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해도 해결이 안 되자 유서를 싸놓고 자살한 성완종 사건이 미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중에 이번에는 국정원직원의 자살사건이 터졌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억울함과 결백을 주장하고, 뇌물 받은 사람, 죄 지은 사람, 사건의 배후 연루자들과 그들의 죄목을 유서에 싸놓고 자살을 했는데,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는 모른다, 나는 그 사람을 만나본적도 없다’며 발뺌을 하고, 죽은 자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많은 유서 자살사건을 보았듯이, 증인이 살아 있어도 버젓이 거짓말을 하는데, 증인이 죽었으니 죽은 자에게 모든 것을 전가하면 그만이니 ‘죽은 자는 말이 없듯’ 정국을 뒤흔드는 이번 사건도 얼마 후에는 용두사미로 흐지부지 끝나버릴 확률이 많다.
본문은 동방의 의인 욥이 자기무죄와 결백을 선언한 말씀이다. 당대 동양 최대 CEO 기업가요, 대법조인이며, 자선가요 백성들의 스승이며 맨토였던 욥이 어느 날, 하루아침에 1천 마리 소와 5백 마리 암나귀와 수백 명의 종들을 아라비아사람들이 탈취해 가고 죽이는 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같은 날, 하늘에서 검은 먹구름에 휩싸인 거대한 불덩어리가 내려와 7천 마리 양과 수백 명 종들을 모두 불태워 한 줌의 재와 숯 덩어리를 만들었는데, 그와 거의 같은 시간에 이번에는 요르단 남쪽에 사는 갈대아인들이 떼를 지어 쳐들어와 3천 마리 약대와 약대를 돌보던 수많은 종들을 모두 죽이는 사고가 있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맏아들 집에서 잔치를 즐기던 일곱 아들과 세 딸과 그들의 수십 명 자녀들이 무서운 대풍에 집이 무너지는 사고로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두 압사를 당한다.
그러나 불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얼마 후, 이번에는 욥의 몸에 온몸이 부스럼과 악창으로 썩어 들어가는 Bagdad-Boil이라는 상피병이 걸리게 되면서, 욥의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고 온몸은 피고름 범벅으로 걸레처럼 되고 성한 곳이 없어지고 짐승의 몸처럼 흉측하게 변했다. 그러자 열 자녀를 낳았어도 처녀처럼 예쁜 미모를 자랑하며 현모양처로 명성을 날리며, 그 많은 재산이 없어지고 아이들이 죽었을 때도 욥의 곁을 마지막까지 지키며 귀부인의 품위를 지켰던 부인이 이혼장을 던져 놓고 집을 떠났다. 몇 달 사이에 이런 비극을 연속적으로 당하자 이제까지 가까이 지냈던 형제와 친척친구와 이웃들도 욥을 멀리하고 동물원 짐승 보듯 욥을 비웃고 조롱한다. 이제 욥의 주위엔 아무도 욥을 가까이 하거나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어졌다.
몇 달 후, 욥이 당한 비극소식을 들은 오랜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 세 사람이 멀리, 데만과 수아와 나아마에서 욥을 조문하기 위해 불원천리하고 단숨에 달려왔다. 하지만 처참한 욥의 몰골을 보는 순간 한 사람도 입을 열지 못했다. 몇 달 전, 사업차 만났을 때만 해도 위풍당당했던 욥이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온 몸에 부스럼과 종기와 피고름과 썩은 상처로 일그러져 있는 것을 본 친구들은 일주일 동안 욥을 쳐다만 볼뿐 말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
그럴 때, 욥이 고통 중에서 입을 열어 자신의 살아있음을 괴로워하며 탄식한다. ‘내가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를 임신했다고 즐거워하고 좋아했던 부모가 원망스럽다, 어째서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않았는가?(Why did I not die at birth)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나를 낳을 때에 숨지지 않았는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는가?(Why did the knees receive me) 어찌하여 유방이 나로 빨게 하였는가?’(Why the breasts that I should suck)... 욥은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를 외치고 되 뇌이며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자기생일(生日)을 17가지 변무(辨誣)로 저주하고 비통해하며 슬퍼했다(Birth lamented; 17 curses on his birthday; 욥 3: 1-12)
이 모습을 지켜보던 세 친구가 마침내 입을 열어 욥과 변난(辯難)대담을 시작하는데, 그 변론대담내용은 한 마디로 “욥, 네가 당하는 지금의 저주와 고난은 너의 죄 때문이니 회개해야 산다, 네가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고는 이런 환난을 당할 리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위로가 아니라 상처 위에 소금 뿌리기였다.
