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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06월30일 22시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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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편애(偏愛)하신 모세
        하나님이 편애(偏愛)하신 모세    민 12: 1-10       6. 29. 14
 
지구촌 모든 사람에게 태양의 빛과 열을 평등하게 주시는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 한 사람만을 유달리 편애(偏愛)하여 사랑하시고,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치는 편심(偏心)으로 사람을 대하신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 출신 데라의 세 쌍동아들(창 11: 26)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 중에서 첫째 아들 아브라함을 편애하셨고, 이삭의 쌍동아들 중, 둘째 아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으며(말 1: 2) 잇사갈의 네 아들(창 46: 13, 욥 42: 7-8)중 셋째 아들 욥을 편애하셨다. 이렇게 차별을 두고 한쪽으로 치우친 하나님의 편애와 편심은 한 사람의 개인뿐 아니라 지파와 족속, 교회와 국가까지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지구촌 수백 개 국가 중에서 이스라엘을 편애하여 선민으로 택하셨다. 모세는 신 32: 8-9에서 노래하기를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라”고 했다.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란 바벨탑 사건 이후 하나였던 지구 땅덩어리가 오대양 육대주와 수백만 개 섬으로 나뉘고 사람들의 언어가 분립되며, 인류가 전 지역으로 흩어질 때를 가리키고, “인종을 분정하실 때”는 전 지구촌에 흩어진 열국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분깃을 나눠주실 때를 의미하며, 그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다”(He set the boundaries of the peoples. According to the number of the sons of Israel; 8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유익을 염두에 두시고 세계를 분할하셨다”는 말씀으로 “상고시대에 하나님이 만국의 땅을 분정하시고(창 11: 1-9) 인류를 갈라놓으실 때, 아직 지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이스라엘을 염두에 두고 국경을 정하셨다”는 말씀이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추석이나 구정이 되면 동네에서 여러 마리의 소와 돼지를 잡아 각 가정 사정에 맞게 고기를 분배했는데, 부친이 있을 때는 물론이지만 부친이 출타중이라도, 동네 어른들은 부농에 어려운 이웃을 많이 도와 인심을 많이 얻은 부친을 생각해서 15명이 넘는 대식구를 염두에 두고 우리 몫으로 많은 양의 소고기 돼지고기를 집으로 보내주어 오랫동안 고기를 먹었던 기억이 나는데, 상고시대에 하나님이 지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스라엘을 미리 염두에 두고 지구촌의 땅 분배를 하셨다는 말씀이다. 그만큼 하나님은 국가로써의 이스라엘을 편애하셨다.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택한 선민, 하나님의 군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포도원, 하나님의 아내 등으로 편심을 기록했고, 선지자 아모스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다”(You only have I known  of all the families of the earth; 암 3; 2)고 말했음을 기록했으며, 스가랴는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For he who touches you, touches the apple of His eye; 슥 2: 8)고 했다.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편심과 편애가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과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에도 있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의 편애는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서도 나타난다. 구약 전체기록을 볼 때, 하나님의 편심과 편애, “하나님의 묻지마 사랑”은 유다지파와 요셉지파 레위지파에게 집중됐다(신 33: 7-11, 13-17). 유다지파에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탄생하는 축복을 주셨고, 레위지파는 수 천 년 동안 대대로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특권을 주셨으며, 요셉지파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이후 450년의 사사시대, 500년 이상의 왕정시대에도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지파로 복을 받았고, 심지어 장차 7년 대환난 때에 각 지파에서 1만 2천명, 열두 지파에서 14만 4천의 유대인 전도자를 세워 지구촌에 마지막 복음을 전하는 축복을 주실 때, 하나님이 편애하는 요셉지파는 므낫세와 요셉, 두 지파로 2만 4천명을 선택하시지만  미운털이 박힌 단 지파는 제외시켰을 정도이다(계 7: 5-8) 
 
그다음 하나님의 편심과 편애는 아시아의 교회들인 에서버두사빌라 일곱 교회에서 서머나 교회와 필라델피아교회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두 교회는 일곱 교회 중에서 교세가 가장 약했고 고난이 많고 핍박받는 교회였으며 교회활동도 미약한 외형적으로 가장 빈약한 교회였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심은 온통 하나님의 관심을 끌었던 서머나 교회와 필라델피아교회에 집중됐었다. 그러기에 2000년이 지난 오늘날, 세월의 흐름과 함께 다섯 교회는 역사의 장막 뒤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두 교회는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것이다. 오늘도 지구촌 수백만 교회와 수십억 교인 중에서도 예수님의 관심이 기울어 있는 성도, 하나님의 편애를 받는 교회가 따로 있다.
 
