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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10월25일 16시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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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만의 병 고침이 주는 교훈

나아만의 병 고침이 주는 교훈   왕하 5: 9-14   


올 여름 개봉 3개월 만에 2,000만을 육박하는 관객을 동원할 정도로 세계영화계를 강타한 Blockbuster(일발로 도시의 한 Block(구획)을 파괴할 정도로 강력한 대형폭탄)영화는 단연 이순신의 ‘명량’이었다.

그 동안에 충무공 이순신 영화는 5-6편이 넘게 나왔지만 ‘명량’만큼 이순신 신드롬을 만들며 흥행대박에 성공한 영화는 없었다. ‘명량’이 이순신 열풍을 몰아치며 흥행에 성공한 것은 1척의 거북선과 12척의 판옥선으로 “죽기를 각오하면 살고, 살고자하면 죽는다”는 필사즉생(必死卽生, 비시지쉥) 필생즉사(必生卽死, 비쉥지시)의 각오로 열배가 넘는 133척의 왜군과 목숨을 건 싸움에서 이긴 박진감 넘치는 Spectacle한 전투신 때문만은 아니다.


2014년 여름, 대한민국의 침울하고 답답한 시대상이 관객들을 영화관으로 끌어 당겼다고 봐야할 것이다. 핵으로 무장한 김정은 집단의 계속되는 대남협박과 함께 활개 치는 종북 좌익세력들의 부추김과 417년이 지난 명량대첩의 배경인 진도 앞바다 팽목 맹골수로에 침몰해 300여명이 사망한 세월호의 해난사고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야당세력들의 준동과 수준 낮은 여의도 선량들의 정치행태에 식상한 국민들이 영화관으로 몰려갔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관객들은 윤일병 사망사건처럼 악마 같은 사회에 대해 사랑으로 병사를 보듬는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모를 흠모하게 만들었고, 피폐화된 사회 불신이 사람들을 극장으로 몰려가게 했을 것이다.


417년 전(1597년), 바다에서 일본해군을 격퇴한 이순신 장군의 감동적인 리더십이 한국에 있다면, 70여 년 전, 미국엔 일본공군을 상대하여 남태평양 상공에서 일본공군과 처절하게 싸웠던 오헤어(Butch O'Hare) 대위의 감동적인 영웅담이 있다. 400여 년의 차이를 두고 이순신 장군과 오헤어 대위는 일본을 상대로 한국과 미국에서 영웅이 됐다.


미군전투기 조종사로 일본 본토 폭격작전에 참여한 오헤어 대위의 비행편대는 출격명령을 받고 모함인 항공모함을 출발한다. 비행 도중 오헤어 대위는 연료탱크계기를 보고 연료가 부족함을 편대장에게 보고를 하는데 편대장은 그에게 즉시 모함으로 돌아가라고 명령을 한다.

그런데 그가 항공모함으로 돌아오는 도중, 그는 일본군 전투기 편대가 기러기 떼처럼 미군 항공모함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장면을 본다. 당시 항공모함에 있었던 전투기들은 모두 출격을 떠났기 때문에 항공모함은 무방비상태였고, 오헤어 대위가 할 수 있는 것은 적군의 비행편대를 교란시켜 항공모함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단신작전을 펴는 일이었다.


그는 자기개인의 안전은 눈에 없었고 항공모함과 수백 명의 미해군을 구해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적군 비행편대를 혼자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오헤어 대위는 “죽기를 각오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각오로 일본전투기를 공격했다. 종횡무진의 그의 용감한 비행기술과 과감한 전투정신에 일본기는 한 대, 두 대, 세 대, 네 대... 격추됐다. 오헤어의 맹렬한 공격에 당황한 일본전투기는 기습을 당한 셈이다. 기관총에 탄환이 떨어지자 기체로 일본전투기를 접촉시켜 적기를 격파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그는 적군비행대가 항공모함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용감한 한 대의 미군전투기에 얻어맞은 일본비행대는 패배한다. 그리고 오헤어는 망가진 전투기를 가까스로 항공모함에 착륙시켰다. 그의 비행기에 장착된 카메라는 그의 용맹스러운 장면을 다 수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정부가 주는 최고훈장을 받았고 세계에서 비행기가 가장 많이 이착륙한다는 시카고 국제비행장은 그의 이름을 따서 ‘시카고 오헤어 공항’이라고 이름을 붙였고 광화문광장에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우뚝서있듯 오헤어 공항엔 오헤어 동상이 우뚝서있는 것이다.


