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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06월14일 09시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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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누리는 사대축복의 비밀
        성도가 누리는 사대축복의 비밀     시 34: 1-10     6. 1. 14 
 
금년 초 미국 기업인 간담회에서 기조 연설자로 나온 82세의 억만장자 토머스 퍼킨스는 “왜 (미국의 소득 최상위) 1%가 저주를 받아야 합니까? 70년 전 Crystal Night(크리스털 나이트)와 다름없다는 생각이 앞선다”고 말을 꺼냈다. 그러자 그곳에 참석한 기업인들은 퍼킨스가 농담을 하는 줄 알고 회의장 여기저기서 모두가 배를 움켜쥐고 모두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자 퍼킨스는 “실제 상황인데 왜 웃고 난리냐?”며 정색을 하고 연설을 계속했는데, 잠시 후에 기업인들은 퍼킨스가 의도적으로 크리스털 나이트(Crystal Night: “수정의 밤”)를 사용한 것을 알았다.
 
“수정의 밤”이란 Crystal Night는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일 년 전, 독일 전역을 휩쓴 유대인 박해를 말한다. 당시 히틀러는 독일에서 유대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비즈니스 7500 여개와 회당 400여 곳을 나치당원들을 보내 한밤중에 불태우고 유대인들을 무차별로 학살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깨진 유리의 무수한 파편들이 아침 햇살에 수정처럼 빛을 발했다고 해서 훗날 서방언론들이 크리스털 나이트란 이름을 붙여준 끔찍한 대학살 사건이다. 
 
나치가 집권하기 전, 유대인들은 독일에서 부를 독점한 최상위 1%였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독일인들을 착취하는 “참 나쁜 인종, 지구상에서 없어져야 할 인간말짜”로 부추겨 나치당원들에게 유대인들이 소유한 집과 재산과 가게를 몰수하고, 병원과 은행, 사업체와 건물을 방화하고 약탈하며 무차별로 살인을 저지르게 했다. 그래서 크리스털 나이트를 시작으로,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서 45년 9월 2일 일본이 항복문서에 조인하기까지 독일, 일본, 이탈리아의 파시즘 세력의 추축국(樞軸國)과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연합국 사이에 유럽과 대서양, 동아시아와 태평양 전 지역을 전쟁터로 삼아 5천만 명이 희생되고 6년 만에 끝난 2차 세계대전에서, 6년 동안에 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 600만 이상이 대학살을 당한다.        
 
퍼킨스는 부자들을 악마 취급하는 작금의 세태가 ‘크리스털 나이트’와 비슷하다며 이 같은 극단적인 표현을 입에 담은 것이다. 그날 퍼킨스의 발언이 뉴스 초점이 되고 논란을 빚었는데도 그는 “히틀러는 특종 인종을 탄압했지만 현 집권층은 특정계급인 부자를 죄악시 하고 있으니 현대판 크리스털 나이트가 아니고 무엇이냐”며 자기 목청을 높이고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심지어 미국의 부자 1%야 말로 일자리를 만들어 내고 세금을 많이 내 “참 좋은 사람들”이라며 자화자찬까지 했다. 
 
퍼킨스는 재산이 거의 100억 달러나 되는 부자다. 돈 뿐만 아니라 학력도 MIT에서 전자.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고 하버드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땄을 정도로 빵빵하다. “첨단 신제품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투자한다”는 그의 경영철학은 지금도 실리콘벨리에선 벤처바이블로 통할 정도로 돈과 실력이 쟁쟁한 부자노인이다. 그래서 그의 Crystal Night 발언은 부자들과 중산층 이상의 백인들에게 작은 파문을 일으켰는데, 심지어 월스트리트 저널에선 “세금을 한 푼 내지 않은 사람에겐 투표권을 주지 말고 세금 낸 것만큼 투표권을 주자(세금 안 낸 사람에겐 투표권을 주지 말고 100만 불을 납세한 사람에겐 100만 표를 주자)”는 글까지 게재(揭載)될 정도였다.
 
