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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04월26일 09시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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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옆집으로 이사하는 것
최근 본인이 소속한 교단 원로목사님께서 소천하셨다. 오랫동안 아프시다가 돌아가셨는데 필자에게 이 소식을 전하면서 사모님이 며칠 전에 남편목사님과 나눈 대화내용을 말해주었다. “나는 뻐스타고 먼저 가는데 당신 뻐스 값 있어?” 하면서 “우리 같이 갈까?” 하는 등 말했다고 한다. 그분이 부활주일 새벽에 주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두분은 같은 교회에서 만나 결혼하고 도미하여 성실히 살아오셨다. 두분이 의가 참 좋으셨는데 목사님께서 먼저 가신 것이다. 장례예배에 오신 가족과 같이 목사님에 대한 기억을 말하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하며 기억을 나눴다. 나눌수있는 기억을 가진다는 것을 좋은 것이다.

최근 영국에서 한 소녀가 조로증으로 십대의 나이지만 100살 노인의 모습을 한 채 사망했다. 그 소녀는 죽음을 앞두고 주위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마치 옆집으로 이사가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오히려 가족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죽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죽음을 대하나? 죽으면 어떻게 되나? 등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또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번씩은 생각하는 질문들이다. 알다시피 죽음은 그렇게 간단히 생각할 것은 아니다. 죽음에 대하여 어떤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죽음을 대할 것인지가 우리가 생각할 요점이다.

사람들은 언제 죽음을 느끼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시작한다고 생각할까? 20대는 공부하고 일하고 결혼하고 애를 낳아키우며 학교보내고, 자식들 결혼시키면 자신들이 어느덧 할아버지/할머니가 된다. 세상의 움직임도 살펴보고, 사회의 옳고 그름에 대한 비판도 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기는 나이가 되면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사람들은 어느날 자신이 60의 나이가 되고 70이 넘는 것을 지켜보면서 갑자기 자기 삶이 다했다는 생각과 더불어 손을 놓고 자신의 삶을 정리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때가 있다. 이때 사람들은 대개 마지막이 왔다고 생각하여 손을 놓거나 아니면 더 늦기 전에 과거에 생각했던 새로운 무엇인가를 하려고 서두르기도 한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어느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어느날 갑자기 자신이 70살이 넘은 것을 깨달았다. 죽는 것밖에 안남은 나는 이제 인생이 끝났구나 라는 생각이 엄습하면서 자신이 없어지고 막연히 불안해졌다. 이제 잠들면 그것으로 마지막이 되어 깨어나지 못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잠자리에 들기가 두려워졌다고 말했다. 졸려서 잠은 자야겠는데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 그가 70세를 넘기면서 포기하고 놓다시피한 일들을 다시 시작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게됬는지 물어보았더니 그의 걱정과는 달리 자신에게 아무일도 일어나지도 않은 것과 그의 담당의사가 건강은 전보다 더 좋아졌다면서 “하고 싶은 것 다 하세요”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직도 무엇인가 할수있다는 자신감이 생겨 생전에 하고자 했던 계획, 포기했던 일들이 생각나서 행동으로 옮기는 중이라고 말했다. 죽는다는 것은 언젠가는 오겠지만 그것 때문에 자신을 포기할 수는 없다면서 지금은 예전과 같이 잠도 잘 자고 자주 눕지만 더이상 불안하거나 두렵지않다고 말한다.

퀴불로로스라는 스위스 태생의 정신의학자가 한 말이다. “인간은 실제로 죽는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시간이 빠를수록 보다일찍 참으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현실 속에서 깨닫고 정직하게 받아드리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필히 오는 삶의 마지막 순간과 긍정적으로 대면할수있다면 질병으로 고생하고 죽음을 앞에 두고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치료를 받고자하는 마음이 생긴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서 이기면 자신감을 회복할수도 있다. 이 세상에서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다른 삶으로 연결되는 삶도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마치 옆집으로 이사가는 것과 같다고 말한 어린 소녀의 단순하고 쉬운 이해와 같이 죽음은 그런것이다.

사도바울은 죽음을 “이 세상을 떠나 본향으로 간다는. depart” 라고 말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삶은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무엇을 하던 최선을 다 할때가 아름다운 것이다. 인간은 해 낼수있는 내적인 힘과 자원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로스박사와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되고 자기에 대한 믿음과 여기서 오는 평안함을 가질수있기를 바란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진행하다 미쳐 다하지못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전승시킬수있고 어느날 두려움없이 명랑하게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다. 영국소녀가 말한 것같이 다른 나라로 이사가는 것이다.

크리스천은 두려움이 없이 마지막을 맞는다.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그리스도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지내기위하여 떠나는 여행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에서의 마지막인 이 여행을 크리스천들은 위로와 기쁨으로 받아드린다. 그래서 고통이나 슬픔도 두려움도 극복되는 것이다. 