이렇게 전쟁은 영웅을 배출시킨다. 그래서 시대마다 나라마다 전쟁을 통해 영웅이 된 사람은 기라성처럼 많다. 그런데 전쟁은 비단 이 나라와 저 나라, 이 민족과 저 민족이 살인무기를 들고 죽이고 죽는 싸움의 전쟁뿐 아니라, 절망의 잿더미 위에서 살아남기 위해 비극의 운명과 싸우는 것도 전쟁이며, 내 몸 안에 침투한 난치질병이나 불치병과의 처절한 싸움도 전쟁이다.

그래서 나라를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구출한 사람도 영웅이지만 절망의 환경을 뛰어넘고 일어선 사람도 영웅이고, 의사의 사형선고를 받은 불치병과 난치병을 이기고 살아남는 질병과의 전투에서 이긴 사람도 한 사람의 영웅이다. 


                     나아만의 병 고침이 주는 교훈


예수님은 고향 땅, 나사렛 회당 설교에서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다”(None of them was cleansed, but only Naaman the Syrian: 눅 4: 27)고 하시므로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도 수많은 문둥병자들이 있었지만 한 사람도 병 고침을 받지 못했는데 하나님의 백성도 아닌 이스라엘의 원수 수리아 군대장군이 질병을 치료받은 신앙영웅이 됐다고 설교하시므로 오늘도 난치병을 고침 받는 하나님의 축복, 불치병을 치료받는 신앙영웅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고 설교하므로 고향사람들의 분노를 사 죽음의 위기를 맞았었다.

그렇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을 받는 신앙영웅, 하나님의 기적으로 병 고침을 받는 믿음의 영웅, 하나님의 특별 기적을 체험하는 신앙영웅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만나 자기 믿음을 보였던 나아만 장군의 믿음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 신앙영웅, 축복의 사람, 기적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보였던 믿음을 소유하는 예배가 되므로 나아만의 기적을 체험하는 축복의 예배가 되기를 축원한다.   


성경에 67번이나 기록된 문둥병은 죄의 상징이다. 성경에서 다른 병은 ‘병이 낫다, 병을 고쳤다, 병의 치유함을 받았다’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① 문둥병을 고칠 때는 죄를 깨끗이 씻듯 ‘문둥병이 씻음을 받았다’는 표현을 했다. 그래서 문둥병은 죄를 상징한다. ② 문둥병에 걸리면 감각이 없어져 아픈 것이나 뜨겁거나 찬 것을 느끼지 못하듯 사람이 죄에 빠지게 되면 선한 양심이 마비되고 착한 마음도 마비되며, 감사의 감각이나 기쁨과 즐거움의 감각이 사라지며, 사무치는 감격이나 미안하거나 죄스러움의 감각까지 없어져 버린다.


③ 문둥병에 걸리면 온 몸을 썩게 하듯 죄는 사람의 영혼과 마음과 몸을 썩게 하고 생각과 정신을 피폐하게 한다. ④ 문둥병에 걸리면 격리수용을 해야 하듯 죄는 우리를 하나님과 격리시킬 뿐 아니라 신실한 성도와도 자신을 격리 시킨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목사를 슬슬 피하게 되고 신앙 좋은 사람을 멀리한다. 구약시대나 성경시대에 문둥병자는 성한 사람을 보면 멀리서 “나는 부정합니다, 나는 더럽습니다”며 소리를 질러서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거나 자기들끼리 산속 깊은 곳에 문둥이 촌을 만들어 집단격리생활을 했다. ⑤ 그다음, 오늘날은 문둥병 치료방법이 개선돼 완치까지 가능하지만 구약시대나 신약시대엔 한번 걸리면 죽음만을 기다려야 하는 불치의 병이듯 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통하지 않고는 인간의 그 어떤 노력과 수고와 수양으로도 용서 받을 길이 없기 때문에 문둥병은 죄의 상징이다.