욥기 4장부터 31까지에서 욥을 정죄하는 세 친구의 공박과 목숨을 걸고 자신의 무죄와 결백을 주장하는 욥의 공방전은 촌철살인(寸鐵殺人)을 지나 피차에 촌진척퇴(寸進尺退: 얻는 것은 적고 잃는 것은 많음-진보는 적고 퇴보는 많음)의 난전이었다. 욥기 4-5장 15장 22장에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인간의 경험을 통해 볼 때, 욥의 고난은 죄의 결과이니 죄를 회개해야만 다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변론했고, 8장, 18장, 25장에서 수아 사람 빌닷은 사람의 전통과 관습과 옛 사람들의 전설을 종합해 볼 때, 욥의 고난은 죄의 결과라고 압박했으며, 11장, 20장에서 나아마 사람 소발은 인간의 가치와 사람이 쌓은 공적(功績)이나 공로로 볼 때, 욥이 당하는 고통은 죄 값이라고 몰아붙였다.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죄 없이 당하는 고난도 괴롭고, 육체의 아픔과 고통도 힘이 들어 견딜 수가 없는데, 한 마디 위로는 못할망정 ‘네 고난과 질병과 저주는 죄 값이라’ 몰아붙이는 친구들을 향해서 6-7장, 9-10장, 12-14장, 16-17장, 19장, 21장, 23-24장 그리고 26- 31장을 통해 여덟 번이나 항변했던 욥의 답변은 한 마디로 ‘나는 무죄하다’는 절규였다. 그 중에 본문 31장은 욥이 조목조목을 열거하며 자신의 결백과 무죄를 주장하는 내용이다.
1. 욥의 12가지 무죄결백 주장(Job's twelvefold innocence declared)
생각해보라. 아무 죄도 짓지 않았고, 사건의 알리바이도 증명돼 무죄가 확실한데도 경찰과 검찰이 자기들 실적을 위해 살인자와 강도와 사기범으로 구속해 감옥에 가둔다면, 그 사람의 억울함이 얼마나 크겠는가?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억울하게 투옥돼 4-50년 2-30년 10년을 큰집에서 살다가 무죄로 나온 사람과 지금도 그렇게 감옥에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심지어 사형수나 무기수로 살다가 무죄가 증명돼 몇 십 년 만에 극적으로 살아나온 사람도 많다. 그들은 판사 앞에 섰을 때, “나는 절대로 그 죄를 짓지 않았다. 내가 만일 그 죄를 지었다면 천벌을 맞아 죽어도 좋다”며 자기결백을 주장했을 것이다.
예전에 한국 사람들은 자기무죄와 결백을 주장할 때, “내가 만일 그 죄를 범했다면, 내 성을 갈 것이다, 당신이 내 아버지가 될 것이다, 내가 벼락을 맞아 죽을 것이다, 내가 피를 토하고 죽을 것이라...”는 극단적인 언어를 사용했었는데, 세상이 악해진 요즘은 유서를 써놓고 자살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 것이 유행처럼 되고 있어 안타깝다. 그래서 자살이 유행인 요즘을 인터넷 신조어로 ‘엄빠주의 시대’(엄마와 아빠 모르게 주의하는 시대), ‘열폭 시대’(열등감 폭발시대), ’노(No)잼 시대‘(재미없는 시대) ’깜놀 시대‘(깜짝 놀라는 시대)라고 부른다.
‘당신의 저주와 고난은 죄 값이라’ 몰아세우는 세 친구를 향해 욥은 맹세형식으로 “만일 내가 무슨, 무슨 죄를 범했다면(If I did it?)...내가 어떤, 어떤 벌을 받을 것이라”며 자신의 결백을 12가지로 주장하는데,
⑴ 그 첫 번째는 여인을 향한 탐욕적인 호색에 대한 무죄선언(Not guilty of lust after women, 1-4절)이다. 인간이 짓는 죄 중에 이성(여자)과 관련된 죄가 80%이상이 된다. 그만큼 인간은 본능적으로 육신의 정욕과 음탕과 더러운 마음으로 가득 차있다. 여기엔 남녀노소나 동과서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다. 엊그제 브라질에서는 양아버지의 성폭행으로 10세 소녀가 아이를 낳아(역사상 가장 나이 어린 소녀가 아이를 낳음) 충격을 주었지만 세상은 온통 음탕과 음란, 호색의 흙탕물이다. 특별히 돈 많고 권세 있는 사람은 호주의 억만 장자가 20명의 미녀들과 밤낮을 먹고 마시며 쾌락을 즐기는 것을 자랑하듯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하다.
