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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07월09일 21시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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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 유신론
우주와 자연 그리고 생명은 하나님의 존재를 말한다. 
 
 본인은 과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신론과 유신론의 변론에 대한 연구에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으로 무신론자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강의를 할 때에 본인은 그들의 자신감에 아연실색한다. 이 제한된 육체를 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이 없다고 자신있고 확신에 넘쳐서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왜 하나님이 없는 방향으로만 생각을 하는 지 정말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그들을 하나님이 없는 방향으로만 생각을 몰고 가는 것일까?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방향으로 생각을 하면 믿을 만한 것이 너무나 많다. 이 모든 것이 과학으로 설명되어져야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가?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것으로 증명이 될 사건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계신 정황은 너무 너무 너무 많다. 믿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어떨까? 
 
자연 만물 속에 있는 신비로움은 하나님을 지시한다.
 
 밤 하늘에 빛나는 별들 중에 우리 눈이 볼수 있는 이런 크기의 별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실제로 이 우주가 얼마나 큰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광활한 우주와 억 천만개의 별들이 우연히 생겼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지를 못한다. 
 
 누에는 계속 자라다가 어느 시기가 되면 고치 속에 들어가 잠을 자는데 그때 누에 몸 속의 특수한 세포들이 변하여 나비의 본체와 날개 등 여러 지체가 나타나게 되는 신기한 변화가 생긴다. 자연 속에서 피고 지는 생명의 신비로움을 그 누구가 설명할 것인가? 
 
 초록색 풀을 먹는 소가 어떻게 하얀 우유를 만들어 내는지 모르겠다.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조차도 그 생명의 복잡함과 미묘한 움직임은 우리가 어떻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다. 
 
 인간의 눈은 눈 속에 30만개의 회로가 있고 안구에는 1억 만개의 신경세포가 있어서 거리나 
광도, 색상을 자동 조절한다고 한다. 또한 우리의 몸 속의 호르몬과 신경조직과 근육조직등의 신비스러운 생명현상은 ‘경이’롭다는 말로 밖에는 도대체 설명을 할 수가 없다. 
 
 거북과 연어는 알을 낳을 때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정확히 찾아간다. 이들을 비롯, 고래, 비둘기, 꿀벌 등 대다수 동물들은 지구 자기장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어 방향을 찾아가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동물이 어떻게 자기를 느끼는가에 대한 의문은 과학계의 오랜 수수께끼였다. 
 
 어느 여름 밤, 뜰에 앉아 쏟아질 것처럼 찬란하게 뿌려진 수많은 별들을 올려다 볼 때, 하나님의 신비함을 어찌 느끼지 않을 수 있는가? 시 139편에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주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하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시인은 자연 속에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이로움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시 14:1)”고 한다. 그래서 로마서는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만물을 보고 그의 신성과 능력을 보고 사람들이 핑계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미국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땅 아래를 보고서 무신론자가 되었다는 사람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고서도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아주 유한적인 지식을 가지고 아주 용감하게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이 아는 것은 얼마되지 않는다. 그것은 태양이 구름에 가려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손으로 자기 눈을 가리거나, 감고서 태양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인간이 아무리 목청이 터져라고 소리를 높여서 “하나님이 없다”고 해도 하나님은 계신다. 우주 생성에 high intelligent designer가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이 생겼다. 
 
 2000년 미국에서 4월12∼15일 달라스 베일러대에서 ‘지적 설계 : 비판적 평가’ 토론회가 있었다. 이 모임에 세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비롯해 200여명의 과학자가 참가했다. 미국 생화학자인 마이클 비히(Michael J. Behe)가 출간한 ‘다윈의 블랙박스’라는 책은 ‘세포의 복잡한 생화학적 과정이 오직 자연선택에 의해서만 만들어졌다고는 볼 수 없으며, 생명은 오직 지적설계의 산물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지적 설계’ 이론을 천문학, 물리학, 생물학 분야에서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과연 인간이, 우주와 생명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도, 우리 인간의 판단과 능력은 한계 투성이다. 우리가 수많은 소리를 듣지만, 모든 소리를 귀로 듣는 것은 아니다. 소리에는 가청범위라는 것이 있어서, 진동수 16~20,000 싸이클 이내의 소리만이 우리 귀에 들린다. 소리가 너무 작은 것과 소리가 너무 큰 것도 우리는 들을 수 없다. 빛도 볼 수 있는 빛의 범위가 있어서, 굴절율이 너무 큰 것도 너무 작은 것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안 보인다고 함부로 없다고 말하지 말자. 안 들린다고 함부로 없다고 말하지도 말자. 
 
 우리 눈에는 확실히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 그러므로 보이는 대로 느끼는대로 말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태양 빛이 무색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태양 광선을 분석해 보면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 이렇게 7색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적외선과 자외선이 있다는 것이 판명된다. 이렇게 우리 눈에 무색으로 보이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과연 인간의 인식대로 사물을 바로 설명할 수 있을까? 또한 과학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영적인 세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분명히 초자연의 세계가 있다. 누가 과학만이 진리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 누가 설명될 수 있는 것만 받아들이겠다고 할 수 있을까? 
 
 가장 크게 병이든 사람은 인간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사람이다. 사실 자연 속에서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먹는 소금은 맛을 내고 방부제도 되고 몸에 모자라면 죽기도 한다. 이렇게 중요한 소금이 극히 나쁜 독약인 소디움과 크로라이드라는 두 가지 원소가 합하여 된 것이다. 물은 수소와 산소 이 두 가지가 합한 것이다. 산소와 수소는 아주 뜨겁게 타는 물질이다. 이 두 가지가 합하면 불을 끄는 물이 된다 자석 중에서도 아주 강력한 자석인 알리코 자석은 자석 성분이 없는 알미늄, 니켈, 코발트를 합해서 만들어 진다. 인간의 제한된 머리로 자연을 완전히 이해할 길이 없다. 그래서 시편 139편 기자는 이 같은 신비를 발견하고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나이다”고 노래했다. 
 
 본인은 잠시 인간의 몸의 해부학을 공부를 한 적이 있다. 공부하면 할 수록 인간의 생명과 그 생명현상은 너무 신비롭다. 우리는 이런 신비를 어느 정도까지는 알긴 하지만 완전한 설명이 가능할 것 같지 않다. 과학은 한계가 있다. 과학은 현상을 설명할 뿐이지 그 이유와 근본을 설명할 수는 없다. 앞으로도 근본을 설명하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11:33) 라고 하였다. 
 
 지구상의 그 누구도 하나님의 창조는 측량치 못하고 그 창조에 대한 설명을 완전히 하지 못할 것이다. 성경은 “집마다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한다.
 
이순증 목사 (기독뉴스 주필, 새방교회) sleedn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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