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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07월06일 17시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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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벧에돔의 ‘문지기 축복’ (대상 13: 9-14)
        오벧에돔의 ‘문지기 축복’     대상 13: 9-14        7. 6. 14
 
어떤 사람에게 일생을 같이 한 네 명의 친구가 있었다. 네 번째 친구는 말만 친구이지 그냥 무시하고 지냈다. 그럼에도 친구는 늘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세 번째 친구는 그냥 부대끼며 온 세월을 같이 했고, 두 번째 친구는 자기의 온갖 수발을 다 들어준 친구였다. 첫 번째 친구는 정성을 다해 챙겨주고 닦아주면서 오직 그만을 위해 살다시피 한 친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홀로 외롭게 먼 길을 떠나기가 두려워진 이 사람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고 아꼈던 첫 번째 친구에게 ‘길을 같이 가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한마디로 그와의 동행을 거절했다. 두 번째 친구에게 갔더니 ‘이 좋은 세상을 놔두고 어떻게 자넬 따라가느냐’며 손사래를 치며 냉정하게 돌아 섰다. 세 번째 친구는 그나마 ‘무덤까지만 따라가 주겠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자기가 냉대하던 네 번째 친구에게 어렵게 말을 건넸더니 그는 흔쾌히 ’끝까지 따라가 주겠다‘고 했다.
 
네 친구 중, 첫 번째 친구는 70-80년, 80-90년 동안 이 세상을 그 사람과 함께 살아온 그의 몸이고, 두 번째는 돈이나 권력 같은 출세의 길이었으며, 세 번째는 그와 함께 운명을 함께 하며 살아온 가족이고, 네 번째 친구는 자기 영혼이었다. 결국 그는 자기를 끝까지 따라가 주겠다는 자기영혼에게 울면서 감사했다고 한다. 그가 길고 긴 세월의 날을 무관심을 당하면서도 외롭고 힘들게 자기를 기다려 준 것에 눈물 흘리며 고마워하자 영혼은 그의 눈물을 닦아주며 돌아올 수 없는 죽음 건너편으로의 긴 여행을 웃으며 같이 떠났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우리가 지구촌에서 나그네 인생을 끝내고 죽음 건너편으로 떠날 때에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돌보며 사랑했던 육신 살덩어리는 나와의 동행을 거절할 뿐 아니라 시공간의 제약으로 동행이 불가능하다. 돈이나 권력이나 성공출세도 죽음 앞에 맞서는 나를 응원해주거나 나를 도와주는 내편이 될 아무 능력이 없다. 그리고 나를 낳아준 부모도 나와 한 배에서 태어난 혈육의 형제자매도 나와 수십 년을 동고동락했던 나의 아내 나의 남편도 죽음을 향한 나의 여행에 한 발자국도 동행할 수가 없다. 어둡고 공포로 가득한 죽음의 터널을 나와 함께 지나가고 천국과 지옥의 판결심판을 함께 당하며, 영원토록 나와 함께 할 친구는 네 번째 친구인 우리 자신의 영혼뿐이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첫 번째 친구인 썩어 없어질 살덩어리 육신을 위해서는 많은 투자를 하고 끔찍하게 아끼며 애지중지하여 돌보고, 두 번째 친구를 위해서 목숨까지 걸며, 세 번째 친구를 위해선 세상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허비하면서, 네 번째인 자신의 영원한 친구 자기영혼을 위해서는 너무나 관심이 적다. 심지어 천하보다 더 귀한 자기 영혼을 지옥으로 던져버리는 일을 아무 거리낌 없이 자행한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자살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자살공화국’이다. 2012년 현재, 인구 10만 명당 자살사망자가 29명으로 OECD 평균 12명의 2.4배이고 자살자가 가장 적은 터키(1.7명)의 17배나 되는 수치이다. 외환위기와 함께 자살률이 급증해서 외환위기가 끝나면 떨어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자살이 줄어들지 않고 있는 것은 특히 65세 이상 노인의 자살률이 높기 때문이다. 2011년 노인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82명이나 되는데 이것은 미국(14.5명)의 5.6배, 일본(17.9명)의 4.7배가 되는 자살률이다.
 
