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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05월25일 19시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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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기독교인의 몰락
얼마 전 두 기독교인이 몰락하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두 사람 다 장로이다. 개인적으로 교회 안에서는 존경을 받는 장로들이었다. 그리고 자식들에게는 모범적인 가장들이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한 사람은 부정축재로 입건되기 전에 자살을 택했고, 다른 한 사람은 국가 기밀을 누설한 죄와 국가를 배반하고 타국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롭게 하는 과오를 범해 입건되었다.
 
어째서,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던 장로들이 하루아침에 나라에 해악을 끼치는 괴물들이 되었을까? 이들의 몰락을 보면서 한국 기독교의 현주소를 보는 듯해서 가슴이 아프다. 왜냐하면 그들의 잘못은 결코 한 개인의 잘못이 아닌, 기독교인들의 총체적 도덕적 사회의식의 결여가 그들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한 때 한국교회는 복음적인 기치를 강조하기 위해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이라는 이분적인 구도로 나누어, 오직 복음만을 강조한 나머지 개인의 구원을 강조했다. 사회나 국가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데모하기에는 자신들의 내부 문제도 만만치 않게 산적되어 있었기에 바깥을 탓할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런데다 교회나 매 정권은 전통적인 정교분리의 원칙을 편리할 때마다 들고 나왔기에 한국사회는 서로 각자의 길을 걸었다. 그 결과 기독교인 개인은 자신의 구원만 해결되면 자신의 종교적인 의무를 다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장로는 그런 교회의 풍토가 낳은 비극이었다. 단돈 천원으로 약 2조원의 자산을 일군 한 장로는 그 동안 수많은 비자금을 만들어 정권에다 돈을 퍼 부었다. 그 결과 그는 정권의 힘을 이용해서 우량기업들도 여지없이 집어 삼켰다. 그리고 한국 굴지의 건설회사가 되었다. 심지어 그는 국회의원이 되어 금융계를 좌지우지했다. 담보 없이는 한 푼도 은행으로부터 빌릴 수 없는 자금도 그는 칠천 억 원의 신용담보로 자신의 기업을 키웠다고 한다. 그러나 탐욕의 끝은 배신이었다. 그 동안 뒤를 봐 주던 무리들에 의해 사정대상이 된 것이다. 그 결과 그는 목매어 자살하고 말았다.
 
다른 장로는 무기를 팔아 부자가 되었고, 불량무기를 군에 팔고, 또 연예계의 대부로 살았다. 두 얼굴을 가졌지만 그는 언제나 자상한 장로였고, 교회를 자신의 자금 세탁소로 삼았다. 그러나 도무지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몰랐다. 개처럼 돈을 벌어 하나님을 위해 정승처럼 돈을 써야 한다는 생각 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칸트의 말이 생각난다. “정말,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은 과정도 결과도 선한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두 장로는 오직 개인의 구원이 전부인줄 알고 교회생활을 했고, 또한 목사로부터 그렇게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편협한 구원 개념은 언제나 이렇게 시작한다. “먼저, 너 자신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나서 여유가 주어지면 이웃도 돌보아야 하고, 국가도 도와야 한다. 그 전에는 우선 너부터 복을 받아야 한다. 네가 건강해야 남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그러나 그 어떤 이도 자신의 구원을 완성하고 이웃을 돌아 본 일이 없음을 사람들은 왜 모르는가! 구원은 자신과 주변을 함께 완성시키는 것임을 기독교인들은 잊고 사는가 보다!

<김호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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