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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08월15일 20시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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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는 있으나 지도력이 없는 시대





섀클턴을 비롯한 대원들은 남극 탐험 길에 일기를 남겼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혹한 속에서도 그들은 일기를 기록했고 그 중에 한 대원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섀클턴은 은밀히 자신의 아침 식사용 비스킷을 내게 내밀며 먹으라고 강요했다. 그리고 내가 비스킷을 받으면 그는 저녁에도 내게 비스킷을 줄 것이다. 나는 도대체 이 세상 어느 누가 이처럼 철저하게 관용과 동정을 보여줄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나는 죽어도 섀클턴의 그러한 마음을 잊지 못할 것이다. 수천 파운드의 돈으로도 결코 그 한 개의 비스킷을 살 수 없을 것이다.” 아주 단순한 기록이다. 영하 30℃ 이하의 추위 속에서, 거대한 빙벽 앞에서 수백억 원의 돈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비스킷 하나는 바로 생명 그 자체이기도 하다.

최초의 남극점 정복은 노르웨이의 아문센이 이루었다. 아쉽게도 섀클턴의 선배 스콧도 이 기록을 깨지 못하고 남극에서 비극적으로 운명한다. 그러자 섀클턴은 남극점 정복 대신 남극 대륙 횡단을 계획한다. 그는 27명의 대원과 함께 범선 ‘인듀어런스로’를 타고 세 번째 남극 탐험 장정을 떠났다. 인듀어런스로는 섀클턴을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탐험가, 지도자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비록 대륙 횡단은 하지 못했지만, 남극 빙벽에서 634일을 견디고 전 대원이 무사히 귀환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세 번째 탐험을 ‘위대한 실패’, 혹은 ‘위대한 항해’라 부르면서 지금도 그의 정신을 추모한다.

섀클턴은 세계 최초 극점도달이나 횡단 등의 기록을 보유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섀클턴의 지도력이 새롭게 조명을 받는데는 이유가 있다. 섀클턴의 목적은 전대원의 무사귀환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원정 탐험대가 출발했다가 돌아올 때면 대원 중에 최소한 한 명 이상 사망하는 일들이 다반사였다. 전원 무사 귀환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섀클턴이 이끈 대원 27명은 무려 2년에 가까운 시간을 빙벽에 갇혀 있었음에도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모두 살아서 귀환했기 때문이다. 불가사의한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섀클턴의 탁월한 지도력 때문이다. 섀클턴의 지도력은 바로 한 대원의 기록에서 보여주었듯이 비스켓에 담겨 있다. 식량도 바닥나고 영하 30℃ 이하의 극한의 상황에서 비스켓 하나는 목숨이 달려 있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섀클턴은 바로 그 목숨을 부하 대원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다. 이것을 이토록 분명하게 보여준 지도자가 이 세상에 또 있었던가?

최근 2년 동안 한국 사회는 어두운 먹구름의 하늘 아래 사는 것처럼 늘 우울했다. 사건에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사회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런데 무수한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책임 진 사람이 없다. 국민적 감정과 국가적 흐름이 정돈되지 않고 홍수 때의 탁류처럼 흘러가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이 난지 백일이 넘었다. 세월호 사건이 터지자 고 김선일 선교사가 순교 당할 때 ‘한 사람의 국민이라도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는 국가가 아니다’라며 노무현 대통령을 맹렬하게 비난했던 박 대통령은 진도 앞바다에서 300명의 어린 학생 중에 단 한명도 구출하지 못하고 수장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하였다. 그리고 나서 청와대는 재난 컨트럴타워가 아니라고 발뺌하였다.

지도자는 있으나 지도력이 없는 사회다. 종교계도 마찬가지다. 옛날 군부독재시대 때 시국선언이 잇따르고 사회의 위기감이 고조 될 때마다 한경직 목사나 김수한 추기경 등등의 교계 지도자들이 중재의 역할을 하였었다. 그러나 현재는 교계도 상징적인 인물이 없고 그럴만한 지도력을 발휘하는 인물도 없다. 탁류에 같이 몸을 싣고 갈 뿐이다.

지도자는 다방면에서 뛰어난 안목과 능력을 가져야 한다. 인재를 기용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활용할 수 있는 리더십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섀클턴 같은 인간됨이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감성이 없는 지도자는 결코 대중과 소통할 수 없고 신뢰를 구축할 수가 없다. 인간적 애정과 신뢰를 잃어버리면 지도력을 인기몰이나 공권력 등 비정상적인 방식에 의존하게 된다. 여기에 위험성이 존재한다. 교회 내의 갈등의 원인도 자세히 보면 비정상적인 방식의 지도력을 구축하려는 것에서 발생한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신 예수님께서 당시의 제자들과 현재의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목숨을 버리신 것이 바로 우리가 배운 지도력이다. 배운대로 살자. 예수님의 지도력을 본받을 때 우리가 죽는 것 같으나 진정으로 사는 길로 가는 것이다.


안지호 목사(봉일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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