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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04월05일 10시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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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이 부활의 소식을 듣는다 해도...
일반적으로, 한 사건을 놓고 입장에 따라서 상반된 반응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우리 예수님의 부활 소식도 기절초풍하도록 놀라 간담이 서늘해지며 등골이 오싹했을 사람들과 부활의 예수님께 남은 인생을 다 걸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뉜다.

전자는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빌라도 같은 이들이었고, 후자는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 제자들, 백부장,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갈릴리의 여자들이었을 것이다. 사실, 가룟유다의 후회는 스승이었던 예수님을 판 것에 대한 죄책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이 초래할, 자기의 원대한 꿈의 좌절도 한 몫하지 않았을까!

예수님을 이용하여 세상을 바꾸고 싶었고, 그 바뀐 세상에서 한 출세하려던 유다가 아닌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아름다운 왕국을 이루시는데 나처럼 능력있고 정열적인 인물을 의지하지 않으시다니… 좌절은 분노로, 분노는 배신으로, 배신은 후회로, 후회는 자살로…자살로 끝났다. 자살로 예수님 앞서 죽어버린 유다에게 말은 안되지만, 혹시 예수님이 용서를 말씀하셨어도 분명히 유다의 어리석은 자존심은 도리도리 거절했을 것이다. 

 십자가에서 두 팔을 한껏 벌려 온 세상의 죄를 안고 죽어가시는 예수를 바라보며 백성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기들이 했던 무서운 저주의 말 ‘예수의 무죄한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가 어떤 모양으로 값을 치루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보았을까! 

 
어쨌거나, 예수의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대속(Atonement)’이 되어 하나님과 ‘화목(Reconciliation)’을 이루어 ‘의인(Justification)’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다. 물론 보혈의 옷 속에는 ‘더럽고 냄새나는 죄 투성이의 내 모습’ 그대로이지만, 당신 아들의 보혈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볼 생각도 않으시고 그냥 …의롭다!, …죄없다!, …아름답다! 보아주시겠다니... 아! 이 황송함을 어찌할까? 
 
 지난 3일 전, 그 광란의 밤 이후, 각각의 사람들은 사실 얼마나 상실감이 컸을까? 아마 3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말씀이 믿어진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심으로 부활의 가능성을 보여주셨지만, 아무도 그것을 기대할 수는 없었겠지, 죽으면 끝나는 것이 당연지사였으니까! 여태까지는 예수님께서 새로 쓰시는 ‘죽음에 관한 새 역사’ 즉 ‘다시 살아남’에 관해서 그 누구라 상상이나 예측을 할 수 있었을까! 
 
 드디어 그 숨 막히게 가슴 조리던 좌절의 3일이 지나 부활이 이루어졌을 때, 아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 자기들도 믿을 수 없는 새로운 사람들로 변화되어 버렸다. 아리마대 요셉은 그 엄청난 권력의 자리인 산헤드린 공회원이기를 포기했다. 예수님의 죽음을 초라하지 않도록 공개적으로 마무리해 드린 요셉은 부활 후에 더 이상 영적으로 무지한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함께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기득권을 포기하고라도 남은 인생은 제대로 가치 있게 살고 싶었다.

슬피 울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러 제자들에게 달려갔다. 글로바도 자기의 목숨이 보장이 안되는 예루살렘으로 즉시 돌아갔다. 예수님 처형되실 때에 폭도로 변한 백성들이 무서워, 비겁하게 도망가 안으로 철커덕 꽁꽁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움에 덜덜 떨던 제자들과 베드로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 온 후에는 대부분 순교의 제물로 자신들을 내 놓은 복음의 전사들로 용도변경 되었다. 
 
 처절하게 잔인한 십자가 위에서까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용서’를 외치며 돌아가시는 우리 예수님의 모습은 사람들의 오금을 저리도록 했다. 조상들로부터 세대를 이어가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배워온 그들에게 ‘용서’라는 숭고한 사랑의 언어는 사실, 너무 엄청나서 감당할 수가 없었다. ‘용서’는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대로마제국 군단의 그 어떤 전략보다도 더욱 엄청난 파워를 내장한 숭고한 두려움으로 마음가득 밀려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다. 우리는 너무나 연약하고 너무나 똥고집장이여서 아무리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유언으로 ‘용서’를 말씀하시며 시범을 보여주셨어도, 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후 비겁하고 나약한 사람들이 투철한 사명자로 체질개선이 되어도, 그건 그들이고, 나하고는 도대체 아무런 상관이 없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언제까지 이렇게 무기력할 것인가!  
 
 그런데 과연, 사망을 이기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에게 회초리를 흔들어대시며 업적과 실적을 다그치실까! 분명 ‘쉽고 가벼운 멍에’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의 이름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기본 중의 기본은 ‘예배!’ 내 기분과 감정과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한 시간을 일년처럼, 일년을 평생처럼, 바쳐진 시간에 대한 변함없는 태도의 예배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피조물인 것을 인정한다면, 예배를 만홀히 여길 수 없다. 분명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 하셨고 그렇게 요구하시는 분이 내가 드리는 예배의 신령과 진정성을 대충 계산하실 리가 없다. 하나님은 가시적이 아니시기 때문에 더욱 두렵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 편만하신 하나님! 내 세포 깊숙하고 은밀한 더러움 까지도 놓칠 수 없으신 공의의 하나님! 영이신 하나님을 대하여 피조적 육체인 나는 대책을 세울 수도 피할 수도 없지 않은가! 
 
 교문 앞에서 일년 365일을 제 아무리 열심히 구두를 닦아봐야 학생이라 불리워지지 않는다. 예배없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사랑은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표현이 된다.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일차적이고 기본적인 사랑표현이다. 내가 일년 52주일을 예배드린다 한들 특별할 것도 훌륭한 것도 아니다. 그 52번의 예배 중에 몇 번의 예배가 보좌까지 올라갔을까!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낮에와 같이 단정히 하고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하는 것이다. 구원은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는 것이다. 거듭된 산제사로 변화된 내 모습을 보고, 내게서 나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은 사람들이 ‘우째 이런 일이?’ 신기해서 하나님이 궁금해지게 만드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해야 하는 첫 번째 의무다. 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라고 했다. 칭찬은 좇는 것이 아니라 따르는 것이다. 칭찬없는 삶? 약처방을 받아서라도 바뀌어져야 마땅하다.  
 
 내가 올바른 예배자가 되려고 몸부림하며, 그 몸부림을 통하여 변화된 나에게 칭찬이 따르고, 그 다음에, 울고 있던 마리아에게 “가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라” 하신 예수님의 피로 쓰신 간절한 부탁대로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과 부활에 관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대상은 내가 판단하고 결정할 일이 아니다. 꼴보기 싫으니까…잘났으니까…돈이 많으니까… 돈이 너무 없으니까…성격이 나쁘니까…부담스러워하면 앞으로 내 처신이 곤란하니까…나의 판단력! 나의 편견! 어쩌면 사탄이 휘두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분명히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 이야기…가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라니까!”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마가복음 8:38)>

이은선 (컬럼니스트/H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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