죽음의 먼 길을 동행할 준비가 안 된 영혼들, 자신의 가장 소중한 친구를 자살로 유혹해 억지로 끌어다가 지옥 불에 던져 넣는 자살자들이 줄지 않는 대한민국의 장래가 염려스럽다. 죽음을 맞을 준비를 했어도 영혼을 죽음 건너편으로 보내는 일은 슬픈 일인데 하물며 자신의 본체인 영혼을 지옥으로 보내는 일이겠는가? 당신은 당신 영혼과 함께 먼 길 떠날 여행준비가 돼 있는가? 자기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 영혼을 예수 통해 구원과 영생의 길로 인도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오벧에돔의 ‘문지기 축복’
 
   1. 하나님의 법궤
 
구약시대 광야교회는 솔로몬 성전이 건축되기까지 천막으로 된 ‘성막성전’이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과 성막 안의 배치할 각종 성물과 관유와 제사장의 의복까지 만들 것을 계시하셨는데, 성전인 성막 다음으로 제일 먼저 만들라고 하신 것이 법궤(法櫃, The Ark)였다. 법궤는 가로 114cm, 세로 68.4cm, 높이 68.4cm의 직사각형 나무 상자(출 25: 10, 37: 1-9)로 아카시아 나무인 조각목으로 만든 다음 정금으로 안팎을 싸서 금궤가 되게 하였고, 네 귀퉁이에 금 고리를 부어 만들고 조각목으로 들 채를 만들어 금으로 싼 후 금 고리구멍에 걸어두어서 사람들이 멜 수 있게 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법궤는 ‘함이나 궤짝’이란 뜻의 궤(櫃, The Ark; 출 25: 10)란 이름으로 53번, 증거궤(The ark of the testimony; 출 25: 22)란 말로 13번, 언약궤(The ark of the covenant: 민 10: 33)란 이름으로 13번, 주의 언약궤(The covenant of the Lord; 수 3: 11)로 7번, 온 땅의 주 여호와의 언약궤(The ark of the Lord; 수 3: 13)와 하나님의 궤(The ark of God; 삼상 3; 3)로 각각 36번,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The ark of the covenant of the Lord of host; 삼상 4; 4)로 1번, 이스라엘 신의 궤(The ark of the lord of Israel; 삼상 5: 7)란 이름으로 7번, 주의 능력의 궤(The ark of Thy strength; 대하 6: 41, 시 132; 8)로 2번, 거룩한 궤(The holy ark; 대하 35; 3)로 1번 등 16가지의 각각 다른 이름으로 194번이나 기록됐는데, 성도들에게 잘 알려지고 많이 사용되는 이름으로는 법궤, 증거궤, 언약궤, 주의 능력의 궤, 거룩한 궤란 이름들이다.
 
하나님의 성막 가장 은밀한 곳인 지성소에 보관했던 법궤 안에는 하나님의 공의의 법과 하나님의 성품을 상징하며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을 기억하게 하는  십계명 두 돌판(The Covenant Stones)과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양식인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인 만나 항아리(The Pot of Manna; 출 16: 33, 요 6, 히 9: 4)와 예수 부활과 영원한 능력과 성령의 권능을 상징하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Aaron's Rod; 출 16: 32, 민 17: 10, 히 9: 4)를 담았다. 그리고 법궤를 덮는 법궤뚜껑을 속죄소라고 부르는데(출 25: 17-22절), 속죄소(贖罪所)의 카포레트는 “칠하다”, “제거하다”라는 의미로 “인간의 더러운 죄를 덮고 새로운 것으로 칠해서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죄를 제거한 것처럼 완전하게 용서하는 장소”라는 뜻이다. 
 
