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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02월18일 22시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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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절 영감을 받는 삼대비밀(1)

       갑절 영감을 얻는 삼대비밀(1)    왕하 2: 1-11절      2. 15. 15


현대를 미니멀리즘(Minimalism) 시대라고 한다. 우리말로 “최소한 주의, 극소주의(極小主義)”라고 번역할 수 있는 Minimalism(미니멀리즘)은 “작은 것을 투자해 큰 것을 얻고, 적게 투자해서 많은 것을 얻는다” 또는 “최소한의 구성으로 최대의 효과를 끌어낸다.”는 뜻이다. 애플의 아이폰이 지구촌을 휩쓸 무렵 어느 미술평론가는 “스티브 잡스는 미니멀리즘과 사랑에 빠졌다”고 논평했는데, 그 이유는 스티브 잡스가 ‘스마트 폰은 한 손에 쥐고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작아야 된다)’고 고집해, 화면 크기가 3-4인치짜리 I-Phone(아이폰)을 만들어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가 미니멀리즘으로 스마트폰을 성공하자, 세계는 스마트폰뿐 아니라 스포츠와 사업경영 그리고 대기업경영이나 국가경영에까지 미니멀리즘으로 많은 효과를 얻으려고 연구하고 있다.


얼마 전 끝난 2014년 브라질 월드컵우승팀은 독일이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우승팀에서 나와야 하는 대회 최우수선수상인 ‘골든 볼’이 아르헨티나의 메시에게 돌아갔다. 우승팀 독일선수들 외에도 지구촌 모든 나라에서 기라성처럼 많은 축구천재와 축구영웅들이 각축을 벌인 별들의 잔치였는데도 메시가 ‘골든 볼’을 수상한 것은 그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게 한다. 메시는 그 자체가 거대기업이자 스포츠 전 종목을 통틀어 최고의 브랜드이기도하지만 조별예선에서 결승전까지의 메시의 축구는 한마디로 적게 뛰고 많은 결과를 가져온 미니멀리즘 축구였다.


메시는 어슬렁거리며 쉬엄쉬엄 공을 찼다. 산소탱크 박지성이나 Terminator(터미네이터; “종결자”) 차두리처럼 운동장을 종횡무진 휘졌다가 포위망을 좁혀오는 수비수들을 현란한 개인기로 따돌리며 폭풍처럼 질주해 슈팅을 날릴 줄 기대했는데, 경기마다 그가 뛰는 모습은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통계상으로도 메시가 매 경기에 달린 거리는 10km가 될까 말까, 다른 선수에 비하면 턱없이 적다. 그러나 그의 진가(眞價)는 매번 상대편 골문 언저리에서 밀집수비를 뚫고 동료에게 패스를 하거나 직접 골망을 흔들어 놓는 데서 나타났다. 메시가 문전으로 대시하는 순간만큼은 마치 사슴을 덮치는 치타처럼 발과 몸놀림이 전광석화 같고 자로 잰 듯 정확하다.


메시는 최소한으로 뛰는 미니멀리즘 축구로 전후반 90분과 연장전까지 120분을 뛰고도 지친 기색이 전혀 없다. 그래서 뒤에 쳐져 지켜보다가 기회를 포착하면 무섭게 달려들어 골 사냥을 하는 메시 축구를 보고, 중계 아나운서나 해설자들은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쉴 새 없이 탱고를 추는데 메시 홀로 ‘슬로, 슬로 퀵퀵’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만큼 메시 축구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쓸데없이 잔재주를 부리는 스타일이 아니다. 최소한 적게 뛰다가 결정적일 때, 폭발해 득점(실용성)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그의 특기였다. 그래서 어느 스포츠 평론가는 메시야 말로 “잡스 이후 처음, 미니멀리즘의 천재”라고 논평했다.

