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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11월10일 09시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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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창 13: 14-18절    11. 9. 14
 
하나님은 사람을 축복할 때 바라봄의 법칙을 사용한다. ‘바라봄의 법칙’이란 내가 원하는 것을 계속해서 집중해 바라보면 그대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사람이 어떤 것을 집중해 바라보면 원하는 것이 내게로 끌려오든지 내가 원하는 것에게 끌려간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것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소원하면 그것을 사랑하게 되고 그것을 닮게 되며 그것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게 되고 마지막엔 그것을 갖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은 사람들을 축복하기 전에 먼저 축복의 그림을 보여주시고 그것을 바라보게 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밤하늘에 별들을 보여주시며 ‘내가 네 자손들을 저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 주겠다’고 하셨다. 그때부터 가나안의 Bedouin(베두인) 아브라함은 밤마다 중동의 낮고 맑은 밤하늘에서 지금이라도 쏟아질 것 같이 영롱하게 빛나는 수백, 수천, 수만 개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별처럼 많이 주실 자손들을 생각하며 기다렸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열한 개 곡식 단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과 해와 달과 11개의 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보여주시고 요셉으로 그것을 바라보게 함으로 모든 시련과 아픔, 고난과 유혹들을 이기며 하나님의 축복을 기다리게 하여 13년 후엔 그가 바라보던 개인적인 꿈을 이뤄주셨고, 22년 후에는 요셉이 바라보며 기다려왔던  일생의 모든 꿈이 다 이뤄지게 하셨다.
 
그다음 하나님은 모세와 다윗에게 지어질 성막과 성전을 미리 보여주어 그것을 바라보게 하셨고, 욥과 이사야, 에스겔과 다니엘, 베드로와 바울, 사도요한에게 주님의 지상 재림과 천년왕국, 새 하늘과 새 땅을 미리 보여주시고 그것을 책에 기록하게 하여 기다리게 하셨으며,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계시를 보여주시며 미래의 축복들을 보여주시고 그것을 믿고 기다리게 하신다. 이렇게 하나님은 역사에서 시대마다 바라봄의 법칙으로 사람을 축복하셨다.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영웅인 에녹과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와 다윗, 엘리야와 다니엘 같은 사람들은 성품들이 강직하고 신실한 사람들이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여주신 꿈과 계시와 환상의 기록이 몇 번 안 됐어도 큰일을 이뤘지만 내 경우엔 같은 내용의 꿈이나 음성이나 계시나 환상을 적게는 서너 번, 보통은 6-7번을 반복해서 그리고 어떤 것은 내가 그것을 잊을만하면 반복해서 열 번, 스무 번, 설은 번 이상까지 같은 내용으로 보여주셨고 심지어 어떤 것은 수백 번을 보여주거나 음성을 들려주신 것을 보면 아마 나는 믿음도 약하고 변덕이 많으며 의지가 약하기에 불쌍히 여기셔서 그런 것이라 생각이 든다. 그렇게 바라봄의 법칙으로 이끌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눈을 들어 동서남북(東西南北)을 바라보라!
 
   1. 네 눈을 들라!
 
아브라함은 불의의 사고로 아내 사라를 바로에게 내주고 바로와 처남매부가 된 대가로 갑자기 졸부(猝富)가 된다. 바로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양과 염소, 나귀와 약대, 소와 수많은 종들 그리고 많은 금과 은을 선물 받아 거부가 됐다가 하나님의 간섭으로 애굽을 떠나면서 그 많은 짐승과 종들과 빼앗겼던 부인까지 데리고 유대의 남쪽 네게브지방(The Negev: 창 13:1)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얼마 후 거처를 벧엘로 옮긴 아브라함은 갑자기 늘어난 짐승과 종들 때문에 좋은 풀밭목장과 마실 물 문제로 조카 롯과 갈등을 겪게 된다. 이렇게 자기의 종들과 롯의 종들 간에 서로 다투는 일이 많아지자 아브라함은 어느 날 조카 롯에게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가 오늘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네가 먼저 좋은 땅을 차지하라”며 분쟁 해결책을 제안한다. 
 
선택의 우선권을 받은 롯이 ‘삼촌이 먼저 좋은 땅을 취하시고 나는 나중에 선택 하겠다’고 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요즘 재산과 돈 욕심에 이성을 잃은 사람들이 상속문재로 형제들끼리 철천지원수가 되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까지 일어나며 심지어 자기가 사랑하는 자식에게 유산상속을 주기위해 노부부가 황혼이혼까지 하는 일까지 있듯, 롯도 욕심 때문에 지금까지 부모처럼 자기를 길러주고 보살펴준 아브라함을 배반하고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하고 종들과 함께 아브라함을 떠난다.
 
‘삼촌이 먼저 땅을 선택하시라’ 해도 양보했겠지만 막상 롯이 인정사정 보지 않고 자기 욕심 챙겨서 뒤도 안돌아보고 황망히 떠나버리자 아브라함은 실망감과 배신감, 허무함과 서글픔의 감정들이 걷잡을 수 없었다. 조카에게 처형당한 장성택의 마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마 ‘머리털 검은 짐승은 도와주지 말라’는 말과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정말 모르는 일이라’며 서글퍼 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바위에 걸터앉아 저 멀리 나무와 풀이 울울창창하고, 굽이굽이 흘러가는 물이 넉넉해 에덴동산 같고 애굽 땅 같이 비옥한 평야목초지 소돔 땅을 향해 짐승과 종들을 데리고 약대 타고 멀어져가는 롯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제 이후 자기가 선택해서 가야할 반대편 황량한 사막 땅을 바라보며 착잡한 마음으로 한숨 쉬고 있을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너는 눈을 들어(Now lift up your eyes)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Look from the place where you are, 
northward and southward and eastward and westward. 
보이는 땅을 내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For all the land which you see, 
I will give it to you and your descendants forever고 하셨다.
 
