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영 칼럼] 기독교는 스포츠를 능가할 수 있는가? - 기독뉴스
모바일보기
기독뉴스 개편사이트 안...
2024년 05월 04일
 
뉴스 오피니언 방송사진 커뮤니티 2세뉴스
기사등록 I 독자마당 I 광고후원 로그인 회원가입
뉴스홈 > 오피니언 > 칼럼 > 칼럼
2014년07월17일 15시49분
글자크기 기사내용 이메일보내기 뉴스프린트하기 뉴스스크랩하기
[정재영 칼럼] 기독교는 스포츠를 능가할 수 있는가?
대체종교로서의 스포츠

세계 스포츠인들의 축제인 2014 브라질 월드컵이 결승전만을 남겨놓고 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국들이 모두 아쉽게 16강에 오르지 못해 세계의 벽을 실감했지만, 유럽의 강호와 전통적인 남미의 대표국들이 4강에 올라 어느 때보다 관심이 집중된 월드컵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포츠를 하나의 여가활동으로 즐기지만, 오늘날 사회학자들은 스포츠의 다른 측면에 주목하고 있다. 그것은 곧 스포츠가 전통적으로 종교가 하던 기능들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스포츠를 하나의 종교로 보는 입장까지 등장했다.

어떻게 이런 논리가 가능할까? 이것은 전통적인 입장과는 다른 관점에서 종교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종교를 정의할 때 종교가 가지고 있는 요소들의 측면에서 종교를 이해한다. 곧 “종교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종교라면 본질적으로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염두에 두고 종교를 정의하게 된다. 이것을 종교에 대한 ‘본질적인 정의’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종교는 어떠한 일을 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종교를 이해할 수도 있다. 사실 종교가 무엇인지 한 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위대한 종교사회학자인 막스 베버는 자신의 연구의 시작 단계에서 종교를 분명하게 정의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지식이 일정 수준에 이른 후에야 종교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종교에 대한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막스 베버는 연구 중에 급사하여 그의 종교에 대한 정의를 남겨놓지 못했다. 그만큼 종교를 본질적으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 대신에 ‘이러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 종교다.’ 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종교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인데 이것을 종교에 대한 ‘기능적인 정의’라고 한다.

이와 같이 종교를 기능적으로 정의한다면 궁극적인 문제에 답을 준다든지, 사람들을 특정한 가치로 결속시킨다든지, 최상의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 종교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오늘날에는 스포츠가 그런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전통적인 종교만이 이러한 기능을 담당하였지만, 오늘날에는 특정 이념이나 사상과 같은 유사종교뿐만 아니라 여가활동이나 스포츠 같은 활동들도 그러한 기능을 하는데, 이러한 것들이 종교의 기능을 대신한다고 하여 ‘대체종교’라고 표현한다.
 
종교에 버금가는 스포츠

실제로 스포츠가 어떻게 종교의 기능을 하는지 생각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것을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운동경기장에 가본 사람이라면 쉽게 경험해볼 수 있는데, 수만 명의 사람들이 경기장에 모여서 자기가 좋아하는 팀을 응원하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흡사 종교 집회를 방불케 한다. 목청 높여 응원가를 부르는 것은 신자들이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을 연상케 하고, 관람 중에 음식을 나눠 먹는 모습은 애찬식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많은 종교사회학자들은 운동경기장을 의례의 공간으로 보고, 스포츠를 종교로 여기고 있다. 단순히 “스포츠가 종교의 기능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스포츠가 실제로 종교”라고 보는 것이다.

좋아하는 팀이 우승을 하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하는 경우도 쉽게 볼 수 있다. 실제로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에 우리 국민들은 엄청난 경험을 하였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우리 축구대표팀이 16강을 넘어서 8강, 4강까지 올라갔을 때 스포츠팬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열광하며 기뻐했고, 전에 없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흔들었으며 심지어는 태극기를 몸에 두르는 새로운 의상 패션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애국가를 부르며 감격했던 모습을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또한 붉은 옷을 입고 시청 앞에 모여서 응원하는 모습은 전세계 언론에 보도되며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이것은 실제로 하나의 시민 의례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당시에는 월드컵 기간 동안 자살률이 떨어졌다는 보도도 나와서 스포츠로 인한 결속력과 자존감 회복이 심리 치료의 기능을 한다는 점을 증명해 보이기도 하였다.