현재 IT산업이나 스포츠나 사업경영에서 미니멀리즘은 세계적인 대세(大勢)와 흐름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도 미니멀리즘으로 해야 될까? 그 대답은 ‘Yes and No’이다. 기독교의 선교사역이나 무리한 교회건축이나 교세확장을 위한 교회사업(Program과 Activity)의 일부분에선 미니멀리즘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한 신앙,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는 일과 이웃을 구제하고 선행을 베풀며 선교를 하는 일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 그리고 성도들이 성령을 받고 은사로 충만하며 권능으로 충만해지는 일에서는 ‘적당, 적당’, ‘대강대강’, ‘간단, 간단’의 미니멀리즘보다는 Maximalism(맥시멀리즘: “최대한 주의”, “최고주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적당히 기도하고, 대강 기도하며, 간단히 기도하는 데서는 사도행전적인 강력한 영적권세나 영적권능의 은사가 없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성령으로 충만하여 각종의 은사들이 충만하게 나타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갑절의 영감을 얻는 삼대비밀


우리가 살고 있는 2015년 현재는, 나의 천진난만한 유소년시절이던 1950-60년대나 꿈과 낭만이 넘쳤던 청년시절의 1970-80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30년 동안에 변화될 수 있는 것이 1년 안에 변할 수 있고, 6개월에도 변할 수 있는, 상전벽해로 모든 것이 순식간에 변할 수 있는 급변시대이다. 그 중에 과학이 눈부시도록 발전하고 변하여 삶의 질이 좋아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반대로 사람들의 마음이 악하게 변해가는 인심의 변화는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부가 남남으로 헤어지는 것이 감기 한번 앓는 정도가 된 것은 옛날이야기고, 빚을 갚지 못한 사람의 장기를 떼고 생매장시키는 일 그래서 그런 일이 두려워 자살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사람을 납치해 이유 없이 죽이거나 성폭행하는 일, 헤어진 남편이나 아내에게 악심을 품고 위해하거나 죽이는 일, 친구가 친구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 친 딸을 수년씩 강간하거나 성노리개로 삼아 괴롭히는 일까지의 반인륜적 추악한 범죄들이, 배우고 못 배움을 떠나서, 있고 없음을 떠나서, 신분과 지위의 높고 낮음도 떠나서, 저 옛날 청계천에 구정물이 범람하듯 지구촌 온 세상에 출렁이며 흘러가고 있는 시대다. 더 안타깝고 불안한 것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죄악과 범죄가 더 많아져가고 더 악랄해져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 소돔 고모라에 살면서 외롭게 홀로 의를 전파하던 롯이 무법자들의 동성애타락과 음란과 방탕범죄를 날마다 보면서 그 마음에 고통을 당하고(벧후 2: 6-8)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죄에 만성이 돼 갔고, 한 사람 의인의 자녀였던 롯의 딸들은 유황불 심판을 피해 산으로 도망가면서 독한 술(독주)을 가지고 갈 정도로 그리고 그 독주를 아버지에게 먹이고 근친상간으로 사생아를 낳아 딸이 아버지와 부부가 될 정도로 죄에 무감각했고 죄에 노출돼 타락했던 것처럼(창 19: 30-38) 오늘날은 믿음생활을 잘하는 경건한 성도들과 그 가족과 자녀들까지도 I-Phone에 난무하는 온갖 더러운 죄와 유혹들에 노출돼 무방비상태로 살고 있는 시대다. 그래서 교회 안에 청소년들이 쉽게 죄를 짓고, 심지어 경건한 성도라도 아니 목사와 장로도 유혹에 넘어지고 시험에 빠지는 일이 점점 많아지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으로 강하게 무장돼야 한다. 그래서 엘리사가 엘리야의 갑절영감을 받았듯이, 우리가 50년 40년 전, 30년 20년 전에 크게 받았던 은혜와 은사보다 갑절영감, 갑절은사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 그래야 장차 올 휴거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고, 칠년 대환난도 이겨서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복된 성도가 될 수 있다. 엘리야의 갑절영감을 받았던 엘리사처럼 갑절영감과 갑절은사를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갑절영감의 세 가지 비밀을 알아본다. 나는 어떻게 해야 갑절영감을 받고 갑절은사를 받을 수 있는가?