그렇다. 눈을 들라! Lift up your eyes! 당신의 눈을 들어라. 오늘도 하나님은 눈을 멀리, 높이 드는 사람을 축복하신다. 성경에 619회나 언급된 눈(Eye)이란 단어에서 ‘눈을 드는 것’이란 영적인 의미는
 
   ❶ 정신을 집중하는 것(대하 7: 15)
 
하나님은 솔로몬의 애절한 성전봉헌기도를 들으시고 “내가 네 기도에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겠다.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이 성전 위에 있으리라”(My eyes and My heart will be there perpetually)고 응답하시므로 눈을 드는 것은 정신을 집중하는 것임을 의미했다. ‘정신일도 하사불성’(정신을 집중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이란 말이 있다. 밤에 태산같이 거대한 호랑이가 달려들어 정신을 집중해 활을 쏘았더니 화살에 맞은 호랑이가 통나무 쓰러지듯 넘어졌는데 아침에 보니 호랑이가 아니라 큰 바위였다는 고사이다. 오늘 ‘눈을 들어’ 흐트러진 마음을 모으고 약한 마음을 강하게 집중하므로 축복의 사람이 되기를 축원한다.
 
   ❷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고 기다리는 것(시 123: 1-2)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To Thee I lift up my eyes.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 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
 
그렇다. 눈을 드는 것은 시편저자의 고백처럼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눈을 들라’(Lift up your eyes)고 한 것은 네가 믿고 의지했던 골육형제까지도 네 곁을 떠났지만 나는 너와 함께할 것이니 너는 나를 바라보고 나의 긍휼만 기다리란 말씀이다. 
 
버지니아 주정부 허락을 받았던 신학대학 인가가 맡겼던 담당자의 관리소홀로 취소된 후, 2011년에 메릴랜드 주정부에 대학인가 신청을 다시 하고 기다려왔던 지난 2년 반 동안은 나에게 상당히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들이었다, 무엇보다 가까웠던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과 핍박이 힘들었다. 가까운 동료마저도 ‘아무리 노력해도 대학인가는 절대로 안 나온다’, ‘김엘리야 목사는 거짓말쟁이요 사기꾼이다’며 비난하고 내 곁을 떠나갔다. 심지어 기도를 많이 해 예언을 한다는 사람들까지 나타나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며 대학인가는 물 건너갔다고 했다.   
 
그 동안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새벽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며 ‘내 눈을 들어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며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까다로운 서류심사로 가슴조이는 날도 많았고, 서류가 Back and Forth하면서 울고 웃는 시간도 많았으며, 그래서 다른 학교의 분교설립까지도 섭외하는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지만 하나님의 축복으로 마침내 지난 10월 24일(금요일)에 대학인가허락을 받았다. 아픔과 시련 중에서도 낙심치 않고 내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긍휼을 기다린 것을 응답해주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눈을 들어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자마다 나와 같은 응답을 받는 역사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❸ 죄를 징벌하는 하나님을 보는 것(대상 21: 16)
 
        “다윗이 눈을 들어 보매(David lifted up his eyes and saw)  
여호와의 사자가 천지 사이에 섰고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예루살렘 편을 가리켰는지라...”
 
다윗은 자기 자랑과 자기과시의 교만으로 인구조사를 하다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사흘 동안에 급성온역으로 7만 명이 죽임을 당하는 국난 중에서, 눈을 들어 천지 사이에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들고 예루살렘을 진멸하려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번제를 드렸다. 그렇다. “눈을 든다”는 의미는 하나님은 죄와 타협치 않으시고 죄는 가차 없이 징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마음에 새기라는 말씀이다.
 
   ❹ 만물의 창조자, 권능의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사 40: 25-26)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 
너희는 눈을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보라
    (Lift up your eyes on high, and behold who has created these things?)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인간이 눈을 들어 주시하고 바라봐야 할 분은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뿐이시다. 천지간에 창조자 하나님 외에 그 어떤 인간이나 신도 내 눈을 들어 바라볼 가치가 없다. 하나님만이 우리가 눈을 들어 바라볼 존재이시다. 눈을 들어 만물의 창조자, 권능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❺ 하나님의 일을 자세히 보라는 것(사 49: 18)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Lift up your eyes and look around)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로 
장식을 삼아 몸에 차며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 
  
     
본문은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70년 만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을 눈을 들어 보라는 말씀이고 궁극적으로는 천년왕국이 시작되는 종말에 칠년 대환난이 끝나고 전 세계에 흩어져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이스라엘과 유대 백성이 본토로 돌아오는 것을 눈을 들어 보라는 말씀이다. 성경은 “혹자는 원방에서, 혹자는 북방과 서방에서, 혹자는 시님(Sinim: 이사야 시대엔 중국을 시님으로 불렀다) 땅에서 오리라”(사 49: 12)고 했다. 세계각처에서 이스라엘이 돌아올 것의 예언이다. 
 