그렇다면, 동양최대의 거부 욥도 예외는 아니었다. 잘 생기고 돈 많고 막강한 권세가 있었던 욥의 주위엔 수많은 미인처녀들이 줄을 섰었고, 손만 내밀면 언제 어디서든 미모의 여인들이 닿아 있었다. 특별히 일부다처가 죄가 아니던 욥의 시대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인생을 쾌락으로 즐길 수 있었다. 욥에게 여자관계가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그런데 욥은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이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며 높은 곳에서 전능자가 주시는 산업이 무엇이겠느냐?...내 길을 감찰하시고 내 걸음을 일일이 세시는 하나님이, 만일 내가 처녀에게 주목했다면(If I gaze at a virgin; 주목(注目, Think upon, 빈: ”간절히 바라보다, 깊이 생각하다, 음탕하게 바라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성적욕망이 일어 날만큼 천천히 바라보는 것“) 지금까지 내가 누렸던 위에 계신 하나님이 내리시는 분깃과 전능자가 주시는 산업이 가능할 수 없었다”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과연 욥은 동양제일의 경건과 거룩함의 규범이었고, 율법적으로 완전한 의인이었다.
⑵ 위선에 대한 결백주장(Not guilty of deceit, 5-6절)이다. 욥이 당한 가장 고통스러운 것 중 하나는 자신의 과거 선행들을 모두 거짓된 것으로 돌려버리는, 친구들로부터 위선자와 속이는 자로 취급받는 것이었다(욥 4; 7-9, 8: 6, 12, 11: 4-6, 15: 30-35, 18: 5-21, 20: 5-29) 그래서 욥은 “내가 공평한 저울에 달려서 하나님이 나의 정직함을 아시게 되길 원한다”(Let Him weigh me with accurate scales and let God know my integrity)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⑶ 부정직함에 대한 결백 주장(Not guilty of dishonesty; 7-8절) 욥은 자신이 충성의 대상을 옮기는 배교를 하지 않았다든지, 눈으로 보는 것을 통해 마음에 생기는 악한 소욕을 억누르지 못했다든지, 손으로 죄를 짓지 않았다는 자신의 말이 거짓이라면, 자기가 땀 흘려 수확한 곡물이나 쌓아올린 재산을 일하지 않은 타인이 먹는 억울함을 당해도 그것을 거짓에 대한 형벌로 생각하겠다고 말함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하나님 앞에서 한 점의 의혹도 없다는 무죄고백이다
⑷ 간음에 대한 무죄선언(Not guilty of adultery; 9-12절) “언제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렸는가? If I did it(“내가 만일 그랬다면”) 내 처가 타인의 매를 돌리며(그의 종이 되어 종살이하는 것) 타인이 동침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는 중죄(重罪)라(For this is an heinous crime(극악한 죄, 구역질 날만큼 불쾌한 죄)-For that would be a lustful crime(호색의 죄) 재판관에게 벌받을 악이요 멸망하도록 사르는 qf이라 나의 모든 소산을 뿌리까지 없이 할 것이니라” 1절의 처녀(Maid, 베투라)는 “남자를 전혀 알지 못하는 숫처녀와 동정녀”를 의미하고, 9절의 여인(Woman, 이솨)은 “보통여자 또는 남의아내”란 뜻으로 “육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숙한 여인으로 쉽게 성적인 대상이 될 수 있는 여성”을 의미한다. 욥은 눈으로 보는 것을 통해서 아름다운 처녀나 Sexy한 남의 아내에게 음욕을 품는 마음의 죄까지도 짓지 않았음을 주장했다
⑸ 권리침해와 불공정행위에 대한 무죄선언(Not guilty of injustice; 13-15절) 친구 엘리바스는 22; 5-9에서 욥이 자기 종들에게 횡포를 부렸다고 몰아붙이면서 인과응보로 너도 오늘 이런 고난을 받는다고 지적했는데, 욥은 ‘종들을 학대한 적이 없었고, 오히려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말을 들어주었다’고 하면서, ‘내가 만일 종들의 권리를 무시했거나 공의를 저버렸다면, 하나님께서 저들을 변호하기 위해 일어나셔서 나를 정죄하실 것인데, 어떻게 내가 그런 죄를 범했겠느냐?’