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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05월25일 14시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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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가 없는 세상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미국인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사위가 심방을 갔더니, 나이든 자신의 교인 한 분이 “요즈음 사람들은 컴퓨터나 핸드폰을 들고 하루 종일 생활하는데, 우리들은 사람을 쳐다보고 살았다”고 말 하더라는 것이다. 사람대신 기계가 모든 사람의 답변을 대신해 주니 참 편리한 세상이 온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을 쳐다 볼 이유가 사라진 사회가 되었다는 점이다.

유대인 종교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나와 너”(Ich und Du)라는 글을 써서 한 때 세상에 알려졌다. 그가 자신의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선 진정한 인격적인 신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도 없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다른 이웃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웃을 이용하려 들 때, 다른 존재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자신 역시 퇴락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곧 인간의 왜곡된 역사는 너라고 하는 존재를 단지 그것(it)으로 여길 때 파멸로 치달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너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간다. 가족이 유일한 대화의 상대지만, 이 또한 각자의 생활로 서로 얼굴보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아니 오히려 대화하는 방식을 잃어버려 자신의 아내나 남편마저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쑥스러워 하는 형편이 되었다. 신문과 TV가 모두의 말 문을 닫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컴퓨터나 핸드폰에 매달려 하루 종일을 산다. 그래도 카카오톡이나 메일을 서로 주고 받는다면 양호한 편이다. 아직도 기계를 통해서라도 너의 잔영과 대화라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삼십 년 전 독일 유학을 할 때였다. 하이델베르그대학 축제 때에 많은 학생들이 클럽에서 춤을 추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때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은 그 클럽에 모여 춤을 추는 학생들이 눈을 감고 홀로 춤을 추고 있었던 점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클럽에 가 본적이 없었으니 춤을 홀로 추는 사람들을 보고 놀란 것은 당연하다. 춤을 혼자 추는 이유를 들으니 소위 자기 삼매경에 도취되기 위해서 이란다. 자기 즐거움을 위해 더 이상 상대가 필요 없는 자기만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러한 이상한 세상에 산다.    

이제 사람들은 춤을 혼자 춘다. 상대방은 더 이상 파트너(partner)가 아니다. 이제 너는 단지 나의 참고 대상이거나 나를 위해 사는 그것(it)과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인간에 대한 대화는 오직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기만의 통로를 통해 가능하다. 설상가상으로 오늘날 경쟁사회에서 이웃은 더 이상 나의 친구가 아니다. 경쟁 대싱이자, 적이기도 하다. 문제는 내가 다른 이들에 의해 인격적인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든, 아니면 내가 다른 이를 단지 그것으로 취급하던 간에 분명한 사실은 내가 너의 존재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너 없는 나의 세상에서 오로지 자신만의 공간만을 점유하고서 쾌락을 느끼고 있다. 바로 너 없는 나만의 세상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마르틴 부버가 예언했던 것과 같이, 이로서 인간은 더 이상 땅에서 생존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김호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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