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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04월12일 17시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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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요 20: 24-29      4. 12. 15

내 차(車)의 번호판(Plate Number)은 ‘3 Elijah’이고, 집사람 차 Plate Number는 ‘1 Pslms’이다. Elijah(엘리야)는 “Jah is God”(“야훼는 하나님”)이란 뜻인데 ‘3 엘리야’(3 Elijah)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는 의미에서 붙인 번호판이고, 집사람의 ‘1 Pslms’은 문자 그대로 시편 1편을 의미한다. Maryland(메릴랜드) 자동차 번호판은 A나 B나 C 다음에 123456의 여섯 숫자를 붙이거나 상하로 AB나 AG를 쓰고 다음에 1234의 네 숫자를 붙이거나, 여섯 글자 번호판의 앞에 세 글자는 영어 알파벳 뒤에 세 글자는 로마 숫자를 붙이는 것이 상례인데, 우리 부부는 차량면허국에 요청해서 우리가 선호하는 문구를 넣었다. 운전을 하다보면 우리 뿐 아니라 자동차 번호판을 자기들이 좋아하는 문구를 넣은 차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미국 50개주 가운데 자동차 번호판에 자기가 원하는 문구를 넣은 사람이 가장 많은 주가 버지니아라고 한다.

참고로 최근 정부, 센서스, 민간 연구소가 50개주의 각종 통계를 바탕으로, 인터넷 스릴리스트(Thrill-list)가 발표한 ‘주별 베스트 1’(주별 최고기록)을 몇 가지 소개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메릴랜드는 사망사고가 가장 적은 주이고, 이웃 펜실베이니아는 50주중 카지노 세수가 가장 높은 주이며(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는 2012년 카지노에서 8억 9천만 달러를 세금으로 거둬들였는데 펜실베이니아는 15억 달러의 세금을 거둬들임) 뉴욕은 가장 높은 임금을 받는 주, 캘리포니아는 모유 수유를 가장 많이 하는 주(2011년 통계에 따르면 신생아중 92.8%가 모유를 받았는데 이것은 전국 평균 79.2%보다 10%이상 높은 것이다)라고 한다.

그 외에도 텍사스는 풍력발전 시설이 가장 많은 주, 아칸소는 47.9%의 가정에서 애완견을 키우고 있어서 애완견 주가 됐고, 몬태나는 고양이의 평균수명이 가장 긴 주, 오클라호마는 인공호수가 가장 많은 주, 미주리는 가장 훌륭한 산책로를 보유한 주,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사람들이 가장 친절한 주, 사우스다코타는 기후 생활면에서 은퇴 후 가장 살기 좋은 주, 캔자스는 10대의 자원봉사 참여가 제일 높은 주, 메인은 범죄율이 가장 낮은 주, 버몬트는 야외활동이 제일 높은 주, 매사추세츠는 교통사고 사망자 수가 가장 적은 주, 아이다호는 물가가 가장 저렴한 주, 아이오와는 50개 주중 이혼지수가 가장 낮은 주(인구 1000명당 2.4) 코네티컷은 쌍둥이 주로 알려졌는데, 이것은 1980년부터 2009년까지 30년간 신생아 1000명 중 무려 45.9명이 쌍둥이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칠 남매 자녀라도 그들이 어느 지방의 중, 고등 대학교를 다니고, 어떤 교육을 받으며, 어떤 사람을 만나 결혼했느냐에 따라 10년 20년 30년 후, 성격과 좋아하는 음식과 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이들의 운명까지 모두 달라지듯이 똑 같은 미국이라도 주마다 도시마다 특성이 다르고, 똑 같은 교회라도 교회가 있는 지방 따라, 교회를 섬기는 목사 따라 그리고 함께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따라서 우리가 받는 말씀의 축복, 믿음의 축복, 물질과 영적인 축복이 모두 다르다. 한 솥 밥을 먹던 어렸을 때는 형제자매의 입맛이 비슷하고 취향도 비슷했었지만 20년 30년 후 헤어졌다가 만났을 땐 음식의 취향도 성격도 모두 바뀌듯 영적으로도 내가 듣는 말씀 따라 신앙의 색깔과 축복의 색깔이 달라진다. 올바른 말씀 안에서 건강한 믿음, 건강한 축복, 건강한 삶의 축복이 있기를 축원한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1. 안식 후 첫날, 저녁 때(19절)