며 자기결백을 주장했다 ⑹ 무정함과 몰인정, 잔학함에 대한 무죄선언(Not guilty of inhumanity; 16-23절)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두려워할 뿐 아니라 그분의 위엄(威嚴) 때문에(For destruction from God was a terror to me, and by reason of His highness),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거나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지 않았고,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를 기르기를 그들의 아비처럼 했고, 어렸을 때부터 과부를 인도했으며, 의복이 없는 자나 빈궁한 자가 덮을 것이 없으면 나의 양털로 그 몸을 덥게 입혀서 그들로 나를 위해 복을 빌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내가 공회의 일원으로 재판판결을 임의로 조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나의 권력을 남용해 가난한 자나 약한 자를 늑탈하는 일에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무죄선언을 한다. “만일 내가 그랬다면(If I did it) 내가 그렇게 무자비하고 몰인정했다면, 내 어깨가 어깨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뼈가 부러짐이 마땅하니라”(Let my shoulder fall from the socket, and my arm be broken off at the elbow) 욥의 조금도 부끄럼이 없는 양심고백이고 무죄선언이며 결백주장이다.
⑺ 탐욕에 대한 결백주장(Not guilty of covetousness; 24-25절) 욥은 금으로 자기의 소망을 삼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고, 자신의 삶을 물질적인 부에 의탁하거나 그 힘을 빌려 행동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하나님 대신 재물을 의지한다고 비난하는 엘리바스(22: 24, 25)에게 자신이 동양최고의 재력가와 거부가 된 것을 자기능력으로 성공한 부자라고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힘과 지혜로 부자가 된 것을 고백한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재산과 자녀들을 잃고 알거지로 잿더미에 앉게 됐을 때,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The Lord gave and the Lord has taken away”(1; 21)며 감사했던 것이다. 정말로 욥은 탐욕에 대한 결백을 주장할 만한 사람이었다. ⑻ 우상숭배에 대한 무죄와 결백주장(Not guilty of idolatry; 26-28절) 욥은 당시 사람들이 태양과 달의 위용에 압도돼 그것을 숭배했지만 자신은 우상숭배 죄를 범하지 않았음을 고백하며, 그것은 간음죄와 같이 하나님께 벌 받을 중죄라고 선언했다. 이렇게 욥은 여자를 바라보거나(9-11절) 천체를 바라봄으로 짓는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다.
⑼ 증오와 사악한 감정에 대한 결백주장(Not guilty of malignity; 29-31절) 욥은 자기를 미워하는 원수들이 재앙을 만나거나 멸망을 당할 때, 자기를 괴롭히던 자들이 어려움이나 역경을 당할 때, 마음속으로 어떤 쾌감이나 즐거움도 느끼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우리 중, 과연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의인이 얼마나 되겠는가? ⑽ 냉담이나 무뚝뚝함에 대한 결백주장(Not guilty of inhospitality; 32절) 욥은 나그네로 길거리에서 자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고, 지나가는 낮선 행인에게도 문을 열어 주어 융숭하게 대접했다고 말했다 ⑾ 위선이나 외식에 대한 무죄주장(not guilty of hypocrisy; 33-37절) 욥은 다른 사람들은 죄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위선과 외식으로 자신을 숨기려고 노력하지만, 자기는 아무 것도 숨길 것이 없는 결백을 주장할 정도로 자신이 있었고, 대적들이 자기를 고소하는 그 앞으로 왕족의 태도처럼 위엄 있고 당당하게 걸어서 다가갈 정도로 결백하다고 자신의 무죄를 선언한다. ⑿ 마지막으로 거짓과 허위(虛僞), 사기행위에 대한 결백주장(Not guilty of fraud; 38-40절)이다. 욥은 일꾼들의 품삯을 주지 않은 채, 그 소산물을 독차지하는 탐욕의 죄를 범하지 않았고, 부자로써 남을 속이거나 사기를 치는 행위도 없었다고 결백을 주장한다.