가지고 있던 재산 다 날아가고 자식들은 하루아침에 죽어 없어졌으며, 천년해로를 약속했던 부인마저 욥을 저주하며 자기 길을 가버린 후, 온 몸이 썩어 문드러지는 고통 속에서 시시각각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 때, 하루하루 순간순간 때마다 일마다 분초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욥에게 집중돼 있었기에 시련이 끝나자마자 하나님은 욥을 직접 만나셔서 네 번씩이나 ‘나의 종’이라 부르며 칭찬하시고 축복하신 것처럼(욥 42: 7-10) 오늘도 하나님이 남들보다 더 사랑하시고 더 관심이 많으시며 호의를 더 베풀며 편애하시는 성도와 교회, 예수님이 편애하시는 가정과 사업, 하나님과 예수님의 편심과 편애를 함 몸에 받는 사람들이 있다. 지구촌 모든 사람들이 시기하고 배 아파하며 사단마귀가 질투하도록 하나님의 편심과 편애를 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이 편애하신 모세
모세를 대적하고 비방하다가 하나님의 저주로 문둥병이 걸려 온 몸이 흰 눈처럼 희게 되고, 그 몸이 썩어 죽어야 했던 미리암이 모세의 중보기도로 고침 받은 본문의 기적은 42번의 모세의 기적 중에서 35번째 기적이다. 실수는 아브라함이 하고 징계의 벌은 바로가 당하고 잘못은 아브라함 부부가 저지르고 매는 아비멜렉이 당한 것처럼, 실수와 잘못의 원인제공은 모세가 했는데 야단을 맞은 사람은 아론과 미리암이었고, 하나님께 매를 맞은 사람은 잘못을 저지른 모세가 아니라 모세를 비난한 미리암인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절대 신임하시는 편심과 무조건적으로 편들어주신 편애를 알 수 있다. 본문이 주는 교훈을 알아본다.
 
   1. 모세가 재취(再娶)한 구스 여인 
 
60만 장정과 남녀노소와 수많은 이방족속까지 줄잡아 250만에서 300만에 가까운 대 민족을 영도하는 불세출의 정치지도자요 영적지도자인 모세가 검은 피부의 에티오피아여인에게 장가들어 아내로 취한 것은 충격적사건이다. 유대전승에서는 모세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을 따라 이집트를 탈출해 온 잡족 중 에티오피아인 흑인노예 여인을 두 번째 부인으로 취한 것이 본처 십보라가 살아있었을 때였다는 설과 십보라가 죽은 후였다는 설이 있는데 어떤 설을 따르더라도 300만 이스라엘 백성의 로망인 모세가 구스여인을 재취한 것은 사람들의 가십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다른 학설을 주장한다. 그것은 히브리소년 모세가 이집트 바로공주 아들이 되고 바로의 후계자로 낙점(落點)되자, 불안을 느낀 사제들은 모세가 유일신 히브리종교를 이집트에 전할까 전전긍긍했고, 궁정 관리들은 모세를 제거하기 위해 부단한 살해위협을 가했으며, 심지어는 “모세에게 전쟁을 이기게 해 영웅으로 만들어 ‘이집트의 바로’가 되게 하자”는 명목으로 모세를 이집트군대사령관으로 수많은 전쟁터에 보내 전사시키려고 살해음모를 시도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는 이집트를 침공한 에티오피아 군대를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에티오피아 왕가의 중심도시 스바까지 진격했는데, 세 개의 강이 합류돼 흐르고 있는 지형적인 불리함과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철옹성 요새 스바에서 배수진을 치고 결사 항전하는 에티오피아 군대를 정복하지 못하고 포위만 하는 상황이 됐다. 
 
