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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07월17일 01시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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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막 2: 1-12 7. 13. 14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막 2: 1-12 7. 13. 14

 

예수님의 선교본부(Mission Headquarter)가 있었던 예수님의 제2 고향 가버나움(마 4: 13)의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막 1: 29절)에서 설교 도중에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기적의 본문은 예수께서 성도를 위한 영원한 제사장(히 2: 17)과 구속주로서 자신을 스스로 증거하신 자기계시의 사건으로 아주 중요한 내용이다. 특별히 신학적인 문제들에 아주 민감해 예수를 트집 잡으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앞에서, 병상에 누워 있는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My son, your sins are forgiven; 5절)며 선포하신 것은 예수자신이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며 인류의 제사장과 구속자이심을 당당하게 선포한 중대한 선언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중풍병자를 향한 ‘죄 용서 선언’을 들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 하는가 참람하다. 지구촌에서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 누가 능히 인간의 죄를 사하겠느냐?”(Why does this man speak that way? He is blaspheming, who can forgive sins but God alone?; 7절)며 예수님을 향해 이를 갈면서 격분했다.

 

참람하다’의 블라스페메이는 인간관계에서는 “제 분수를 지나 방자스럽거나 주제넘고 건방지다”, “타인을 비방하고 중상한다”는 뜻이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신의 특권을 탈취하거나 그분을 불경스럽게 모독한다”는 뜻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교법사들은 예수님의 ‘죄 용서 선언’을 듣자마자 “나사렛목수 천민출신인 예수가 감히 하나님의 특권을 탈취하고 하나님을 불경스럽게 모독한다”, “저자는 죽어 마땅한 신성 모독자”라며 격앙하고 분노했다. 그만큼 예수님의 죄 용서 선언은 당시로는 가히 충격적인 선포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용서뿐 아니라 죄의 결과로 당하고 있는 육체의 질병 중풍(中風)병까지 고쳐주심으로 당신 스스로가 사죄권이 있는 하나님과 동등한 신적존재임을 증거했다. 이 질병치료기적은 ‘믿음으로’ 동시에 죄 용서함과 병 고침을 받은 그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게 했고,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 앞에 구름떼처럼 운집해 인산인해를 이뤘던 가버나움 동네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They began glorifying God; 눅 5: 26)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We have seen remarkable things today!) 외치며 소리 지르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사건이 돼 버렸다.

 

“저희 믿음을 보시고”

 

공관복음의 저자 세 사람 마태, 마가, 누가는 이구동성으로 중풍병자의 죄 사함과 질병치료사건을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When Jesus saw their faith; 마 9; 2, 막 2: 5, 눅 5: 20) 행하신 기적이라고 증언했다. ‘Their faith, 그들의 믿음’이란 먼저,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신대로 중풍병자의 믿음을 가리키고, 그다음.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리고 온 네 친구들의 믿음을 가리킨다. 그래서 Their Faith(저희 믿음)란 중풍병자와 네 친구들인 다섯 사람의 믿음을 가리킨다. 그렇다. 다섯 사람의 믿음이 오늘의 기적을 만들어 냈다.

 

그렇다. 오늘도 우리 삶의 현장에서 크고 작은 죄 용서와 각종질병의 치료, 많은 문제의 해결, 여러 가지 축복의 사건과 기적의 역사는 “예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실 때” 나타난다. 당신이 절망 앞에서 한숨 쉬거나 포기할 때가 아니다. 당신이 문제 앞에서 두려워 떨거나 문제를 피해 도망칠 때가 아니다. 예수께서 ‘나의 믿음을 보실 때’이다.