그리고 속죄소 양쪽 끝에 하늘의 영적존재인 두 그룹천사(Two Cherubim)를 금으로 만들어 붙였는데 천사의 날개들이 속죄소를 덮게 하므로 속죄소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요 그룹천사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을 선포하고 증거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속죄소를 영어로는 The Mercy Seat(“자비의 장소, 긍휼의 자리, 시은소”)라고 부른다. 그러나 속죄소가 있는 언약궤 법궤는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을 만나 죄 용서와 긍휼함을 얻는 시은소이지만 이방인들에게는 어둠이 빛을 받아드릴 수 없듯이 저주와 두려움과 재앙이 될 뿐이다.
 
여호와의 언약궤인 법궤는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시내 산을 출발할 때부터 이스라엘의 길을 안내하기 시작해 법궤가 머무는 곳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동시에 멈추어 서므로 광야40년 동안에 43장소에 장막을 칠 수 있도록 안내했고(민 10: 33-36, 33: 5-49) 법궤는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널 때, 도도하게 흐르던 강물을 끊어지게 하고 마르게 하며 물이 역류케 하는 기적으로 마른 땅을 걸어서 강을 건너게 하였으며(수 3; 3, 4: 7) 난공불락의 철옹성 여리고를 붕괴되게 하였고(수 6: 4-6)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패전해 법궤를 뺏겼을 때는 법궤를 옮기는 곳마다 블레셋을 온역과 저주로 쳐서 법궤를 이스라엘로 되돌려 보내도록 역사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물론이거니와 이웃나라 대적들에게 여호와의 언약궤는 언제, 어디서나 임마누엘로 성도들에겐 은혜와 축복으로, 대적들에겐 재앙과 저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臨齋)의 상징”이었다(The whole ark symbolized the Divine Presence In all places; 삼상 4; 3-22, 5; 1-11, 6: 1-21, 7: 1-2, 14: 18, 삼하 6: 2-17, 대하 5: 1-10, 8: 11) 그래서 평생 동안 하나님과 함께 하길 소원했던 다윗의 최대소원은 하나님의 법궤를 모실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의 상징이며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증거물(출 25: 22, 34: 28, 29)인 법궤를 소중히 여기는 성도가 되자.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를 상징하는 두 돌판과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요 영생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인 만나와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상징하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담고 있던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와 언약의 상징이니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약속들을 존귀하게 여기는 성도, 그것을 소홀히 여기지 않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2. 언약궤 모심을 실패한 사람들
 
시내 광야에서 제작된 언약궤(출 39: 35, 40: 17)는 이스라엘 백성과 약 38년 동안 광야여행을 함께 했다. 그리고 언약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길갈(수 4: 19, 9: 6, 14: 6)을 거쳐 실로로 옮겨져 사사시대 450년 동안 그곳에 보관되면서 실로는 이스라엘의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가 된다. 그러다가 사사시대 말기인 엘리 사사 때, 전쟁승리를 기원하며 언약궤를 에벤에셀 전투(BC. 1075년)에 보냈다가 패전과 함께 블레셋에게 빼앗긴다(삼상 4; 11) 그러나 하나님의 강한 역사로 이스라엘로 돌아오는데, 언약궤가 옮겨진 곳은 블레셋국경에서 가까운 벧세메스였다(삼상 6; 12-14)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함을 범한 죄로 징벌을 받자 그것을 두려워 한 벧세메스 사람들에 의해 언약궤는 다시 기럇여아림으로 보내지고(삼상 6: 19-21) 거기서 약 70년 간 보관된다. 그후 다윗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옮겨지는데(삼하 6장, 대상 13, 15장)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첫 번째 시도는 레위사람 아비나답의 후손인 웃사가 운반 도중에 법궤를 손으로 만지므로 신성모독의 죄로 죽임을 당해 실패로 돌아가고, 그 일로 언약궤는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 동안 머물렀다가(삼하 6: 11) 다윗에 의해 예루살렘 시온 산으로 옮겨졌다(삼하 6: 17) 그리고 다윗의 유지에 따라 솔로몬이 모리아 산에 지은 성전으로 옮겨지고(대상 22: 19, 28: 2, 11, 19, 대하 3; 1) 솔로몬성전에서 수백 년간 머물렀다가 BC. 586년 바벨론의 침공으로 성전 파괴와 함께 언약궤는 분실된다.
 
