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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05월17일 22시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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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한마리를 먼저
선택이란 단어가 있다. 내가 원하는 특정적인 어떤 것을 택하는 것을 말한다. 선택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 아시는 소피의 선택이란 영화인데 나치수용소에서 나치병사들이 여주인공인 메릴스트립에게 그녀의 자식 둘 중 살리기를 원하는 자식 한 명을 하나를 선택하도록 명령했다. 어머니의 선택에 따라 두 아이 중 하나는 살게되고 다른 하나는 죽임을 당해야하는 것이었다. 아들과 딸 둘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해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찢기고도 남는 것이었다.

그런 충격적이고 비참한 선택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선택해야 할 일, 또는 선택 당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 얼마 전에 제가 아는 분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 목회자이신 이분이 설교를 부탁받아 열심히 준비했다. 설교하러 가야할 당일 아침 심각한 일이 발생했다. 새벽에 어느 분이 전화를 해서 자신이 아프다고 말했는데 저를 만나보러 오고싶다고 말해서 오시라고 했다. 당신을 만나러 다리를 몇 개씩 건너 운전하고 온 그분의 상태는 혼자 놔두고 설교하러 갈 수가 없어 보였다.

설교를 하기로 약속한 그분은 당황했다. 기도회에 참석한 분들을 생각했다. 그러나 담당자에게 전화를 해서 아침에 있을 기도회에 참석못할 사정과 설교를 못할 이유를 말하고 양해를 구하고 예배에 참석하지도 못했다. 당연히 설교도 하지 못했다. 멀리서 죽음과 같은 고통을 무릅쓰고 자신을 찾아온 그분과 같이 이틀을 지나면서 많은 일이 있었다. 그분의 상태가 나아져서 그를 데리러 온 분과 같이 집으로 돌아갔다. 그 분은 아픈 것을 무릅쓰고 도움을 찾아왔었다.

손을 내미는 사람에게는 펴는 대신 밀어내지 말아야 한다. 저에게 이 말을 들려준 분을 생각했다. 그분이 그날 아침 당황했을 마음을 생각해보았다. 자신을 믿고 도움을 받아 멀리서 찾아 온 분을 놔두고 나갈 수 없었던 그 목회자의 심정을 생각했는데 설교를 약속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어떻게 해야하나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에는 자신의 도움을 받으러 온 최악의 절망상태에 빠져있는 분, 또 한편에는 그가 와서 설교를 할 것으로 알고 기다리는 분들을 생각하면서 진퇴양난의 입장에서 영화의 장면같이 한 결단을 내렸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 아픈 한 사람을 위하여 그날의 설교를 포기한 것이다.

한 마리의 아프고 상처받은 양 때문에 99마리 양떼를 놔두고 떠날 수 밖에 없었던 목자를 생각해 보았다. 먼길 가다가 강도만나 부상당한 사람을 보고 가던 길을 멈추고 환자를 여관에 데려다 놓고 다시 올 것을 약속하며 계속하여 잘 돌봐주기를 부탁하고 떠난 선한 사마리아인도 생각했다. 성경은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기어이 찾아 함께 즐거워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양은 어디선가 낭떠러지에 떨어지지않고 살아 주님에게 발견되었다. 필자가 좋아하는 성화가 있다. 주님이 양을 구한 다음 어께에 메고 가는 그림이다. 발견되어 구조된 양은 목자의 품에 안겨 우리에 들어가서 목자의 치료를 받을 것이고 상처가 아물 때까지 양우리에서 목자의 돌봄을 받았을 것이다.

인간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도움이 가장 필요한 때는 생명이 경각에 달린 위험한 환자일 때이다. 병원 응급실이 바쁜 이유는 응급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이 오는 곳이기 때문인데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보다 더 급한 응급환자가 오면 그에게 주의가 집중된다. 예를 들어 다리에 부상을 입은 환자가 응급실에서 치료 중인데 머리에 총상을 입고 출혈이 심한 상태로 앰부란스에 실려온 사람이 있으면 그가 먼저 치료받아야 할 환자인 것이다. 증상이 심각한 환자가 당연히 먼저 치료를 받는다.

만일 길에서 행인이 심장발작이 일어나 쓰러지면 당장 심페소생술을 시행해야 한다. 병실에서 환자에게 갑자기 응급문제가 발생하면 코드불루(code blue)를 방송하면 의사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 병실로 뛰어가서 속히 응급조치를 취해서 환자를 살린다. 당장 치료를 받아야할 사람에게 당신의 차례를 기다리라고 말할 수 없다. 치료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증상이 심한 사람의 치료를 위하여 의사의 바른 판단력과 통찰력, 현실감의 이해가 필요하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떤 치료방법을 먼저 사용해야 할지를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의사로서 상식적인 일이고 당연한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고 말끝마다 시비걸고, 배반하고 결국은 십자가 죽음까지 지게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이 자기들과 같이 행동하고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이 찾는 정치지도자, 현실의 이스라엘을 로마통치의 압제에서 구할 사람으로 생각하고 찾았다고 열광했지만 예수님이 자기네들이 찾던 나라를 구할 독립운동가, 정치가가 아닌 것을 알고 실망하고 배반했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을 이간질하고 미워하는 악한 마음이 일도록 충동하여 그를 죽음에 몰고 갔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의견에 동조하는 집단에 소속하고, 그런 집단을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 자기 그룹을 만든다. 그러나 꼭 그 의견들에 동조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특정 구릅들의 어떤 생각이나 행동, 방법이나 의견들이 다 옳거나 받아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할 이유가 있으면 본인이 한 선택이 어떤 이유였는지 알아야 한다. 왜 그것을 선택했는지 이유를 알고 있을뿐 아니라 잘못된 선택에 대한 결과는 틀린 것일 수밖에 없으므로 자신이 한 선택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비판할 수 있는 안목도 가져야 한다.

