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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7일 01시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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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영성으로 현대를 사는 총명(聰明)
처음 성경을 읽을때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제일 이해가 안가고 얼핏 우습게도 생각되는 장이 바로 광야생활을 그린 민수기였다. 왜냐하면 이들의 반복되는 원망과 불평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모습이 바보스럽게 보여 영 나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착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선입관은 머지않아 바로 교정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인생을 더 살아갈수록 가장 내 마음에 부딪히는 성경이 바로 민수기가 되었고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가장 잘 적나라하게 드러낸 성경의 장으로 날이갈수록 공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명기는 광야생활을 마치는 모세가 가나안 입성 두어달 전 또 죽기 한달 전 세편의 고별 설교로 남긴 유언집이다. 이 설교의 대상자들은 출애굽 사건을 전혀 체험치 못하였거나 어려서 체험하였던 출애굽 2세의 신세대였다. 
시내산 언약을 맺었던 출애굽 1세대가 불순종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당하는 등 사십여년간 숱한 우여곡절과 천신만고를 겪어왔던 모세였기에 이제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신 세대들에게 남기고 가는 신앙의 메시지는 실로 책임 막중하고 의미심장한 것이었으리라. 
신명기를 통해 모세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율법의 전수에 그치는 문서적인 기록이나 관념이 아니라 현재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일임을 교훈하고 있다.
하나님은 과거 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진행적으로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이스라엘 백성을 안아 가나안 땅까지 이르게 하시는 따뜻한 사랑의 아버지이심을 토로하고 있는 음성이 들려온다(신1:30-31).
모세는 신세대들에게 십계명을 위시해서 각종 율법의 의미를 재해석해 주면서 율법준수 여부에 따른 축복과 저주에 대하여 분명히 경고하므로써 이들의 동의를 얻어내 일찌기 1세대가 맺었던 시내산 언약을 모압땅에서 2세들에게 갱신하고 있는 것이다(27-30).
이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주님의 말씀은 과거의 기록이나 교리가 아니라 현재의 우리에게 리바이벌 되어야하는 진리적 실재라는 사실이다. 비단 모압땅에 모여서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새로이 새겨들었던 출애굽 2세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각자도 언약 갱신의 실제적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있다.
언약갱신의 주된 요점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과 순종하여 따르는 행위이다.
애굽의 종 살이에서 천신만고 끝에 건져냄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기에 그들은 성경상의 어느 세대보다 가장 하나님을 잘 아는 -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였던 백성들이었다. 그러므로 십계명의 서두는 "나는 너를 애굽땅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신5:6)"라고 시작된다. 
그런 그들이,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권능과 큰 능력을 경험하였던 저들이 고달픈 광야의 행진동안 어느덧 계속적으로 악한 말로 하나님께 대한 원망을 일삼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인간으로서의 나약함과 사람들의 원망섞인 말들에대해 성경은 이것이 곧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요 불신앙으로 간주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도 참으시기 싫어하시는 죄악이 라고 경고하고 있다(민14:11, 27).
놀랍게도 우리의 불신앙과 교만과 망령됨은 무슨 커다란 잘못된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말속에 들어있다는 진리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광야는 우리 인생 여정의 상징이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신자들이나 성화의 과정에 입문하지 못한 이들이 아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새기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믿음의 언약궤를 앞세우며 인생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제사장의 축복을 받고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았던 우리와 꼭 같은 신앙인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번번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보다는 환경에 압도당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원망하고 불평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한 신앙인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의 절정이 가데스 바네아의 사건이다.
광야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은 결국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의 산물이며 곧 우리의 교만을 드러내는 것이라 성경은 가르쳐주신다. 이는 오늘날 신자들도 생활속에서 피할수 없이 경험하는 내적 환경이기도 한데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을 신명기에서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신 8:2-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먼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때 우리는 기꺼이 불평과 불만의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을수 있는 고난 참여의 영성에 한발짝 다가설수 있다. 고난 참여란 다름 아닌 주만을 바라보는 믿음의 산물이다. 이것의 총체적 진리의 절정이 놋뱀사건이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신명기를 통해 나를 자녀로 택하신 것은 나의 장점이나 남보다 우세함이 아니라 가장 열세한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만 사랑하심을 인하여서"라고 말씀하고 있다(신7:8). 
또 우리의 성공이나 승리도 우리의 의로움이나 정직함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공의안에서 생겨난 결과적 산물이라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지난 과오와 교만함을 잊지말고 기억하라고 당부하고 계신다(신9:4-7).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말씀을 지키고 마음을 정결케 하며 하나님과 친밀함을 가지는 것이라 하신다(10:16, 20).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던 하나님의 초 자연적인 역사는 거저 간단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6일 동안만 거두도록 하셨고 안식일을 위한 제 6일외에는 아침까지 만나를 남겨두지 말라고 명하셨다(출16). 이와같이 저희에게 일용할 육의 양식을 허락하셨던 이유는 일차적으로 저들의 필요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그러나 이와 아울러 영의 양식인 말씀을 저희가 지켜야 함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며 이로써 저희의 믿음을 테스트하시고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셨던 것이다(신8:16).