   1. 거쳐야 할 네 과정


오랜 유교문화에 젖어 고향과 학연과 친구와 선후배를 중요하게 여기는 역대 정권과 현 정권인 박근혜는 낙하산인사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을 거치지 않고 무시한 채, 낙하산 타고 내린 사람들처럼 전문지식이나 경험이나 경륜이 없는 사람들에게 정부요직을 맡기고, 국가경제를 맡기며, 백년대계인 나라의 교육을 맡기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자기들의 철밥통을 지키는 일과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일뿐 이다. 그렇게 낙하산인사로 관료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마피아처럼 똘똘 뭉쳐 퇴직 후에도 관련업계에 취업하여 먹이사슬을 형성해 부패한 사회를 만들어 ‘관피아’란 말까지 나왔는데 그런 나라는 일등국가가 될 수가 없다.


2014년에 한국검찰은 특정분야의 폐쇄성과 끼리끼리 문화에 따른 유착비리로 국가 시스템 작동을 방해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세력을 악명 높은 범죄 집단 마피아를 본 따서 (관료+마피아)관피아라고 명칭하고 관피아의 유형을, 행정고시 기수에 따라 순혈주의로 유착돼 금융업계 이익을 대변하는 재무부와 금융집단을 모피아로, 산업통상자원부와 산하기관 기업집단을 산피아로, 해양수산부와 해운업계의 유착집단을 해피아로, 부정거래로 전력대란까지 초래한 원자력분야 유착비리 집단을 원피아로, 철도공사와 철도시설공단의 비리집단을 철피아로, 국세청과 세무법인의 유착비리 집단을 세피아로, 금융업계 비리집단을 금피아, 군대 안에 비리집단을 금피아로 그리고 교육부와 학계의 비리집단을 교피아로 발표했다. 검찰은 이러한 마피아가 날 뛰는 사회가 오늘의 대한민국이고 이러한 관피아들이 대한민국을 망하게 하고 국가위상을 무너뜨리고 있어 뿌리를 뽑겠다고 했는데 과연 그들만 망국의 암적 존재들인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으면 악의 뿌리를 뽑겠다는 검찰은 물론 모든 사람이 마피아요 관피아인 죄인과 악인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라가 변하고 사회가 변할 수 있는 것은 관피아 몇 사람 감옥에 집어넣는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국가적으로 대통령에서 지게꾼까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해 새사람으로 변화되는 일만이 나라와 국가사회가 사는 길이다. 대한민국 5000만과 해외동포 디아스포라 800만이 모두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한다.


사람이 사회적 지위와 직분을 가지려면 마땅히 거기에 맞는 과정과 단계를 거쳐야 한다. 아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의사가 된 돌팔이의사는 사람을 죽이고, 필수과정을 생략한 낙하산교수는 엉터리 가짜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칠 자격이 없으며, 인턴과정이 없는 경영인과 장군은 부하직원을 통솔할 수도 없고 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없으며, 혹독한 수련과 수행과정이 없는 태권도 명예 9단은 기왓장 하나 깰 힘이 없다. 그렇다. 평신도성도들이나 목사도 시련과 연단의 과정이 없으면 무력무능의 성도가 되고 영적능력과 영적인 권세가 없는 목사가 된다. 그래서 갑절영감은 반드시 과정과 단계를 거쳐야 한다. 첫 번째, 갑절영감의 4단계는?