성경엔 문둥병에 걸렸다가 기적적으로 고침을 받은 사람과 반대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문둥병이 걸린 사람 등 문둥병자가 22명이나 등장한다. 그중에 호렙산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을 거절하다가 두 번씩이나 문둥병에 걸렸었던 하나님의 사람 모세(출 4: 6-7, 29-30)와 십보라의 사망 후, 에티오피아 타르비스 공주를 아내로 취한 모세를 비방하다가 문둥병에 걸렸던 모세의 누이, 여선지자 미리암 사건(민 12: 1-16)과 시리아 적군에게 포위되어 굶주림으로 죽게 됐던 사마리아를 아사 직전에 구출한 네 문둥이 기록(왕하 7장), 그리고 교만하므로 제사장을 물리치고 월권행위로 번제를 드리다가 하나님의 저주로 문둥병이 걸린 웃시야(왕하 15: 5, 대하 26: 20)와 물질의 욕심과 탐심으로 은과 의복을 나아만에게 받아 챙겼다가 하나님의 저주로 나아만의 병이 옮겨 문둥이가 된 엘리사의 종 게하시 사건(왕하 5: 20- 27)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너무나 크고 중요하다.    
        

   1. 나아만의 문둥병
당시 시리아 군대 총사령관 나아만은 시리아 왕 벤하닷 1세가 가장 총애하는 군대장군이었다. 군사지휘권을 가진 총사령관 나아만 장군 밑에는 기라성 같은 수많은 장군들과 첨 명의 군사를 통솔하는 천부장, 백 명의 군인을 다스리는 백부장, 오십 명 군인을 지휘하는 오십 부장, 열 명의 군인을 이끄는 십 부장 등의 군대 조직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 시리아에서 2인자 나아만은 한마디로 천상천하의 유아독존이었다. 시리아에서 벤하닷 1세 외 엔 그 누구도 나아만 앞에 감히 얼굴을 들 수 없는 막강한 권력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화려하고 찬란한 계급장, 하늘을 나는 새도 명령 한마디면 떨어뜨릴 수 있는 위풍당당한 장군의 제복 속에는 온 몸이 문둥병으로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던 나아만의 초라한 육신이 숨어 있었다. 그래서 나아만의 비극은 현대인의 비극이기도 하다.


오늘 이 땅에는 출세, 권세, 돈, 명예, 학위, 지위라는 화려한 성공의 그늘 속에 자신이 썩어가고 있는 문둥병에 걸려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남편이 유명한 정치인이고 뛰어난 CEO의 경제인, 대학교수, 법관, 사업가, 종교인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문둥병이 들어서 살이 썩어 문드러져가는 가정처럼 부부의 행복이 파괴된 가정, 육신이 병들어 절망 중에 살아가는 사람, 자녀가 불치병으로 고생하는 비극을 겪거나 탈선하여 한숨과 탄식이 끊어질 날이 없는 가정, 남모를 고민들로 밤마다 뜬 눈으로 지새우는 절망의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나아만 문둥병의 비극은 주전 800-900년 시리아 제국의 국가적인 비극이나 나아만 장군 개인의 비극만이 아니라 오늘 21세기 현대인들이 가정마다 갖고 있으며 가슴마다 품고 있는 비극이기도 하다.
 
오늘 당신의 부와 명예와 권력과 성공 뒤에 숨어있는 죄책감에 대한 절망, 삶의 무의미에 대한 절망, 죽음에 대한 절망이다. 오늘 당신의 찬란한 성공의 휘장 뒤에 가려 숨겨져 있는 개인적 절망, 가정적 절망이다. 오늘 당신의 화려한 겉모습 뒤에 거머리처럼 붙어있는 가정의 비극, 진정한 행복과 만족이 없는 삶, 참된 자유가 없는 공허한 삶이다. 절망의 문둥병자 나아만을 통해 절대 죄인인 연약한 자신의 모습, 소망 없는 자기 실존, 무능하고 초라하며 연약한 자신을 발견하고 지구촌의 유일무이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십자가의 피 뿌림을 통해 죄 사함과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 받는 역사들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2. 나아만의 가난한 마음과 하나님의 축복


나아만 장군 집에는 전쟁터에서 잡아온 계집아이 파출부소녀가 있었다.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데려온 파출부 계집아이는 얼마 후에 나아만 장군 집의 말 못할 비밀고민을 알게 된다. 그것은 나아만 장군이 불치병의 문둥병자라는 사실, 그래서 병 때문에 괴로워하는 장군과 남편의 병 고침을 위해 백방으로 애쓰며 노력하지만 백약이 무효로 아무 효과가 없어서 날마다 마음 아파하는 부인의 고민을 알게 된다.


