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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08월30일 15시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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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면목: “크리스천의 의미”
우리 한인들은 미국에서 태어난 2세대를 제외하고는 한국에서 태어난 이민자들이다. 미국에서 산다는 의미는 미국 법에 순종한다는 말이다.
 
미국에서 살면서 미국 법에 어긋나는 관습이나 방식, 사상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잘못되었다. 미국과 다른 영국인도 미국에 와서 살면 운전이 다르므로 그들의 방식대로 차를 운전하면 당장 큰 교통사고가 날 것이므로 그들의 방식대로 운전할 수 없다 그래서 차를 운전할 때 신호등의 사인을 잘 보고 운전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나라의 시민으로서 내가 원한다고 아무데서나 내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 기독교인은 예수님에게서 듣고 배운 것을 기억하고 그 길을 따르려고 애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배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실천은 거저 되는 것이 아니다. 가르침을 듣고 깨닫고 순종하여 행하는 것으로 그때까지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 등 주님의 가르침과 다른 것은 포기하거나, 잘못된 것을 바르게 되돌림으로 변화하려고 한다. 주님의 길을 간다는 것은 그의 가르침의 의미를 바로 이해 했을 때이다.
 
이때껏 옳다고 주장하며 걸어왔던 길이나 생각 등이 주님이 가르쳐준 것이 아닌 틀린 것을 깨달았을 때 바른 길로 가고, 그 결과 상대방에게 부정적이거나 나쁜 영향을 끼었을 거라고 알게 되고, 자기의 생각이 얼마나 다르고 틀렸는지를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됐을 때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각, 관점, 삶이나 사람에 대한 이해가 자신이 내가 알아왔던 것과는 다른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선 주님의 백성들의 삶의 모습은 유교전통적 남녀의 삶이나 서구적 남녀의 삶의 모습과는 다르다. 서구적 남녀의 삶의 모습은 자유와 평등 안에서 독립적이고 간섭 받기 싫어하며 개인적으로 자신을 책임지고 서로를 같이 대하는, 부부는 같이 인생의 동반자로서 서로 존중하며 자존심을 가지고 긍정적 사회생활을 한다.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은 자유함과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와 자신과 이웃을 위한 삶으로 즉 “누구의 누구”라는 유교전통의 고정적 의존관계가 아닌 서로를 존중하고 의지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는 자신의 주체를 가진 삶이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고 달라졌지만 아직도 유교문화적인 삶의 방식은 남존여비의 성차별로 “남자는..”, “여자는..” 하는 남녀의 역할을 고정시켰다. 이로 인한 제한된 생활방식은 가정에서나 사회, 교계에서 여성들에게 여성들 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자신에 대한 낮은 자존감, 열등감과 분노, 깊은 좌절감을 갖게 해 바람직한 자아성장을 이루는데 장애가 되어왔다.

어느 여성이 내뱉은 말이다. “남녀차별은 이젠 정말 지겨워.” 
알겠지만 천주교 교단에서는 여자는 신부(Father)가 될 수 없고 개신교에서도 아직도 여성의 목사안수와 장로선출을 거부하고 있는 곳이 아직도 많이 있다. 유교문화권의 크리스천 세계는 달라져야 한다. 주님은 남녀모두를 같이 부르셨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지 2천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인간관계의 해악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좌절을 불러온다. 이젠 바뀔 때가 되지 않았는가? 
 
기독교 세계에서 차별이나 견제는 존재해서는 안되는 해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인정해 주고 서로 협력하고, 서로 협조하고 보완해주어야 하는데 성, 연령, 종족간, 피부색깔, 사회적 지위나 위치에 의한 차별이 있다면 이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모든 사람을 받아주신 주님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실까?
 
주님의 백성이 되면 말과 행동과 삶의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의 뜻에 순종하고 따라 살기를 원한다면 과거 자신이 살았던 삶의 방식이나 태도, 사상 면에서 변하고 달라져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남을 통제하고 명령하는 것이 아닌 주님에게서 받은 소명과 지도력을 가지고 서로가 같이 동등한 모습으로 믿음의 공동체를 만드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동네 말썽꾸러기가 주님을 만나 회개하고 새사람이 됐다는 말을 듣는다. 그와 같이 사람들도 기독교인이 되면 인간의 안과 밖이 즉 생각과 행동, 습관, 살던 모습 등 삶의 모습 등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왜 과거 그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는가? 과거의 문화나 잘못된 관습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과정에서 충돌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된 후에는 과거의 삶이 아닌 기독교인으로의 새 삶으로 바꿔 살아야 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상대를 인정하고, 존경과 대우하므로, 말과 행동과 사고방식에서 달라야 한다.

필자는 누구에게든지 “우리는 동료목사(colleague)” 라고 말한다. 절대로 무례하게 말을 놓거나 반말을 하거나 나의 할 일을 시키거나 명령하거나 내 말에 순종하지 않는다고 상대를 불편하게 하거나 겁먹게 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바른 동료관계이다. 이런 말과 행동은 여호와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지 못한다. 
 
우리들 크리스천들은 우리의 입술은 주님을 찬양하는데, 우리의 눈은 영화로운 주님을 바라보는데 필요하다 그런데 주님을 찬양하고 축복할 입에서 상상치도 못한 악하고 두려운 저주의 말을 말한다면 이것은 한 입에서 나오는 두 상반된 말의 모습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주님의 백성의 입에서는 한 가지 찬양의 음성만 들려 나와야 하는 것이다.
 
아침 저녁으로 바람이 선선하다. 11월의 추수감사절을 지나면 주님이 처음 아기예수로 우리에게 온 그날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대강절 주간이 시작된다. 하루하루 밝아져 오는 주님의 빛을 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가 탄생하신 날을 준비하고 예배하고 찬양한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두 번째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면서 그때 주님을 만나서 그 앞에 섰을 때 무엇을 대답해야 하나 생각한다.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했는가”, “세상에서 크리스천으로 어떤 삶을 살았는가?” 물었을 때 우리는 대답할 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익을 하여 남을 해하지 않았는지, 함부로 이웃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았는지, 성별이나 위치에서, 재산이나 학벌, 외모에서 등등 나보다 못하다고 차별하고 무시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고, 그들이 힘들고 외로울 때 그때 너는 어디 있었는가에 대한 답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말은 필자가 80년대 수많은 한인들의 집집마다 문제가 생겨서 내 사무실에 상담 받으러 온 아이들에게서, 남편에게서, 부인에게서 들은 외침의 말이다. “내가 힘들고 외로웠을 때 엄마는, 아빠는, 당신은 그때 어디 있었어요?”  이번 가을에는 주님이 말씀하신 것들로 인해 멋있고 맛있는 결심을 맺었으면 한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의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 잘못되고 틀린 것은 콤퓨터에서 지우듯 없애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지배가 아닌 소통, 지혜와 사랑과 자유함 속에서 서로를 동등하게 인정하고 동반자로서 같이 의논하고 나누면서 그리스도와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사는 길을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는 방법이다. 이 길은 자신감을 기르는 길이요, 지도자가 되는 길이고 자신에 대한 존엄성을 높이고 나를 성장시키는 길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때 이웃을 사랑하고 존경할 줄 알기 때문이다. (끝)

김금옥 목사(에버그린장로교회 담임/정신신경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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