   ⑴ 길갈에서 출발하라


본문 1-11절에서는 대선지자 엘리야의 갑절영감을 받은 엘리사가 길갈에서 벧엘, 벧엘에서, 여리고, 여리고에서 요단까지 떨어지지 않고 끝까지 좇아 따랐다고 했다. 물론 엘리사가 길갈에서 요단까지 그 먼 길을 인내하며 끝까지 엘리야를 따랐기에 갑절영감을 받았다는 말씀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길갈에서 요단까지 장소를 옮겨가며 뒤를 따랐기 때문에 갑절영감을 받았다면, 남산에서 출발해 경기도 소사와 덕소와 경상도까지 박태선을 따라간 신앙촌사람들은 모두 그의 갑절영감을 받았을 것이고, 주일마다 부산에서 제주도에서 대구 광주에서 불광동에서 서대문으로 서대문에서 여의도로 순복음교회를 따라갔던 사람들과 주일마다 애리조나 주에서 캘리포니아까지 자가용비행기를 타고 예배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담임목사의 갑절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교회장소와 자신의 장소를 옮겨가며 따랐던 교인들이 담임목사의 갑절영감을 받았다는 말은 아직까지 들은 적이 없다. 그렇다. 길갈에서 요단까지는 인내심을 요구하는 장소의 이동일 뿐이지 영적인 의미는 아니다. 그래서 길갈에서 요단까지의 영적의미를 바로 알아야 갑절영감의 비밀을 알게 된다.

성도들이 신앙인격의 마지막 열매요 성령의 열매인 사랑에 도달하려면, 믿음에서 출발해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供給, Add, 에피 코레게사테: “풍부하게 공급하다”, “지원하다”)할 때 비로써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에 도달할 수 있듯이(벧후 1: 4-7) 성도들이 갑절영감을 받을 수 있는 첫 번째 단계는 길갈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길갈에서 출발하자!


길갈이란 이름의 의미는 “굴러간다”는 뜻으로, “종살이하던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는 뜻으로 성경엔 길갈(Gilgal)이란 장소이름이 41회나 기록됐는데, 무엇보다도 길갈은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땅에서 처음으로 장막을 친 장소(수 4: 19- 20)이고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후 최초로 할례를 행한 장소로 유명하다. 그렇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 새 출발이 죄와 저주의 종노릇하던 애굽의 수치가 다 굴러가 없어져버린 길갈에서 시작됐듯이, 신약성도들의 새로운 인생 출발과 갑절영감과 영적인 권세는 주 예수님을 믿으므로 죄의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이 용서받아 사라져버린 길갈에서 시작된다. 죄 용서가 없는 곳엔 어떤 신령한 영적 능력과 영적권세가 없다. 예수를 구주로 믿어 예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예수의 이름으로 갑절영감을 받아 신령한 신앙생활을 하며, 능력 있는 성도, 응답 받는 성도, 하늘의 권능으로 충만하여 사단마귀와 모든 죄와 유혹과 저주를 이기는 권세 있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⑵ 벧엘을 통과하라


성경에 66회 언급된 벧엘(Bethel)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다. 벧엘은 야곱이 에서를 피해 밧단 아람으로 도피하던 중, 밤에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하나님을 만나 영적으로 거듭나고 베개 삼았던 돌기둥에 기름을 부어 하나님의 성전을 삼은 장소였고, 그 이후 20년 동안 타국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오매불망 사모하던 장소였다. 그러나 야곱은 20년 타향살이를 끝내고 벧엘로 돌아오던 중에 살기 좋은 숙곳을 만나 그곳에 이삿짐을 풀고 살다가 ‘딸 디나의 강간사건과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의 살인사건’으로 끔찍한 징계고난을 당한 후 마침내 돌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곳이 벧엘이다. 야곱의 벧엘은 신약성도에게 하나님의 집인 교회와 성전이다.


그다음 벧엘은 북이스라엘의 초대왕 여로보암이 히브리인 삼대절기에 하나님께 제사하러 예루살렘성전으로 올라가는 백성들을 막기 위해 금송아지 우상을 세우고, 절기 날짜도 삼대절기와 비슷하게 만들어 공포하고, 자격도 없는 자들을 제사장으로 세워 우상을 섬기게 했던 치욕의 장소이다.