언약궤 모심을 실패한 세 사람을 알아본다. ⑴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이다(삼상 7: 1-2) 삼상 7: 1-2에서는 언약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20년 간 있었다고 했는데, BC. 1075년에 있었던 에벤에셀 전투에서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간 것은 BC. 1003년 이후이기 때문에 언약궤가 아비나답 집에 있었던 기간은 대략 70년 정도이다. 그래서 ‘20년 간’은 언약궤가 아비나답의 집으로 옮겨간 때부터 사무엘이 32세에 최초로 선지자 사역을 시작한 때까지를 가리킨다. 
 
아비나답은 자기 아들 엘리아살을 제사장 가문의 후예가 아님에도 제사장으로 세워 하나님의 언약궤를 지키게 했는데 70년 동안이나 거룩하고 존귀한 언약궤를 자기 집에 모셨음에도 아비나답이 받은 특별한 축복에 대한 기록이 없고, 오히려 훗날 그의 손자 웃사가 법궤를 손으로 만졌다가 죽임당한 것으로 봐서 그의 언약궤 모심은 실패였다고 할 수 있다. 
 
아비나답은 보통물건을 창고에 보관하듯 거룩하고 존귀한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볍고 소홀하게 모셨다. 그렇다. 오늘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소홀히 여기는 교인,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들을 가볍게 여기는 교인은 언약궤 모심을 실패하는 자다. 만일 당신이 성경대로 5년, 10년 동안 주일성수하고 십일조성수하며 충성 봉사 헌신했는데 병 고침이나 물질축복이나 문제해결의 가시적인 축복을 받지 못했다면 언약궤 모심을 실패한 교인이다. 실수와 절망 중에도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았던 아브라함과 사라가 응답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잡아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길 축원한다.  
 
⑵ 말씀대로 언약궤를 모시지 않았던 다윗(David)이다(삼하 6: 1-10) 당시 블레셋 지경근처 바알레유다(“숲의 성읍”이란 뜻의 기럇여아림의 옛 명칭)에 안치된 언약궤를 모시기 위해 다윗은 삼만 명의 군대를 동원한다. 만일에 일어날 블레셋의 기습공격을 대비하고, 언약궤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회복시켜 여호와신앙의 부흥을 꾀하며, 각 지파간의 유대감을 조성하여 통일왕국의 결속을 공고히 하기 위한 거국적 행사였다. 
 
하나님의 임재와 언약의 상징이며 하나님의 가견적 보좌인 언약궤 모시는 것을 천하열국에 과시하고 온 이스라엘에게 자랑하며 모시려고, 최고로 아름답고 화려한 수레를 만들어서 언약궤를 실었고 3만의 군대를 동원했으며,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천지가 진동하도록 웅장하게 주악하며 예루살렘으로 언약궤를 운반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차가 나곤의 타작마장(기돈의 타작마당; 대상 13; 9) 근처를 지나갈 때, 마차를 끄는 소들이 돌부리에 걸려 미끄러지면서 비틀거리자 법궤가 심하게 흔들리면서 마차에서 떨어지려고 하자 웃사가 법궤를 손으로 붙잡았다. 그러자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하나님이 웃사를 쳐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 사고로 다윗은 두려워하여 언약궤 모시는 일을 중단하고 언약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가게 한다. 
 