그렇다. 우리 눈을 들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 말씀한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눈을 들어 복의 근원, 생명의 근원, 창조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망하지 않는다. 눈을 들어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언약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망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위에 걸터앉아 낙심하여 ‘땅이 꺼져라’ 한숨 쉬는 아브라함에게 Lift up your eyes!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김 집사(송 권사, 최 장로...)에게 눈을 들라고 하시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사관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장교와 결혼하여 남편과 함께 사막부대에서 신혼생활을 하게 됐던 어느 자매의 이야기이다. 도시생활에만 익숙했던 자매에겐 낮선 생면부지의 사막 끝자락에 있는 군인부대 생활이 견디기 힘든 신혼생활이었다. 매일 거칠게 불어대는 사막바람에 모래가 집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입는 옷이나 먹는 음식도 모래 때문에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사막에 있는 군인부대라 먹을거리 놀 거리도 변변치 않았고 사귈 친구도 별로 좋지 않은 환경이라 군인으로 성공하려던 젊은 부부는 신혼의 단꿈마저 깨질 판이었다.
 
처음에 얼마 동안은 참고 견뎠지만 몇 달을 이렇게 지내는 동안 의욕을 잃게 된 자매는 4성장군인 아버지에게 군대생활이 좀 더 편한 곳, 환경이 좋은 다른 부대로 자기 남편을 옮겨 달라고 장문의 편지를 썼다. 그런데 좋은 소식을 기다리던 자매는 얼마 후 아버지로부터 짧은 답장을 받았는데 아버지는 “벌레의 눈을 가진 자는 망하고 새의 눈을 가진 자는 흥 한다”는 말로 딸에게 답장편지를 보냈다. 좋은 소식을 기다렸던 딸은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처음에 실망이 컸고 아버지가 야속했었지만 마음을 다잡아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벌레의 눈을 가지고 땅만 처다 보며 어려운 환경 앞에서 한숨 쉬고 낙심할 것이 아니라 새의 눈을 가지고 새롭게 도전하자”고 결심한 자매는 그때부터 자기가 대학에서 전공한 글 쓰는 재주를 살려서 도시에서 느낄 수 없었던 사막의 새벽과 낮과 밤, 사막의 꽃과 곤충, 사막의 바람에서 눈과 비와 천둥까지 매일 주옥같은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3년 동안의 부대생활을 마치고 도시로 나와 그동안 썼던 글을 책으로 출판해서 많은 돈과 명예를 얻게 된 자매는 “벌레의 눈을 가진 자는 망하고 새의 눈을 가진 자는 흥 한다”는 아버지의 충고를 감사했다고 한다.
 
그렇다. 당장 눈앞에 것만 바라보는 근시안적인 벌레의 눈을 가진 사람은 인생을 성공할 수 없다.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원시안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만이 인생을 정복하는 사람이 된다. 눈을 들어 멀리 보는 꿈의 사람 되기를 축원한다.
 
   2. 동서남북(東西南北)을 바라보라. 
 
아브라함에게 눈을 들라고 하신 하나님은 두 번째로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東西南北)을 바라보라”(Look from the place where you are, northward and southward and eastward and westward)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기계인형 Robert가 일정한 시간에 따라 동서남북으로 작동해 움직이면서 사람들에게 절하거나 권투선수가 링 위에서 동서남북으로 방향을 바꾸며 청중들에게 인사하는 그런 목적이 없거나 기계적인 응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신 것에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다. 동서남북의 성경적인 의미, 동서남북을 바라보라는 성경적인 의미를 알아본다.
 
   ⓐ 동쪽, 동방(The east, Eastward)의 의미
 
성경에 197회 언급된 동편, 동쪽, 동방은 ‘에덴 동쪽’(창 2: 8)에서 천년왕국 때에 오염된 세상을 새롭게 하며 살리는 생명수강물이 예루살렘 천년왕국성전 동쪽 문지방 밑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씀(겔 47:1)까지 많은 기록을 볼 수 있다. 그 중에 대표적으로 'The east'(동방; 욥 1: 3)라고 일곱 번 사용된 동쪽과 동방나라(7 uses of "The East")를 통해 동방과 동쪽의 의미를 알아본다.
   ① 아브라함이 두 번째 부인 그두라를 통해 낳은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 여섯 아들에게 가족의 평화를 위해 이삭을 떠나 살게 한 동방(東方)이다.(The country to which Abraham sent his other sons away from Isaac: 창 25: 6) 그래서 동쪽을 바라보라는 영적의미는 무엇보다 “가정의 평화, 형제의 화목을 중시하라”는 말씀이다. 가정평화, 형제우애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시작된다.
 
   ②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창 24: 10, 29: 1) 아브라함의 옛날고향이며 며느리 레베카를 구해온 지역이니 그래서 동쪽을 바라본다는 의미는 “옛날을 기억하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도 “네가 종 되었던 애굽을 기억하라”고 누누이 말씀하심으로 과거를 잊지 말라고 경계하셨다.
 
   ③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악을 행할 때, 미디안과 아말렉과 함께 이스라엘을 쳐들어와 약탈하고 괴롭힌 사람들이 동방 사람들이다(The place men came from who co-operated with the Midianites and Amalekites: 삿 6: 1-6, 33, 7: 12, 8: 10) 그러므로 동쪽을 바라보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악을 행치 말라”는 말씀이다. 
 