그래서 미국에서 가장 끗발 센 사람은 세금을 잘 낸 납세자(Taxpayer)라고 한다. 여러분도 해마다 세금 잘 내서 국민의 의무를 잘 이행하고 미국시민의 권익을 다 누리며 사시기를 바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본문에 기록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사대축복을 다 받아 인생을 승리하는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성도들이 누리는 사대축복의 비밀
 
 
1975년 월남이 공산화된 후, 불과 몇 년 동안에 양민 300만 이상이 학살을 당했다. 공산당의 무서움을 안 월남사람들은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돈 있고 백(Back)이 있는 사람들은 비행기로 탈출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바다로 나가서 목적지나 방향도 없이 조각배나 어선을 타고 탈출을 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무작정 통나무 뗏목을 타고 탈출해 바다에 몸을 맡겼다. 그러나 월남을 탈출한 수백만 중에 반 이상은 바다와 육지에서 태국이나 라오스, 미얀마, 인도네시아 해적들에게 잡혀서 남자들은 현장에서 죽임을 당해 바다에 던져 고기밥이 됐고, 여자들은 능욕을 당하고 몸이 팔리는 노예 신세가 됐으며 그들이 갖고 있던 돈과 귀중품과 재산들은 모두 약탈당해 알거지가 됐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이산에서 호랑이를 피했다가 저산에서 이리떼를 만난 전후 월남난민들처럼 문제를 피하여 이곳을 떠났다가 저곳에서 더 큰 문제를 만나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 한국에서 사기꾼에게 당하고 미국에 왔다가 더 무서운 사기꾼을 만나고, LA에서 나쁜 사람 만나 있는 것 모두 털려 뉴욕으로 왔다가 더 악랄한 사람에게 걸려 고생하며, 주벽이 심한 남편 만나 몇 년을 고생하다가 견딜 수가 없어 이혼하여 혼자 살다가 좋은 사람 같아 고민 끝에 재혼을 했는데 이 사람은 그 사람보다 더 난폭하고 성질이 나쁘며 생활능력마저 없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하루하루를 괴롭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오늘 본문, 시 34편은 이스라엘의 왕이면서 장인이었던 사울이 시기질투로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한 21번의 살생시도에서 15번째 살해미수사건(Commanding that he be brought from home to die; 삼상 20:31-42)이 있은 후에 일어났던 사건이다.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자객들을 피해 도피생활을 해야 했던 다윗은 이제 지칠 대로 지쳤다. 끝이 안 보이는 터널 속에 갇힌 것처럼, 걸음을 내 딛을 때마다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처럼, 적군의 검산도곡을 파훼하고 포위망을 뚫고나가야 하는 장수처럼 다윗에겐 위협과 위험이 첩첩산중이었다. 그래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다윗은 마침내 외국으로 도피해 살아남을 망명을 결심한다. 그리고 사울의 추격을 피해 멀리 블레셋 가드의 왕 아기스를 찾아가 몸을 의탁한다(삼상 21: 10-15) 
 
처음에 아기스는 쌍수를 들고 다윗을 환영했다. 그러나 신하들이 “저 다윗은 우리의 아이돌, 골리앗 장군을 죽인 자다. 그가 골리앗을 죽였을 때, 사람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칭송했습니다. 하늘이 준 기회이니 차라리 지금 다윗을 죽여 없앱시다. 살려두면 앞으로 큰 해가 될 것이다”고 간한다. 결국 아기스도 다윗을 모살할 궁리를 하게 되고 ‘D 데이’를 정한 후, 다윗을 왕궁으로 초청한다. 자객들이 숨어있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 위기를 감지한 다윗은 아기스와 문무백관들이 보는 앞에서 갑자기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Scrabbled; 손톱으로 긁거나 할퀴다) 침을 수염에 질질 흘렸다’ 그러자 아기스는 “너희들이 보다시피 이 자는 미치광이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 데려왔느냐?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해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런 미친놈을 감히 내 집에 들이다니! 당장 쫓아내라”며 불호령을 내린다. 그렇게 해서 다윗은 죽음의 위기를 모면하는데, 본문은 다윗이 아기스의 왕궁에서 구사일생으로 쫓겨나온 후에 지은 시이다. 
 