격전이 중단되고 몇 달 동안 스바를 포위한 채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모세의 진영 근처에 팔등신 미모의 여인이 나타난다. 그녀는 시녀들을 거느린 타르비스 공주였는데, 우연을 가장하고 날마다 모세의 진영 근처를 배회하다가 극적으로 모세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가까워지게 되고 자주 만나면서 사랑을 하게 된다. 이렇게 에티오피아는 미인계로 모세에게 접근하는데 성공했고, 마침내 모세가 스바를 양도받는 대신 타르비스 공주와 결혼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기에 이른다.
 
그리고 스바 성에 무혈입성 한 모세는 몇 달 동안 에티오피아를 통치하다가 이집트로 돌아온다. 그때 모세와 타르비스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들이 유태계 에티오피아인들이 되는데 그들은 수세기 동안 모세를 영웅으로 경외하며 숭배하다가 모세가 죽자 그의 죽음을 애통해 했고, 자기들의 장례식 때마다 모세의 죽음을 애도하며 기렸다고 한다. 그 사건이 지난 수백 년 후, 솔로몬을 찾아온 스바 여왕(왕상 10장)도 모세와 타르비스 공주의 후손인데, 스바 여왕은 솔로몬과 결혼해서 왕자 멘엘릭(Menelik)을 낳고 예루살렘에서 키우다가 후에 에티오피아로 돌아간다. 
 
요세푸스는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후처 구스여인은 수십 년 전, 모세가 이집트장군으로 전쟁에 나갔다가 전쟁터 스바에서 극적으로 결혼했던 에티오피아 타르비스 공주라고 기록했는데 이것은 유대전승보다 더 설득력 있는 해석으로 많은 학자들이 지지하는 학설이다. 그럼에도 당시 모세의 재취(再娶)는 오늘날 몇 만의 성도를 목회하는 목사가 칠계(七戒)를 범한 것만큼이나 히브리사람들의 거센 비난에 부딪혔고 아론과 미리암의 공격표적이 됐다.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의 결혼을 비난한 것은 ① 이방인과의 결혼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② 선민으로서의 민족적 우월성과 배타성 때문이었으며 ③ 무엇보다 가장 궁극적이며 근본적인 동기는 모세의 탁월한 지위에 대하여 갖고 있던 그들의 교만한 시기질투와 적개심 때문이었다(2절) 그렇다. 한 피를 나눈 누이와 형이었지만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를 대적했고 선봉에 서서 노골적으로 공격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론과 미리암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모세의 손을 들어주셨다. 모세를 대적한 미리암을 문둥병이 들게 하신 것으로 모세 편이 돼 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모세 편애’다.
 
참고로 하나님은 홧김에 이스라엘 민족을 모두 죽여 없애버리겠다고 세 번이나 말씀하셨다. ① 출 32: 10, 신 9: 14에서, 아론과 이스라엘의 시내산 금송아지 우상사건 때였고 ② 민 14: 12에서,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평하던 정탐꾼 10명을 즉사시킴으로 이스라엘 진멸의지를 보여주신 바란 광야에서였으며 ③ 민 16: 45의 모세와 아론의 중보기도로 1만 4천 명이 염병에 죽는 것으로 끝난 고라의 반역 때였다. 중요한 것은 세 번 중에 두 번이나 이스라엘을 진멸하고 모세를 통해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셨다는 것이고 한번은 모세와 아론만 살리겠다 하셨다는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은 강한 집착과 집념을 가지시고 사랑하는 사람을 편애하시는 분이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보다 모세를 편애하셨을까? 하나님의 관심이 온통 모세에게 집중되고 하나님의 마음이 모세에게만 기울어져 있었던 성경적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은혜시대인 오늘도 과연 하나님의 편심과 편애는 존재하는가? 만일 하나님의 편애가 있다면, 하나님은 어떤 성도를 편애하시는가?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총애를 받고 하나님의 편애와 편심을 받을 수 있는 비밀은 무엇인가?
 