어느 날 계집아이는 뜬금없이 “우리 주인 나아만 장군이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선지자는 장군의 문둥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며 나아만 장군 부인에게 전도한다. 파출부 계집아이는 자기 집 안주인에게 전도를 한 것이다. 사실 이 전도는 자기의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만일 계집아이의 말대로 나아만 장군이 선지자를 만났는데 병이 고침을 받지 못한다면, 이 아이의 생명은 끝이다. 그럼에도 파출부소녀는 담대하게 나아만 장군 부인에게 전도를 했다. 


“사장님은 우리 교회에 와서 목사님의 안수기도 한번 받으시면 병이 나을 것입니다”, “아드님은 우리 목사님께 기도 한번 받으시면 치료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모님은 우리 목사님의 설교를 한번만 들으시고 안수기도를 받으면 병 고침 받을 것입니다”, “선생님 부부가 40일 새벽기도를 드리면 그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라는 전도였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목사님을 믿는 믿음의 전도였다.
 
그러자 파출부소녀의 전도는 주모를 통해 나아만 장군에게 전달되고 나아만은 그 말을 벤하닷 1세 아람 왕에게 전해졌으며, 왕은 즉시 이스라엘 왕 여호람에게 편지를 써서 ‘나아만 장군을 이스라엘로 보낼 터이니 그의 문둥병을 고쳐 달라’고 했다. 일사천리로 거침없이 일이 진행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파출부소녀의 전도와 그 말을 듣고 즉시 행동으로 옮긴 나아만 장군의 가난한 마음이다. 나아만 부부가 얼마나 병 고침을 열망했고 마음이 가난하고 갈급했으면, 확인도 해보지 않고 일을 추진했겠는가? 일이 잘못되면 이스라엘과 아람 사이에 국가 간 전쟁도 일어날 중대 사안이다. 만일 나아만이 문둥병에 안 걸렸다면 장군 부부가 포로로 잡아온 하찮은 계집아이의 말을 들었겠는가?


그렇다. 오늘 당신이 병에 안 걸렸다면, 당신의 남편과 당신 아내와 아들과 딸이 건강하다면, 그리고 사업이 잘되고 가정에 문제가 없다면, 진학문제나 영주권문제가 없었다면 당신이 금식기도를 3일, 5일, 여리고 정복 일주일기도와 13일 기도, 다니엘 금식기도 21일을 하겠는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철야기도를 하겠는가? 새벽기도를 한 달, 두 달, 40일, 100일을 작정하여 하겠는가? 우리들이 겪는 문제들이 우리 마음을 가난하게 하고 사모하게 하며 갈급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신앙을 더 견고하게 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문제가 없어도 겸손하여 가난한 마음이 되는 것도 축복이지만 문제 때문에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도 은혜의 기회, 축복의 기회이다. “마음이 가난하므로 천국이 당신의 것이 되는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여기에 전도의 위력이 있고 가난한 마음의 위대한 힘이 있다. 그래서 전도는 이스라엘의 파출부소녀처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기회 있을 때마다 해야 한다. 씨를 뿌리는 것은 내가 하지만 거두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이다.