BC 1057-8년경에 있었던 이 뛰어난 기지(奇智)는 1250년 후인 주후 200년경 중국 땅에서 재연(再演)된다. 조조의 집에 몸을 의탁하던 유비는 날마다 분뇨통을 들러 매고 밭에 나가 곡식과 채소를 가꾼다. 당시 조조의 신하들은 ‘유비가 장차 큰 인물이 돼 우리를 위협할 자니 죽여 없애자’고 채근하므로 조조는 염탐을 보내 유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는데, 날마다 똥지게나 지고 밭에 나가 농사일이나 돌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하들을 안심시켰지만 듣는 신하가 많지 않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유비를 연회장으로 초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의심되면 죽이기로 합의를 한다.
 
사방에 자객들을 매복시킨 후, 유비와 연회석에 마주 앉은 조조는 웃으면서 집요하게 유비의 속마음을 떠보는 질문을 한다. 조조는 정치와 군사와 병법 등을 질문하는데 유비는 무식한척 교묘하게 질문들을 피해간다. 그런데 갑자기 강풍이 불고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뇌성벽력과 함께 비가 억수처럼 쏟아진다. 그러자 유비는 연회장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가 눈을 뒤집어 까고 침을 질질 흘리면서 부들부들 떤다. 조조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유비는 ‘나는 어렸을 때부터 뇌성벽력 소리만 들으면 무서워 숨는 버릇이 있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조조와 신하들과 시녀들까지 정신이 나가 반쯤 미쳐있는 유비를 보고 “뇌겁자”(뇌성벽력에 겁을 먹는 자)라 비웃으며 연회를 끝낸다. 그리고 ‘천둥소리에 겁을 먹는 인간은 큰일을 할 수 없다, 분뇨나 주고 호미나 들고 있는 자는 꿈이 없는 자’라며 유비에 대한 관심을 거둔다. 그날의 기지로 유비는 조조의 사지의 함정(올가미)을 구사일생으로 벗어나고 천하를 호령하는 사람이 된다. 
      
본문을 통해서 다윗이 누린 축복의 비밀과 성도들이 누리는 사대축복의 비밀을 알아본다.
 
   1. 여호와께 간구한 자의 축복
 
1-4절을 본다. “내가 여호와를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내 영혼이 여호와로 인하여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The humble shall hear thereof, and be glad: ”환난과 고통 중에 있는 가난한 자가 듣고 기뻐할 것이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자.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I sought the Lord, and He heard me)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He delivered me from all my fears) 
 
다윗은 ‘세상에 있는 모든 환난과 고통에 있는 모든 가난한 자들이 이것을 듣고 기뻐하며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할 것(O magnify the Lord with me and let us  exalt His name together; 3절)은 내가 야훼께 구하매, 그가 내게 응답하시고 나를 모든 두려움에서 건지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야훼하나님을 송축한다(I will bless the Lord, at all times; “나는 항상 야훼하나님을 축복한다”) 하나님 송축하는 것이 내 입에서 계속될 것이다’라고 노래했다. 그렇다. 성도들에게 주시는 야훼하나님의 첫 번째 축복은 ‘내가 야훼께 간구할 때, 내게 응답하시고,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져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어떤 환난과 고난과 고통, 우리가 뛰어 넘을 수 없는 육체적 경제적 정신적 영적인 괴로움과 상심 속에서도 절망 대신 희망을 갖고 야훼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를 하는 것이다. 당신의 간구가 응답되고 모든 두려움에서 건짐 받기를 축원한다. 
 