요한 20: 19-23절에서 예수님이 도마가 빠진 열 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12번 나타나신 사건 중에서 다섯 번째 현현사건이고, 도마를 포함한 열한 명 제자에게 나타나신 본문 24-29절은 여섯 번째 현현 사건기록이다. 19절의 안식 후 첫날 저녁때(The same day at evening, being the first day of the week)와 26절의 여드레를 지나서(After eight days)는 문자 그대로 토요일 안식일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주일(Lord's Day)을 가리킨다.

이렇게 예수님이 주일에 사도들에게 나타나신 사건 이후, 사도들은 토요일 안식일보다 안식 후 첫날인 주의 날을 중시했고(고전 16: 2) 사도요한도 주의 날에 밧모섬에서 혼자 예배를 드리다가 계시를 받아 묵시록을 기록했으며(계 1; 10) 초대 교부들도 초대교회가 주의 날에 예배와 친교를 가졌다는 것을 여러 문헌에 남겼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더 이상 토요일 안식일이 시간적 구속력을 강요하는 율법적 멍에가 아니라는 사상이 보편화돼 있었다. 초대교회는 안식일 기본정신은 폐기하지 않으면서 ‘안식 후 첫날’을 더 중요시 여겼는데 그러한 정통신앙은 2000년 동안 흔들림이 없이 성도들에게 지켜지고 있다.

그런데 요즘 ‘토요 안식일 정통성’을 주장하며 주일을 지키는 성도들을 지옥의 자식들처럼 매도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성도들의 신앙을 동요케 하고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처하는 이단의 소리요 마귀의 소리이다. 바울은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갈 5: 10)고 했다. 신앙을 흔드는 이단과 사설에 미혹되거나 빠지는 일이 없기를 축원한다.

종말시대성도들이 간직해야할 안식일에 대한 올바른 성경의 가르침 몇 가지를 소개한다. ⑴ 구약의 토요일 안식일을 성경대로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경대로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려면 ① 밭을 갈거나 곡식을 거두는 일을 하지 말라(출 34; 21) ② 솜틀을 밟거나 물건을 실어 운반하지 말라(느 13; 15, 렘 17: 21) ③ 나무하지 말라(민 15: 33) ④ 물건을 사고파는 장사를 하지 말라(암 8: 5) ⑤ 불을 피워 음식을 만들지 말라(출 16; 23) ⑥ 안식일은 2,000큐빗(1,212야드, 약 1km) 이상 가지 말라(행 1: 12, 출 16: 29) ⑦ 오락을 구하지 말고 사사로운 말도 하지 말라(사 58: 13-14)를 지켜야 하는데 이것을 그대로 지키는 사람이나 지킬 사람은 아무도 없다.

⑵ 안식교의 주장대로라면 예수님은 안식일을 범한 죄인이다(이것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죽인 이유 중 하나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① 성경을 읽고 설교함(눅 4: 16-30, 막 1; 1-6) ②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침(요 5: 5-15) ③ 가버나움에서 귀신들린 자 치료(막 1; 21, 27, 눅 4; 33-37) ④ 베드로 장모 열병을 치료함(마 8: 14-15, 막 1; 29-32) ⑤ 밀 이삭을 잘라 먹음(마 12; 1-8, 막 2: 23-28, 눅 6: 1-5) ⑥ 소경의 눈을 뜨게 함(요 9: 1-16) ⑦ 18년 된 꼽추 여인을 고쳐줌(눅 13: 10-17) ⑧ 심장결함이나 신장이 병들어 얼굴이 붓고 팔다리도 부으며 살갗이 물러지는 고창병 들린 자를 고쳐줌(눅 14: 1-16)등의 일을 했다.