28년 동안 지방에서 불교협회 회장을 했던 분이 예수님을 믿고 병 고침을 받고 집사가 된 성도가 제게 이런 간증을 했다. 그가 전국 불교협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절을 지으며 협회 일을 할 때, 어느 누구도 자기에게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자기는 몸에 병이 들어서 병 고침을 받고 자손들이 잘 되게 하려고 많은 돈을 드려 절을 짓고 불공을 드리며 충성했는데 아무 변화도 없어서 나중에는 교회라도 나가보고 싶었는데 아무도 자기에게 전도를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30여 년 동안 해수(咳嗽; 기침병)로 고생하면서 우연한 기회에 전도를 받고 나를 찾아온 그분이 어느 날 건물 지하에 있는 우리 교회를 왔는데, 그가 지하 1층까지 층계 20개 계단을 내려오는데 보통 40-50분 걸려야 할 정도로 숨이 차고 가래가 끓어 고생하였다. 그러던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8개월 동안 새벽마다 안수기도를 받고 병 고침을 받은 후, 집사가 되어 열심히 봉사하던 어느 날, 자기 간증을 하면서 ‘내가 불교에 심취해 모든 재물을 다 바쳐 사찰을 짓고 보살처럼 중을 하나님처럼 보필할 때, 누구라도 교회에 한번 와보라고 했으면 그때 예수 믿었을 것인데...한 사람도 내게 전도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 몸이 병든 사람, 사업에 실패한 사람,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은 건강하고 모든 일이 잘되며 문제가 없는 사람보다 마음이 가난하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될 정도로 심령이 가난하며 복음에 갈증을 가지고 있다. 그럴 때 전도하면 나아만 장군처럼 빨리 주님을 영접할 수 있다. 그래서 병원전도, 군부대 전도, 구치소 감옥전도나 갱생원 전도가 빠른 시간 내에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내 이웃들에게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축원한다.


   3. 내 생각을 포기하라


장군 나아만은 아람 왕 벤하닷의 친서를 가지고 선물용으로 은 10달란트와 금 6,000 개와 의복 열 벌을 마차에 싣고 많은 수하 장수들과 호위병들을 거느리고 왕의 행차처럼 보무도 당당하게 이스라엘 왕 여호람을 찾아 갔다. 은 1(한)달란트는 3천 세겔로 무게는 약 3,427g이니 10달란트의 은은 342kg의 은이고, 금 6,000개는 두 달란트로 약 68. 4kg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선물이다. 나아만 장군의 방문을 받은 이스라엘 왕 여호람은 벤하닷이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주지 않으면 그것을 핑계 삼아 아람 나라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는 속셈인 줄 알고 겁을 먹는다. 그리고 공포와 절망에 질려 문무 대신들을 불러 모아 여러 날 동안 어전회의를 하지만 속수무책 아무 소득이 없다.


그럴 때 엘리사로부터 사람이 와서 여호람에게 “시리아의 군대장관 나아만을 내게로 보내시오. 내가 그의 문둥병을 고쳐서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게 하겠다”고 하자 여호람은 뛸 듯이 기뻐하며 나아만을 엘리사에게 보냈다.


여러 대의 마차에 은 10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시리아산 최고품의 의복 열 벌을 선물로 싣고 수많은 수행원과 경호원들을 데리고 엘리사를 찾아가는 나아만은 비록 문둥병에 걸리긴 했지만 병 고침 받을 것을 기대하며 병 고침을 받은 후에 앞으로 있게 될 자신의 성공과 출세를 생각하며 기세등등했고 기고만장했다.


그러나 나아만이 엘리사의 집에 도착하자 엘리사는 문 밖에 나타나지도 않고, 종을 시켜서 “당신은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게 될 것이라”(Go and wash in the Jordan seven times, and your flesh shall be restored to you and you shall be clean)는 말을 듣고는 기절초풍한다.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도 자기 앞에서 벌벌 떨었는데, 이름도 없는 시골 변두리 촌부에게 문전박대를 당하며 모욕과 멸시를 당한 것이다.


당시 나아만의 첫 번째 반응을 보자. 11-12절이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고국 다메섹의 아바나(Abanah)와 바르발(Pharpar) 강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 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났더라”


격분한 나아만은 “Behold, I thought”(이 어찌된 일인가? 내 생각에는) “엘리사가 정중하게 나를 맞아 최고의 예의를 갖추고, 자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내 몸 이 곳 저 곳 상처 위에 자기 손을 흔들면서 거룩한 예식을 행하여 나의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그런데 감히 나를 이렇게 대하다니 무례하도다. 어디 그뿐이냐? 어찌 나에게 하필이면 저 더러운 요단강 물에 일곱 번을 씻으란 말이냐? 이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냐? 차라리 우리나라 아바나 강이나 바르발 강에 가서 씻으라고 한다 해도 나의 자존심과 분노가 풀릴까 말까인데 감히 요단강이라니?...”소리치며 노발대발 하늘 끝까지 격분한 나아만은 엘리사의 집을 떠났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교황이나 주교처럼 거룩한 예복을 입고 장엄하고 엄숙한 예식으로 성수를 뿌리면서 자기 환처를 만져서 고쳐 줄 것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엘리사의 처방은 유치하게도 더러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거룩하고 엄숙한 어떤 종교예식을 통해서가 아니다. 성령의 역사와 감동을 따라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레마의 말씀을 통해서다. 하나님말씀이 없는 종교의식은 아무 것도 아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말씀이 없는 어떤 화려하고 장엄한 종교예식도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 만을 따르는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그러자 그를 수행한 경호원장수들과 군사 종들이 “내 아버지여, 병을 고치기 위해 선지자가 당신에게 이보다 큰일을 하라고 했더라도 그 일을 행하지 않았겠나이까? 하물며 요단강에 가서 씻어서 깨끗하게 하라 함입니까?”라며 읍청(泣請)하며 만류한다. 그 말을 듣자 나아만은 분을 삭이고 발걸음을 요단강으로 향했다. 이것이 나아만의 두 번째 반응이다.