하나님은 민 4: 15-20에서, 언약궤를 옮길 때는 반드시 레위지파 고핫 자손이 어깨에 메라고 했고, 레위지파라도 성물을 손으로 만지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다윗은 어깨에 메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수레에 실어서 옮기려고 한 것이다. 그것이 다윗의 ‘언약궤 모심의 실수’였다. 그런 실수는 오늘 성도들 중에도 많이 있다.
             “말씀대로 언약궤를 모시자! 성경대로 하나님을 섬기자!”
 
그렇다. 말씀대로 언약궤를 모시고, 말씀대로 주일성수와 십일조와 봉사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아브라함이 자기를 축복한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듯이(창 14: 17-20) 성도들의 십일조는 자기가 속한 교회, 자기 영혼이 말씀으로 은혜받고 복을 받는 본교회에 드려야 한다. 부모나 형제가 생활이 어렵다고 십일조를 그들에게 보내도 안 되고, 아들이 목사고 딸이 선교사라고 그들에게 십일조를 보내는 것도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십일조를 개척교회 목사 아들, 선교사 딸에게 보내는 것은 당신도 죄를 짓는 것이고, 당신 아들과 딸로 하나님의 것을 강탈하는 죄와 도둑물건을 빼돌리는 장물아비의 죄를 짓게 하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목사아들이나 선교사 딸에게 십일조를 보내기 원한다면 십의이조를 드려서 본 십일조는 본 교회에, 두 번째 십일조는 그들에게 보내던지 십일조는 본교회에 드리고 선교비를 그들에게 보내라. 하나님의 십일조는 손대지 말라. 그것이 성경적인 물질의 십일조이다. 십일조 드리고도 자기 자신도 도적이 되고 아들과 딸도 도적을 만들지 말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의 일을 하는 성직자, 목사 전도사들은 물질뿐 아니라 시간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다. 하루 24시간, 1440분에서 십일조인 2시간 20분을 기도하는 일과 성경 읽는 시간으로 드리지 못하는 목사 전도사는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 도적들’로 가슴을 찢으며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의 종으로 선택된 사명자는 물질도둑과 시간도둑이 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는 ‘언약궤 모심’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윗의 행사가 아무리 거국적으로 웅장하고 화려했어도 말씀대로 법궤를 모시지 않으므로 실패했던 것처럼 신앙실패가 없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⑶ 아비나답의 손자 웃사(Uzzah, 삼하 6: 1-7)이다. 법궤를 싣고 가는 소들이 날뛰므로 언약궤가 마차에서 떨어지려하자 손으로 잡았다가 죽은 웃사의 사건은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법궤가 마차에서 떨어져 깨지는 것보다 떨어지지 않게 붙잡는 것이 얼마나 당연한 일인가? 그런데 하나님은 웃사가 잘못했다고 그를 죽이셨다. 그렇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는 일이 아주 까다롭고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다. 그래서 내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고 긴장하고 조심해서 하나님을 섬겨야한다. 언약궤를 수십 년 동안 집에 모시고 날마다 보면서 살아왔던 웃사에겐 언약궤가 낮이 익었고 친숙하므로 대수롭지 않게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마차가 흔들리면서 법궤가 떨어지려하자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붙잡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웃사의 행위를 하나님의 거룩함을 침해하는 잘못으로 인정하셨고 급속한 진노를 발해 웃사를 현장에서 죽이신 것이다.
 
성경은 언약궤를 다루는 레위 자손이라도 손으로 만지지 말라고 했고(민 4: 15) 법궤는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들여다보아서도 안 된다고 했으며(민 4: 20, 삼상 6: 19) 증거궤를 운반할 때는 완전히 싸서(민 4: 15) 법궤 고리에 꿴 채(Pole, 출 25; 14)를 어깨에 메고 운반할 것이라고 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언약의 상징이며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 언약궤에 인간의 생각을 개입시키지 말고 사람의 손을 대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만큼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는데 최선을 다하고 긴장의 끈을 놓지 말라는 말씀이다. 
 