⑶ 세계의 날자와 시간이 일치하지 않는다. 워싱턴의 4월 12일 주일 오전 10시 53분이 서울은 13시간이 빠른 12일 밤 11시 53분이고, 미얀마의 양곤은 10시간 30분이 빠른 오후 9시 53분이며, 네팔의 카트만두는 9시간 45분이 빠른 저녁 8시 38분이다. 한나라인 미국에서도 동부 중부 서부시간이 다르다. 그렇다면 어디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정확한 것인가? 그래서 토요안식일을 주장하는 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 

⑷ 일주일의 첫 날인 주일을 지키는 것은 안식일의 주인인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한다. 토요일 안식일성수가 성부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라면, 주일 성수는 성자하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날로 천지창조와 출애굽보다 더 큰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래서 제 7일 토요일이 천지창조의 기념일이라면 제 1일인 주일은 신천지의 시작을 기념하는 일이다. 그리고 성경대로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기 때문에(막 2; 28) 첫째 날을 주일로 정할 권한이 있고(시 118: 240 타락한 세상을 구속한 역사적인 구속주요 구세주이기 때문에도 절대적인 권한이 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부활 후 토요일이 아니라 주일인 첫날에 두 번이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요 20: 19, 26) 주의 날에 사도요한에게도 나타나셨으며(계 1: 10) 그 주인이 날짜를 바꾸는데 누가 이의를 제기하는가?

⑸ 주일인 첫 날을 지키는 것은 초대교회 사도들과 속사도 그리고 교부들의 행적에 근거한다(행 20: 7, 고전 16: 2) 여기서 두 번 모두 다 설교를 했고 떡을 떼며 성찬식을 했었으니 초대교회가 주일날 주님을 경배하고 예배를 드린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바울이 안디옥 회당에서 안식일에 설교한 것(행 13; 14)과 빌립보에서 안식일에 기도처를 찾은 것(행 16: 13)과 안식일에 데살로니가 회당에서 성경을 강론한 것(행 17: 1-2)은 토요 안식일성수를 주장하는 이들의 말처럼 바울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회당에 모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⑹ 사도요 대 신학자인 바울은 토요일이나 주일이나 날짜에 매이지 말고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해서 지키라고 권면하고 있다(롬 14: 5-6, 골 2: 16-17) 그렇다.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율법주의를 떠나 그날이 주일이든 월요일이든, 일주일의 한 날을 정하여 안식일의 주인이요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예배하고 섬길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부활하신 주님의 날을 성수하는 것이 최선이다. 주일을 성수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2. 주일 하루의 중요성

본문은 주일 하루가 성도들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일주일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 부활의 몸을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일찍이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당할 때 뿔뿔이 흩어져 제각기 도망을 갔었다(마 26: 56) 그래서 제자들은 위험한 선동자의 추종자들로 혐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숨어서 은신하고 있다가 서로 연락을 취해 비밀리에 모였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 산헤드린의 군사들이 체포하러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유대인들을 두려워해 모인 곳에 문들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있었는데(19절) 예수님께서 유령처럼 그들에게 나타나 Peace be with you!(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시면서 못 자국이 난 손과 창 자국이 난 옆구리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이 주신 평강과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몸을 보고 담대한 마음을 갖게 된다.

그래서 일주일 후 다시 모인 주일예배 모임 때에는 일주일 전처럼 모였던 장소의 문들을 걸어 잠그질 않았다(26절) 뿐만 아니라 열 명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의 몸을 본 이야기로 흥분돼 있었고 기쁨과 흥분으로 충만했다. 그러나 한 사람 도마는 예외였다. 도마는 “나는 예수님 손의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한다. 다른 제자들은 일주일 전 주일예배에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보았지만 그 예배에 불참했던 도마는 그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것이 주일 하루의 중요성이요, 주일예배 한 번의 중요성이다. 나에게 내가 성령을 받고 방언을 했던 1961년 1월 19일 주일이 없었다면, 그리고 담임목사님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If You can! All things are possible to him who believes; 막 9: 23)를 설교하신 1962년 봄 어느 주일이 없었다면, 그리고 1959년 5월에서 1968년 5월까지 평신도시절의 450여 번의 주일과 47-8년 동안의 목회에서 2,400여 번의 주일들이 없었다면, 나의 존재와 삶은 짐승보다 못한 지옥의 삶, 죄인 중의 죄인으로의 삶이었을 것이다. 3,000여 번을 지켜온 지난 세월 동안의 주일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축복의 원천이다.