   ④ 예수님을 경배하러 왔던 동방박사들의 고국이며 지혜 있는 자들이 많았던 지역이다.(The country where wise men came from: 왕상 4: 30, 마 2: 1) 아브라함에게 동쪽을 바라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의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⑤ 욥이 살았던 동방(The country of Job; 욥 1: 1-3)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우리에게 동쪽을 바라보라는 성경적 의미는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 살라”는 말씀이다.
 
   ⑥ 동방(The East)은 메데와 바사, 앗수르와 바벨론을 가리킨다(The lands of Media, Persia, Assyria, and Babylon; 사 2: 6, 11: 14, 41: 2, 46: 11, 렘 49: 28, 겔 25: 4, 10) 역사적으로 이 나라들은 제국을 이어가며 대대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침략하고 압박하며 학대하고 괴롭혔던 나라들이니 구약의 아브라함과 오늘 우리에게 동쪽을 바라보라는 말씀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두루 찾고 있는 원수 “마귀들을 대적할 수 있도록 늘 깨어 있으라”는 의미이다. 
 
   ⑦ 장차 대환란(大患亂)때에 적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싸울 동북부의 나라들이다.(The countries east of the Roman empire that will fight against the future Antichrist; 단 11: 44) 이 나라들은 지구 종말에 온 세계가 적그리스도에게 복종하거나 동맹을 맺을 때, 끝까지 적그리스도와 동맹을 맺지 않고 오히려 아마겟돈 전쟁이 끝날 무렵에 적그리스도를 공격하는 나라들이다. 
 
아브라함이 동쪽을 바라보고 말세를 사는 우리에게 동쪽을 바라보라는 영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들을 남겨두셨고 아세라에게 입을 맞추지 않은 자들을 숨겨두었으니, 적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너처럼 같은 고난을 당하는 자들이 많이 있을 테니 “너도 용기를 내어 끝까지 신앙을 지키라”는 말씀이다.
        
   ⓑ 서쪽, 서방(The west, Westward)의 의미
 
성경에 96번 언급된 서쪽, 서방에서 ‘서쪽을 바라보라’는 의미는 “예수님의 용서, 그리스도의 죄사해주심을 바라보라”는 의미이다. 성경은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다”(As far as the east is from the west, so far has He moved our transgression from us; 시 103:12)고 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죄인들이 성전의 동쪽 문으로 들어와 속죄의 제사를 지내고 서쪽 문으로 나갔는데 동쪽 문으로 들어올 때는 죄인이던 사람이 서쪽 문으로 나갈 때는 용서받은 사람이 됐던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죄과(Transgression, 페솨)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신적권위에 도전하는 행위의 결과'라는 뜻으로 “심각한 죄악”을 의미한다. 그래서 ‘서쪽을 바라보라’는 말씀은 그러한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 심각한 죄인이라도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믿고 ‘예수이름을 바라보라, 너희 죄과가 흰 눈처럼 희게 용서함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 남쪽, 남방(The south, Southward)의 의미
 
나는 지난 40년 미국생활 중에 미국 땅을 동서로 평행선과 대각선으로 왕복 6번, 서부 중부 동부를 남북으로 왕복 3번을 자동차로 대륙횡단을 하면서 45개 주 이상을 다녀봤고, 내가 살았던 도시들과 미국의 대도시를 거의 다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몇몇 도시 외에는 대다수 도시들이 북쪽은 부자들과 부유층이 살고, 남쪽은 개발이 덜돼 가난한 사람들과 영세민들, 흑인들과 히스패닉들이 살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그 이유를 지금까지도 알지 못한다. 
 
성경엔 남방, 남쪽이란 단어가 167회나 언급됐는데 '남쪽을 바라보라'는 영적인 의미는 여러 가지 중 ①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보라는 의미이다(슥 9: 14)   
 
        “여호와께서 그 위에 나타나서 그 살을 번개같이 쏘아 내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리시며 남방 회리바람을 타고 행하실 것이라” 
  
이 말씀은 지구 종말의 아마겟돈 전쟁 때,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공격할 적그리스도와 그의 군대를 향해 지상에 재림하실 예수님께서 남방 회리바람(Whirlwinds of the south; The storm winds of the south)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을 도우실 것이란 말씀이다.   
 
   ②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라.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               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               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 42, 눅 11: 32)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멀고 먼 땅 끝, 남방에서 찾아왔는데 지금 너희는 너희와 함께 있는 솔로몬보다 더 크고 지혜로운 나의 말을 듣질 않으니 심판 날에 심판의 법정에 스바 여왕을 세워 너희를 정죄하겠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남방을 바라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라는 말씀이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실 것”(전 12: 14)을 마음에 생각하며 사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 북방, 북쪽(The north, Northward)의 성경적 의미
 