한국의 국무총리 인선 때마다 ‘저 사람한테서는 어떤 먼지가 쏟아질까’ 청문회 보기가 겁이 난다. 국무총리청문회 때마다 부동산투기, 병역의혹, 위장전입, 논문표절, 황제특강 그리고 말도 신중하게 걸러서 할 줄 모르는 저질처신까지 레퍼토리가 항상 동일하니 나라를 염려하고 기도하는 목사로써 ‘우리 시대에 청백리가 없는 것’에 안타까울 뿐이다. 청백리(淸白吏)는 조선시대 청렴결백하고 관직수행 능력을 겸비한 관리를 호칭하는데, 조선시대엔 청백리가 무려 218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세종 때, 좌의정이었던 맹사성은 나라에서 주는 봉급만으로 생활한 청백리로, 비가 오면 집에 비가 새어 맹정승 부부는 빗물이 떨어지는 곳에 그릇을 갖다놓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중종, 인종, 명종 세 명의 임금을 모시고 38년 벼슬생활을 했던 박수량은 재물에 욕심이 없고 곧고 청렴했던 그가 세상을 떠나자 가족들이 장례 치를 비용이 없어 조정에서 장례비를 지급할 정도였는데, 그의 묘비에는 ‘삼정승 육판서까지 올랐지만 초가삼간조차 없었던 청렴한 선비’라고 쓰여 있다고 한다. 존경받는 청백리는 못 되도, 여의도 금배지들이 정직하게 땀 흘리는 국가대표선수만큼 만이라도 정직하게 되길 기도해야 할 것이다.
욥의 12가지 무죄와 결백주장은 욥이 노아, 다니엘과 함께 당당하게 구약의 삼대의인으로 선택될 자격이 있음을 보여준다. 선지자 에스겔은 겔 14: 14, 16, 18, 20절에서 네 번이나 욥을 노아, 다니엘과 함께 구약의 삼대의인으로 기록했다. 그렇다. 욥은 율법적으로 완전한 의인이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흠이 없는 사람, 점과 티가 없는 사람, 최고의 의인이었다. 하나님이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의인이라”고 칭찬하신 의인, 그래서 수억, 수십억의 사람들이 추종하는 어떤 종교교조나 종교창시자보다도 뛰어난 의인이었다.
욥은 당대에 완벽한 롤 모델의 남편이고, 완전한 기업가며, 대사업경영자고 뛰어난 신앙인이었다. 그 시대 최고의 맨토였고, 약점이나 부족함을 찾아볼 수 없는 의인이었으며,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그리고 자신을 향해서나 물질을 향해서 완전한 사람, 죄를 찾을 수 없는 의인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고난에 대하여, 죄 값이라는 친구들의 비난에 자신은 결백하다고 주장하며 당당하게 맞설 수 있었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욥 같은 의인은 오대양육대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2. 책망 받는 욥
이렇게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역사 최고봉에 태산거봉처럼 의인으로 우뚝 서있는 동방의 의인 욥, 도덕적으로나 율법의 의로는 흠잡을 데 없는 완전한 사람 욥이 두 번씩이나 죄인으로 혹독한 책망을 받는다. 첫 번째는 욥과 세 친구의 변론을 처음부터 끝까지 경청했던 람 족속, 부스사람 바라겔의 아들, 젊은 청년 엘리후에게 였고, 두 번째는 하나님께 였다.
욥과 세 친구의 논쟁이 기차철로처럼 끝이 없는 평행선처럼 지루하게 계속되자 마침내 네 번째 사람 엘리후가 참견하고 나선다. 욥기 32-37장은 질서정연한 엘리후의 논박인데, 32장에서는 자기 자신을 소개하고, 33장은 ‘고난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성급하게 판단한 욥을 책망하는 내용’이고, 34장은 ‘지나친 자기 의에 도취해 하나님을 비난한 욥을 책망한 내용’이며, 35장은 ‘욥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이 응답치 않은 원인’을 변론했고, 36장은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찬송’이며, 37장은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초자연적 광대무변한 능력을 설파한 후, 욥으로 하나님의 기묘한 일을 궁구할 것을 권면하면서 자기의 책망과 변박을 모두 마친다.