국민학교 1년생들이 반장을 선출할 때도 학생들이 선택을 잘해야 일 잘하는 반장이 선출되는 것이다. 어려서 어머니의 치맛바람으로 반장이 된 분이 있었다. 별로 반장감이 아니었던 이 분은 필자를 만나서도 어머니를 원망하고 자신이 창피하고 불편했었다고 말했다. 판단이나 선택은 본인이 정할 것이다. 반장이 되는 것은 멋있고 자랑스러운 것이지만 반장으로의 성숙한 통솔력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알아야 한다. 그 청년은 반장으로 선출이 안되었다면 자신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지 않은채 그런대로 평범하게 살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거나 도와줘야 할 사람들이 주위에 있고 그들에게 무엇이 먼저 필요한지는 안다. 필자는 몸과 마음과 영혼이 상처받고 아픈 사람이 먼저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분들의 고통이 심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옆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주위를 돌아보아야 한다. 도울 수 있으면 돕고 우선 무엇을 도와줄가를 찾아야 하며 급하고 당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먼저 도움이 가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우선적인 선택이다. 당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내 앞에 있는데 이득 될 일이 없다고 피하면 크리스천이 아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보다 먼저 환자를 쳐다본 길가던 두 나그네 같이 흘낏 보고만 지나갈 수는 없는 것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서 먼저 상처난 곳에 응급조치를 취한 후 여관으로 데려와 계속적인 치료를 받게해야 한다. 그 환자가 완쾌될 때까지 도와주어야 온전한 치료이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인은 자기가 가던 길에서 일단 정지하고 급한 먼저 사람을 도왔다. 그는 그에게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주님이 말한 이웃사랑이고 주님이 말한 잃은 양 한마리의 비유라고 생각한다. 아픈 사람들을 대할 때 우리의 마음도 같이 아프고 고통을 나누어야 한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께서 제자 요한에게 너의 어머니다 라고 어머니를 부탁하신 주님, 성문 밖을 보면서 눈물흘린 주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필자가 최근에 알고 관심을 가졌던 두 분이 이 세상을 떠난 소식을 들었다. 한 사람은 우울증으로 인해 만나고 상담도 했었던 분이다. 우울증 증상이 너무 심해서 걱정을 하고 정신과 전문기관에서 전문치료를 받도록 말했는데 필자가 잠시 아픈 동안 상태가 급작히 나빠져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또 한분은 본인이 오랫동안 알던 분으로 젊었을때 상냥하고 자신의 교회도 잘 출석하고 열심히 봉사도 했던 분이다. 언젠가부터 아프기 시작했는데 필자의 친구목사님을 잘 따랐다. 널싱홈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으며 한동안 소식이 뜸했었는데 얼마전에 그분이 돌아가셨다.

필자는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괴롭다. “조금만 더 열심히 돌보아주고 관심을 가졌다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조금만 더 참고, 더 잘해주고, 조금 더 도와주었더라면, 지금 쯤은 많이 좋아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나를 만나서 늘 하던대로 목사님하고 웃었을 것인데 “조금만 더” 를 못했다는 사실이 나를 후회하게 한다.

어느 목사님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요새 왜 많은 목회자 가족들이 세상을 떠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주님을 만나러 갈 날을 알고 준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최소한도 우리가 “조금만 더”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다. 그러면 최소한도 이유없는 아까운 희생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얼마전 저희 교단 총회사무실에서 회원교회들에게 네팔지진 재난에 대하여 편지가 왔다. 그래서 그곳으로 구호금을 보냈다. 각 나라에서, 저의 교단 등에서 신속하게 구호물품과 의사등 의료구제팀을 보내 도운 것을 안다. 우선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조금 더 일찍, 조금만 더를 했기 때문에 한 생명이라도 누구 한 사람이라도 더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주위에 널려있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보면서 “조금만 더”를 하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생각난다. 내 생각과 맞지 않더라도 너그러운 마음과 양보는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저와 같이 며칠을 지내신 분이 상태가 좋아져서 집으로 갔는데 잘 도착했다고 소식을 전해 오셨다. 자다가 일어나는 일도 없이 잠을 잘 잤다고 하고 오랫만에 미역국으로 아침밥도 먹었다고 했다.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필자가 준비한 설교는 언제가 기회가 있을 때 사용하려고 한다. 사랑하는 분들에게 설교를 못해서 죄송하지만 용서해 주실 것으로 믿는다. 오랫동안 고통받았던 한 분이 마음에 평화를 얻었다니 더 이상의 보상이 어디있겠는가. (끝)

김금옥 목사(에버그린장로교회 담임/정신신경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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