성경엔 북방, 북쪽이란 단어가 158회 기록됐는데 그 많은 단어 중에 북쪽, 북방이 가리키는 영적인 의미는 ① 북방은 천국,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곳이다(욥 37: 22, 사 14: 13) 타락한 루시퍼는 북방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 보좌를 넘보다가 저주를 받고 파멸 당했다. 그러므로 북방, 북쪽을 바라보라는 말은 “천국을 바라보라”, 교만하다가 타락하여 하나님께 버림받을 것이니 “교만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② 시온 산이 있는 곳이다(시 48: 1-2)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北方)에 있는 시온산이 그리하도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북방의 시온산을 바라보고 살라는 말씀으로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살라는 말씀이요, 예수님의 정결한 신부로써 바른 신앙을 지키며 살라는 말씀이다(히 12: 22, 계 21: 2, 고후 11: 2-3)
 
   ③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곳(겔 1: 4-28)
에스겔은 하나님이 계신 북쪽 하늘로부터 거대하고 장엄하며 아름답고 두려운 하나님의 영광이 자기가 있는 바벨론의 그발 강변 포로수용소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천지를 가득 채운 하나님의 영광 안에는 네 생물과 생물의 신이신 성령, 그리고 영광스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하나님과 하나님을 호위한 천군천사들이 있었다. 
 
그렇다. 북쪽은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곳이다. 사람을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인류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계신 곳(시 75: 5-7)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북쪽을 바라봐야 했고 오늘 우리도 그 북쪽을 바라보아야 한다. 신발 거꾸로 신고 아브라함을 떠나간 괘씸한 배반자 롯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나를 높여주실 재판장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김 엘리야 목사야, 너는 눈을 들고 동서남북을 바라보아라!”, “주기도문 교회와 성도들아,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봐라!”, “박 집사, 남 장로, 서 권사야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봐라” 이제부터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는 자들이 되길 축원한다.
 
동서남북을 바라보되 ❶ 균형(均衡)있게 바라볼 것이다. 동쪽으로나 서쪽으로, 남방으로나 북방의 한 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균형이 있게 바라볼 것이다. 동서남북 어디든지 세상일이든 영적인 일이든, 좋은 일과 나쁜 일, 장점과 단점이 있다. 음식을 맛있는 것만 먹는다고 건강한 것이 아니라 골고루 먹어야 건강하듯 신앙도 삶도 균형이 있어야 건강하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균형이 있는 신앙관, 역사관을 가질 수 있기를 축원한다.
 
   ❷ 정복자(征服者)의 눈으로 바라보라. 책상 앞에 자기가 존경하는 대통령이나 기업가, 정치가나 목사님의 사진을 붙여놓고 날마다 바라보며 그런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청소년처럼, 홀컵(Hole cup)에 공을 넣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여 그린을 살펴보는 골퍼처럼 집중력을 가지고 정복자의 마음으로 동서남북을 바라볼 것이다.
 
   ❸ 분별(分別)하여 바라보라. 세상만사, 동서남북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있다. 유익한 것과 무익한 것,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그리고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다. 그리스도도 있고 적그리스도도 있다. 그래서 거룩한 지혜로 이것을 분별하며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 중에 어떤 것은 취해야하고 어떤 것은 포기해야 한다. 어떤 곳은 반드시 가야하고 어떤 곳은 가지 말아야 하는 곳이 있다. 어떤 일은 해야 하고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는 말씀은 네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분별해서 선택하라는 말씀이다.
 
   ❹ 가능성(可能性)을 가지고 바라보라. 지금 아브라함의 눈앞에 보이는 동서남북은 들판의 잡초와 황량한 사막과 몇 포기의 풀과 나무 그리고 몇 마리의 짐승들뿐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권을 뛰어 넘으면 가까이는 가나안 땅의 사방지경(민 34: 1-12, 겔 47: 13-20)인 이스라엘의 동서남북 사방경계들이 나온다. 그러나 가나안 국경을 지나 더 멀리 보면 동쪽으로는 이락과 이란 인도와 중국 한국까지의 아시아 대륙과 서쪽으로는 지중해와 스페인 영국, 유럽에서 미국까지, 남쪽으로는 홍해를 지나 고대 세계문명의 발상지 검은 대륙 아프리카 까지, 북쪽으로는 가까운 시리아에서 북쪽의 끝 러시아까지 전 세계가 펼쳐진다. ‘동서남북을 바라보라’는 것은 그런 무한한 가능성을 보라는 말씀이다. 
      
9년 전, 처음으로 캄보디아 씨소폰에 선교를 갔었다. 지금은 씨엠립 국제공항에서 씨소폰이 1시간 반 정도면 갈 수 있지만 그때는 도로포장이 안 돼 4-5시간이나 걸렸다. 진흙탕 길은 우리나라 60년대의 시골길처럼 반은 진흙이고 반은 물인데 가다가 물이 많은 데선 택시기사가 차에서 내려서 어디로 가면 물에 빠지지 않을까 길을 살펴보고 다시 운전을 할 정도로 도로형편이 열악했다. 그러다가 잘못해 진흙탕에 빠지면 손님이 차에서 내려 차를 밀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새벽 3-4시에 도착해 잠간 눈을 부쳤다가 시끄러운 소리에 일어났는데 고성능 확성기로 앞에 절에선 염불소리, 뒤에 모스크(Mosque: 회교사원)에선 모슬렘 특유의 Salat(기도) 소리로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일어나보니 모기에게 물려서 생긴 붉은 반점이 53군데나 있었다. 그것이 캄보디아 선교 신고식의 시작이었다. 
 