무엇보다 1961년 1월 19일, 여섯 시간을 부르짖고 기도해 성령을 받은 것이 내가 먼저 주님 앞에 서거나 주님이 다시 오셔서 내가 주님을 맞을 때까지, 주님을 닮아가는 목사와 1,000번의 성경통독을 꿈꾸며 말씀의 저 끝까지의 비밀들을 깨달아 알고 성령으로 충만해 그 복음을 전하는 21세기 역사와 세계를 받은 목사를 꿈꾸고 도전하는 목사가 되게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1962년 봄 어느 주일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도전을 받고 태생적으로 말을 더듬고 부끄럼 잘 타는 어눌한 내가 1년 8개월 동안 설교를 연습한 것이 50여 년을 설교하는 목사가 되게 했다.

내가 주일날 식구들과 놀러가는 그 시간에, 내가 주일날 돈 버는 일을 놓지 못해 일하는 그 시간에, 내가 주일날 피곤한 몸을 쉬기 위해 잠자는 그 시간에, 내가 주일날 도마처럼 다른 일로 예배에 불참하는 그 시간에, 내가 주일날 파티 때문에, 스포츠 때문에, 다른 약속 때문에, 장사 때문에...주일예배를 빠지는 그 시간에, 주님은 다른 사람을 만나시고 은혜를 주시며 질병을 치료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며 신령한 축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주일을 성수하는 성도를 “야훼하나님과 연합하는 복 있는 자들”(사 56: 1-8)이라 선포하시며, 내가 그들을 “나와 연합하여 나를 섬기는 자, 나 야훼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는 자, 주일을 더럽히지 않는 자,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자”로 인정하고 “내가 그를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고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을 것이며, 대환난의 날에 그들을 모아 ‘마지막 남은 자’(Remnant)의 축복을 주겠다”고 했다. 만일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주일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면 저 위대한 하늘의 비밀과 엄청난 종말의 비밀이 기록된 요한계시록은 없었을 것이다. 주일예배를 드린 다른 사람에게 그 축복이 옮겨졌을 것이다. 

주일은 바로 그런 날이다. 주일을 성수하는 자들은 바로 그런 축복을 받을 자들이다. 그러나 주일을 가볍게 생각하는 자, 주일을 쉽게 범하고 주일예배를 소홀히 생각해 아무 부담 느끼지 않고 빠지는 자들에겐 안타깝지만 그런 축복에서 제외된다. 주일예배에 빠짐으로 도마처럼 의심의 사람으로 남지 않고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고 말씀으로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3. 믿는 자가 되라!

이번에는 도마를 포함한 열한 제자가 모여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 Peace be with you!(“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시고 죄송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도마를 찾아가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만져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Reach here your finger, and see My hands, and reach here your hand, and put it into My side)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And be not unbelieving, but Believing)” 말씀하셨다.

믿음 없는 자(Faithless, Unbelieving)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피스토스는 “믿지 않는 사람”, “그리스도 교인이 아닌 사람”을 가리킨다(고전 6: 6, 14: 22, 고후 4: 4) 그렇다. 믿음 없는 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엄밀하게 말해서 참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 안에도 믿음 없는 자, 참 기독교인이 아닌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사람들이 집사 권사 장로 목사가 되고 주일학교 교사, 찬양대원이 됐으니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예수복음을 가리고 있다. 교회 안에 부활신앙을 갖고 있는 성도가 많다면 오늘날 교회 안에 사기꾼, 교만한 자, 세상 사람보다 더럽고 지저분하며 악하고 교활한 자들이 없을 것이고, 세상이 비웃고 조롱하는 개독교가 되지 않았을 것이며,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적었을 것이다.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에서 ‘되다’의 헬라어 기누는 “자신을 보인다”는 뜻이다(고전 15: 58, 골 3;15, 살전 1: 5, 2: 7) 그래서 “믿는 자가 되라”는 말은 “네 믿음을 보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부활신앙을 예수님께 보이는 성도, 부활신앙 때문에 모든 고난을 참고 인내하는 성도, 부활신앙 때문에 죽도록 충성하는 성도가 되라는 말이다. 자신의 부활을 위해서 날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성도, 모든 이단 사상과 신앙을 떠나는 성도, 영적간음과 육신의 간음을 떠나는 성도, 죽게 된 신앙을 굳게 하고 흰옷 세마포를 입는 성도,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의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성도, 열심을 내서 회개하고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투자하여 불로 연단된 금과 같은 믿음을 사고 영적으로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며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밝히 보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4. 나의 주, 나의 하나님(28절) 