성도 여러분, 때때로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기적은, “내 생각에는”(I thought)을 버릴 때, ‘나의 생각’, ‘나의 계획’을 포기할 때 일어난다. 내 생각과 나의 고정관념이 무너질 때, 하나님의 축복이 내게 임한다. 놀랍게도 성경 대부분의 기적들은 인간의 생각이 포기된 때에 일어났다.

그래서 사 55: 8-9절은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For as the heavens are higher than the earth)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So are My ways higher than your ways)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And My thoughts than your thoughts)”고 했다. 나아만이 자기 생각을 포기하고 자기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렸을 때, 질병치료의 기적이 있었듯, 내 생각을 버리고 포기하므로 하나님의 기적들이 나타나기를 축원한다.
  
30년 전에 의사와 과학자들은 “마라톤의 기록은 절대로 2시간 10분벽을 넘을 수 없다. 만일 인간이 마라톤 풀코스 26마일 385야드를 2시간 10분대로 달리게 된다면 사람의 폐는 호흡을 중단할 것이며 심장은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버릴 것이다”고 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감히 2시간 10분벽을 도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계 마라톤은 2시간 5분대 기록을 격파했고 현재는 1시간 57분을 기록 중이며 불원간에 1시간 55분대까지 도달할 것이다.


인간의 한계의 벽을 뛰 넘는 마라톤이 2시간 15분대에서 10분대를 뛰어 넘는데 거의 30년이 걸렸고 다시 2시간 5분대까지는 불과 3-4년이 걸렸으며 1시간 57분대까지는 5년이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제한시킨 인간의 고정관념은 넘을 수 없는 한계의 벽을 만들어 놓았지만 고정관념을 깨자 기록들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심리학에 Flea Symptom(벼룩 증후군)이란 말이 있다. 여러 마리의 벼룩을 유리 상자에 넣고 리듬에 맞춰 높이 뛰게 하면 어떤 놈은 30cm, 어떤 놈은 50-70cm 까지도 높이 뛰어 오른다. 그러다가 일정한 높이에 맞춰 뚜껑을 닫아 놓은 후, 벼룩을 뛰게 하면 유리 천장에 닿아 그만큼 밖에 뛰어 오르질 못한다. 이런 훈련 뒤에 유리를 치우고 뛰게 하면 유리 천장 있던 곳까지만 높이 뛰고 그 이상은 못 뛴다고 한다.


오늘 당신은 무엇보다 ‘나는 여기까지다. 더 이상은 못한다. 이것이 나의 한계다’라는 벼룩증후군의 생각의 궁기(窮氣: 궁색한 기운의 생각)를 버려야 한다. 우리 생각이 궁하면 믿음도 궁하고 믿음이 궁하면 인생도 궁해진다. 그래서 생각의 한계는 인생의 한계요 생각의 차이는 인생의 차이요 생각의 전환은 인생의 전환이다.


도요타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순익 1조 엔을 올린 세계 초 일류급 자동차 회사이다.
그런데도 도요타 경영진은 “도요타 타도”를 외친다. 그 이유는 현재의 모습에 안주하면 결국에는 궁기가 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마다 변신을 꾀하므로 궁색한 기운이 감돌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 도요타를 전 세계 초일류 자동차 회사를 만든 정신이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모든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위대한 일을 하려면, 틀에서 벗어나 생각하라”(Think out of the box)고 하는 것이다. 나아만 장군이 자기 생각을 포기하고 엘리사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불치와 난치의 천병(賤病) 문둥병을 고침 받았듯, 내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기적들이 임하고, 나의 좁은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 믿음의 생각들로 채워지는 가슴들이 되길 축원한다.