필자의 남편이 마지막 수년을 널싱홈에서 입원치료를 받았다. 병원이 크기 때문에 하루 한번씩 각자의 병동에서 예배를 드렸는대 그날도 점심을 먹고 오후에 예배를 드리기위하여 wheel chair에 앉아 예배실에서 모두와 같이 예배시작을 기다리는 중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가장 복받은 사람이었다고 지금도 확신한다. 

순교를 앞에 두었던 사도 바울은 그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닥아올 죽음을 기다리고 있은지를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수가 되었고 사형선고를 받아 얼마안있어 순교를 당할 형편에 놓여있었을 때였는데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다”고 말하며 자신의 죽음을 떠나는 것으로 말했다. 바울에게 있어 “죽는다는 것은 집으로 떠날때가 가까워 온 것”으로 말한다. 이것이 기도교인과 불신자 또는 비기독교인과의 차이인 것으로 기독교인에게 있어 자기가 살던 세상에서의 죽음은 “주님이 계신 집으로 떠나는 때”인 것일 뿐이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죽을 날이 가까워왔음을 알고 준비한 것 같다. 이제 그의 사역은 끝이났고 그의 개인적 구원도 예수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졌으므로 주와 만났을 때 그의 사역의 모든 것을 아는 주님과 주의 종으로서 결산을 기다릴 것이었다. 그것을 알기때문에 사도바울은 주님을 만났을 때를 축복된 것으로 생각하고 기대하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도바울은 죽음은 이세상을 떠나는 것이고 그에게 일을 맡긴 주인에게 가서 의의 면류관을 받는 날인 것을 알기 때문에 그는 죽음을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두려워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사모하고 기대했다. 그런 그의 믿음과 만남에 대한 확신이 순교의 공포를 극복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이세상을 떠난다는 그날은 낙원으로 승천하는 날이고 기쁨과 영광의 날인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죽은 후에 어떻게 되어지 알기때문에 불안이나 두려움없이 오히려 냉정과 고요함 속에서 그시간을 기다릴수 있다.

여기 최소의 평안도 없이 불안과 두려움, 공포속에서 억울하게 강제로 세상을 떠난 분들이 있다. 이들은 나치 수용소에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이다. 수백만의 유대인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수용소에서 말로 표현할수없는 악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다. 한인을 비롯한 아시아의 정신대 여성들이다. 강제로 끌려가서 비참한 방법으로 성적으로 신체적으로 학대받고, 전쟁이 끝나도 수치감으로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 사실은 필자가 본인의 교단(PCUSA) 총회에서 뉴욕시노회에서 제출한 한인정신대여성에 대한 헌의안에 대하여 당시 총회여성목회부의 대표로서 보고하기로 되어 있었다. 총회바로 전에 대표로 선정되었다는 말을 듣고 수많은 재료를 한국정신대협회에서 가져와서 읽었다. 그 보고서에는 많은 여성들이 절벽에서 뛰어 내려 삶을 마감했다고 한다. 세월호 배속에서 구제되지못한 학생들의 죽음, 모욕과 구타등으로 맞아죽은 윤일병등 억울한 죽음을 당한 모두에게 영원한 주님의 평안과 위로가 있기를 바란다.

여기에 사도 바울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을 다시한번 생각하자. 바울은 그의 마지막, 떠날 날을 준비함으로 기다리고 있었고 고대하고 있었다. 디모데후서 4:6b-8의 내용이다. “이제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됬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당연히 두려울 수 있다. 사람들이 죽음에 대하여 준비하고 않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맞을 수도 있고 준비했는 대로 불편한 마음으로 삶의 마지막을 보내는 분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누가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생의 마지막을 정리할까 생각해 볼 수 있다.

살아오는 생애를 뒤돌아 보아서 기억이 될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거나, 후회될 일을 했거나, 자랑스럽지 않은 일을 한 과거가 있다면 그런 분들은 죽음이 가까워지는데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수 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나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도 죽음에 대한 불안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살아가면서 발생하는 갈등이나 상처들은 될 수 있으면 살아생전에 해결되어 평안을 가진채로 삶의 마지막을 살아나가는 것이 좋다. 늦었지만 칭찬받을 어떤 일을 해보는 것도 좋은 일 아닌가?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삶에 있어서 큰 갈등없이 대체적으로 원만한 삶을 살았다거나 후회할 일이 없이 살았다면 죽음을 대면하여 좀더 성숙한 모습을 보일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마지막으로 마주해야 하는 것이 죽음이다. 두려움이 없이 마주할 수 있고 마음 속에서 다가오는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 같이, 또 영국의 소녀가 말했던 것같이 옆집으로 이사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죽음을 간단하고 쉽게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바울 선생같이 자신의 떠나는 것을 준비하고 기다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이 세상의 하직이 영원한 끝남이나 사라짐이 아닌 새로운 또 하나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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