 

오늘 여러분이 기적적인 사건으로 질병에서 치료를 받기 원한다면, 예수님의 기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기 원한다면, 예수의 기적으로 절망적상황이 희망으로 바뀌고 칠흑 같은 상황이 광명으로 바뀌기 원하며, 주님의 기적으로 놀라운 부흥을 원한다면, 먼저 당신 개인의 믿음을 예수께 보이고, 당신 가족의 집단적 믿음과 주기도문교회 목사와 성도들이 하나가 된 집단적 믿음을 예수님께 보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 믿음이 예수님께 발견돼 인정받고 검증받아야 한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 개인의 믿음과 우리의 집단적인 믿음을 보시고 육체의 질병치료구원에서 죄 사함과 용서의 영혼구원, 삶에 활기가 넘치는 환경의 구원, 숨이 막히는 가난과 불경기의 저주에서 자유를 얻는 물질의 구원, 실타래 얼크러지듯 복잡하게 얽혀 나를 괴롭히고 있는 문제들이 풀어지고 해결되는 기적의 구원역사들을 베풀어 주시기를 축원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보신 다섯 사람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고,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서 보시기 원하는 것은 어떤 믿음인가?

 

1. 장애물을 뛰어넘는 믿음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려온 네 사람은 그 중풍환자의 친구인 상전의 명령을 받은 네 명의 종들로 보는 견해와 중풍병자의 가족이나 친구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네 사람이 누구이든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중풍병자와 네 친구, 다섯 사람의 예수의 권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네 사람이 병상들것에 실어 환자친구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 이미 베드로의 집 안팎, 집 근처엔 설교를 들으려는 사람들과 병 고침을 받으려는 사람들, 예수님의 기적을 보려는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사람이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예수님이 계신 집 안으로 병자를 데려가는 일은 거의 불가능이었다. 그렇지만 다섯 사람은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 앞에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장애물을 넘어 예수님께 가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잠시 병자를 땅에 내려놓은 네 사람은 장애물을 뛰어넘을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환자친구를 지붕으로 올려가는 것으로 방법을 결정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의 서민 가옥의 구조는 대개 진흙을 햇볕에 말린 벽돌집으로 된 단칸방에서 살았다. 집은 보통 단층이지만 집안의 방은 높은 칸과 낮은 칸으로 나뉘어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높은 칸은 가족들의 숙소로 사용됐고, 낮은 칸은 가재도구나 여러 가지 물건의 저장소로 이용됐으며, 밤이나 비가 올 때는 가축의 우리로도 사용됐다. 대부분의 지붕은 이 벽에서 저 벽까지 든든한 대들보로 가로지르고 나뭇가지를 덮은 후, 그 위에 진흙과 모래와 자갈을 섞어서 덮고 평평하게 만들었다. 당시 지붕은 사람들에게 공지사항을 공표해 알리는 장소(마 10: 27) 또는 경배와 기도 장소(행 10: 9)로 사용됐고, 위급시엔 도망로(마 24: 17)가 되기도 했으며, 일반적으로는 멍석을 깔고 자는 잠자리나 곡식이나 과일을 말리고 익히는 장소로도 사용됐다. 그리고 여유가 있는 집은 넓은 지붕 한쪽에 다락방을 들여 손님방(Guest Room)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는데(눅 22: 12) 평평한 옥상의 지붕은 우리나라의 2층 옥탑방처럼 밖으로 나있는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가 있었다.

 

네 친구는 비교적 사람들이 적은 계단을 통해 중풍병자 친구를 지붕으로 올려간 다. 그리고 여기저기 귀를 기울여서 집안에서 설교하고 계시는 예수님이 계신 장소를 찾은 다음, 과감하게 그곳 지붕을 뜯어내고 병자를 방안으로 달아 내려서 예수님의 치료를 받게 했다. 예수님은 그날 장애물 앞에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장애물을 극복해내는 그들의 불굴의 신앙을 보시고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셨다. 오늘도 예수님의 축복과 기적은 장애물을 뛰어넘고 극복하는 사람에게 나타난다.