이렇게 벧엘은 거룩한 하나님의 집이 있는 장소이면서 금송아지우상이 세워졌던 장소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갑절영감을 받은 엘리사가 벧엘을 떠나 엘리야를 따라간 것처럼 신약성도들이 갑절영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집인 벧엘, 하나님의 성전과 교회인 벧엘을 우상숭배장소로 만드는 것과 ‘성전우상’을 떠나야 한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장사하는 집인 강도의 굴혈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계신 성전은 수십 수백 년에 걸쳐 많은 돈 들여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은 성전건물이나 로마의 베드로성당과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의 Crystal Church(수정교회)처럼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지은 장엄한 교회건물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참 부흥은 초기 기독교박해 카타콤교회시대 250년과 19세기와 20세기에 일어난 말씀운동과 세계선교 운동 그리고 20세기 초부터 시작돼 오늘까지, 마른 땅에 불붙듯 지구촌에 퍼져나가는 제 삼의 물결인 오순절 성령운동 때였다. 교회가 예배당을 왕궁이나 거대한 성처럼 지었을 때,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였지만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영성은 없었다.

그리고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시대마다 혜성처럼 나타나 그 시대를 움직였던 영적능력의 사람들은 놀랍게도 웅장한 교회건물에서보다는 초라한 천막교회나 광야나 사막이나 산중기도원에서 그리고 기도실 골방에서 나왔다. 큰 교회는 훗날 그들이 유명해지므로 그들에게 제공된 선물이었을 뿐이다. 


오늘 여러분이 갑절영감을 받기원한다면, 벧엘을 통과하라. ‘대형교회 건물욕심’을 떠나라. 교회 크게 지으려는 욕심에 과도한 은행융자로 목사와 성도들이 갚아야 할 빚에 눌려 있으면 교회에서 영적권세가 소멸되고, 목사가 교회성장과 목회성공 욕심에 사로잡혀 쫓기면 영감 있는 설교가 나올 수가 없다. 그런데 오늘 얼마나 많은 교회와 목사들이 성공하고 싶고 큰 교회 만들고 싶어서 잘못된 메시지(각종 마술, 체면술, 명상, 신념의 마력까지 동원함)를 전하고 잘못된 방법을 동원해 교회부흥과 성전건축을 시작해 귀한 영혼들을 혹사시키고 죽이고 있는가? 엘리사처럼 과감하게 벧엘을 떠나므로 갑절영감을 받는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⑶ 여리고를 극복하라


엘리야가 벧엘을 떠나 여리고로 들어갔을 때도 엘리사는 그림자처럼 엘리야의 뒤를 따랐다. 엘리사의 소식을 듣고 몰려온 여리고 선지생도 50여명은 이구동성으로 “야훼하나님께서 당신의 선생, 엘리야 선지자를 하늘로 데려가실 것을 당신은 아느냐? 더 이상 엘리야 선지자를 괴롭히지 말라”고 만류한다. 그러자 엘리사는 Yes, I know it, hold ye your peace!(“나도 알고 있으니 너희는 잠잠하라”; 5절)며 동료들에게 대답한다. 그때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니,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고 말했는데, 엘리사는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오니 내가 당신을 절대로 떠나지 않을 것이라” 대답한다.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한다”(As the Lord lives and as your souls lives)는 구약에 나타나는 맹세의 일반적인 형식으로 “야훼하나님과 당신이 살아있는 것이 확실하듯 나의 맹세도 확실하다”라는 관용어이다(삼상 14: 39,  20: 3, 25: 20, 삼하 11: 11) “선생님의 살아계신 것이 확실한 것처럼 내 맹세와 결심도 확실하다”는 엘리사의 고백, “누가 뭐래도 당신의 갑절영감을 받기 전에는 결코 당신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고백이었다. 그리고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 여리고를 떠나 요단으로 따라간다. 그렇다. 갑절영감의 세 번째 비밀은 여리고를 떠나는 것, 영적인 여리고를 극복하는 것이다.