선교사 두 명에 학생 30여명, 열악한 음식과 수준 낮은 문화생활이 9년 전, 캄보디아 선교현황이었다. 그래서 나의 첫인상은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별천지에 온 것 같았고 이런 곳에서 과연 선교가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지만 48년 전 내 목회 시작도 그것보다 훨씬 더 못한 환경에서 시작했었기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며 선교를 시작했다.  
 
9년이 지난 이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30명이 넘는 열정적인 선교사들과 300여명의 학생들이 새벽 5시부터 밤 10시까지 기도와 찬양과 예배와 말씀 그리고 전도 등 세계 어디서도 보기 힘든 열정적인 신학교로 발전하고 있다. 원래는 성경 200독을 해야 졸업하는 것으로 약속하고 입학을 받아주었는데 200독 이상을 하고 졸업한 학생도 있겠지만 최소한 50번 이상은 통독하고 졸업하는 것으로 짐작 된다. 
 
9년 전에 나는 캄보디아에서 50년 전에 아무 소망이 없던 한국의 서울 변두리 시골 땅에서 흙이나 파서 농사지으며 살다가 끝내야 할 나를 그 진토(塵土)에서 건지시고 거름 무더기에서 들어 세워서 오늘처럼 존귀케 하신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가 그곳에 있기에, 그리고 저들도 먼 훗날 천국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한 식구로 주님을 섬길 나의 형제자매들이기에 그들이 사랑스러웠고 그래서 눈에 보이는 현실 보다는 '가능성을 보고' 나도 주님이 힘주시는 대로 헌신하려고 다짐했는데 10년이 안 돼 하나님이 하신 큰일을 보게 됨을 감사한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적을 만든 그들처럼 말씀 안에서, 가능성을 보고 동서남북을 바라보는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동서남북(東西南北)을 바라보라! 남이 하다가 망했다고 같은 장소의 당신 가게가 망하지 않는다. 당신이 하나님과 관계가 바로 서있는 이상 당신은 축복의 사람이 된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지 말라. 가시권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축복하실 무한한 가능성을 보라.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의 가능성을 제한하지 말라. 성경은 미래세계의 Road Map이다. 10년 후, 50년 100년 후, 1000년 만년 영원까지의 설계가 그려져 있는 책이다. 말씀과 성령 안에서 아브라함처럼 동서남북을 볼 수 있는, 미래를 볼 줄 아는 안목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기를 축원한다.
 
   3. 땅을 밟아라.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믿음의 성도들은 누구나 한 두 번씩 “땅 밟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사고 싶은 자동차나 가게, 맘에 드는 집을 살 수 있게 해달라며 집과 가게와 Auto-park를 돌면서 ‘땅 밟기’를 했을 것이다. 나도 12년 전, 주기도문교회 성전 터를 구입할 때, 땅은 마음에 드는데 자금부족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주인이 집과 땅을 팔려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 더 문제였다. 그래서 심방을 마치고 멀리 돌아가야 할 것도 일부러 차를 몰고 이곳을 찾아와 땅을 한 바퀴 돌면서 기도하고 돌아가고, 시간 나는 대로 새벽이나 밤이나 이곳을 찾아와 ‘땅 밟기’를 하면서 기도를 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완고한 주인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면서 융자문제까지도 Owner's Financing으로 해결 해주시므로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다. 
 
아브라함에게 세 번째로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땅을 밟아라!’는 ‘땅 밟기’였다. 옛날 시골에서는 집을 지을 때 ‘땅 밟기’를 했다. 땅을 다지는 Roller도 없고 쇠 덩어리도 구하기 힘들 때, 시골에선 돌절구나 큰 바윗돌을 든든한 줄로 묶고 사방에서 동시에 줄을 당겼다가 놓으면 기막힌 '땅 밟기'가 됐다. 그리고 보리나 밀도 겨울에 '땅 밟기'를 해주어 뿌리가 잘 내리고 자랄 수 있도록 해주었고, 논두렁도 땅 밟기를 해주어 물이 새거나 둑이 무너지지 않게 해 주었다. 그래서 땅 밟기는 옛 사람들의 삶의 지혜이다.
 
하나님도 이스라엘에게 땅 밟기를 명령했다. 여호수아에게 여리고 땅을 밟으라고 명령하셨고, 제사장들에게 요단강을 밟으라고 명령하셨으며, 베드로에게 물 위를 밟으라고 명령하셨다. 땅 밟기 명령이다. 이렇게 땅 밟기는 축복의 절대조건이다. 아브라함에게 땅 밟기를 명령하신 본문 17절을 보자.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縱)과 횡(橫)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Arise, walk about the land through its length and breadth,
 for I will give it to you. 
 
하나님의 지시대로 아브라함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정신 나간 사람처럼 종과 횡으로 걸으며 ‘땅 밟기’를 했다. 그날 아브라함이 밟은 땅은 기껏해야 가로와 세로, 종과 횡으로 직경 20m, 30m 미만이었을 것이다. 3년이나 4, 5년에 걸쳐서 그 넓은 가나안 땅 전체를 밟고 다닌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날 아브라함의 땅 밟기를 가나안 땅 전체를 밟은 것으로 인정했다. 
 
그렇다. 오늘 우리는 맘에 드는 사업체나 가게를 돌며 땅 밟기를 하거나 사고 싶어 하는 교회 장소를 돌면서 땅 밟기를 한다. 그리고 많은 선교사들이 복음전도가 봉쇄된 무슬림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땅 밟기를 한다. 
 