 

1961년 1월 19일에 나는 어느 부흥집회에 참석했다가 성령세례를 받고 본교회로 돌아와 유창하게 방언기도를 하는 여 집사님을 보면서 너무 부러워, 나도 성령을 받고 방언이 하고 싶어서 30여명의 학생들과 철야기도를 했다. 저녁 10시에 시작해 다음날 새벽 4시 반까지 6시간 반 동안 기도한 후,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기도를 하게 됐지만 방언 은사체험 과정에서 몇 시간을 아무리 부르짖고 기도해도 응답이 없어서 ‘내게 방언의 은사를 주시면 목사가 되겠다’는 서원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 후에 마침내 ‘날라리방언’(지금의 방언처럼 유창한 언어의 방언이 아니라 랄랄라만 하는 방언)을 받았다.

 

성령을 받고 날라리방언을 했던 몇 달 동안은 구름 위를 날아다니는 것 같은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즐겁게 했는데, 몇 달 후 나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됐다. ‘방언을 하게 하시면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한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성격이 급하고 부끄럼을 많이 타는데다 말까지 어눌한 태생적인 말더듬이였다. 나의 바로 밑 동생 이름이 ‘선일’인데 그를 부를 때 ‘설아’라고 할 정도로 성격이 급하고 말도 정확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부끄럼을 많이 타서 사람 앞에 서면 마음이 떨리고 얼굴이 붉어지는 두려움증이 있었다. 목사가 되려면 말을 잘해야 하는데(당시 담임목사님의 설교는 다발총 쏘는 것처럼 잘하셨다)...나는 아무리 봐도 목사 재목이 아니었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은 8-9개월이 지난 후, 고민하던 끝에 ‘목사만 아니면 무슨 일도 순종하겠으니 목사만 되지 않게 해 달라’며 ‘목사 취소기도’를 시작했다.

그렇게 여섯 달 이상을 기도했지만 아무 응답이 없던 어느 주일, 담임목사님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If You can!)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All things are possible to him who believes; 막 9: 23)는 설교가 있었는데 그 말씀들이 불방망이로 내 맘을 두드려 부수고 산산조각을 내면서 내 영혼 속에 불같은 도전을 주었다(그날의 설교를 다 기억하진 못하지만 많은 내용이 ‘역사를 움직인 웅변가나 대설교가들은 날 때부터 말을 잘하는 달변가가 아니라 말을 더듬던 사람들로 그들은 폭포수 앞이나 정글이나 산에서 웅변과 설교를 연습한 사람들이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날 목사님의 설교는 내 인생의 Turning-Point가 됐다.

 

목사님 설교에 도전을 받은 며칠 후부터 나는 고향 뒷동산에 올라가 설교연습을 시작한다. 그렇게 1년 8개월 동안의 설교연습이 시작됐다. 새벽잠이 많아 게을렀던 내가 새벽 2-3시에 일어나 산에 올라가 고함을 지르며 설교연습을 하고, 학교에서 돌아와 저녁이나 밤에도 산에서 떠들며 설교연습을 하니 완전히 미친 사람이 됐다. 그러자 동네사람들이 ‘당신 아들이 실성한 정신병자가 됐으니 조심시키라’며 부모님을 괴롭히자 부모님의 핍박은 상상을 초월했다(성경책을 불태우고 가방까지 아궁이에 집어넣었으며, 저녁에 교회를 가면 대문을 걸어 잠거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밥을 굶기기까지 했다) 그래서 한창 성장할 고등학교 2-3학년 때에 밥을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다. 동네어른들은 내가 인사를 하면 ‘미친놈이 인사하니 재수가 없다’며 얼굴을 돌렸다. 나중에 부친은 내가 산에 가는 것을 막으려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소를 끌고 들에 나가 풀을 먹이고 소꼴을 베 오라고 했다. 그러면 소꼴을 지게에 짊어진 채 소를 몰면서 논두렁에서 설교를 연습했는데, 갑자기 소리 지르는 우렁찬 내 목소리에 놀란 소가 뛴다. 그래서 뛰는 소를 잡으려고 좁은 논두렁에서 비틀거리다가 곤두박질해 물속에 빠지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설교를 연습한 고향 뒷동산 산모퉁이 자갈밭엔 유난히 뱀들이 많았다. 그래서 여름과 가을엔 독사들이 나타나 위험했고 겨울엔 눈이 무릎까지 차 눈 속에서 발이 언 채로 연습해야 했으며, 살을 에는 찬바람 강추위에 떨면서 설교연습을 했다. 그렇게 비오고 바람 불며 무더위가 극성을 부리고 폭설이 내려도 설교연습을 계속했다. 이것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전적인 성령님의 인도였다(당시는 나처럼 어눌한 사람이 소나무를 붙잡고 기도하다가 뿌리가 뽑히면서 뒤로 굴러 넘어졌다가 말을 잘하게 된 사람이 있었다는 간증 때문에 산에서 소나무를 붙잡고 뿌리가 뽑히도록 기도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나는 시멘 콘크리트보다 더 강한 자갈밭에 뿌리박힌 소나무를 붙잡고 흔들면서 몸부림을 치면서 기도를 했지만 한 뿌리도 뽑지 못했다) 심지어 나중에는 자갈을 입에 물고 설교를 연습해 잇몸이 으깨져서 피를 토하면서 연습을 했다. 태생적인 어눌함의 장애물을 믿음으로 뛰어넘으려는 초강훈련이었다.