욥은 율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흠 잡을 데 없는 완전한 의인이었지만 자기 의에 빠져 하나님을 비난하다가 엘리후에게 책망을 받았다. 그렇다. 오늘날 지구촌의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의에 도취하고, 자기 의에 빠져 자기가 하나님이 되고, 자기스스로가 구원자가 되고,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것으로 착각하며 산다. 하나님 없이 자기 의로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욥처럼 도덕적으로 의롭게 살고, 착하게 살며, 남을 구제하고 불쌍히 여기는데 전 재산을 바치고 일평생을 바쳐 희생한다. 그러나 그것이 의인의 조건은 아니다. 그것이 구원의 조건도 아니다.
인간이 의인이 되는 길, 인간이 구원 받아 영생을 얻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길뿐이다.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다. 그래서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독선은 버려야 한다’는 말은 적그리스도의 말이고 거짓 선지자의 가르침이다. 그 말을 아무리 유명한 목사가 했더라도, 세계적인 신학자나 대부흥사가 했더라도, 그는 영혼들을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이다. 동방의 의인 욥의 최대실수는 자기 의에 빠져 하나님을 비난한 것이다. 여러분이 아무리 의롭고 착해도 유일무이한 의인 예수를 믿으므로 의인되는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두 번째는 욥기 38-41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직접 욥의 교만과 무지함을 책망하시고 회개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38: 1-3에서 하나님은 고난이 부당하다고 변박하는 욥에게(13; 2, 22, 23: 3-9) 폭풍 속에서 말씀하심으로 교훈을 시작하신다. 칼날 같은 예리한 논리로 욥을 책망하는 엘리후의 변박이 끝난 얼마 후, 갑자기 나무들을 부러뜨리고 집을 날려 보낼 것 같은 무시무시한 회오리폭풍(The whirlwind)이 미친 듯이 휘몰아쳐 온다. 그리고 그 거칠고 사나운 폭풍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온다. “무지(무식)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Who is this that darkens counsel by words without knowledge?)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하라(Gird up now your loins like a man, And I will ask you, and you answer Me!)...앞이 안 보이는 칠흑의 어둠 속, 미친 회오리광풍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두렵고 무서운 음성이었다.
그날 하나님은 ① 물질세계를 창조한 근원 ② 바다의 기원을 설명하심 ③ 밤과 낮의 창조에 대한 질문 ④ 그에 반해 시간과 공간적으로 제약을 받는 연약한고 작은 인간의 존재 ⑤ 광대무변한 하늘의 신비에 대한 설명을 시작으로(38장), 들짐승들과 맹금류 새들의 생태(39장)를 설명하신 후, 욥의 통치력이나 능력이 얼마나 왜소한지 깨닫게 하여 회개를 유도했지만 욥이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자(40: 5) ‘네가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간주한다면, 의롭다고 생각하는 네가 하나님처럼 행사해 보라’며 욥의 교만을 무섭게 책망하신다(40: 10-14) 그리고 거기서 대화를 끝내려던 하나님은 다시 하마와 악어 이야기를 통해 짐승보다 못한 욥의 어리석음과 교만을 책망하자, 마침내 욥은 자기 의 무지함과 교만을 회개한다.
캄캄한 바다 작은 조각배에서 횃불을 들고 있으면, 작은 빛 때문에 멀리 있는 등대 빛을 볼 수 없듯, 인간이 자기 의로움에 도취해 있으면 자기교만과 자기아집과 자기만족 때문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교만을 내려놓지 않는 한 구원의 길이 없다. 욥이 자기교만을 내려놓고 “내가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였습니다.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했고, 스스로 할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합니다”를 고백하자 비로써 하나님이 욥을 만나주시고, 영혼의 구원과 육신의 질병치료와 난마처럼 얽혔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모두 풀어주신 것처럼, 오늘 이 시간이 자신의 무지함과 자기 의의 교만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만나므로 모든 문제가 해결 받는 축복의 시간이 되기를 축원한다.