마 13; 55에서는 예수님의 Half brother(남동생들)를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로 소개했고, 막 6: 3에서는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라고 소개하므로 시몬과 유다의 서열순서를 바꿔 설명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시몬과 유다를 예수님의 쌍둥이 동생들로 해석한다.

본문 24절에서 도마를 ‘디두모라 하는 도마’(Thomas, called Didymus)라고 했는데, 도마는 “쌍둥이”를 뜻하는 아람어이고, 디두모는 “쌍둥이”란 뜻의 헬라어 번역이다. 그래서 도마는 쌍둥이 중 한 사람이다. 도마의 다른 쌍둥이 형제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그날 주일예배에서 도마가 손가락으로 예수님의 못 자국을 만져보거나 손가락으로 옆구리 창 자국을 만져봤는지는 모르지만, 도마는 예수님을 향해 “당 신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My Lord and my God; 28절)라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다.

그리고 오순절 마가다락방에서 성령세례를 받은 후, 예수님께 전도파송을 받았던 70제자 중 한 사람인 다데오 아다이(Addai, Thaddeus)를 동역자로 삼아 동부 시리아 에뎃사에서 복음을 전하고 거기서 첫 번째로 세운 교회가 동 교회(東敎會, The Church of the East)였는데 여기서부터 동방선교의 확장이 이뤄지기 시작했고, 사도 도마가 동기독교회(The Church of the East)의 초대 총주교가 됐다고 한다. 도마가 시리아 에뎃사에 선교를 시작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지병인 Gout(영양과다나 부족으로 오는 관절염) 통풍으로 고생하던 오스로헨 왕국의 아브갈 5세 왕(King Abgar, AD 9-46년 재위)이 예수님을 자기 나라에 초청했는데, 인류구원 사역완성에 분주하셨던 예수님이 대신 도마를 보냈고, 전도기반을 세운 후에 도마는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을 따르기 위해 돌아오고 다데오 아다이를 그곳에 파송하여 교회를 세우게 한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신 2년 후, 도마는 오르헤센 왕국과 당시 중동지역에서 두 강대국 세력의 하나로 서방의 로마제국과 대립되었던 인도 북부까지 뻗쳤던 빠르티아(Parthia) 제국에서 전도한다. 그리고 인도에 상륙해 왕으로부터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전도하여 많은 신자들을 얻었다. 그는 그곳에서 일곱 개의 지역교회를 세웠고 두 명의 사제를 두었고, 일시 중국으로 가서 전도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AD 72년에 인도의 밀라폴(Milapore-현재의 Chennai)에서 순교한다.