   2. 온유(溫柔)한 사람, 모세
 
3절을 본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溫柔)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勝)하더라” (The man Moses was very meek, more than all the men which were upon the face of the earth) 온유함(Meek)의 히브리어 아나우의 문자적인 의미는 “마음이 약해지거나 상황과 사정이 약해지다”(Depressed in mind or Circumstances), “자기를 낮추는 것”, “괴롭힘을 아무 저항 없이 당하는 것”, “겸손함”,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이란 뜻으로 “자기를 비방하는 소리에 대항하지 않고 감정을 억제하며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고 묵묵히 참아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을 가리킨다. 모세는 누이 미리암이 쏟아내는 비수 같은 조롱과 비난을 묵묵부답으로 견뎠고, 형 아론이 뱉어내는 칼처럼 날카로운 비소와 책망에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며 묵묵히 하나님의 뜻만을 구했다. 이것이 모세의 온유(溫柔)였다. 그리고 ‘모세의 온유함은 지상의 모든 사람보다 뛰어났다, 당시 어느 누구도 모세의 온유함을 따라갈 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인격은 겸손과 온유, 문창극 총리후보처럼 온갖 음해와 중상모략을 당하고, 억울한 누명 속에서 비난과 비소를 당하며, 핍박과 박해의 집중포화를 당하더라도 묵묵히 참고 견디는 겸손과 온유이다. 기분 나쁜 소리 듣거나 마음 상하는 소리 듣고 손해되는 일을 당할 때, 눈에 쌍심지 켜고 입에 거품을 뿜으며 대항하고 변명하는 것은 겸손과 온유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편들어 주지 않는다. 하나님이 편들어주고 손들어 주는 사람은 손해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겸손과 온유로 묵묵히 예수님 바라보고 아픔을 삭이며 참고 기다리는 사람이다. 모세처럼 겸손과 온유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편심과 편애를 받는 은혜의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그런데 모세는 본문 3절에서, 자기 자신을 ‘지상최고의 온유한 자,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 세상에서 가장 겸손하고 온유한 자’이라고 자화자찬했는데 과연 모세는 얼마만큼의 온유한 자였기에 그 정도로 당당하게 자신의 온유함을 말할 수 있었는가?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 29)고 하셨고,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Be imitators of me, just as I also am of Christ; 고전 4: 14, 11: 1)고 했다. “내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도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결코 예수님과 바울이 자기자랑으로 했던 말이 아니다. 성령으로 충만했던 주님의 말씀이고, 성령의 열매(갈 5: 22, 23)를 맺었던 바울의 고백이며, 오늘 성령의 열매를 맺은 성도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다.
 
이사야는 사 53: 7에서 예수님의 온유를 이렇게 말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Like a lamb that is led to slaughter. And like a sheep that is silent before its shearers. So He did not open His mouth)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성난 군중의 함성 속에서 빌라도에게 재판 받으시던 예수님과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그린 말씀이다. 
 
이사야는 계속해서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분깃을 얻게 하며(Therefore I will divide Him a portion with the great)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And He shall divide the spoil with the strong)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祈禱)하였느니라”(12절)고 예언했다. 아무 죄가 없는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사형당할 범죄자로 인정을 받아 자기영혼을 버리면서 묵묵히 죽음을 당한 것은 인류의 죄를 걸머지기 위한 그분의 온유함이었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의 극치였다. 그랬기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승천의 최고영광과 지구심판자로 재림할 지고지상의 존귀한 자로, 강한 자로 높여주시고 축복하신 것이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 21)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라”(시 25: 9)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 판단하러 일어나실 것이다”(시 76: 9)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차지할 것이다”(시 37: 11, 마 5: 5)며 온유한 자가 받을 축복들을 기록했다. 
 
