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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07월04일 11시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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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7월 4일이 독립기념일인가?
 왜 7월 4일이 독립기념일인가? 신대륙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는 독립선언서를 채택한 날이1776년 7월 4일이었기 때문이다
 
신대륙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다. 미국의 13개 식민지 주들이 1776년 7월 4일 영국으로 독립하겠다는 독립선언서를 채택한 직접적인 이유는 영국이 당시 식민지에 부과한 각종 세금이었다.
 
영국은 신대륙과 유럽에서 프랑스와 전쟁을 치른 후 막대한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 식민지에 각종 세금을 부과하는 법들을 마련했다.
 
각 식민지는 이 법들이 자신들을 대표하는 의원이 없는 영국 의회에서 자신들의 동의없이 만들어졌다는 이유를 들어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고 외치면서 이의 철폐를 요구하고 영국 상품들에 대한 대규모 불매운동을 벌여나갔다.
 
일부 과격주의자들은 ‘자유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영국 세무원들에게 테러를 가하기도 했다.
 
서막은 보스턴에서 올랐다. 보스턴에 주둔했던 영국군이 1770년 3월 보스턴 주민들과 사소한 이유로 충돌, 주민 몇 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사망자는 노예 한 사람을 포함, 다섯 명에 불과했지만 ‘자유의 아들들’은 이 사건을 ‘보스턴 대학살’이라고 부풀리기 시작했다.
 
이들의 장례식에는 보스턴 주민 1만6,000명 중 1만 명 이상 참가하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영국은 사건 후 군대를 철수하고 타운젠드 조례를 대부분 철회, 이 사건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그러나 3년 후 보스턴에서 ‘보스턴 차 사건’이라는 또 다른 충돌사태가 벌어졌다. 1767년 타운젠드 조례는 식민지로 들어오는 인도산 차에 대해 관세를 부과했는데 ‘보스턴 학살’사건으로 이 법 대부분이 철회되면서도 이 조항만큼은 남아 있었다.
 
이에 따라 식민지에서는 차 값이 올라 차의 밀무역이 성행하였다. 문제는 영국이 1773년 동인도회사에 식민지로의 모든 차 수출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하고 수출관세를 면제해 준 데 있다.
 
이렇게 되면 동인도회사의 차가 밀수품보다 낮은 가격이 되어 식민지 차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게 될 것이고 차 밀무역으로 돈을 벌던 미국 상인들도 도산하게 될 것이 뻔했다. 식민지에는 반영 여론이 비등하고 영국산 차에 대한 대대적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보스턴에서는 ‘자유의 아들들’이 1773년 12월 16일 모호크 인디언으로 분장한 후 항구에 정박 중이던 세 척의 동인도회사 소속 배에 올라 배 위에 쌓인 342개의 차 상자를 바다에 던지며 잔치를 벌였다. 항구에 늘어선 주민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이것이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이다.
 
영국 의회는 바다에 버려진 차 값을 매사추세츠 식민지가 배상할 때까지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고 사건 주모자들을 영국에 압송하여 재판하겠다고 하는 강제법(식민지들은 이를 ‘참을 수 없는 법’이라고 부름)을 통과시켰다.
 
이어 영국군 4개 연대가 보스턴에 도착했고 영국 의회는 이듬해 캐나다 이남으로부터 오하이오, 미시시피 강에 이르는 지역을 퀘벡 식민지에 병합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것은 식민지인들의 서부 진출을 사실상 봉쇄하는 것으로 식민지의 반영감정은 이로써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보스턴 차 사건(1773년 12월 16일)은 전쟁의 서막이었다. 1774년 6월 조지아를 제외한 12개 식민지 대표들이 필라델피아에 모여 ‘참을 수 없는 법’의 철회를 영국왕에 청원했으나 영국왕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1775년 4월 18일 매사추세츠 렉싱턴에서 영국군과 식민지인들 사이에 첫 무력충돌이 일어나 식민지인 8명이 전사했다. 한 달 뒤 식민지 대표들은 재차 필라델피아에 모여 영국과의 전쟁을 결의하고 식민지 연합군을 조직하기로 결정, 조지 워싱턴을 연합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1776년 7월 4일, 세번째로 열린 식민지 회의에서는 토머스 제퍼슨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난 후 2년 반이 지나서야 비로소 식민지가 독립을 선언했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렸을까?
 
식민지의 독립을 반대하는 강한 여론 때문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국 이민 1세나 2세여서 모국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식민지 독립은 모국에 대한 배신이었다. 독립주의자들은 이들을 ‘왕당파’ 또는 ‘보수반동’이라고 매도했다. 당시 이들은 전체 식민지 인구의 1/3이었다. 이들은 독립선언 후에도 식민지 연합군보다 영국 편을 들기 일쑤였다.
 
토머스 페인이 ‘상식(The commonsense)’이라는 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식민지의 여론분열은 끝내 극복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은 꿈과 자유로 가득찬 거대한 신대륙이 폭군이 지배하는 조그만 섬나라의 지배를 벗어나는 것은 하나의 ‘상식’에 불과하다는 요지를 담고 있다.
 
책은 이성보다는 격정이 앞서 있지만 이 때문에 ‘상식’은 식민지에서 폭발적인 방향을 일으켰다. 1776년 1월에 출판되자 마자 재판을 거듭, 50만부 이상 팔렸다.
 
이런 영향으로 식민지에서는 반영과 독립의 기운이 부쩍 고무되었고 3차 식민지 회의에서 독립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거론되었다.
 
식민지 회의는 당시 문필가로 이름을 날리던 토머스 제퍼슨이 중심이 되어 선언문의 초고를 작성했다.
 
‘독립선언서’(사진)는 식민지가 독립을 선언하는 대원칙을 밝히고 영국 국왕의 부당한 식민지 정책을 열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서론에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몇 가지 권리를 부여했다. 여기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추구권이 포함된다” 등이 있다.
 
미국의 독립선언서는 평등, 천부인권, 인민의 동의, 저항권 등 근대민주주의 핵심사상을 이론이 아닌 실천강령으로 선언한 최초의 문서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독립선언서를 만들고 이를 승인한 식민지회의 대표들이 이런 고상한 이념들을 얼마나 마음 깊이 양심적으로 신봉하고 있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는 많은 노예를 거느린 남부 농장주들과 노예무역으로 치부한 북부의 상인들도 다수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안자들이 무슨 목적과 생각을 가지고 만들었든 독립전쟁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은 진실로 독립선언서가 내세우는 고상한 이념을 위해 싸우고 이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특히, 민주주의 이상에 고취된 수많은 유럽인들이 자원하여 독립전쟁의 의용군을 나서기도 했다.
 
이로부터 불과 15년 후 미국 독립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에서는 대혁명이 일어나고 온 유럽이 구체제 타파의 격랑에 휩싸이는 등 세계사에 커다란 변혁이 몰아닥치게 되었다.
 
미국인들은 이를 기념하며 매년 7월 4일 독립기념일로 축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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