2002년 6월 14일 한국은 우승후보 중에 하나인 유럽 최고의 선수 피구가 이끄는 포르투갈을 1:0으로 제압하고 16강에 진출하는 기적을 만들었다. 그날 밤 기쁨으로 흥분한 김대중 대통령은 선수들을 격려하기 위해 찾아가 무엇이든 필요한 것을 말하라고 했다. 그때 주장 홍명보는 “군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후배들을 잘 보살펴 달라”고 대통령에게 부탁한다. 그러자 다음날 대통령의 지시로 국회위원 146명이 병역법 시행령 개정을 정부에 건의했고, 16일 국방부 대변인은 “국민의 뜻을 고려해 축구선수들에게 병역혜택을 주기로 했다”고 발표한다. 홍명보의 건의 후 병역면제 결정까지 이틀이 걸렸다. 그때 박지성, 설기현. 이영표, 현영민, 송종국, 이천수, 차두리, 안정환, 김남일, 최태욱 등 10명이 수혜자가 됐다. 생각지도 못했던 병역면제 특혜를 받은 이들은 펄펄 날아 이탈리아를 꺾고 8강 그리고 정상의 문턱인 4강 신화까지 창조해 냈다.
 
10년 후인 2012년 런던 올림픽,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 대표팀 라커룸엔 김광석이 노래한 ‘이등병의 편지’가 무한반복 재생됐다. 어떻게 하든 메달을 따 병역혜택을 받겠다는 선수들의 집요한 의지의 표현과 자기체면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은 8강에서 올림픽주최국 영국을 승부차기 끝에 이겼고, 3, 4위전에선 영원한 라이벌 일본을 사생결단의 투지로 싸워 2: 0으로 꺾고 동메달을 목에 걸었으며 여러 선수들이 오매불망 소원하던 병역혜택까지 받았다. 그러자 세계 언론은 “객관적으로 우세한 상대를 잇따라 꺾은 한국의 최대 경쟁력은 병역혜택”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런던올림픽 동메달 멤버를 그대로 이끌고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축구에 참가했던 홍명보 감독은 사상 최악의 졸전 끝에 1무 2패의 참담한 성적표를 들고 패잔병으로 귀국했다가 공항에서 ‘엿 세례’를 받는 참담한 수모를 당했다. 활화산 같은 국민들의 분노는 선수들이 축구에서 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질적인 감독의 ‘축피아’ 선수 선택과 전술실패에 대한 분노였고, 무엇보다 투쟁심을 상실한 선수들에 대한 분노였다. 브라질월드컵에선 한국팀의 자랑인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근성과 상대를 몰아붙이는 강인체력을 어디서도 보지 못했는데, 축구 문외한인 내가 봐도 화가 날 정도였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2014년 한국팀의 패배원인을 선수들의 실력부족보다는 절실함을 상실한 동기부여의 부족이라고 진단한다. 병역면제 같은 당근도 없고, 유럽구단에서 이미 몸값을 다 올려놨으니 위험부담을 무릎 쓰고 사생결단 죽기 살기로 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축구뿐만 아니다. 신앙에서도 아비나답의 손자 웃사처럼 틀에 박힌(매너리즘에 빠진) 교회생활, 절실함이 없는 기도, 습관적인 미지근한 신앙생활, 동기부여가 없는 기도와 찬양은 하나님의 법궤 모심을 실패케 하는 원인들이다. 당신의 예배참석과 기도와 찬양, 말씀과 감사가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는 간절하고 진실함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3. 법궤를 모신 오벧에돔의 축복
 
본문 14절을 본다.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 권속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The Lord blessed the family of Obed-edom with all that he had)” 그렇다. 웃사가 죽은 나곤의 타작마당 근처 단 지파 경계 내에 살고 있던, 레위 지파 고핫 자손으로 가드림몬 출신인 오벧에돔은 우연한 기회에 석 달 동안 하나님의 법궤를 모신다. 갑자기 웃사가 죽자 법궤 모시기를 두려워한 다윗이 급히 주위에 레위지파 사람을 수소문해 가드사람 오벧에돔을 찾게 되고 법궤를 그의 집으로 옮기게 한 것이다. 갑자기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게 된 오벧에돔은 레위지파 사람으로 법궤를 모실 자격이 있었고 언약궤에 대한 말씀지식이 있었기에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에 모든 정성을 다해 석 달 동안 언약궤를 모셨다. 그러자 야훼하나님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신 것이다. 
 
