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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11월19일 21시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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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의 눈물

계(鳥類界)의 제왕인 독수리는 식용이 금지된 조류목록에 대형 명조(命鳥)로 분류되어 있다.  구약성서의 이사야서(사40 ; 31)에 보면 독수리는 힘과 위엄의 상징으로 나타나 있다.  

물고기와 새(鳥類)에는 눈물이 없다고 하는데 , 이 글의 제목이 독수리의 눈물이라니 독수리에는 눈물이 있다는 것일까 ?

한국의 대학가 용어(用語)에 안암동을 사자골이라고 하고, 신촌을 독수리 촌이라고 했는데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는지 궁금하다.

나는 한국 정부의 고위 정책부서에 파견되어 근무하는 동안 정부의 장학금으로 신촌 독수리 촌에 있는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야간부)에서 공부할수 있었다.  공부는 즐거웠고 그 자체가 나의 생활의 힘이 되어 박봉의 군인봉급으로 생계는 어려웠으나 모든 역경을 딛고 주근야독(晝勤夜讀)의 힘든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공부는 귀중한 것을 배운다는 차원을 넘어 내 삶의 즐거움이었으며 사명으로도 여겨졌었다.    

낮에는 정부 청사(廳舍)에서 근무하고 밤에는 학교에 가서 늦게까지 공부하고 돌아오는 귀가의 길은 참으로 고달프고 외로운 길이었다.    신촌에서 버스를 타고, 도중에서 갈아타고 한강을 건너 버스에서 내려 터덜거리며 동네 골목길을 걸어, 집 문을 두드리면 쓸어 질 것 같은 피로가 밀려오곤 하였다.   
 
그때 마다 하루 종일 무료하게 낮 시간을 지내고 밤늦도록 기대리다가 문을 열어 주는 아내의 피곤한 모습은 볼 줄 몰랐다. 그렇게 과정을 마친 나는 졸업식에서 열심히 노력한 보람으로 대학총장으로부터 독수리 상(賞)을 수여받았다. 
                                     
그 때의 기쁨, 보람, 자랑스러운 마음은 비길 데가 없었다. 총장으로부터 상장과 상패와 연세대학교 독수리 뱃지가 붙어있는 금 넥타이 핀을 받았다.

군문을  떠난 뒤,  프랑스를 거쳐  미국에 와서 헌신의 길에 들어섰다. 돌고 돌아 미국에 와서 한국에서 중단하고 마치지 못했던 신학과정을 마쳤다. 미국에 와서도 공부는 열심히 하였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의 미국에서의 공부생활도 그렇게 편안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공부에 열중하는 것으로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지만 아내의 입장에서는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고생의 그늘이 있었음을 나는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나는 3년의 신학대학원 과정을 마치면서 또 한 번 두 번째의 독수리 상(Eagle Award)을 받게 되었다.

두 번째로 느끼는 환희와 자부심, 기쁨은 비교할 데가 없었다.  이 자랑스러운 상장과 상패와 사진은 내가 사역지(使役地)를 따라 이사(移徙) 할 때 마다 소중이 간직하고  나의 서재와 책장위에 늘 놓여 있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한국의 시골 교회에서 건축헌금을 할 때에 헌금으로 낼 현금(現金)이 없어서, 상으로 받은 금 뱃지가 달린 넥타이 핀을 교회에 바쳤다. 

50년 전의 과거를 회상하면, 그 당시의 열정이 희석되어서 인지 “그 기념품만은 그대로 간직할 것을”...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 만큼 신앙의 정열이 희석된 증좌가 아닐까하고 돌이켜 본다.

그러한 독수리 상을 탄 자부심이랄까, 그렇게 자랑스러웠던 만큼 나는 외길만 보고, 마땅히 둘러보아야 할 옆은 보지 않고 앞을 향해서만 달렸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어느 정도 평탄한 길을 갈수도 있었지만 나는 어리석은 고난의 길을 택하여 고집스러운 궤도를 달렸다.  미련한  탓이었을까, 설명하기 어려운 교만의 탓이었을까 ?!

큰 교회에서 미자립(未自立) 교회로,  미자립 교회에서 개척 교회로, 개척 교회에서 국경을 넘어 멕시코 빈민촌으로   ....     국경에 가서 수년 동안 폐쇄되었던 교회문을 열고 교회 간판을 다시 만들어 달았다.  뿔뿔이 흩어져 간 교인들을 다시 찾아 모으고, 그리고 또 국경을 넘어가 멕시코 빈민촌( Accuna, Mexico)에 가서,   “철길 먼지 마을 교회”를 세워 4년간 선교를 펼쳤다.  

국경을 넘나들면서 두 교회를 섬기는 길에서 은퇴의 길에 들어섰다.  그 이유는 세월의 탓이었다.