여리고(Jericho)는 “종려의 도시”와 “향기”란 이름의 의미처럼 종려나무들이 우거지고 꽃들이 많아 향기가 넘치는 아름다운 도시다. 성경에 예순세(63회) 번이나 언급된 여리고에서 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대표적인 것은 ①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이 강도를 만난 장소이다(눅 10: 30)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 36km(약 90리)를 가려면 해발 760m의 예루살렘에서 해면 하 250m의 여리고까지 해발고도 1000m 정도를 밑으로 내려가야 하가 때문에 강도 만난 사람을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갔다’고 했지만, 영적으로도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향기가 있는 여리고로 가는 것은 ‘내려가는 것’이다.

그래서 ‘갑절영감을 받으려면 여리고를 극복하라’는 말은 영적인 능력과 권세, 갑절영감을 받으려면 ‘내려가는 낙심을 극복하라’, ‘내려가는 세상 즐거움과 쾌락을 극복하라’, ‘내려가다가 강도 만나지 말라’, ‘밑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지난 날 당신이 받아 지금까지 누렸던 영적인 축복의 갑절영감과 갑절 은사, 갑절 능력, 갑절의 영적은혜는 ‘내려가, 내려가’에서는 없다. ‘올라가, 올라가’에서만 있다. ‘올라가, 올라가’에서 갑절영감의 축복들이 임하기를 축원한다.


② 아간이 범죄 하므로 이스라엘을 전쟁에 지게 만든 장소다(수 7 : 21)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정복할 때, 금은동철의 기구는 야훼께 바쳐 여호와의 곳간에 저장하고 남녀노유와 우양과 나귀는 칼날로 죽이라고 하셨다(수 6: 18-21) 그런데 유다지파의 아간이 여리고 성안에서 전리품을 수거하다가 아름답고 값비싼 시날산 외투와 은덩어리와 금덩어리를 보고 탐심이 생겨 그것들을 몰래 숨겼다가(수 7: 20-21) 제비뽑기에 발각된 후, 하나님의 진노로 아골 골짜기로 끌려가 돌에 맞아 죽는다(24-26)


갑절영감을 받으려면, ‘여리고를 떠나라, 여리고를 극복하라’는 말은 탐심과 욕심을 극복하라는 말이다. 갑절영감을 받으려면 온갖 탐심과 욕심을 버릴 것이다. 돈의 욕심과 탐심, 재산의 욕심, 사람(남자, 여자) 욕심, 권세욕심을 버릴 것이다. 그리고 갑절영감을 받은 후에도 탐심과 욕심을 버려야 한다. 성경은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입에 물을 것을 주면(When they have something to bite with their teeth, They cry, “Peace”)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않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 하는 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해서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Therefore it will be night for you, without vision) 흑암을 만나리니 점치지 못하리라(And darkness for you, without divination) 하셨나니 이 선지자(先知者)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The sun will godown on the prophets. And the day will become dark over them; 미 3: 5-6)고 했다. 갑절영감을 받은 후에 욕심과 탐심으로 저주가 임할 것을 예언한 말씀이다.


③ 무너진 여리고를 재건하므로 저주받은 벧엘 사람 히엘(왕상 16: 34)이다. 여리고를 정복한 여호수아는 잿더미가 된 여리고에서 “누구든지 이 여리고성을 다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는 막내아들을 잃으리라”(수 6: 26)고 했다. 여리고성은 다시 건축 되서는 안 된다는 선언이다. 그러나 500년 후 벧엘 사람 히엘이 많은 돈을 들여 여리고를 재건했는데 그가 여리고 성터를 쌓을 때,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 막내아들 스굽을 잃어 여호수아를 통해 하셨던 야훼하나님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 이뤄졌다. 그래서 갑절영감을 얻으려면 여리고를 떠나라, 여리고를 극복하라는 말은 당신이 갑절의 영력과 영적권세를 얻으려면 야훼하나님의 말씀에 100% 순종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 말씀에 100% 순종하므로 갑절영감을 얻는 역사들이 모두에게 나타나기를 축원한다.