오벧에돔은 하나님의 임재와 보좌의 상징인 법궤, 성부하나님의 상징인 두 돌판과 성자하나님의 상징인 만나 항아리와 성령하나님의 상징인 싹난 지팡이를 담고 있는 언약궤,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상하는 법궤를 석 달 동안 최선의 정성으로 자기 집에 모셨는데 하나님은 그 일을 기억하시고 그와 자녀와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법궤를 40여년 모신 모세나 다윗과 솔로몬처럼 우리가 3-4대, 5-6대를 이어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오래 모시고 섬긴다면 더 좋은 일이다. 그러나 짧은 석 달이라도 정성을 다해 모시고 섬기면 하나님의 축복은 반드시 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기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는 질(質)이다. 아비나답과 그의 손자 웃사는 하나님의 법궤를 대를 이어 70년을 모셨지만 기억될 만한 특별한 축복이 없었고 오벧에돔은 불과 석 달 동안을 모셨지만 그가 받은 복은 상상을 초월하는 축복이었다. 오늘날 3-4대에 걸쳐 수십 년 하나님을 섬겼어도 형식적인 신앙으로 축복이 없는 교인이 있고, 짧은 기간의 믿음생활에서도 많은 축복을 받는 성도가 있는 것과 같다.
 
바로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석 달 동안 모세를 숨겼던 아므람과 요게벳의 믿음이 120년 모세의 축복을 만들었고, 오벧에돔이 법궤를 석 달 동안 지극정성으로 모시므로 넘치는 축복을 받았듯, 하나님은 당신의 믿음의 질(質), 섬김의 질, 헌신의 질, 충성의 질, 봉사의 질, 기도와 찬송과 감사의 질과 내용을 보신다. 그래서 여러 번 찔끔찔끔 목사님 대접하는 것보다 한번 멋있게 대접하는 것이 기분이 좋고 서로의 기억에 남듯, 하나님 섬기는 일도 시시하게 하지 말고 기억에 남도록 ‘왕창’ 해보라.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도록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되고, 당신이 드리는 기도와 감사예물과 받는 말씀도 기쁘게 열납되는 예배가 되며, 당신이 교회를 섬기고 주의 일을 하는 것도 온 정성을 다하므로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축복들이 임하기를 축원한다.
 
석 달 동안,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고 잘 관리했던 오벧에돔은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받았다. 오벧에돔이 받은 첫 번째 축복은 62명이나 되는 많은 자손의 생산이었고, 두 번째는 그 모든 자손들이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자손들로 성장해, 이스라엘에 큰 용사와 백성의 지도자와 다스리는 자들이 되는 성공적인 삶을 산 것이며(대상 26: 4-8) 세 번째 축복은 그의 가축과 밭의 소산 등 모든 소유재산의 물질축복과 그가 하는 모든 일과 사업형통의 성공에서였다. 
 
하나님은 법궤를 모신 당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아주 작은 일에도 반드시 보상하신다. 예수이름으로 교회화장실 청소를 했어도, 교회에 꽃을 봉헌했어도, 성전 뜰의 잔디를 깎고 부엌의 일과 음식으로 성도를 섬겼어도, 영혼들을 사랑해 남이 모르게 전도를 했어도, 목사님과 예배를 위해 금식기도를 했어도, 정성을 다해 찬양대로 충성했어도, 거룩하게 감사와 십일조, 선교헌금 건축헌금 구제헌금을 드렸어도, 강단에 물을 준비하고 물수건을 준비해도, 교회생활이 낯 설은 새 성도를 사랑으로 접대했어도...주를 섬기는 모든 일에는 보상이 있다. 하나님을 섬긴 당신의 집과 자녀들과 생업들이 오벧에돔의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한다.    
 