아직은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고 눈이 흐려지지 안하였으나 세월과 세대가 은퇴의 길로 나의 발걸음을 옮기게 하였다.   “ ......   산촌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 라고 읊은 옛시조 ( 길 조 )는  이런 데서 연유한 것인가 ?

70의 나이에 나는 이 열사막( 熱 砂漠)의 국경에서 의식(儀式)도 없이 주일 예배로써 은퇴를 알리고, 이별의 손 흔들어 주는 이도 없는 남부 택사스의 산시막(山砂漠)을 가로지르는 귀로에 올랐다.  

국경, Rio Grand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멕시코의“아꾸냐”와  Texas 주의 “Del Rio” 두 소읍(小邑)을 떠나 뉴욕 까지 2,040 마일의 길을 서서히 달리기 시작하였다.  나의 가는 앞길에 아직 남겨진 무슨 일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      

그리로 떠나갈 때에 빈 손 이었기에 돌아올 때도 빈 손 이었다.   가다가 멈추어 쉬고, 쉬고서는 다시 가고 하기를 거듭하면서 6일을 걸쳐 서서히 동북쪽으로,  동북쪽으로 길을 갔다.  

행선은 뉴욕이지만 거기 가서도 우선 머리 둘 곳이 없었기애 여로(旅路)를 재촉하지 안하였다. 

머리 둘 곳이 없는 행로였지만 그런 가운데도 “ 어서 가야한다” 는 마음은 서둘러졌다.  이는 어디론 가에 가야한다는 여로(旅路)의 알수 없는 정서(情緖)였다.

다섯 밤을 돌아오는 길의 MOTEL에서 밤을 지새면서, 가랑이 찢어지는 여린 발걸음으로 나를 따라왔던 열 (烈, 아내의 별칭)의  얼굴을  훔쳐 보곤 하였다.     

뉴저지에 돌아와서는 출가한 딸의 꽤나 멀리 떨어져 있는 시골집에 우선 짐도 없는 여장을 풀었다. 여기에서도 오래 머물러 있을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기숙하는 곳으로 나가야, 해 질 무렵에 찾아 온 일꾼에게도 포도원의 문은 열릴 것이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겨울을 지나고 얼어붙은 땅이 녹을 때, 다시 뉴욕으로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푸러싱, 교회 가까운 처남 장로의 집으로 옮겨  몇 주일을 머물렀다.   

이제는 더 옮겨 갈 일이 없는 긴 여로의 마지막 쉼터로 여겨져서 인지 아내의 얼굴에는 겨우 휴식의 평안이 드리운 듯 하였다.    

자원하여 기쁘게 맡은 사역(使役)의 길을 앞장서 달리다가 은퇴하고 70 나이를 넘겨 여기에 돌아오기까지,  나의 마음의 한 구석에 늘 자리하고 있던 공허, 독수리 상을 탔을 때의 겹친 감격과 기쁨, 자랑스러움, 서재에 늘 진열되어있던 상패와 상장들을 보면서도 무엇인지 모르게 채워지지 않고 늘  허전했던 동공을 발견하였다.   

긴 여로에 지쳐 잠든 아내의 얼굴에서 휴식의 평안한 모습을 보았을 때에,  나는 아내의 얼굴에 독수리의 눈물이 번져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제까지  자랑스러움과 자부심으로  피로를 모르고 홀로 앞장서서  달리기만 하던 나는 아내의 얼굴에 주름이 가고, 검은 머리에 숨겨진 하이얀 머리카락을 보지 못하고 달리는 세월을 보냈다.

나는 자랑스러움과 자부심으로 피로를 모르고 지냈던 그 모든 순간 순간에, 내가 받은 독수리 상패와 상장위에, 아내의 수고와 고통을 못 보았던 나의 회한의 눈물이 흘러 번지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 교회에서 설교 요청이 있어서 설교시간에 그동안 내가 지나온 이야기를 했더니 , 그 교회 성도들이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일도 없고, 선교사로 청빙을 받은 일도 없는 나를 선교사라고 불렀다.   

늦은 나이의 저물 무렵의 세월에, 포도원 문 앞에서 기다리는 쇠잔한 일꾼을 불러주기를 10년 넘게 기다려 왔다.  그 후로 나는 꽤나 안타깝고 무료한 긴 세월을 보내면서도 부름을 기다리는 것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남은 날을 계수하고 있다. 

사람이 포도원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포도원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또 해는 바뀌어 2013년이다.      

세월이 빠르다고 하는 말하는 것은 언제나 지각생의 독백이 아닌가 싶다.    귀에 들리지 않는 음성을 찾아서 이 한 해에도 어디론가  달려가야 할 것이다.   

독수리의 눈물이 마르기 전에 달려가자 ....

2012년 1월 9일(수) 초(抄)
몽당연필 주진경
 
주진경 목사(뉴저지 은목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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