예수 믿는 사람 중엔 네 종류의 교인이 있다. ① 죄 안 짓고 실수나 실패도 하지 않아 깨끗하므로 교만한 사람 ② 죄를 짓고 실패했으면서도 자신을 속이고 교만한 사람 ③ 죄 짓고 실패하여 자기의 연약함을 뼈저리게 뉘우치고 회개하여 겸손한 사람 ④ 죄 안 짓고 실수도 없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겸손한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를 짓지 않고 교만하거나 죄를 짓고도 자기를 속이는 교만한 사람보다는 죄를 짓고 회개하므로 겸손한 사람과 죄를 짓지 않고도 겸손한 사람을 사랑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 안 짓고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완벽하므로 자기 의에 도취해 교만했던 욥을 책망하신 것이고, 살인죄와 간음죄를 저지르고 통곡하며 회개하므로 의로워진 다윗을 사랑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죄를 짓고 회개하여 겸손 하라는 말은 아니다. 죄를 범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은혜로 겸손한 성도가 되라는 말씀이다. 오늘 당신이 신앙생활을 잘 하므로 율법적인 의로 교만했던 욥보다는 죄를 짓고 실수하여 절망의 시궁창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회개하므로 용서받은 다윗처럼, 실수와 실패 중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함을 바라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3. 오늘 내가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기독교박해자요 살인마였던 바울은 은혜를 받고 변화 된 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It is no longer I who live, but Christ lives in me)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 20)고 고백했다. 그렇다. 지구촌의 거듭난 기독교인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죽은 자들’이다. 그리고 성도들이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중생한 성도들의 의로움은 자기들의 도덕적 의나 율법적인 의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모두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의이다.
나는 오늘, 욥이 살았던 구약시대에 살지 않음을 감사한다. 나는 구약의 그 많은 율법조항들을 기억할 지혜도 없거니와 기억한다 해도 욥처럼 지킬 능력이 없다. 솔직히 나는 욥처럼 완벽하게, 의롭게 살 자신이 없다. 그래서 욥처럼 ‘내가 언제?...내가 그리하였다면?’(If I did it?)이라고 내 의로움을 내세울 용기도 없다. 나뿐 아니라 우리 중 누구라도, 욥처럼 자신의 의를 담대하게 내세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의 죄 값으로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나 자신의 누더기 옷 같은 더러운 의를 덮어주고 새롭게 해줄 천만 배 수억만 배 뛰어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 공로를 통한 의가 있다.
오늘 나의 도덕적인 의가 물감으로 황금색을 칠한 그림이라면, 욥의 도덕적 의는 금가루로 도금한 그림일 정도로 내 의와 욥의 의는 비교할 수가 없다. 조족지혈이다. 그러나 우주의 창조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의는 억만 분지 일의 불의도 섞이지 않는 1,000% 10,000% 수억%의 완전한 정금자체이다. 그래서 욥의 고귀한 율법적 의와 도덕적 의도 예수님의 의로움에는 빛과 어둠처럼 비교가 안 된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를 따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의 피로 죄 용서함을 받아 의롭게 된 것은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은 예수님과 똑 같은 의인이 된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율법적 의인인 욥보다 더 뛰어난 의인이 된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예수님 때문에 욥보다 뛰어난 의인이 됐다.
그래서 오늘 나는 욥처럼 12가지로 자신의 무죄와 결백을 주장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보혈 때문에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갈 수 있다. 구약의 욥은 자신이 자기를 변명했지만, 오늘 우리는 보혜사 성령님이 변호사로 내 곁에 계셔서 나를 변호해주신다. 자신감에 넘쳤던 욥의 무죄선언과 결백주장은 도중에 실수하여 자기 교만에 빠졌다가 하나님의 책망을 들었지만, 우리의 무죄선언은 하나님의 신(神)이신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한 치의 실수가 없다. 누구보다 뛰어난 자기의 완전한 의로 교만했던 욥은 하나님의 질책과 책망을 들었지만, 먹보다 검고 머리털보다 더 많은 흉악한 죄를 자복하고 회개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만만하게 자기결백을 선언했던 동방의 의인 욥보다 뛰어난 의인이고 복을 받은 사람이다. 이 큰 은혜와 축복을 무엇으로 다 감사하며,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는가? ‘늘 울어도 눈물로써 다 갚을 수 없어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칠 뿐이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하나님 아버지를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예수님께 영광과 능력과 지혜와 찬양을 세세토록 돌리는 성도가 되길 축원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의롭게 하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신 예수님께 영광을 세세토록 올려드릴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고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을 우리를 대신해 죄를 삼으신 하나님께 영원토록, 영원토록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돌릴지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