1980년대에 나도 한때 꿈을 가지고 둘레 60마일의 애틀랜타 Belt-way 고속도로를 일주일에 한 번씩 자동차로 돌면서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느웨 성과 크기가 같은 애틀랜타를 회개시킬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축복으로 애틀랜타에서 큰 부흥의 축복을 경험했었다. 우리들이 믿음으로 하는 몸으로 땅 밟기, 자동차로 땅 밟기는 모두 의미 있고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교회장소와 가게, 사업체나 선교지역을 걸어서 돌고 차를 타고 돌며 비행기 타고 도는 ‘땅 밟기’도 중요하지만 ‘기도로 땅 밟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자기가 있는 곳에서 종과 횡으로 사방 20m, 30m의 땅을 밟으면서 그 마음의 기도는 끝이 안 보이는 광활한 가나안 땅을 그리며 밟은 것을 하나님은 그의 믿음으로 인정해 주셨듯이 오늘 하나님은 여러분이 기도로 땅 밟는 것을 그대로 인정해 주신다. 그러므로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해 남긴 발자국만 땅 밟기가 아니고 톨스토이의 단편소설에서처럼 땅을 욕심낸 사람이 땅을 밟다가 지쳐죽은 것만 '땅 밟기'가 아니다. 우리의 땅 밟기는 40일 동안 가나안 땅 밟기를 했다가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멸망한 이스라엘의 땅 밟기 보다는 노아처럼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땅 밟기를 해야 한다. 그래서 진정한 땅 밟기는 ‘기도의 땅 밟기’이다. 여러분의 믿음의 기도가 닿는 곳마다 거룩한 흔적, 당신의 발자국이 남는다. 육신의 땅 밟기보다 기도의 땅 밟기가 더 중요하다. 기도로 땅을 밟지 않으면, 가족구원도 남편구원도 아내와 자녀구원도, 영주권해결과 사업의 기적적인 축복도, 건강의 축복과 신령한 은혜도 없다. 야베스처럼 기도로 자신의 지경을 넓힐 것이다. 땅 밟기로 여리고를 정복한 여호수아의 기적들이 기도로 땅을 밟는 여러분에게도 많이 나타나기를 축원한다.    
 
   4. 예배 성공으로 축복을 받자.
 
아브라함의 축복의 비결은 무엇보다 예배성공이었다. 그렇다. 성도들의 축복은 예배성공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너는 눈을 들어라,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아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횡으로 걸어보라”는 지시를 다 따랐지만 예배성공이 없었다면 아브라함에겐 세상적인 성공은 있었을지라도 신앙적인 성공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여러분이 눈을 들어서 새의 눈을 갖고 세상을 살고, 불타는 꿈을 가지고 동서남북의 땅을 바라보며, 그 땅을 신념으로 밟고 뛰면 세상에 하나님 없이도 성공하는 사람들처럼 당신도 성공과 출세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성공은 외줄타기의 위험한 성공이다. 두 선의 레일(Rail) 위를 달리는 기차처럼 안전한 성공이 아니다. 이러한 하나님 없는 외줄타기 성공은 인간이 한계상황을 만날 때, 끓는 물에 얼음처럼 힘없이 무너져 버린다. 그래서 예배에 성공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 축복의 사람 아브라함을 보자.
 
"이에 아브라함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檀)을 쌓았더라."(18절)
                    There he built an altar to the Lord.
 
그렇다. 아브라함은 헤브론으로 거처를 옮긴 후 하나님을 예배했다. 조카 롯이 살기 좋은 소돔 땅으로 가서 성공하여(창 19:1) 죄악생활에 젖어 사는 동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예배생활로 자기의 인생을 걸었던 것이다. 
 
“예배(禮拜)로 인생(人生)을 걸자!” 
 
성경 어디를 봐도 롯이 하나님께 예배하며 제단을 쌓았다는 말이 없다. 열심히 일하고 사람들과 교제하므로 성공해서 출세했다는 말씀은 있어도 롯이 그 가족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며 제단을 쌓았다는 말씀은 없다. 유황 불 심판을 피해 소알 성으로 피신한 딸들이 술을 가지고 도피하고 아버지에게 독한 술을 먹여 만취하게 한 후 아버지와 근친상간으로 임신한 것으로 볼 때 자녀교육까지도 실패했다. 세상 성공은 했어도 신앙은 실패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벧엘에서 조카 롯과 헤어질 때,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며(창 13: 3-4) 송별식을 했고, 친 아들같이 정을 주고 키웠던 롯과 마음 아프게 헤어진 후 헤브론으로 거주지를 옮겨서도 예배생활로 새 삶을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예배생활을 통해 신령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아브라함은 그 나이 84세에 가솔 중 건강한 청년 318명을 선출해 틈나는 대로 그들과 함께 전쟁을 훈련하고 준비하므로 훗날 네 나라 북부 메소포타미아 동맹군의 침략을 격퇴하고 포로로 잡혀갔던 여섯 나라 중립국 거인 족속들과 조카 롯과 그 가솔 그리고 다섯 나라 남부 사해 동맹군까지 구출해 ‘Gladiator Abraham’, ‘남부 특공대(特攻隊)의 영웅(英雄)’, ‘Great Warrior Abraham’, ‘영웅 아브라함 사령관’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철저한 예배생활에서만 받을 수 있는 특별한 하나님의 계시와 축복이다. 오늘 육신적으로 영적으로 잘되고 인생을 성공하기 원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에 성공하라. 무엇보다도 예배에 우선순위를 두라. 예배에 All-in(All inclusive)하라. 모든 일을 예배 다음에 하라. 예배에 빠지지 말고 예배에 늦지 말고 졸지 말며 예배를 철저히 드려 예배를 성공하라. ‘먼저 예배(禮拜), 그다음 사업(事業)’의 사람이 되라.
 