   ⑷ 요단을 통과하라


엘리야의 갑절영감은 엘리야를 따라 요단강을 건넜을 때 엘리사에게 임했다. 엘리사에게 갑절영감의 마지막 관문이었던 요단(Jordan)은 신약성도들에게 영적으로 어떤 단계며 어떤 과정인가? 성경에 197회 언급된 요단은 우리에게 두 가지 영적교훈을 준다. ① 주기적인 시험을 이기라는 뜻이다. 여호수아 3: 14는 “요단강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For Jordan overflows all its banks all the time of harvest-“요단이 추수기에는 언제나 물이 언덕까지 넘쳤다”)고 했다. 요단 평야에 구절양장처럼 굽이굽이 누워 있는 물줄기를 따라 유유히 흐르는 요단강이 보리와 밀을 거두는 때만 되면 변덕을 부려 강물이 범람하여 둑을 넘어서 언덕까지 넘쳤다는 말이다.


그렇다. 영적으로 요단강은 우리에게 주기적으로 변덕을 부리며 찾아오는 시험들을 의미한다. 사람에겐 모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략 25일에서 33일에 한 번씩 찾아오는 육체적인 생체주기와 정신적인 생물학적주기(Bio-Rhythm: “생체순환 리듬”)가 있다. 밤하늘을 밝게 비추는 보름달이 한 달 주기로 떠오르듯 사람의 몸과 마음도 대략 한 달을 주기로 생체가 순환한다. 그래서 한 달 사이에 육체적으로 어떤 힘든 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최상의 컨디션일 때가 있고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힘이 없을 때가 있으며, 기분이 맑고 상쾌하며 기억력이 최상일 때가 있고 의기저상하고 만사가 귀찮아지는 때가 있다.


그런데 사단마귀는 사람의 생체리듬을 이용해 유혹한다. 사람의 생체리듬이 가장 약할 때, 육체적으로는 정욕이 활화산처럼 일어날 때, 정신적으로는 남편과 떨어져 있어 외로웠던 하와를 유혹했듯(창 3: 1-2) 외로움이나 고독에 붙잡히거나 절망이나 낙심에 빠질 때 유혹에 미끼를 던진다. 그래서 어떤 교인은 한 달에 한번, 두세 달에 한번, 6개월 1년에 한번 시험에 빠져 방황을 한다. 어떤 사람은 한 달에 두세 번 주일성수를 잘하다가 시험주기만 되면 한번은 꼭 빠지거나 대여섯 주일은 잘 지키다가 시험주기가 오면 영락없이 예배를 불참해 신앙이 자라지를 못해 몇 년 동안 교회생활을 했어도 앉은뱅이 신앙에 멈춰있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사람의 생체리듬을 이용하는 마귀사단은 사람의 약점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역발산기개세의 장사 삼손을 보라. 당시 15척거인(?) 역사장수 삼손(30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다곤 신전 두 기둥을 좌우 양손으로 붙잡고 무너뜨릴 정도면 신장이 거대한 장사였다: 삿 16: 23-31)을 힘으로 이길 사람은 이스라엘에도 원수 블레셋에도 없었다. 골리앗(당시 골리앗의 신장은 여섯 큐빗(한 큐빗은 25인치) 한 뼘(대략 10인치)-13피트 3인치였다; 삼상 17: 4)의 다섯 형제 거인장사의 아비도 거인이었듯(삼하 21: 18-22) 대대로 거인장사들이 많았던 블레셋에도 삼손과 견줄만한 거인장사가 없었다.


그러나 삼손의 약점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었다. 삼손이 문제를 만났을 때마다 거기엔 여자가 있었다. 딤나의 처녀가 있었고(삿 14: 1) 가사의 기생이 있었으며(삿 16: 1) 마지막으로 포도주 산지인 소렉(Sorek) 골짜기의 음탕녀 들릴라(삿 16: 4)가 있었다. 마귀사단은 삼손의 최대약점인 여자를 미끼로 유혹해 천하장사 삼손을 파멸케 했다.