   4. 끝까지 순종한 나아만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여러분에게 순종을 강조하는 것은 언제라도 유익한 권면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순종하는 성도에게만 임하시기 때문이다.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의 말대로 일곱 번이나 더러운 요단강 물에 들어갔다. 우리 생각대로라면 엘리사의 말대로 나아만이 세 번쯤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왔을 땐 살이 썩고 피고름이 나던 것이 멈추는 변화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신이 나겠는가? 다섯 번쯤에는 썩었던 살이 아물고 새 살이 나오는 기색이 보였다면, 그리고 여섯 번쯤 들어갔다 나왔을 때는 부스럼들이 떨어져 나가고 없어진 대머리에 머리털이 나왔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러면 순종하는 사람도 신이 나지 않겠는가? 그러나 더러운 물 속에 여섯 번을 들어갔다가 나와도 아무 변화가 없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엿새 동안 여리고를 매일 한 바퀴씩 돌았지만 여리고 성은 벽돌 한 장 떨어지거나 최소한 지진이 일어나 여리고 성의 균열이 가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듯이,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은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나아만이 일곱 번째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오자마자 기적은 일어났다.
 
성경을 보자. “나아만이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So he went down and dipped himself seven times in the Jordan, according to the word of the man of God, and his flesh was restored like the flesh of a little child and he was clean; 14절) 할렐루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되 응답을 받을 때까지, 끝까지 순종할 것이다. 한두 번 주일 성수하고 5-6개월 십일조 드린 다음, 조급하게 왜 하나님이 복을 안 주시는가 하지 말라. 한두 달, 일 년 이 년 주일성수하고 십일조 드리고 왜 하나님이 거짓말 하시는가? 왜 목사님이 거짓말 하는가?(주일성수하고 십일조하면 복을 주신다더니...?) 하지 말자.


쇠 절굿공이를 숫돌(여석; 礪石)에 갈아 바늘을 만드는 긴긴 세월은 아니더라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세월만큼은 인내하고 기다리며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축복이라도 축복이 다 똑같지는 않다. 돈으로 환산한다면 10만 불짜리 축복이 있고 50만 불짜리 축복도 있으며 100만 불짜리 1,000만 불짜리 억만 불짜리 축복이 있다. 그래서 그 값과 가치에 맞는 인내와 순종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 우리 중엔 하나님께서 50만 불, 100만 불짜리 축복을 예비한 성도도 있고 천만 불... 억만 불짜리 그리고 하늘과 땅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큰 축복을 예비하신 성도가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25년을 기다리며 순종했고 50년 만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으며, 요셉과 다윗이 13년의 인내와 순종의 기간이 필요했고, 모세와 여호수아가 40년의 세월이 필요했으며, 욥에겐 값을 계산할 수 없는 인내와 순종을 요구하셨듯이 우리가 받을 축복의 가치만큼 우리의 인내와 순종이 필요한 것이다. 


창 31: 53절의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 (데라)의 하나님”이란 말씀과 데라 가족의 역사기록인 창 11: 27-32절을 대조해 보자.


원래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데라였다(행 7: 2-3. 수 24: 2-3) 그러나 데라는 가나안으로 오다가 중도에서 살기 좋은 하란 땅에 정착을 했다.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를 오다가 대전이 좋아 보여 그곳에 정착했다는 말이다. 결국 데라는 가나안을 사모했지만 가나안은 들어가지 못하고 하란에서 60년을 살다가 죽었고, 그 대신 아브라함이 갈대아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므로 믿음의 조상, 축복의 조상이 됐다.


그러므로 창 31: 53에서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 데라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은 데라의 셋째 아들 하란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처음부터 갈대아 우르를 떠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믿음 정도만큼 역사하시고, 갈대아 우르는 떠났지만 중간지점 하란에 정착한 데라에게는 그의 믿음 정도만큼만 역사하시며,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순종한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처럼 끝까지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시란 말이다.


