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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08월13일 20시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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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종교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의 자세
‘종교 전시장’인 한국 사회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이 임박하면서 한국 개신교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개신교의 성장세가 하락세로 돌아선 반면에 천주교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어 대비가 되고 있는데, 교황의 방문이 천주교의 성장세를 가속화하면서 개신교를 더욱 위축시킬 것을 염려하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개신교계 일부에서는 교황의 방문을 반대하는 움직임도 있고, 대놓고 반대는 안하더라도 천주교의 이단성을 부각시켜서 교황 방문 효과를 반감시키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물론 개신교와 천주교의 차이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또한 개신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필자가 몇 년 전에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옮겨간 사람들을 면접조사 했을 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천주교와 개신교는 형제 종교이고, 차이는 ‘하나님’과 ‘하느님’의 차이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에 용어상의 차이밖에 없다는 말은 분명 사실이 아니다. 최근 여러 개신교 매체들이 다뤘듯이 개신교와 천주교는 교리상 다른 부분이 매우 많다. 따라서 개신교인이라면 그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개신교인으로서 신앙생활에 충실해야 한다.

그러나 개신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뚜렷이 하는 것과 다른 종교를 대적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외에는 절대 진리가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배타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는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이다. 그런데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종교의 확산에는 매우 효과가 있지만 그 믿음은 특수주의 가치관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특수주의란 어떤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진리, 지식, 선함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보는 태도를 의미한다. 종교적 특수주의는 자신의 종교만이 참되고 정당하며, 다른 것들은 거짓이고 어리석고 사악하다는 믿음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대개 강력하고 특수주의적인 종교들이 공존하는 곳에서는 종교 갈등이 극렬하게 일어나게 된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가자지구의 분쟁이 대표 되는 보기이다.

특히 우리 사회는 매우 많은 종교들이 공존하고 있는 다종교 사회이다. 잘 알려진 종교만 해도 개신교를 비롯해서, 불교, 유교, 천주교, 원불교, 천도교, 그리고 이슬람교 등의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종교 안에서조차 수많은 교파나 종파들이 어떤 제한도 받지 않은 채 생겨나 공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뿐만 아니라 기성의 체계화된 종교의 관점에서 이단으로 여겨지는 수 백개의 신흥 종교들도 난립하고 있다. 여기에다가 민간인들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민간 신앙까지 고려한다면 한국 사회는 종교의 전시장이라고 말할 정도로, 다종교 상황의 극치를 이루고 있어 자주 외국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기도 한다.
 
종교 간의 갈등 상황

이러한 다종교 상황으로 인해 종교간의 갈등도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정부의 종교 정책에 따라 특정 종교가 이득을 보기도 하고 손해를 보기도 하면서 서로 자기 종교에 유리한 정책이 입안되도록 막후 교섭이 치열하다. 그래서 정부 요직에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이 자리를 잡으면 그를 통해서 자기 종교에 유리한 정책이 나오도록 힘을 쓴다. 이러다보니 그 자리에 어떤 종교를 가진 사람이 들어가느냐에 따라 정책이 이리저리 바뀌어 일관성이 없는 경우마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 요직이 대통령직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서로 다른 종교인들끼리 종교 차별이니 역차별이니 하면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기 일쑤이다.

때로는 특정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대립하여 갈등을 유발하기도 하다. 비교적 늦게 이 땅에 들어온 개신교는 전래 초기에 적지 않은 박해와 핍박을 경험하였으나 이제는 우리 사회에서 주류 종교로 성장하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몇몇 개신교인들이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무례한 태도를 보여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몇 년 전에 있었던 봉은사 땅 밟기 사건이다. 이후 기독교인의 땅 밟기 행위가 수차례 이어졌으며 급기야 얼마 전에는 불교 성지인 인도 사원에서도 땅 밟기를 하여 크게 이슈가 되었다.

‘땅 밟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옳을까? 땅 밟기는 일부 선교단체에서 행하는 것으로, 구약성경의 말씀에 기초하여 선교지에서 땅을 밟고 다니면서 그 땅의 영적 회복과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행동을 말한다. 기독교인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땅 밟기’는 전혀 문제가 없는 행위일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보내주신 것과 같이, 선교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땅을 밟으며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은 어쩌면 기독교인들에게 마땅히 필요한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어떻게 여겨지느냐 하는 것이다. 다종교 사회에서 특정 종교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종교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상대방을 제압하려고 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그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만일 스님이 교회에 와서 목탁을 두드린다면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또한 구약의 말씀은 택하신 백성인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는 데 대한 경고의 말씀이므로 이 말씀을 현대 한국 사회의 맥락에 그대로 적용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 성경 말씀이 축자 영감으로 기록된 것임을 믿는 것과 그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노예 해방을 부르짖은 윌버포스나 링컨도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이고 오늘날의 여성 목사나 장로를 세우는 일도 모두 성경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일이 될 것이다. 게다가 성경 말씀은 내 자신을 돌이켜보고 성찰하는 데 적용해야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공격하는 데 사용하는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내 안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은 없는지 돌아보는 것이 우선이다.
 
기독교 진리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그동안 한국교회는 사회와 소통하려 하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진리를 선포하고, 상대방을 단순히 전도 대상자로 여기는 태도를 보여 왔다. 전도는 기독교인들의 사명이지만, 절대 진리를 수호하는 입장에서는 전도의 대상자와 타협하기 어려우며 도덕적 우월감으로 상대를 낮잡아보기 쉽다. 이렇게 자신의 집단 안에 매몰된 사람은 더 넓은 사회의 지평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리하여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교회생활에 열심일수록 사회에 대한 의식수준은 더 떨어지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오늘날에 지하철 안이나 길가에서 큰 소리로 외치며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설득시키기도 어려운 방법이다. 더군다나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수천 명씩 모아 힘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행위는 패권주의식 사고에 다름 아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신념을 강요하는 것은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존중하지 않는 태도는 한 사회 안에서 공존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요즘 많이 얘기되는 미셔널 처치 개념에 초석을 놓은 레슬리 뉴비긴은, 종교 사회학자인 피터 버거가 말한 ‘설득력 구조’의 변화에 주목하였다. 기독교가 국가 종교였던 기독교 왕국 시기와 달리 대부분의 사회에서 국교가 폐지되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종교 신념에 따라 ‘설득력의 구조’가 달라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설득력의 구조’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의 논리를 보편적인 언어로 표현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치에 맞는 것’이 되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들과 자유롭게 대화하며 자신들의 논리를 펼치고 토론을 통하여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진리를 전하는 바람직한 방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 바른 신앙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어 삶 자체로 전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의 사회신뢰도는 땅에 떨어진 지 오래이다. 어느 누구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는 이유가 언행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제 우리 기독교인들은 말을 앞세우기보다 우리가 가진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삶을 통해서 입증해야 한다. 남을 깎아내려서 내가 올라가려고 하기보다 내가 가진 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스스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다종교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자세이다.



정재영 교수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종교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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