오벧에돔의 축복 중 가장 큰 축복은 ‘성전 문지기 축복’이었다. 오벧에돔은 예루살렘의 동서남북 4대문 중 남쪽 문지기로 당첨됐고 그 아들들은 곳간에 당첨됐는데, 곳간은 제사에 쓰이는 거룩한 물건들과 밀가루, 포도주, 소금, 연료 그리고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친 예물들을 보관해두는 장소였으니(대상 29: 7, 8, 느 12; 25) 오벧에돔 가문의 축복은 문지기 중에서도 아주 중요한 직책의 축복이었다. 그래서 성전문지기 축복은 단순히 덕수궁과 창경원 문지기나 베드로성당 문지기 같은 수준의 직업이 아니다. 
 
당시 성전문지기는 세금을 면제받는 특혜를 받았고 군사적인 의무도 면제받았는데 문지기가 하는 일은 성전 문에서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이나 죄를 범하고 회개치 않은 사람을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만일 성전문지기들이 없다면, 거룩한 성전은 죄인들에 의해 마구 짓밟히고 더 이상 하나님을 경배하는 거룩한 장소가 될 수 없게 되며,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속죄소와 시은소의 기능도 발휘하지 못하게 됐을 것이다. 그래서 성전문지기는 천한 직분이 아니라 어떤 직분보다도 귀하고 막중한 직분이었다.
 
예수님은 “문지기는 그(양의 목자)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낸다”(요 10: 3)고 하므로 천국의 문을 열어주시는 성령(聖靈)을 Doorkeeper, Porter(문지기)로 말씀하셨다. 어느 누구도 성령이 아니고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의 복음과 어떤 신령한 천국의 것을 깨달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문지기의 사명은 절대적이다. 그래서 시편저자는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시 84: 10)며 성전문지기, 천국문지기가 되기를 소원하는 고백을 했다.
 
오벧에돔과 그의 후손 62명은 성전과 곳간문지기의 축복을 받았다. 오늘도 야훼하나님의 법궤를 잘 모시는 성도, 말씀을 잘 모시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성도는 개인과 가정과 자녀와 사업형통의 축복은 물론이거니와 말씀사역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 교회재정의 문을 담당하는 문지기, 섬김의 문을 담당하는 문지기,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는 신유사역과 의료사역을 담당하는 문지기, 선교사역의 문을 담당하는 문지기, 목사 전도사의 성직사명을 바르게 담당하는 능력과 지혜가 충만한 문지기가 되는 축복을 받는다. 지금 당신은 교회에서 성전출입의 검열을 당하는 성도인가 아니면 복 받은 성전문지기인가? 문지기라면 어떤 문지기축복을 받고 있는가?
 
아비나답과 웃사는 법궤 모심을 실패한 자로 끝까지 남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 모심을 실패한 후, 말씀대로 법궤를 모시지 못한 자기 죄를 회개하고 말씀대로 법궤를 성공적으로 옮겨 모시고, 40년 동안 법궤 모신 자의 축복을 받아 누렸다.
 
지금 당신의 신앙은 아비나답과 웃사와 다윗 중 누구의 ‘법궤 모심’ 신앙인가? 다윗처럼 잘못된 법궤 모심을 회개하고 올바로 모시는 신앙의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주여, 나에게 오벧에돔의 문지기 축복을 주옵소서. 주여, 내 자녀들에게 문지기 축복을 주옵소서. 주기도문 교회가 21세기 지구촌교회의 문지기가 되게 하옵소서. 주여, 나를 21세기 세계와 역사의 문지기, 주님의 나라의 문지기, 영원천국의 문지기가 되는 축복을 주옵소서!”  


김엘리야 목사(워싱톤 주기도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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