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람의 무덤 - 기독뉴스
모바일보기
기독뉴스 개편사이트 안...
2024년 04월 26일
 
뉴스 오피니언 방송사진 커뮤니티 2세뉴스
기사등록 I 독자마당 I 광고후원 로그인 회원가입
뉴스홈 > 오피니언 > 칼럼 > 돌섬칼럼
2014년11월16일 16시29분
글자크기 기사내용 이메일보내기 뉴스프린트하기 뉴스스크랩하기
하나님의 사람의 무덤

<목사님은 어떻게 설교하십니까? 글만 쓰니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40년목회에 기록해둔 설교가 딱 한편 있어 내놓아봅니다>

제목 : 하나님의 사람의 무덤
본문 : 열왕기상 13장 2절

지금으로부터 2600년전 유대나라에 요시아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8세에 유대의 16대 왕이된 요시아는 16세에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20세에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당시 사회와 종교가 부패할대로 부패한 유대는 전국의 유명 산천이 우상의 제단으로 더럽혀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쓸어내고 부정과 부패를 척결했다는 보고를 받은 요시아왕은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개혁시찰 길에 나섰습니다. 전국을 돌아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던 왕은 벧엘숲속을 지나게 됩니다.

“아! 예가 그 옛날 브엘세바라고 불렀던 벧엘이 아니더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여기를 통과하여 가나안으로 올라갔고, 야곱은 여기서 돌베게를 베고 노숙을 하다가 하나님을 만난 곳이지-”

벧엘은 유난히 신앙의 발자국이 많이 지나갔던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시간도 멈춰 버린 깊은 산속, 앞서가신 분들의 발자국은 찾을길 없고, 이름 모를 산새들의 울음소리만이 가끔씩 산의 적막을 깨고 있을뿐입니다. 처연한 심정으로 숲속길을 걷고 있던 왕의 눈에 저만큼 앞거리에 무심히 서있는 상수리나무가 보였습니다.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듯 외롭게 서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는 돌들이 수북하게 싸여있습니다. 그리고 그 돌무더기 위에는 나무판대기가 꽂혀있었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가보니 그건 비목(碑木)이였습니다. 오랜 비바람을 견디다 못해 거의 다 썩어가고 있는 나무로 만든 비석입니다.

우리는 비목이란 가곡을 압니다. 6.25가 휩쓸고 지나간 휴전선을 지키는 젊은 소위가 있었습니다. 소위는 공산군과 싸우다 죽어 누어있는 돌무덤을 발견합니다. 돌무덤에는 녹슨 철모가 걸쳐있는 나무십자가가 꽂혀있었습니다. 나무로 만든 비석-비목입니다. 망자의 이름도 없는 비목을 보고 젊은 장교는 이런 시를 썼습니다.

“초연이 쓸고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녁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 가
그리워 마디마다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파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그런데 벧엘 숲속의 돌무덤을 지키고 있는 비목에는 어렴풋이 “하나님의 사람의 무덤” 이라는 글자가 써있습니다. 섬뜩한 기분이 들은 왕은 주위를 둘러봤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무덤’이라니, 여기에 무슨 사연이 숨어있는 것 같은데, 경들 중에 아는 이가 없는고?”

이때 역사를 다루는 늙은 사관이 나서서 하나님의 사람의 무덤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오늘 “하나님의 사람의 무덤”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기원전 1053년에 사울이 세운 이스라엘은 다윗 왕조로 바뀌면서 솔로몬의 영광으로 국운을 크게 떨쳤습니다. 그러나 4대 르호보암왕때 남북으로 갈라지지요. 남왕국 유대는 겨우 2지파 소국이지만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있어 융성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10지파를 차지했지만 성전이 없습니다. 여로보암왕은 성전대신에 우상제단을 세워 국민들의 시선을 붙들어 두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중에 북쪽 단지파의 땅에 세운 우상제단과 예루살렘근처 벧엘에 세운 우상제단이 볼만했습니다. 여로보암왕은 틈만나면 벧엘의 우상제단으로 행차하여 분향하기를 즐깁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과 야곱이 하나님에게 제단을 쌓았던 거룩한 하나님의 제단 자리에 우상의 제단이 들어서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형벌이 무서워 어느 선지자 하나 이를 경고하거나 제지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때 유대의 남쪽 시골에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무명이라 그냥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느날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아, 너는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우상에게 분향하는 여로보암을 저지하고 경고하거라”

그는 벧엘로 올라가서 우상에게 분향하는 여로보암왕을 향하여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아라 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여호와의 말씀하신 예조라, 단이 갈라지며 그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여로보암왕은 분기탱천하여 손을 들어 외쳤습니다.