야훼하나님은 고통과 환난에서 구하는 성도들을 한두 가지 두려움이 아니라 모든 두려움에서 건지신다. 그렇다. 모든 두려움(From all my fears)이다. 성경은 인간이 갖고 있는 두려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두려움을 14가지나 소개했다. ① Man fear(창 15: 1, 눅 12; 5, 히 13: 6) 사람에 대한 무서움과 두려움이다. 흔히 ‘사람이 두렵다’고 한다. 물론 사람이 두렵다. 언제 그가 변할지, 그가 언제 배신할지, 언제 그가 안면을 바꿀지, 언제 딴소리 할지, 언제 숨겼던 비수를 꺼내들지, 언제 나를 떠날지, 언제 나에게 반역할지... 그래서 사람이 두렵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하는 성도를 모든 두려움에서 건지시겠다고 했다. 이것이 기도하는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첫 번째 축복이다. 믿거나 말거나, 내 속에 천국의 소망과 하늘나라의 기쁨이 있고 세상의 즐거움을 초월한 현재의 김목사는 Man fear에서 자유를 얻은 상태다. 여러분도 예수 안에서 Man fear에서 자유로운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② 죽음의 두려움, Death fear이다(창 21: `17, 35: 17, 히 2; 15) 죽음에 대한 무서움과 두려움은 지구촌 모든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참 성도는 부활과 영생이 있기에 죽음의 두려움을 초월한 존재다. ③ 미래에 대한 두려움, The future fear(창 46: 3, 50: 19-21)이다. 내일 날이 맑을지 흐릴지, 장차 사업이 잘될지 안 될지, 앞으로 좋은 사람 만날지 악한 사람을 만날지...내일에 대한 두려움이다. 
 
④ 위험에 대한 두려움, Danger fear이다(출 14: 13) 뒤에서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맹렬하게 추격해오는 애굽 군대가 있고, 앞에는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망망대해가 있어서 진퇴유곡에 놓여있던 이스라엘의 두려움은 모세시대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오늘 내가 만난 일이고 우리 가정이 만난 사건이며 우리 교회와 우리나라가 만난 위기사건이다. 그러나 야훼하나님은 당신께 구하는 성도들을 바다 속의 대로를 예비하여 이스라엘로 홍해를 건너게 하신 것처럼 오늘도 우리를 위기의 두려움에서 건져주실 것이다. 
 
⑤ 우상잡신의 두려움, Idol god(삿 6: 10, 왕하 17: 35-38) 여러분 앞에 태산처럼 버티고 있고 흉물스럽게 앉아있으며 두려움의 존재로 무섭게 당신을 쳐다보고 있는 우상의 두려움을 겁내지 말라. 그 우상(偶像)들은 이제까지 한 번도 사람의 말을 듣거나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했고, 손을 펴 도움을 주거나 해를 끼친 적도 없으며, 생각하는 사고의 능력도 없으며 수백, 수천 년 동안에 10cm도 자기 자리를 옮겨보지 못했고, 인간이 처음 만들 때처럼 웃거나 화내거나 앉거나 서 있을 뿐 스스로 아무 것도 못하는 죽은 존재이니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할 가치가 없다. 그러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겐 공포의 대상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에겐 어떤 해를 끼치거나 두려움의 존재가 아니다 ⑥ Dreams fear, 꿈의 두려움이다(욥 4; 14-16) 밤마다 악몽에 시달려 밤이 무섭고 눈 감기가 무서운 사람이라도 살아계신 야훼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꿈의 두려움에서 건져주실 뿐 아니라 악몽 자체도 없애주신다. 
 
⑦ 악에 대한 두려움, Evil fear(시 23: 4, 잠 1: 33) 재앙에 대한 두려움이다. ⑧ 전쟁의 두려움(Was fear)이다(시 27: 3) 군대가 나를 대적해 진을 치고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않고 안연할 수 있는 축복이다.
                
1975년부터 79년까지 4년 동안 폴 포트(Pol Pot)의 크메르 루즈가 캄보디아를 사회주의국가로 만들고자 200만 명 이상의 양민을 죽인 20세기 최악의 사건 중 하나인 킬링필드(Killing Field)와 1975년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월맹(越盟)이 1500억 달러를 소비한 미국을 이긴 베트남전쟁, 이 전쟁으로 수백만 명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고, 미군 5만 8천 명이 죽었으며, 미국의 요청으로 1964년부터 종전까지 연인원 30만 명의 군인을 파병했다가 5000명이 전사하고 지금도 한국에서 2만 명이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베트남 전쟁 그리고 5000만 명이 죽은 2차 세계대전에서 전쟁으로 죽은 전사자보다 전쟁터에 나가있는 아들과 남편, 형과 동생들의 생사를 두려워함으로 심장마비와 고혈압, 당뇨, 암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이것이 전쟁 두려움, War fear다.     
 
