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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03월15일 19시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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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사랑은?

참 사랑은 용서를 전제로 할 때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다. 용서가 없이는 사랑이 시작될 수가 없다. 용서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찌 사랑을 할 수 있는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수로 여기고 있는데 어찌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가? 그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사랑이다. 만약 용서하심이 전제되지 아니했다면 사랑을 하실 수 없으신 것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사랑을 받게 된 것이다. 용서가 없는 사랑은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용서는 이처럼 중요하다.

어느 날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을 하고 있다. “주님 만일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했을 경우 몇 번이나 용서해 주면 될 까요? 한 일곱 번 정도 용서해 주면 되겠지요? 그 정도 용서하면 잘 하는 것 아닌가요?"라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베드로는 그와 같이 질문을 하면서 "그래 그 정도면 되었다. 일곱 번 용서하면 잘하는 것이지”라고 칭찬을 들을 것을 예상했을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한두 번 용서하는 것도 어렵다. 우리들을 보자. 한두 번이라도 용서하는가? 이웃이 자신에게 잘못했을 때 용서하는가? 한두 번도 용서하지 않고, 한 번만 잘못해도 용서하지 않고 그것 때문에 평생 원수로 여기고 원수처럼 지내는 모습이 아닌가? 따라서 베드로가 ”일곱 번 용서 하리이까?”라고 말한 것은 대단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래 잘했다. 일곱 번 용서 하는 것 잘 하는 것이다."라고 칭찬하셔야 마땅하다. 그런대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시고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계신다. 일반적으로 일곱 번 용서하면 잘하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일곱 번씩만 용서한다면 미워할 사람 하나도 없고 원수도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런대 한 번도 용서하지 않으니까 제대로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용서를 못하니 어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가? 그런대 예수님은 어떻게 용서하라고 하시는가? 490번을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어떤 잘못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아무리 여러 번 잘못을 해도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어떤 때는 용서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든지, 무슨 일이든지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490번에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말씀이다. 아무리 여러 번 잘못을 했어도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모든 일에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용서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차원의 용서인 것이다. 그러시면서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종의 비유를 말씀하고 있다. 우리들이 받은 용서는 일만 달란트와 같은 죄를 용서 받았다. 그런대 형제의 아주 작은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되겠느냐? 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나 이웃의 어떤 죄라도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완전히 용서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사랑이 실천되는 것이다. 이런 사랑을 누가 시작하는가? 바로 하나님께서 시작하셨다. 죄인 중의 괴수와 같은 인생들의 죄를 용서해주시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해주셨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같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들이었다. 그런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해 주신 것이다. 그 용서하심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다. 만약 죄 사함의 용서가 없었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사랑은 용서를 전제로 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스데반 집사도 자신을 돌로 쳐 죽이는 원수들을 용서한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도 용서의 삶을 통해 참사랑을 실천하며 살기를 소원하자! 
 
박철수 목사 (익산봉곡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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