 

그런데 1년 8개월의 설교연습 중에 하나님은 세 번의 신비체험을 나에게 주셨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내게 임하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 몸이 불덩어리가 되면서, 내 입으로는 설교를 연습하고 있는데 눈으로는 내가 서 있는 산 밑과 앞산과 옆 산의 수십 수백만 구루의 나무들이 사람이 되어 내게로 모여오는 환상계시였다. 한 번도 아닌 세 번이나 똑같은 신비체험이었다.

 

솔직히 지금도 나는 왜 하나님께서 17-8세의 어린 나에게 그런 계시를 보여주셨는지 하나님의 계획이나 섭리를 알지 못한다. 수십 년 동안 그 계시환상의 의미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생각지도 않았었다. 그러다가 40여년이 지난, 10여 년 전 어느 날, 어렴풋이 그 계시환상이 기억나며 ‘혹시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 이었나’ 생각하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의도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청소년시절에 그러한 장애물을 뛰어넘으려는 굽히지 않는 내 믿음의 도전이 있었기에 수줍음을 잘 타고 어눌했던 말더듬이 소년이 목사가 돼 50여년이 넘도록 대륙을 날아다니며 설교하고 있게 됐음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감사한다. 지금 당신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들을 뛰어넘는 믿음으로 기적을 체험하는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2. 꿈을 포기하지 않는 믿음

 

독일에게 7: 1로 패배한 충격적인 악몽과 정신적 공황(Panic)에서 깨어나지 못한 브라질이 어제 3-4위 전에서 네델란드에게 3: 0으로 다시 패배하므로 브라질은 앞으로 얼마 동안 집단적 Panic에서 헤어나기 힘들게 됐다. 이제 오늘 오후에 있을 독일과 아르헨티나의 결승전을 끝으로, 한 달 동안 세계를 열광시켰던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축구가 막을 내린다.

 

이번 대회 브라질 축구팬의 구호는 ‘리벤지 1950’이었다. 1950년 브라질 월드컵 결승에서 우루과이에 패한 아픔을 씻고 정상을 밟겠다는 의미이다. 브라질 팀은 원래 흰색 유니폼을 입었지만 그때 패배의 아픔이 너무 커 흰색에서 노란색으로 유니폼 색깔까지 바꿨다. 그런데 그렇게 절치부심하여 64년 만에 유치한 월드컵에서 독일에게 7: 1로 참패를 당했고, 설상가상으로 네델란드에게 3: 0으로 졌다. ‘Revenge 1950'이 아니라 ’Again 1950'이 돼 버렸다.