마지막으로 야훼하나님은 선지자 스바냐를 통해서 “내가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I will utterly consume all things from off the land; 1: 2) “내가 사람을 땅에서 멸절하리라”(I will cut off man from off the land; 3하)며 지구촌 파멸을 예고하시면서, 그 심판과 파멸의 날을 “여호와의 희생의 날, 야훼의 분노의 날”이라고 하신 후, 습 2; 3에서는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Seek righteousness, seek meekness. Perhaps you will be hidden, in the day of the Lord's anger)고 했고, 3: 12에서는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남겨 두리니(I will leave among you, An afflicted and poor people)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 이 말씀은 장차 지구촌에 임할 전 삼년 반과 후 삼년 반의 여호와의 분노의 날 2300주야의 칠년 대환난에서 하나님의 특별보호로 숨김을 받고 최후까지 살아남아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성도는 적그리스도의 박해로 곤고함과 극심한 가난과 궁핍을 당하면서도 겸손과 온유로 하나님을 찾는 성도들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겸손과 온유는 일란성 쌍둥이이고, 자전거의 두 바퀴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같은 인격이며, 새의 두 날개처럼 겸손과 온유가 공존할 때만 비로써 영광의 빛이 나는 그래서 하나님의 편애를 받을 수 있는 존귀한 인격이다. 은혜시대에 겸손하고 온유한 성도로 모세처럼 하나님의 편애를 받는 축복의 성도가 되고, 장차 올 지구촌파멸 대환난의 날에도 하나님의 편애로 특별보호를 받는 축복의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3. 충성(忠誠)된 종, 모세
 
7절을 본다. “내 종 모세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모세만 하나님의 종이냐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하나님의 종’이라며 모세의 재취를 비난하고 공박하는 미리암과 아론을 향해 “너희는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는 나의 종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느냐?...나의 종 모세는 나의 온 집에 충성(忠誠)된 종이다(My servant, Moses is faithful in all My household)”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나의 온 집‘(In all My house)은 성막 뿐 아니라 성막에 관련된 모든 규례 그리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언약관계와 언약백성 모두를 가리키는 말로, 모세는 하나님과 관계에서 절대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너희 두 사람은 비교도 할 수 없는 사람이며 모세는 나의 집에 충성된 사람이란 말이다. 충성(忠誠)됨의 네에만은 “확실하다”, “진실하고 충실하다”는 뜻이다. “모세는 오랜 기간에 걸쳐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의 헌신을 다한 사람으로 나에게 충실함을 인정받은 확실한 사람”이란 말이다. 그렇다. 모세는 그의 충실함과 성실함과 충성됨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모세는 하나님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만일 이렇게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모세가 하나님의 편애를 받지 못했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일이다. 5공 이후 역대 정권에서 대통령에게 신임을 얻는 충성된 부하들이나 대기업과 중소기업 심지어 구멍가게 같은 그로서리에서 윗사람에게 충성을 인정받은 사람도 사후를 보장받고 주먹세계에서도 오야붕에게 충성을 인정을 받으면 가족부양과 사후를 보장받는데 하물며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충성을 인정받은 모세를 편애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총독 느헤미야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Pick up돼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와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그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했고(느 9: 7-8) 솔로몬은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한다”(잠 25: 13)고 했으며, 마태는 “(은혜의 날과 환난의 날에)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으로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주는 종들에게는 천년왕국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길 것이라”(마 24: 45-47)고 했고, 마태와 누가는 “주인이 맡긴 일에 착하고 충성스럽게 일한 종들은 주님의 날에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것이라”(마 25: 21, 23, 눅 19: 17, 19)고 했다. 그만큼 하나님은 충성의 사람들을 축복하신다.  
 
바울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고전 4: 2) (교회에서)“여자 집사의 자격은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한다”(딤전 3: 11)고 했고, 사도요한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 10)고 했으며, 히브리서 저자는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했다“(히 3: 5)고 했다. 모세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복음에 대하여 증거(證據)했는데 그 일을 사환처럼, 종과 노예처럼, 머슴꾼처럼 충성스럽게 했다는 말씀이다. 
  
농사를 많이 지었던 우리 집엔 항상 머슴이 있었다. 내 방에서 나와 함께 지냈던 머슴들은 저녁만 먹으면 통나무처럼 쓰러져 코를 골며 잤다. 봄여름 가을겨울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부터 밤까지 소처럼 일을 하니 피곤해서 밥과 잠으로 체력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머슴들은 그렇게 몇 년을 일하고 나갈 땐 살림 밑천, 결혼자금을 벌어서 나갔는데 그래서 여러 사람이 인심 좋은 우리 집 머슴으로 일하기를 원했었다. 
 