그러므로 데라는 반쪽 순종자가 되어 온전한 축복의 사람이 되지 못했고, 데라의   세쌍둥이 아들 아브라함, 나홀, 하란 중에서 셋째 하란은 갈대아 우르에서 일찍 죽으므로 하나님 신앙과는 상관없는 사람이 됐고, 그 대신 그의 아들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 가나안까지 가므로 유황불이 쏟아지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으며, 둘째 나홀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갈대아 우르는 떠났지만 중간거주지 하란에서 멈추므로 믿음의 축복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됐으며, 첫째아들 아브라함만 끝까지 순종하여 믿음의 조상, 축복의 근원,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축복의 사람이 된 것이다.


오늘 당신은 어떤 믿음의 사람인가? 오늘 당신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당신과 상관없는 하란의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처음은 순종했지만 나중은 불순종하므로 그만큼만 경험한 데라와 나홀의 하나님인가? 아니면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순종해 성경에 기록된 모든 축복을 다 받아 누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신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오늘 나(김장로, 지권사, 이집사...)의 하나님 되 시길 축원한다.
 
   5. 게하시의 문둥병(27절)


게하시는 하나님의 대선지자 엘리사의 수제자이다. 엘리사에게 아들이 없던 수넴 여인에게 아들을 낳도록 도와준 믿음의 일군이었다(왕하 4: 14) 엘리사의 따르므로 왕궁에 들어가 왕을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이었으며(왕하 8: 4-6) 선지자 엘리사가 행했던 32번의 기적 중에 12번을 직접 보고 들으며 은혜체험까지 했던 사람이다.


그러한 은혜의 사람이 물질에 탐욕과 욕심이 생겼다. 게하시는 엘리사가 나아만이 문둥병 고쳐줌을 감사하여 사례하려는 것을 거절해 돌려보내자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 ‘에브라임에서 선지생도 두 사람이 왔는데 엘리사 선지자께서 그들을 위해 은 두 달란트와 의복 두 벌이 필요하다며 나에게 얻어오라고 하여 왔다’고 거짓말을 하므로 나아만 장군에게서 은과 옷을 받은 후 그것들을 숨겼다. 그리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엘리사에게 돌아온 게하시는 탐욕과 욕심의 죄를 엘리사에게 책망 받은 후, 나아만이 걸렸던 문둥병이 옮겨가는 저주를 받았다.


게하시의 문둥병은 오늘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를 받은 주의 종들인 부흥사, 목사, 기도원 원장, 권사, 집사들이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버리고 병 고치는 은사와 예언의 은사와 믿음의 은사, 능력 을 행하는 권능의 은사들을 사용해서 돈 버는 일을 경고하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믿음을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당신의 병을 고쳐주시면서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 중에 ⑴ 계시의 은사인 지혜의 말씀의 은사와 지식의 말씀의 은사와 영분별의 은사로 남들보다 설교를 뛰어나게 잘하게 하시고, 사람들의 숨겨진 과거를 밝혀내고 불확실한 미래를 족집게처럼 알아서 예언하며 ⑵ 발성의 은사인   방언의 은사와 방언통역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로 신비한 역사를 나타내며 ⑶ 권능의 은사인 믿음의 은사들이 강하게 나타나고 신유의 은사로 사람들의 각종 병을 고쳐주시며 모세와 여호수아처럼 홍해가 갈라지고 요단강이 갈라지며 베드로의 그림자 기적(행 5: 15-16)과 바울의 손수건과 앞치마 기적(행 19: 12)처럼 사람들의 눈  앞에서 기적들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은사들이 나타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 하심이지 그런 은사들로 돈을 벌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는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의 도깨비방망이도 아니고 돈을 버는 수단이나 방법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나타내는 성령님만이 소유하신 성령님의 은사이다(은사(恩賜), Karisma(카리스마)의 소유권은 어떤 특정한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며 안수기도 한번에 500만원, 1000만원, 1억, 10억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고, 암을 고쳐주는데 50억, 100억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성령의 역사를 설교하고 은사를 주장하는 목사의 한 사람으로 부끄러움을 느끼기까지 한다.  


그래서 나아만의 병 고침과 게하시의 문둥병이 주는 교훈은 오늘 우리에게 우레 소리 같은 경종과 경고이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이 메시지를 통해 거룩한 신앙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복된 목사와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김엘리야 목사(워싱톤 주기도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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