⑨ 두려움의 대상이 없는 곳에서 두려워하는 두려움, Nothing fear이다(시 53: 5) 사람의 두려움은 두려움의 대상이 있는 두려움인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없는 두려움인 불안이 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성도들을 대상이 있든 없든 모든 두려움에서 건져주신다. ⑩ 대적들에 대한 두려움, Enemies fear이다(시 118: 6) ⑪ 벌과 심판의 두려움, Punishment fear(잠 1: 26-27)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의 벌이 갑자기 찾아올 것 같은 두려움이다. ‘내가 이러다가 매 맞지...’하는 불안한 생각에 붙잡혀 사는 생활을 가리킨다. ⑫ 밤의 두려움, Darkness fear이다. 어떤 사람은 해가 넘어가 캄캄해지면 무서워서 화장실을 못가는 사람이 있고, 밤에 불을 켜놓지 않으면 잠을 못자는 사람도 있으며, 교회에서도 불이 없으면 무서워서 기도를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모두 어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⑬ 유령 두려움, 귀신 두려움인 Ghost fear(마14: 26)이다. 세계도처엔 밤마다 유령이 나오고 귀신이 나와 사람이 살지 못하는 수십만 불에서 수백만 불 심지어 수천만 불짜리 집도 있다 ⑭ 습관적으로 두려워하는 마음의 Spirit of fear 또는 A spirit of timidity(겁이 많음, 소심증, 암띰-비밀을 좋아하거나 지나치게 부끄러움을 타는 성질)이다. 아무 이유 없이 두려운 것, 왠지 모르게 그냥 두려운 것, 밥을 먹어도 ‘이 밥 먹고 죽으면 어쩌나 ?’, 잠이 오질 않아도 ‘이러다가 암이라도 걸리면 어쩌나, 이러다가 어떻게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 만나 악수만 해도 ‘그 사람 손에서 병균이 옮기지는 않았을까?’, 차를 타도 ‘차 사고로 죽을 것’같아 두려워하는 것...두려움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다. 
 
야훼하나님은 인간의 어떤 두려움에서도 기도하면 모든 두려움에서 건져주시고, 아침 안개 사라지듯 두려움들이 사라지게 하시며, 태양이 떠오르면 밤하늘을 영롱하게 수놓던 별들이 모두 모습을 감추어버리듯 기도하는 성도들의 환경 속에서 모든 두려움이 없어지게 하신다. 자유를 주신다. 모든 두려움에서 자유함을 얻는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2. 야훼를 앙망한 자의 축복
5절을 본다.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光彩)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They looked to Him(그들이 주를 바라보고) And they were lightened(“저들이 광채를 입었다, 그들이 빛나게 됐다. 그들이 명랑하게 됐다”) 다윗은 자기가 가드 왕, 아기스의 호랑이 굴을 피해 도망하여 이스라엘로 돌아와 아둘람 굴에 이르렀을 때, 자기를 만나러 내려온 ‘400명의 동료들’인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삼상 22; 1, 2)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얻었으며 그 일로 축복을 받아 더 이상 수치를 당하거나 실망치 않게됐다”고 노래했다. 
 
“(주를) 앙망하다”(Looked unto Him)의 히브리어 나바트는 문자 그대로, “(주를) 바라보았다”, “주께 시선을 돌려 주목하다”, “주를 기대하였다”, “눈여겨 주를 보았다”는 뜻이고, “광채를 입었다”(They were lightened)는 나하르는 “빛나게 됐다”, “명랑하게 됐다”는 뜻이다. 그렇다. 다윗은 세상에서 버림 받아 사람들을 피해서 산이나 들이나 시골로 떠나 뿔뿔이 흩어져 있다가 자기가 이스라엘로 돌아온 소식을 듣고 자기 주위로 몰려왔던 자기의 추종자들, 환난 당한 자들과 빚진 자들 마음이 원통한 자들 400명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사라지고 그 얼굴들이 환하게 빛나도록 광채를 얻은 것을 보았다.
 