주인의 사랑을 받는 머슴은 시키는 대로 일한다. 잠 잘 자유, 먹을 자유, 놀러 다닐 자유도 없고, 죽기 살기로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한다. 주인이 있을 때만 충성하고 없을 때는 꾀부리는 사람, 정직하지 못하고 자기 몸 사리며 눈치보고 적당히 일하는 머슴은 주인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주인의 일을 자기 일처럼 충성하는 사람에게 주인의 사랑은 대단하다. 그렇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머슴처럼 충성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편애하셔서 그를 대적한 아론을 책망하시고 미리암은 문둥병으로 치셨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께 얼마나 충성스런 성도인가? 나는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그리고 주님의 피로 사서 세우신 교회와 나의 영혼을 책임지고 밤과 낮으로 말씀과 기도로 수고하는 주의 종을 위해 얼만큼 충성스런 집사, 권사, 장로인가? 나는 시간과 물질과 삶에서 충성된 성도며 목사인가? 여러분의 충성이 하나님께 인정받아 모세처럼 하나님의 편심과 편애를 받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한다.
 
   4. 하나님을 가까이 한, 하나님이 가까이 한 모세
 
무엇보다도 모세는 하나님을 가까이 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누구보다도 하나님이 가까이 해주신 하나님의 종이었다. 하나님은 미리암 아론 모세, 세 사람을 성막으로 부르신 후, 성막 안 구름 기둥 가운데로 강림하셔서 그들에게 말씀하기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내가 이상이나 꿈으로 선지자와 은밀하게 말하지만...내 종 모세와는 내가 직접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아론과 미리암아,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느냐?”고 책망하셨다. “모세는 내가 가까이 하는 총신(寵臣)이고 내가 특별총애(寵愛)하는 나의 종”인데 감히 너희들이 그를 비방하고 대적하느냐는 말씀이다.
 
그렇다. 모세는 스스로 하나님을 가까이 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이 친히 그를 가까이 하신 사람이었다. 사람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이 사람을 가까이 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① 기도다. 모세는 신 4: 7에서 “야훼하나님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설교하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오신다’고 했다. ②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거나 들을 때이다. 솔로몬은 전 5: 1에서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祭祀)드리는 것보다 낫다”고 하므로 여러분이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통해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이 내게 가까이 오시게 하는 방법이고, 말씀은 내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방법이다. 기도와 말씀 외에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이 가까이 해주시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모세의 40년 광야교회 목회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에게 그 말씀을 전하는 목회였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기도와 금식으로 매달려 하나님께 문제해결을 받은 목회였다. 이렇게 모세는 하나님을 가까이 한 말씀의 종이었고, 하나님께서 가까이 해주신 기도의 종이었다. 참고로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위해 40일 금식기도를 했고(신 9: 9) 금송아지 우상숭배로 이스라엘을 전멸시키겠다는 말씀을 듣고 중보기도로 40일을 금식했으며(신 9: 18, 25) 두 번째 십계명을 받기 위해 40일 금식기도를 했다(신 10: 10) 모세의 40일 금식기도는 물이나 주스도 마시지 않은 식음 전폐의 금식기도, 자기 목숨을 하나님의 제단에 바친 결사적인 기도였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른 사람보다 모세를 편애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난 40여년 미국생활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대략 40-50가족의 영주권을 도와줄 수가 있었는데, 특이한 것은 그들 중 70%이상이 한국이나 외국에서 꼭 데려와야 할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가족보다는 이전에 내가 전혀 알지도 못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나를 찾아온 사람들과 내게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성도여러분, 일은 가까이 있는 사람을 중심해 이뤄진다. 이것이 가까운 이웃이 먼 친척보다 더 친근한 이유다. 그래서 결혼도 멀리 있는 사람보다 가까이 있는 사람 중에서 성사되는 것이 70-80%나 된다.  
 
대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어느 도시청년이 멀리 떨어져있는 시골애인에게 10년 동안에 3,500통 이상이나 사랑의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여자애인의 결혼은 매일 편지를 써 보낸 청년이 아니라 그 편지를 2-3일에 한 번씩 전해주던 편지 배달부 청년과 했다고 한다. 멀리 떨어져 있는 애인의 편지로 애절한 사랑은 느꼈지만 실제 사랑은 자주 서로의 얼굴을 보고 웃고 대화하며 자기에게 편지를 전해주는 청년에게 쏠려 그와 결혼이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에게 관심이 더 가게 되고 가까워야 일이 만들어 진다. 
 