“당장 저놈을 잡아 능지처참하라”.

그런데 그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치켜들은 왕의 팔이 돌처럼 굳어져 병신이 돼버린 것입니다. 동시에 돌로 만든 우상제단이 갈라지며 재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졸지에 병신이 된 왕은 벌벌 떨며 용서를 빌었고 하나님의 사람이 기도해주자 감쪽같이 회복됐습니다. 감동한 왕은 그를 궁궐로 초청하여 크게 잔치를 배설하고져 했으나 하나님의 사람은 조용히 거절했습니다.

“제가 여기 올 때 하나님께서 명하셨습니다. ‘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떡 한조각 물한모금 마셔도 안된다. 갔던 길로 와도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임금님의 뜻은 고맙지만 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길을 찾아 벧엘의 숲속을 걸어 남쪽으로 걸어갔습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갑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행적은 순식간에 전국에 알려저 버렸고 그는 단번에 전국구스타가 됐습니다. 이때 벧엘근처 시골에 은퇴한 늙은 선지자가 무료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밭에서 일하던 아들들이 어디서 하나님의 사람이야기를 주어 듣고와서 아버지에게 알려줬습니다.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 늙은이답게 꾀를 냈습니다. 벧엘 숲속 상수리나무 아래 앉아 기다려 있다가 피곤하게 걸어오는 하나님의 사람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강녕하신가? 나도 은퇴한 하나님의 사람일세. 우리집으로 가서 쉬어감세”

“선배님의 뜻은 감사하오나 마시지도 말고 먹지도 말라는 하나님의 계시가 있어서 저는 갈수 없습니다”

늙은 선지자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사실은 나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나온 거라네. 간밤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젊은 하나님의 사람이 내 명령을 따르느라 며칠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여 아주 피곤한 몸으로 오고 있으니 너는 기다렸다가 네 집으로 영접하여 대접하라’ 는 계시를 받았다네”

두 사람 똑같이 계시를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지난밤에 받은 나중 계시가 더 가깝고 신빙성이 있는게 아닙니까? 감쪽같이 속은 하나님의 사람은 늙은 선지자를 따라 들어가서 떡 한조각을 입에 넣고 씹어삼킵니다. 그런데 그 순간입니다. 늙은 선지자에게 진짜 하나님의 예언이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아, 네가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으니 너는 정녕 죽으리라”

너무 놀란 하나님의 사람은 울면서 그 집을 나섰습니다. 상수리나무에 이르자 숲속에서 별안간 사자가 뛰어나와 하나님의 사람을 물어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먹지는 않는 것 이였습니다. 뒤 따라 나온 늙은 선지자는 장난기 어린 자신의 거짓말로 전도 유망한 하나님의 사람이 죽은걸 보고 가슴을 찢으며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만난 상수리나무아래에 돌을 수북하게 쌓아 돌무덤을 만들고 시신을 묻어줬습니다. 나무 판대기로 비석을 세웠는데 이름을 알수 있어야지요. 그래서 그냥 “하나님의 사람의 무덤”이라 썼습니다.