그렇다. 하나님은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보고 대화하던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셨듯이(출 34: 29) 오늘도, 실제로 야훼하나님을 전심으로 앙망하는 성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대하는 자들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며 환하게 빛나게 해주신다. 그래서 솔로몬은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한다”(잠 15; 13)고 했다. 당신의 얼굴이 태양처럼 빛나는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사람이 어떤 것을 바라보면 그것처럼 된다. 어려서부터 정치가를 바라보면 김영삼 대통령처럼 대통령이나 정치가가 되고, 운동선수를 바라보면 운동선수가 되며, 가수나 연예인을 바라보면 연예인이 되고, 사업가를 바라보면 사업가가 된다. 그리고 집에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잘해주는 것을 바라보는 아들은 자기도 좋은 남편이 되고, 마음씨 착하고 순종 잘하며 내조 잘하는 어머니를 바라보고 자라면 자기도 훌륭한 아내가 된다. 그리고 교인들도 교회에서 신앙 좋은 경건한 사람을 바라보고 흠모하며 그 사람 닮기를 노력하면 기도하는 것과 말하는 것, 봉사하는 것까지 닮는 좋은 신앙의 사람이 되지만, 주일성수 십일조 성수 제대로 안하고 자기 멋대로 신앙생활하거나 말이나 많이 하고 싸우기 좋아하는 신앙 나쁜 사람을 가까이 하고 바라보면 자기도 그런 사람이 된다. 
 
이렇게 사람은 자기가 바라보는 대로 된다. 그래서 인생의 삶도 내가 바라보는 대로, 신앙도 내가 바라보는 대로 된다. 야광시계가 낮에 태양빛을 많이 쪼이면 밤에 야광이 더 밝고 환하듯 주를 더 간절하게, 더 강하게, 더 사모하며 앙망하는 성도가 되고,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 그 얼굴을 돌리듯이 주님을 앙망하고 바라보므로 예수님처럼 그 마음과 영혼과 얼굴까지 예수의 광채가 빛나며, 삶의 여정 속에서 무슨 일이든지, 어디서든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한다. 
 
그래서 그 얼굴이 화장을 안 해도 예수광채가 나고, 살결이 김목사처럼 가무잡잡하고 거칠어도 거역할 수 없는 자비한 예수광채가 나며, 그 얼굴에 ‘빨주노초파남보’로 페인트 칠 안하고, 칼을 대거나 다리미질로 주름살 펴지 않으며 보톡스 주사 안 맞아도 그리고 비싼 귀걸이 목걸이 코걸이까지 요란스럽게 걸지 않아도 그 얼굴이 인자하고 온후한 주님의 얼굴처럼 부드럽고 온화하며, 평화롭고 인후한 광채가 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즐거워하고 흠모할 명랑한 얼굴이 될 것이다. 주님을 바라보고 앙망하므로 얼굴이 빛나고 광채가 나는 축복의 사람, 언제 어디서 어떤 일에서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축복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3. 부르짖어 기도하는 자의 축복
 
6-8절을 보자.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This poor man cried)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하셨도다(The Lord heard him, and saved him out of all his troubles)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 도다. 너희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O taste and see that the Lord is good)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다윗은 당시의 자신과 자기의 추종자 400명을 ‘이 곤고한 자’(This poor man; “이 가난한 자”; 6상)라고 불렀다. ‘가난하다’고 한 것은 먹고 마시고 잠잘 곳이 없는 물질이 빈핍한 가난한 자보다는 고통당하고, 정처 없이 쫓기며, 모든 사람에게 버림 받았다는 의미의 “비참함”을 가리킨다. 다윗은 우리들이 비록 가난하고 곤고했지만 우리가 야훼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더니 야훼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주셨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야훼하나님께서 단순히 자신의 말을 경청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야훼하나님이 자신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셨을 뿐만 아니라 내 모든 환난, 내 모든 Troubles, 나를 괴롭히던 모든 근심과 걱정거리와 고민, 지금까지 나를 어렵게 했던 곤란과 불운과 귀찮은 일, 나를 bother해 잠을 못 자게 하던 모든 재난과 골치 아픈 일과 질병까지의 모든 환난에서 건져주셨다는 뜻이다. 다윗의 이 축복이 오늘 예배에서 야훼하나님께 부르짖는 당신에게 임할 수 있기를 축원한다.
 