같은 팀을 응원하는 사람들끼리 느끼는 동질감도 대단하다. 언젠가 거리에서 가벼운 접촉사고가 났었는데 피해 운전자가 가해 운전자의 차에 자신이 응원하는 스포츠팀의 로고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반가워하며 접촉사고를 문제 삼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

그런데 어느 대형 교회에서는 예배를 마치고 나와서 교회 주차장에서 차를 빼다가 가벼운 접촉사고가 났는데 운전자끼리 큰 싸움이 났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단편적인 일화이지만, 같은 교회 교인보다도 같은 스포츠팬끼리 더 강한 동질감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반면에 서로 다른 팀을 응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립과 갈등이 일어나며 운동 경기 중에 폭력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고 자기 팀에 패배를 안겨 준 선수에게 테러를 가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는데 이것 역시 종교로 인한 갈등과 상당히 닮아 있다.
 
기독교가 스포츠를 능가하려면

이렇게 사람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니 해마다 미국에서는 슈퍼볼 경기를 할 때 예배를 쉬는 경우도 많이 있다. 경기를 보기 위해 예배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고 예배에 참석해서도 마음은 경기 결과에 가 있으니 제대로 예배를 드리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월드컵과 같은 우리나라의 주요 경기가 집회 시간과 겹쳤을 때에는 집회를 빨리 마치고 예배당 안에 설치된 스크린으로 함께 경기를 지켜보며 응원을 하기도 한다. 또한 주일 아침이 되면 예배를 보러 교회에 갈까 아니면 등산이나 운동을 하러 나갈까 하고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연휴에 주일이 끼어 있으면 대부분의 교회에서 예배 출석 인원은 10퍼센트 이상 줄기 마련이다.

이쯤 되니 기독교의 경쟁 상대는 불교나 다른 종교가 아니라 여가나 스포츠와 같은 대체 종교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특히 주5일 근무제가 정착되고 나서는 주말에 교외로 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기 위해 교회마다 대책을 강구하고 있으나 별무 소용인 형편이다.

사실 운동 경기는 매 경기마다 박진감이 넘치고 결과를 예측할 수 없어 경기에 집중하게 되고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승부가 펼쳐지니 한번 빠지게 되면 쉽게 빠져 나오기가 어렵다. 그러나 많은 경우 예배는 틀에 박힌 순서에 따라 진행되며 설교도 집중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오죽하면 길고 지루한 얘기를 하면 “설교하지 마라”고 말하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매번 예배마다 흥겨운 분위기에 특별 이벤트를 펼치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하심을 결코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나 매주일 예배마다 감격 속에 드리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우선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예배 환경을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세대에 따라 신앙 배경에 따라 선호하는 예배 분위기가 다르기 때문에 획일적으로 접근할 것은 아니고 각각의 필요에 적절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적절한 시설과 예배적 장치가 필요할 수도 있고, 반대로 모든 인위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것이 예배에 더 집중하게 하기도 하기 때문에 교회 지도자는 이를 잘 고려해야 한다.

다음으로 예배가 일상생활과 지나치게 유리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예배는 일상생활과는 구별된 의례이지만, 일상생활과 단절된 예배 의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의 모든 삶의 모습이 산 예배가 될 수 있도록 주일의 예배와 일상생활이 유기적인 관계 속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예배의 감격이 일상생활에 구현되고 일상생활에서의 실천과 성찰이 예배를 통해서 해석이 되고 의미 부여가 되어야 한다.

성경의 이야기가 2천 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오늘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스포츠가 종교를 대신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스포츠가 궁극적인 삶의 의미에 답을 주지는 못한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복음의 능력을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 삶에 최상의 중요성을 부여하며 모든 삶의 영역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다할 때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는 위대한 종교로서의 역할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재영 교수

 
저작권자(c) 뉴스미션. 무단전재-재배포금지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트위터로 보내기페이스북으로 보내기미투데이로 보내기 뉴스스크랩하기
칼럼섹션 목록으로
 

이름 비밀번호
 70353898  입력
댓글콘선택 : 댓글 작성시 댓글콘을 클릭하시면 내용에 추가됩니다.
[1]
뉴스홈 > 오피니언 > 칼럼 > 칼럼
다음기사 : 손 깨끗한 (2014-07-17 16:24:26)
이전기사 : 너희는 이것들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014-07-14 20:31:04)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회사소개 보도지침 저작권 규약 이용약관 사업제휴 직원채용 광고후원 기사제보 연락처 don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