 

세계최강의 브라질 삼바축구가 한 경기에서 7골을 허용한 건 1934년 유고슬라비아와 평가전에서 8: 4로 패한 뒤 80년 만이다. 이번에 독일에게 7: 1로 참패한 것은 브라질이 1920년 우루과이에 6: 0으로 패한 뒤 당한 최다골차의 패배며, 역대 월드컵 개최국 최다 점수 패배이며, 42경기 연속 홈경기 무패행진의 처참한 종지부였다. 독일과의 Semi-Final(준결승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브라질의 승리를 점쳤지만 게르만 과학축구는 브라질을 무참하게 침몰시켰다. 그리고 어제 실 날 같은 희망을 갖고 국민들을 기쁘게 하려고 도전했던 네델란드 전에서 또다시 3: 0이란 치욕적인 패배의 수모를 당했다. 월드컵 개최국 브라질은 준결승전과 3-4위전까지의 패배로 독일과 아르헨티나의 결승전을 지켜봐야 하는 많은 사람이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심장마비와 자살로 죽었고 각처에서 폭동이 일어나 지금 브라질은 폭발직전의 휴화산이다.

 

그러나 브라질의 삼바축구는 불원간에 다시 일어나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을 나는 믿는다. 그래서 축구황제 펠레의 후계자 제2 제3의 네이마르들이 일어나며 월드컵잔디구장에 노란색 돌풍을 일으킬 것을 꿈꾸는 삼바축구가 되길 기대해 본다.

 

펠레와 함께 브라질의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로 기억되는 선수가 있다. 마누엘 프란시스코 도스 산투스(1933- 1983), 작은 새라는 별명의 가린샤다. 리우데자네이루 슬럼가에서 알코올중독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난해서 정규교육도 받지 못한 까막눈이었다. 여섯 살 때 소아마비를 앓고 그 후유증으로 오른쪽 다리는 안으로 굽고 왼쪽 다리는 밖으로 굽은 기형인데다 오른쪽 다리보다 왼쪽이 6cm나 짧았다. 그래서 보조기구를 달지 않으면 평생 휠체어 신세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랬던 가린샤가 훗날 당대 세계최강 브라질 축구대표선수와 세계최고 드리블러라는 칭호까지 얻고, 1958년 스웨덴 월드컵 우승, 1962년 칠레 월드컵 우승을 이끌며 득점왕까지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만한 우측 공격수는 아무도 없었다’는 전설을 남겼다.

 

절름발이 기형아 소년 가린샤는 꿈을 가지고 걸었고 꿈과 함께 뛰었다. 축구는 그의 유일한 꿈이었다. 그래서 축구를 좋아했고 축구에 미쳐 살면서 실력을 길렀다. 이렇게 다리가 길고 짧은 장애를 극복하려는 노력의 결과 드리볼 자세와 리듬이 다른 선수와 달라서 상대수비수들이 혼란스러웠던 것과 꿈을 이루려는 부단한 노력으로 그의 프리킥과 드리볼은 발군이었다.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마침내 브라질 국가대표가 됐고 1958년 스웨덴 월드컵과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 브라질 우승의 주역으로 우뚝 섰다. 특히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선 펠레가 부상당해 벤치 신세를 지는 바람에 가린샤가 브라질 우승주역이었다. 똑바로 걷을 수도 없던 불구자의 다리병신이 월드컵의 우승주역이 된 것은 꿈을 포기하지 않은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와 고쳐주길 원했던 네 친구는 환자친구의 병을 고쳐주고픈 자기들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의 그런 믿음이 중풍병자 친구의 병을 고친 것이다. 오늘 동서남북 어디를 살펴봐도 소망의 가능성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닿는 것은 절망뿐이며, 주위에서는 ‘안 된다, 망할 것이다, 끝났다’라는 부정적인 소리만 귀에 들리는 여러분, 그렇더라도 ‘하나님의 강한 손이 나와 함께 하신다. 나는 망하지 않는다’는 당신의 꿈을 포기하지 말라.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던 꿈 쟁이 요셉을 기억하자. 당신이 꿈을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한 당신은 결코 요셉처럼 실패하지 않는다. 망하지 않는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

 

평생의 모든 꿈 허물어져 세상의 친구 다 떠날 대

어둠에 앉아서 울지만 말고 예수님 품으로 나오시오

 

어둔 밤 지나면 새 날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이 세상 슬픔이 지나고 나면 광명한 새 낧이 다가오네