모세는 말씀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갔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가까이 와 주심으로 하나님의 관심을 끈 종이 됐고, 하나님의 편심과 편애를 받은 특별한 종이 됐다. 당신이 하나님의 총애와 편애로 자신과 가족과 사업들이 남들보다 더 많은 축복을 받고, 더 큰 사랑을 받기 원한다면, 모세처럼 말씀을 가까이 하는 성도가 되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여 남들보다 더 많이 읽고 더 열심히 듣고 더 잘 배우는 성도가 되라. 그리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이 가까이 하실 성도가 되라. 새벽을 깨워 새벽기도를 하므로 아침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가까이 오시게 하고, 철야기도로 밤마다 하나님이 당신을 찾아오시게 하며, 작정기도 중보기도 합심기도 금식기도 부르짖는 기도로 잠시라도 하나님이 당신 곁을 떠나실 수 없게 하라. 
 
오늘도 하나님의 편애는 계속된다. 모든 면에서 부족한 것을 자타가 공인하는 김목사지만, 하나님이 나를 편애하고 계심을 감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여 각 사람의 행위와 행실대로 보응하시고(렘 17: 10)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김목사가 거짓 없이 겸손과 온유를 좇으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경건하고 충성된 종으로 살아보려고 노력하며,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는 노력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보다 실수를 많이 한 목사이고 사랑하는 예수님께 죄를 많이 지은 목사다. 하나님께 충성스런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비교한다면, 조족지혈이고 등불 앞에 반딧불이며 빙산의 일각도 되지 못한다. 겸손과 온유함도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지금 나는 하나님의 특별편애를 받고 있다(지금까지 46년 반의 목회는 하나님의 편애를 받은 목회-나를 적대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대적하시고, 내가 손대는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님이 특별하게 도와주셨다-였다) 이렇게 부족함에도 하나님이 나를 편애하시는 것은 나의 기도사랑과 말씀사랑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나의 ‘말씀사랑’을 사랑해주시는 것 같다. 2012년 1월 13일, 내가 인도하는 부흥회에서 안수기도에 입신했던 성도의 간증(① 김목사의 다이아몬드 천국 집안 벽들이 성경구절로 치장돼 있었다-“내 종이 말씀을 많이 읽었기 때문이다”-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냐고 묻는 그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이었다 ② “내 종, 김엘리야목사에게 계시록을 더 많이 읽으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많은 계시록의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전해 주어라”)을 들은 후, 그 당시 매일 읽던 70페이지 성경을, 그날부터 매일 ① 구약 100페이지 ② 신약 70페이지 ③ 계시록은 하루에 한번 읽는 것을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전도사시절엔 이틀에 구약과 신약을 한 번씩 읽은 적도 있었다). 이것은 평상시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외국선교(전기사정이 열악한 선교지)를 나가거나 부흥집회를 갔을 때는 정말 힘든 일인데...그래서 하나님이 더 관심을 가지시고 편애하시는 것 같은 마음이 든다. 
 
하나님은 실수한 모세를 편들어 주셨다. 그리고 모든 목사보다 부족한 미말의 무관목사인 김엘리야 목사를 편애해주시고 계신다. 그리고 오늘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편심과 편애의 길을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처럼, 이삭과 야곱과 요셉처럼, 그리고 모세처럼 모든 사람들이 시기질투를 느낄 정도로 하나님이 편애하시므로 당신 자신과 당신의 가정과 자녀, 당신의 사업과 가게, 그리고 주기도문 교회가 되고, 세계교회가 다시 질투하는 한국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말씀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기도로 하나님이 가까이 하는 일로 하나님의 편애를 받는 성도가 되자! 하나님의 편애를 받는 우리 가정이 되자! 하나님이 편애하시는 주기도문 교회가 되자! 하나님의 편애를 받는 한 사람 한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김엘리야 목사(워싱톤 주기도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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