예배의 사람으로 예배를 드리되 앞은 잘라 먹고 뒤는 떼어 먹지 말라. 작은 생선은 어두일미(魚頭一味)고, 큰 물고기 고래와 상어는 꼬리가 최상의 강장제 기호품이며, 생선의 중간부분은 맛이 있고 먹기 좋아 누구라도 좋아하는 부분이듯 예배(禮拜)는 묵도에서 축도까지 찬양, 기도, 말씀, 감사 그리고 성만찬까지 어느 한 부분이라도 소홀(疎忽)해서는 안 된다. 예배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했다고 중간에 졸거나 잡담하거나 편지를 쓰거나 잡념으로 마귀에게 빼앗겨서도 안 된다. 예배를 드리되 예배가 성공해야 한다. “예배에 성공하자!”
 
창세기 13장에선 땅을 바라보고, 15장에선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바라봄의 법칙’으로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삶을 시작해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1963년, 청소년 때부터 ‘바라봄의 법칙’으로 나를 인도하셨다. ‘성령 받아 방언기도 하게하면 목사되겠다’고 기도했다가 방언을 하게 됐지만 날 때부터 어눌한 말더듬이에 불같이 급한 성격, 부끄러움 잘 타는 소심한 나는 목사 될 자신이 없어서 고민하다가 목사 취소기도를 했었는데 어느 날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용기를 얻어 산에 올라가 1년 8개월을 설교 연습을 하던 때에 하나님께서 몇 달 간격으로 “뜨거운 불이 내게 임하여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지고 입으로는 설교를 하는데 눈에는 불가승수의 군중이 설교를 듣는 것이 보이는 환상”을 세 번이나 체험케 하셨다.    
 
그 후 신학교를 졸업하고 6년 8개월 동안 소백산 골짜기 시골교회 목회 중에 하나님께서 직접 세 번이나 두 자(2 Feet)길이 황금의 검을 주신 꿈, 세계의 여러 도시를 안내하며 보여주시던 꿈, 그 중에 특별히 한 페이지가 사방 아홉 자(9 Feet) 이상 되는 거대한 지도책을 넘겨가며 인도 뉴델리의 도시 구석구석까지 보여주시며 설명해주신 것은 아직도 그 의미를 다 알지 못한다. 그리고 지난 47년 반의 목회 중 나에게 보여주시고 바라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시청각(視聽覺) 교육(敎育)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2008년 11월 19일(토)에 보여주신 계시를 나눔으로 끝맺음을 한다. 성령께서 갑자기 독수리가 짐승을 채가듯 나를 들어 지구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우주공간으로 올리셨다(주의 신이 에스겔을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겔 8:3, 11:1) 다니엘을 옮기시듯(단 8:2) 옮기심: 이런 경험은 내 일생에 너 댓 번 있었는데 한 번은 40여 년 전에 천국을 보여주셨을 때, 또 몇 번은 20여 년 전에 휴거를 경험케 하실 때, 다른 한 번은 15, 6년 전에 천년왕국 때(?)에 연결된 대륙의 고속도로를 따라 미국에서 한국까지 날아가는 환상으로, 그리고 이날의 계시이다.) 
 
계시 중에 성령께 붙잡힌 나는 사방이 캄캄한 우주공간에서 두려움과 무서움으로 작은 공처럼 보이는 지구를 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나의 과거를 보이시면서 “이것이 지나간 60여년의 너의 과거다”라고 하신 후, “이제 얼마 후에 네가 할 일을 보여주겠다”며 나를 데리고 빛의 속도만큼 빠르게 지상으로 하강하는데, 내가 현기증으로 어지러움을 느꼈을 때, 나는 벌써 지구 한복판 어느 대도시 마천루 사이를 빛의 속도로 날아가면서 '할렐루야'를 외치고 있었다. 도시 마천루 사이로 바둑판처럼 사통팔달하게 개통된 도로 위에는 사람들로 만원인 자동차들이 홍수처럼 나를 향해 밀려오는데 성령께서 나를 데리고 그 위를 날아가면서 “이것이 네가 앞으로 인도할 영혼들이다”라고 하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후에, 내가 그들에게 금반지 하나씩을 나눠주는 황홀한 계시였다.
 
부족하고 미련한 나는 이 계시와 환상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모른다. 다만 아브라함에게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심으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축복의 삶을 산 것처럼, 죄 많고 허물 많으며 누구보다 더 부족하고 작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섭리에 감사하면서 그분의 뜻만 바라보고 앞만 향해 달려갈 뿐이다.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자. 기도로 땅 밟기를 계속하고 기도의 지경을 넓히자. 그리고 예배에 성공하므로 땅의 복과 하늘의 복을 함께 받는 성도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김엘리야 목사(워싱톤 주기도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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