도마행전(Acts of Thomas)에 의하면 12사도들이 모두 모였을 때, 전 세계 지역들을 분할해 각자가 제비 뽑은 지역을 주님께서 파송하시는 지역으로 믿고 가기로 했는데, 제비뽑기에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유다 도마에게 인도가 배당됐다. 그때 도마는 당황하여 “나는 몸이 약하기 때문에 멀리 여행을 못한다. 그리고 내가 히브리사람으로서 어떻게 문화적 상황과 언어가 전혀 다른 인도로 가서 그들에게 진리를 선포할 수 있겠는가”며 거절했다. 그러자 그렇게 방황하며 고민하던 도마에게 밤에 주님께서 나타나 “도마야, 두려워말고 인도에 가서 말씀을 선포하라. 내 은혜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다. 그러나 도마는 “당신이 원하는 곳에 나를 보내주십시오. 그러나 다른 곳에 말입니다. 인도엔 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도마가 이렇게 말하고 생각하며 인도 선교를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인도에서 군다포로스(Gundaporus) 왕이 보낸 압바네스라는 무역업자를 만났는데, 그는 왕으로부터 ‘목수를 구해 데리고 오라’는 명령을 받고 온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도마는 인도선교가 주님의 뜻으로 알고 순종해 멀고 먼 인도선교를 떠났다고 한다. 압바네스가 배에 짐을 싣고 있을 때, 도마는 그의 짐을 나르고 배에 함께 승선했는데, 배에서 압바네스는 ‘당신은 무슨 기술을 가지고 있느냐’라고 물었고, 도마는 “나는 나무를 가지고 쟁기와 멍에, 소를 모는 채찍과 배와 배를 젓는 노와 그리고 도르래 등을 만들고, 돌로는 건물기둥과 신전과 왕궁 등을 지을 수 있다” 대답한다.

오랜 항해 끝에 도마는 옛 왕도 중 하나인 안드라폴리스, 현재 인더스강의 상업도시인 발바리콘 항구에 무사히 도착했는데, 마침 안드라폴리스엔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왕의 외동딸의 결혼식이 있어서 왕의 명령으로 모든 사람이 나와 축제에 참여하고 있었다. 압바네스와 도마도 왕의 명령에 따라 축제에 참여하였는데, 마침 연회장에서 술잔을 나르는 한 사람이 도마가 외국인 신분임을 알고 손바닥으로 도마의 따귀를 때렸다. 그때 도마는 자기를 때린 자에게 “나의 하나님께서 자네를 다음에 오는 세대에서는 용서하시겠지만 이 세상에서는 이적을 보일 텐데, 지금 나를 때린 손이 개에서 물려 끌려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며 예언적인 말을 했다.

연회가 한참 진행됐는데, 도마를 때렸던 사람이 샘에 물을 기르려고 갔다가 마침 그곳에서 사자를 만났는데, 사자가 그를 죽이고 사지를 찢어버렸다. 그때 몇 마리 개들이 그의 지체를 물어 갔는데, 그 중의 한 마리의 검은 개가 그의 찢어진 오른 팔을 입에 물고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연회장의 모든 사람이 도마의 예언대로 된 것을 보고 놀랐는데, 그때 연회장에서 피리를 불던 여인이 사도도마의 발 앞에 앉아서 “이 분은 신이거나 신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아까 말한 대로 이루어졌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사도도마를 찾아와 “나를 따라와서 내 딸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때 사도도마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우리들의 동행자요 길을 안내하시는 분입니다. 학대받는 자의 숨을 곳과 안식처시며, 가난한 자의 희망이시며, 잡힌 자의 해방이시며, 병으로 눌린 자의 영혼을 치유하시는 손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구세주이시며, 이 세상을 살리시고 영혼들에 능력을 주시는 분이시며, 당신은 오늘 일들을 아시고 우리를 통하여 이루십니다. 주님이시여! 당신의 숨기신 뜻을 계시하사 비밀의 말씀을 나타내십니다...”라고 기도했다. 그 이후 도마는 인도의 여러 고을을 들러서 성령의 권능으로 말씀을 선포한다는 소문이 들렸고, 많은 사람들도 그의 하는 일에 동참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기적과 질병 치료와 귀신을 쫓아 낸 일과 지옥을 다녀온 계시와 전도사역이 도마를 통해 나타났는데 그것을 기록한 책이 도마행전이다.

그렇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도마가 예수님을 “My Lord and my God”(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후, 도마의 삶은 예수님을 자기 인생을 주장하는 주인과 자기의 하나님으로 섬기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시리아, 우즈베키스탄, 중국, 인도 여러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심지어 고대시대 한반도까지 기독교에 영향을 미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인 도마의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축원한다. 과연 예수님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신가? 우리는 그 신앙고백처럼 예수님께 절대 복종하는 예수의 종인가?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인가? 이제 이후의 삶이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전심으로 섬기는 신앙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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