그렇다. 사단은 사람의 생체리듬을 이용하되 그 사람의 약점을 유혹해 넘어뜨린다. 그 사람이 여자를 좋아하면 여자로, 돈을 좋아하면 돈으로, 자신을 자랑하고 내세우는 교만과 명예를 좋아하면 그것으로, 고집을 좋아하면 그것으로, 칭찬듣기를 좋아하면 아첨하고 알랑거리는 것(Flattering)으로, 잠자기를 좋아하고 게으르면 게으름으로 유혹한다. 그래서 죄악에서 태어난 인간이 간교한 사단마귀의 유혹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실패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단마귀의 시험과 유혹을 물리시고 승리했다. 그만큼 성도들이 갑절영력을 받고, 갑절영감을 받아 능력 있는 신앙생활과 승리의 생활을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② 요단은 예수님이 세례 받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곳이다(마 3: 15) 예수께서 요단강을 찾아와 세례 받기를 요구하자 요한은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지 어떻게 당신이 내게로 오십니까?”며 거절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Permit it at this time, for in this way it is fitting for us to fulfill all righteousness)며 대답하시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다. 그리고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았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뇌성 같은 우렁찬 소리(하늘의 소리(The voice of Heaven)는 ① 수세(授洗) 시; 마 3: 17, 막 1; 11, 눅 3; 21, 22) ② 변화산에서(마 17: 5, 막 9; 7, 눅 9: 25) ③ 사역을 마무리 지으실 때(요 12; 28)-예수님의 신적권위의 공적인정과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이 분명하게 표현하신 외적인 증거로 우레 소리 같았다-행 9: 4, 7, 22: 7, 9)가 들렸다.


그렇다. 요단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장소’다. 하나님께 갑절영감을 받는 길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의를 이룰 때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 많은 성도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일에 열심이 다. 그래서 바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았다”(롬 10: 2)고 했다. 이스라엘의 구원실패는 자기 의를 세우려는 잘못된 열심 때문이었다는 말씀이다. 교회를 위한 열심, 선교를 위한 열심, 구제를 위한 열심, 부흥을 위한 열심 그리고 신령한 은사를 구하는 열심까지도 자기 의를 내세우려는 잘못된 열심이었다는 책망이다. 지금 당신의 열심, 오늘 우리 교회의 열심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나의 의를 세우기 위한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지식을 따라 우리 열심들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한다.


갑절영감은 교회생활을 오래했다고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학교를 나오고 대학원과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40일 금식기도 한두 번 했다고, 철야기도를 10년 했다고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수천억 짜리 교회를 짓고 수만 명 성도를 거느린 유명목사가 됐다고, 500개 1000개 선교지교회를 세웠다고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누구든 갑절영감은 반드시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와 요단의 과정들을 통과해야 한다.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 길갈에 멈춰있지는 않은가? 벧엘에서 맴돌고 있지는 않은가? 여리고와 예루살렘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진 않은가? 요단에서 갇혀 있진 않은가? 구원의 감격에만 멈춰있는 어린아이 신앙 길갈과 아름다운 성전건물의 자부심과 교회성장의 자랑인 벧엘과 세상 즐거움과 낙심과 절망의 여리고와 주기적인 시험에 실패하는 습관과 나의 의(義)만을 고집하는 요단의 벽을 뛰어 넘어야 한다. 엘리사가 길갈, 벧엘, 여리고, 요단을 통과했을 때, 16번의 하나님의 기적을 나타낸 엘리야의 갑절영감을 받아 32번의 하나님의 기적을 나타내는 권능의 종이 됐듯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 요단을 뛰어넘어 갑절영감, 갑절영력, 갑절은사를 받는 성도들이 많이 나오기를 축원한다.

주여, 나에게 엘리야의 갑절영감과 엘리사의 갑절영감을 주옵소서. 그리하여 다시 오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김엘리야 목사(워싱톤 주기도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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