 

예수님은 나의 생명 믿음 소망 사랑되시니

십자가 보혈 자비의 손길로

상처 입은 너를 고치시리(미가엘 886장)

 

 

3. 협력하는 믿음

 

중풍병자를 들것에 싣고 온 네 사람은 육군군악대처럼 모두 신장 6피트(180cm)가 넘고 몸무게 90kg이 넘는 건강한 장신거구들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키가 컸고 어떤 이는 키가 작았으며, 어떤 사람은 힘이 셌고 어떤 사람은 힘이 약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협력해 힘을 안배했고 협력하여 서로를 보조했다. 환자 친구를 지붕으로 올려갈 때도, 그리고 지붕을 뚫고 병자를 방안으로 내릴 때도 네 사람은 서로 협력하고 보조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저들이 서로 협력하는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셨고 그의 병을 깨끗하게 고쳐주셨다.

 

오늘 예수님은 주기도문 교회의 협력하는 믿음을 보기 원하신다. 담임목사와 부목사 협동목사가 힘을 합쳐 서로 협력하고, 당회장과 당회, 권사회와 제직회, 남녀선교회, 찬양대가 서로 힘을 모아 협력하는 믿음을 보시고 축복하시길 원하신다. 담임목사는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3시간 4시간 기도하는데 부목사 협동목사는 성의 없이 20분 30분 기도한다면, 중풍병자의 침상을 든 네 사람 중 한쪽은 높이 들고 한쪽은 낮게 든 것처럼 불균형의 잘못된 신앙이며 그런 교회는 거룩한 부흥을 기대할 수 없는 콩가루 집안, 콩가루 교회이다. 담임목사가 2시간을 기도한다면 목회를 돕는 협력목사들은 최소한 1, 2시간은 기도해야 한다.

 

자두연두기(煮豆然豆器, 주도우도우기)

두재부중읍(豆在釜中泣, 도우자이기)

콩깍지로 콩을 태우니 콩은 가마솥 안에서 우네

본시동근생(本是同根生, 벤쉬겐쉥)

상전하태급(相煎何太急, 시앙지안타이찌)

본래 한 뿌리에서 났건만 어찌 이리도 급하게 볶아 대는가

 

조조의 둘째 아들 조식(曹植)이 지은 유명한 ‘칠보시(七步詩)’다. 조조의 뒤를 이어 대권을 잡은 조비(曹丕)는 똑똑한 동생 조식을 시기했다. 그래서 어느 날, 조비는 트집을 잡아 “일곱 걸음 안에 시를 지으면 살려주고 못 지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그때 조식이 일곱 걸음을 떼면서 읊은 시가 바로 ‘칠보시’다. “한 핏줄을 타고 났는데 왜 이렇게 안달 핍박하느냐?”는 원망을 절묘하게 비유한 시이다.

 

칠보시는 수세기 전, 중국 땅에서 형과 동생이 권력을 놓고 싸우던 ‘콩가루 집안’의 노래이지만 오늘 미국에 살면서 조국과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목사의 한 사람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이 여야가 서로 물고 물어뜯는 한국의 여의도정치, 심지어 양김계파 안에서 자기들끼리와 싸우며 박근혜파 안에서의 계파싸움을 보는 마음과 세상보다 더 타락해 가고 있는 한국교회를 보면서 떠오르는 노래 시이기도 하다. 성경은 ‘피차 물고 먹으면 모두 망한다’고 했다. 마음을 모아 협력하는 길만이 가정이 살고 나라가 살며 교회가 사는 길이다.