그러므로 하늘에서 내린 만나는 단순한 육체적인 필요를 위해 주어진 일차원적인 기복신앙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가에 대한 순종의 시험이자 영적인 축복이 담겨있는 것이었다(출16:4). 모세가 시험에 들었던 신령한 반석에서 나오는 신령한 음료도 마찬가지로 생명수를 의미하였다(출17:1-7;고전10:4).
그러기에 오늘날 하나님께서 일상적인 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때때로 초자연적인 역사로 우리의 육체적인 요구를 들어주시는 직접적인 동인은 구하는 자들의 절실한 필요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연민이지만 이의 주된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의 신령한 것을 깨우치게 하시는 즉 우리의 믿음을 성숙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이 진리를 간과하고 피상적으로 기복 신앙이니 신비주의니 운운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 진의를 깨닫지 못하는 비성숙한 사람들의 허물은 될지언정 하나님의 허물이 아닌 것이다.
그저 복을 구한다고 해서 거저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반사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더욱 아니실진데 우리는 평균 이상의 말씀의 습득력을 가진 신앙인들이 체험하는 여러가지 성령의 역사에 대해 일단은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정상적인 신앙인의 태도라고 본다.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의 여정에서는 우리 신자가 살아가는 동안 부딪히는 제반의 문제가 다 포함되어 있다:
시내산에서의 행진 시작과(민1) 불순종으로 인한 38년간의 방황생활(14:34), 교회를 중심으로한 신자의 인생살이(민 2), 나실인의 법에 나오는 남녀평등의 부르심 (6:2), 성직자의 축복권(:22-27), 원망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와 사역자의 중보기도의 중요성(11:1-3), 양무리를 인솔하는 사역자로서의 책임감과 고통(11-). 차별없는 하나님의 은사 공급(:26-30), 리더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과 양무리의 불순종의 벌(12:, 16:), 리더의 잘못을 징계하시는 하나님(20),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예표(21;4-9), 율법 요약(5:-10:; 28:-30:)등이다.  
광야의 영성은 한마디로 우리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밖는 성화의 영성이다. 성화란 거룩함과 성결함과 선함을 좇는 신자의 자세이며 진행적인 것이다. 이에관해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간의 상극에 대해 성경이 말씀하는 바(갈5:17), 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고 말씀한다(롬8:13).
그러나 그것이 결코 쉽지가 않다. 그러기에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시행착오와 과오는 얼핏 표면상으로는 단순하고 어리석게 보이겠지만 실제적으론 우리가 날마다의 삶속의 정황에서 겪는 일이자 또 우리가 이겨내야할 불가피하고 엄연한 현실이요 실상인 것이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까지 사람들의 절대적인 말씀에 대한 순종이 선행되었다. 어느 한 가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도 말씀에 대한 순종과의 연관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볼때에 오늘날에도 이러한 주제의 영성을 사모하는 노력에 대해 손쉽게 비웃거나 비난할 성질이 아닌것을 깨달아야 한다. 오히려 비난은 촛점을 가시적인 것에만 맞출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서 나올 소지가 많다.
메마르고 척박한 유동적인 광야의 생활과는 달리 가나안의 삶은 풍성하고 정착되어 종교 정치 사회 문화적 제도가 갖추어진 환경이다. 광야의 삶이 배고프고 갈한 가운데 오로지 어린애처럼 한분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 절대적 믿음이 요구되어진 상황이었다면, 가나안의 삶은 배부르고 기름진 가운데 인본주의가 팽배해 이방 종교와 적당히 타협하고 혼합되어진 신앙으로 겨우 맥을 유지하는 상황이었다.
그러기에 외견적으로 가나안의 삶의 모습을 많이 닮은 현대의 생활속에서 광야의 영성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를 둘러싼 내외적 환경이 광야처럼 갈급하고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는 자연 광야의 영성에 올인하게 된다. 그러한 노력속에서 자연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役事)가 많이 일어날수 밖에 없는 것은 이미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부인할수 없는 역사(歷史)이다.    
광야의 영성을 가진 신앙인들은 불가시적인 기적에도 눈이 많이 떠진 자들이다. 그래서 기적은 오늘날도 우리의 일상적인 삶속에서도 속속히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에 늘 감격하지 않을수 없는 자들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생활의 기록은 영원한 가나안을 향해 행진하는 이 세상에서 신자가 겪어야하는 성화의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자 현재도 크고 작은 기적과 더불어 부단히 살아 역사하는 감격스런 실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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