이상은 궁중사관이 요시아왕에게 브리핑한 하나님의 사람의 스토리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사람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너무 하십니다. 당신을 위하여 목숨 걸고 충성한 하나님의 사람이 떡 한조각 먹었기로서니 죽이기까지 하는건 너무한 것 같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인데 말입니다. 더구나 늙은 선지자에게 속아서 그런 것입니다. 죽이려면 거짓말을 한 늙은 선지자를 죽여야지, 왜 죄 없는 젊은 하나님의 사람을 죽입니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엄연히 성경에 나와 있는 기록입니다. 억울하고 가슴 아프지만 여기에서 교훈을 얻어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람은 “부름받아 나선 이몸”입니다. 이를 소명(召命-Call)이라고 하지요. 하나님이 유대남쪽 시골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죄악중에서 나를 부르시고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택하셨습니다. 내가 잘나서 내힘으로 하나님께 간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람은 어디던지 가서 무슨 일이던지 합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말입니다. 이를 사명(使命-Mission)이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사람은 죽음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는 벧엘로 올라가서 목숨걸고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요나처럼 제멋대로 딴 길로 가면 안됩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몸 어디던지 가오리다” 입니다. 성직뿐 아니라 직장도 사업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알고 맡은일 에 충성할 때 큰 축복을 받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람은 무덤을 남깁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왕을 회개시키고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충성스럽게 사명 완수했으니 부귀영화의 보상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에게 돌아온 보상은 죽음이었습니다. 그의 시체는 돌무더기에 묻혀 상수나무아래에 버려졌습니다. 억울합니다. 우리는 선을 행했기에 억울함을 당할때가 많습니다. 요셉이 그랬고 다니엘이 그랬습니다. 아니 신앙인들 모두가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예수님은 더했습니다. 죽은 후에 무덤조차 없어서 남의 무덤에 묻혔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역사는 억울한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하여 창조되고 발전됩니다. 일신의 영달을 버리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비명에 간 백범이나 안중근같은 독립투사들이 있어서 조국이 해방됐습니다. 삼팔선 전투에서 이름없이 죽어간 무명용사들의 무덤이 있기에 우리 나라가 6.25때 망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은퇴할 때 호텔만한 아카데미하우스를 남겼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은퇴할 때 10만명교회를 아들에게 남겨줬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은퇴후 70만명이 모이는 대형교회를 뒤에서 움직이는데 그 수입이 재벌급입니다. 큰교회에서 은퇴하여 원로목사 대접을 받고 연금을 받는 목사님들은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평생을 가난하게 목회 하다가 빈손으로 은퇴하여 죽은 후에는 무덤밖에 남길게 없는 목사님들은 더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역사는 수만명이 모이는 대형교회목사님들 때문에 유지되는게 아닙니다. 평생 가난과 고난속에서 목회를 하다가 이름없이 빛도없이 생을 마치는 하나님의 사람의 무덤 때문에 기독교사는 이어갑니다. 고난절 찬송가 “거기너 있었는가?” 는 가사만 읽어도 눈물이 남니다.

“거기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를 그 무덤속에 뉘일 때

오! 때로 그일로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넷째 하나님의 사람의 무덤은 영광의 무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행려병자의 시신처럼 상수리나무 아래 돌무더기속에 묻혀 버렸습니다. 무덤에 꽃을 꽂아 주는 사람도, 그의 죽음을 울어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무덤위로 뜬구름만 하염없이 흘러갑니다. 날라 다니던 새들이 가끔씩 상수리나무 가지에 앉아 무덤을 내려다보면서 무심히 울어대기만 합니다. 이름 모를 들꽃 몇송이가 아무렇게 무덤가에 피어있을 뿐입니다. 세월도 인심도 모두가 그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런 망각 속에서 세월은 230년이나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230년째가 되자 230년전 하나님의 사람이 예언한 대로 유대나라에 요시아왕이 나타났습니다(왕하23:15-20). 왕은 종교개혁을 일으켜 우상의 제단을 없애 버렸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벧엘숲속을 거닐다가 하나님의 사람의 무덤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관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람의 기막힌 사연을 전해들은 왕은 눈물을 흘리며 명령했습니다.

“여봐라! 하나님의 사람이 예언한 대로 벧엘의 우상제단을 모두 허물어 버리고 우상앞에 분향하던 제사장들의 뼈를 불사르거라.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의 무덤을 임금의 왕릉처럼 으리으리하고 영광스럽게 만들어 오고오는 세대에 만인들이 칭송하도록 하거라”

할렐루야! 하나님의 사람의 무덤은 영광의 무덤이 됐습니다. 부활의 아침이 되니 사망을 이긴 예수님의 무덤이 하늘 보좌에 이르는 영광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둡니다. 십자가를 지는 자는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찬송가 “거기너 있었는가”의 마지막 절은 너무 영광스러워 눈물이 납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가 그 무덤에서 나올 때

오! 때로 그일로 주께 영광 영광 영광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트위터로 보내기페이스북으로 보내기미투데이로 보내기 뉴스스크랩하기
돌섬칼럼섹션 목록으로
 

이름 비밀번호
 20161285  입력
댓글콘선택 : 댓글 작성시 댓글콘을 클릭하시면 내용에 추가됩니다.
[1]
뉴스홈 > 오피니언 > 칼럼 > 돌섬칼럼
다음기사 : 아내 몰래 (2014-11-29 19:35:53)
이전기사 : 아빠의 냄새 (2014-11-05 12:01:34)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회사소개 보도지침 저작권 규약 이용약관 사업제휴 직원채용 광고후원 기사제보 연락처 don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