 

2차 대전에서 독일공군은 막강했다. 그러나 영국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므로 패전국이 된다. 당시 두 나라 비행기는 한대씩 출격해 싸웠는데 성능과 기술이 뛰어난 독일비행기에 영국군은 열세를 면치 못해 패전의 위협까지 느끼고 됐었다. 그런데 영국군장교 한 사람이 성경을 읽다가 “한 사람이 천을 쫓고 두 사람이 만을 도망케 한다”(신 32; 30)는 말씀에 영감을 얻어 비행편대를 두 대로 조를 짜 독일군과 공중전을 치러보니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한 조를 네 대로 비행편대를 늘여 공격해보니 그 효과는 한꺼번에 수십 대의 비행기가 공격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영국공군이 독일군을 물리치면서 전세를 뒤엎고 2차 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만들었는데 그때부터 전 세계의 비행편대는 네 대를 한조가 되게 했다고 한다.

 

그렇다. 비행기 한 대보다는 두 대, 두 대보다는 네 대의 공격이 수십 배 효과가 있고, 다섯 평짜리 방 이쪽 끝과 저쪽 끝에 100와트 전구 두 개를 켜면 200와트 밝기가 되지만 서로 가까운 곳에 100촉짜리 두 개를 켜면 300, 400와트의 밝기가 되며, 무쇠 종을 향해 한 사람이 1000개의 종이 공을 한 개씩 던지면 아무 반응도 없지만 200명이 동시에 계속해서 던지면 무거운 쇠 종이 출렁이며 움직이듯 우리들이 믿음을 연합하고 합심하면 놀라운 기적이 나타낸다.

 

사람마다 모두 자신이 갖고 있는 기(氣; 기운)가 있다. 그래서 말없이 가만히 앉아있어도 무술인의 기, 학자의 기, 사업가의 기, 기도하는 사람의 기, 심지어 무속인의 기가 느껴진다. 특히 성도들에겐 은혜의 기, 능력의 기, 영적내공의 기가 있다. 그러나 대단한 내공이 있는 특별한 사람 외에 보통사람의 기는 미약하다. 그렇지만 미약한 기(氣)라도 여러 사람이 모이면 여러 개의 개천 물이 모여 강물이 되듯 강한 기운이 된다. 그러기에 여러분의 기를 하나로 모으면 놀라운 힘을 나타낼 수 있고 여러분의 기도의 기운, 찬양의 기운, 믿음의 기운을 합치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If two lie down together they keep warm, but how can one be warm alone?) 한 사람이면 패하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전 4: 11-12)고 했다.

 

예수님은 병상에 누워있는 중풍병자와 네 친구인 다섯 사람의 믿음, 다섯 사람이 서로 협력하는 믿음을 보셨다. 그리고 중풍환자의 죄를 용서하셨고 그의 병을 고쳐주셨다. 그리고 그 주님은 오늘 주기도문교회가 서로 협력하는 믿음을 보이기를 기다리신다.

 

김목사가 새벽 1시에 교회에 나와 혼자 기도할 때도 하나님은 내게 힘과 능력과 은혜를 주셔서 감사하지만 여러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면 더 힘이 나고 은혜가 된다. 예배 후 성도의 교제시간에 남자성도들이 팔을 걷어 부치고 밥상을 정리하고 음식을 서브하며 설거지까지 하고 여성도들을 도울 때, 팔짱끼고 구경하거나 대접받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보다 훨씬 보기가 좋고 은혜가 된다. 수요일 예배도 피곤하고 바쁘다 핑계하며 성도들이 예배에 빠지는 때보다 성도들이 합심하여 열심을 내서 모이면 더 은혜가 된다. 서로 협력하는 믿음을 주님께 보일 수 있기를 축원한다.

 

4. 침상을 가지고 가라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면서 왜 그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Rise, take up your pallet and go home; 11절, 요 5: 8)고 하셨는가? 그냥 ‘일어나 집으로 가라’(Rise and go home)고 해도 될 텐데, 병자에게 ‘병상을 가지고 가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더럽고 냄새나며 쓰레기만도 못한 병상을 가지고 가라고 하신 것은

 

너도 내 구원사역에 동참하라는 뜻이다. ‘내가 네 죄를 용서하고 네 병을 고쳤으니 너도 네 자신을 용서하고 너의 치료를 위해 노력하고 협력하라, 네 믿음을 보태라, 네가 할 일을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홍해 앞에서 부르짖고 기도하는 모세에게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출 14: 15-16)고 하셨고,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과 칠병이어 기적에서 떡과 고기를 축사하신 후, 제자들에게 떼어주시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떼어 주라고 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의 기적에서 하나님이 하실 일과 인간이 할 일을 알려주신 것이다.

