬15:19-20), 목사직은 할당된 구간에 맡겨진 양무리를 돌보는 차이뿐이라고 했다(Finally, what the apostles performed for the whole world, each pastor ought to perform for his own flock, to which he is assigned."(4.3.6.)
그러므로 칼빈은 목사직은  한직이 아니라 사도들 처럼  교인들을 진실된 거룩함으로 인도하고 올바르게 교육하고 훈련하는 책임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에스겔서를 인용하면서 교회에 파수꾼으로 임명된 자들이 만일 교인들을 깨우치지 않아서 어느 한 사람이라도 모르는가운데 죽으면 하나님은 "그의 피값을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실것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있다고 경고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악인은 죄악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값을 손에서 찾을 것이고" (겔 3:17-18)
칼빈의 철두철미한 소신과 사명감과 아울러 영혼에 대한 책임감이 우러나는 진정 사도적 목회관을 설파한 것이라 할수있다. 그리고 이것은 칼빈 이전에 성경의 말씀이기도 하다.  
4. 소감
이와 같은 칼빈의 이해를 재검해 볼때 오늘날 우리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신학자의 원래의 교리적 뜻과는 달리 진부하고 전형화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본질을 떠난 비 본질적인 이슈에 너무도 많은 소모전을 하여왔지는 않은가 반성하게 된다.  
칼빈이 성령의 사도행전적 역사의 지속성에 대한 확신을 가질수 없었던 것은어쩌면  오랜 세월 말씀의 암흑기를 지나온 당시의 속박된 교회사회적 환경과 무관치 않다고 본다. 그 자신 역사의 대변혁기에  교회와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거룩한 시대적 사명감으로 고군분투하던 환경에 처해있기도했다.
그러한 영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무엇보다 칼빈이 삼위의 한분으로 성령의 위격을 정립하고 또 성령의 본질적 특성을 "거룩한 힘(divine power)"으로 파악한 것은 매우 괄목할만한 일이다. 아마도 그가 오늘날 살아 있다면 성령의 사역자로서 성령론의 대가가 되고도 남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오늘날 만개가 된 성령의 역사가 칼빈의 교리로 인하여 가장 많은 도전을 받고있는 현실은 우리가 칼빈의 열려진 영성보다는 닫혀진 교리에만  촛점을 맞춰  칼빈화가 아닌 교리화된 인식이 빚어낸  아이러니라 할수있겠다. 
 칼빈의 사도적 목사관은 너무도 올바른 성경적인 이해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인 교회사회는 이미 오래전 칼빈이 수용하였던 "사도"라는 호칭의 새로운 등장으로 인해 신성모독이라도 범한듯 정신적이고 영적인 무력시위를  한껏 벌여온 형국이다. 전형화된  고정관념의 폐해가 인격의 황폐함으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자연 영성의 실조(deficiency)현상이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중요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사도적 영성의 회복이라 생각한다.   
요즈음은 어느덧 목회의 성격도 깔끔한 교사직의 성격처럼 변해가고 있는 추세이다. 칼빈이 기대하던 대로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전하여 가르치고",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믿음을 증거하고",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 고 자신있게 말할수 있는 목회자가 얼마나 될까?
그러기에 나는 지금도 사도적 영성과 선지자적 영성의 회복만이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라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사도적 영성의 특징은 한마디로 생명력(vitality)이며 성령의 에너지와 능력인 것이다. 
한편 이제는 칼빈의 교리속에 숨겨진 더 많은 지혜를 발견하기 위해서 교리서의 모체인 말씀을 더욱 더 연구해야 할때가 아닌가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칼빈 선생을 기쁘게 하는 길은 그의 교리의 답보적인 이해가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통해 그의  영성을 재발견하고 확장시키는 일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칼빈 선생에게 보답하고 갚아야 할 빚은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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