 

만나는 하나님이 내려주시지만 들에 나가 만나를 거두는 일과 그것으로 과자를 만들어 먹는 일은 인간이 할 일이며, 죄 용서해주시는 것과 질병치료는 예수님이 하시지만 건강관리와 자기관리는 인간이 할 일이고, 근본적인 문제해결은 예수님이 해주시지만 사업관리, 가정관리, 행복관리는 인간이 할 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해주시는 일과 예수님의 하신 일에 나의 노력과 수고와 노력을 더할 줄 아는 지혜가 있기를 축원한다.

 

너의 과거를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이다. 내가 몇 년 전, 부산에 집회를 갔을 때, 그 교회 한쪽 코너에 교인들이 안수기도를 받고 치료 받은 후 기념으로 남겨둔 돋보기안경, 보청기, 클러치(Clutch), Wheel-chair, 지팡이 심지어 중이 예수 믿고 중병을 고침 받고 기념으로 남겨 놓은 불경까지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병에서 고침 받은 것을 사진으로 남겨서 전시해 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

 

담임목사는 전시물을 통해 성도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체험한 하나님의 기적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다른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사건의 흔적들을 보면서 자기들도 그러한 은혜를 사모하고 기도한다고 했다. 그렇다. 불태워 없애거나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병상을 집으로 들고 간 중풍병자는 그것을 볼 때마다 예수님의 구원과 치료기적을 생각하며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했을 것이다. 이렇게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신앙유지에 큰 도움이 된다.

 

내 서재 책꽂이에 ‘이민 서류철’ 바인더가 있다. 바인더 안엔 30-40년 동안에 내가 사람들을 한국이나 중국, 네팔에서 미국으로 방문 초청한 서류에서 많은 사람들의 영주권을 도와준 서류까지 수백 장이 넘게 보관돼 있다(그중 ⅔ 정도는 버렸는데도 아직도 많다) 그 중에 1974년 3월에 미국목사에게 받은 초청장이 있는데 너무 오래돼 낡고 헐어서 읽기도 어려울 정도지만 나는 그것을 보물같이 귀중한 서류로 간직하고 있다.

 

오랜만에 한 번씩 그 초청장을 펴볼 때마다 나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던 충북단양 소백산 두메산골에서 7년 동안,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보고 기다렸던 인고의 세월을 생각하며, 옛날 사진들을 보면서 과거를 감사하고 미래를 다짐하듯, 낡고 잉크색깔이 변한 초청장을 보면서 과거와 현재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감사하고, 미래에 내가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을 다짐하며 나를 새롭게 한다.

 

지금 우리는 자기 집으로 메고 간 중풍병자의 때 묻고 냄새나며 더러운 침상처럼, 기쁘고 즐거우며, 슬프며 기억창고를 열어보고 싶지 않는 부끄러운 과거를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런 것들을 기억하면서 과거를 잊지 말 것이란 말이다.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이 12개의 돌은 흐르는 요단강물 속에, 12개의 돌은 길갈 언덕에 세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한 것처럼, 망각의 늪 속에 침륜되고 기억 속에 묻혀 져 있는 과거도 감사하고, 기억 바깥으로 나타나는 과거도 감사하는 ‘과거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이제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크고 작은 장애물들을 뛰어넘는 믿음을 갖자. 불굴의 의지로 꿈을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주님께 보이자. 시기 다툼 교만 자랑 버리고 서로 양보하고 서로 협력하는 믿음을 주님께 보여드리자. 멀리 사라져버린 과거를 잊지 말고 기억하며, 주어진 현재를 기뻐하고 감사하며, 앞으로 창조될 신화의 미래를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도전하므로 주님의 기적적인 구원과 축복들을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한다.



김엘리야 목사 (워싱턴주기도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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