그리고 다윗은 성도들이 야훼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祈禱)하는 것을 “성도들이 주를 경외하는 것”과 “성도들이 위험을 피해 하나님께 도피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자신이 받은 기도응답을 도단 성의 엘리사를 불 말과 불 병거(Horses and chariots of fire; 왕하 6: 17)를 보내 그를 둘러 진 치듯 여호와의 사자들이 나타나 성도들을 둘러 진을 치고 성도들을 모든 위기에서 건져주시는 것 그리고 성도들이 야훼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도응답은 Yes와 No를 대답해주는 단순한 응답, Answer만이 아니다. 기도응답은 영적으로는 천군천사와 하늘의 불 말과 불 병거로 성벽처럼 우리를 둘러 싸 보호해 주는 것과 여러 위기에서 나를 건져주시는 것이며. 내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을 보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응답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하는 것이다.  
 
아기스의 왕궁으로 끌려간 다윗은 마치 독 안에 든 쥐였고, 덫에 걸린 짐승이었으며, 그래서 수백 마리 독사 굴에 떨어진 위기였으며, 수십 마리의 굶주린 사자 굴에 던져진 먹이처럼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었다. 그날 아기스의 명령 한 마디면 다윗의 생명은 바람 앞에 등불처럼 한 순간에 억 소리 한번 못하고 허무하게 죽어갈 상황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곤고한 자가 애절하게 부르짖듯 목숨을 건 부르짖음의 기도를 하고 미치광이처럼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이 들으시고 환난에서 그를 건져 주셨다. 천군천사로 벽을 쌓아 다윗을 지켜주셨고, 하나님의 한없는 인자하심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오늘도 그런 역사는 계속 된다. 한난과 곤고에서 부르짖는 성도, 위기와 어려움에서 부르짖어 기도하는 성도에게 그 역사는 계속된다. 성도여러분, 그러면 어떤 사람이 부르짖는가? 그렇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이다. 그 사람을 보고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이다. 배고픈 아이이다. 그렇다. 급한 사람이 부르짖는다. 그리고 야훼하나님은 물에 빠져서 ‘살려 달라’ 부르짖는 사람처럼, 배가 고파 죽기 살기로 부르짖고 우는 아이처럼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에게 먼저 구원의 손길을 펴신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숨이 넘어가는 사람과 배고파 우는 아이가 “거룩하신 하나님...천지만물을 지으신 사랑의 하나님...자비하신 하나님...”하는가? 그러다가 죽는다. 그럴 시간이 없다. “사람 살려!”면 족하다. 기도를 그렇게 하라. 
 
물론 귀 밝고 눈 밝으신 하나님은 고요 잠잠하게 속삭이는 기도와 묵상기도도 들어주신다. 그러나 아무리 얌전하고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도 배고프고 죽게 되면 목소리가 커진다. 물속 배 안에 내 아들 내 딸이 있어서 생사를 모르는데, 책임질 사람들이 수수방관한다면 목소리를 가슴에 담고 조용히 있을 부모가 이 세상 어디 있는가? 기도는 세월호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형제 친구들의 마음처럼 ‘자신의 곤고한 상황’을 하나님께 울부짖고 토설하며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에 544번이나 언급된 기도란 단어(Pray, Prayer, Praying)와 성경에 기록된 221번의 하나님께 응답된 대표적인 기도 중에서 대부분의 기도가 부르짖는 기도(Cried out)였음은 큰 소리로 부르짖어 하는 기도가 얼마나 능력이 있는 기도임을 증명한다. 부르짖는 기도를 응답하셔서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당신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하시는 야훼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부르짖는 기도를 응답하는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4. 야훼를 경외하는 성도의 축복
 
9-10절을 본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O fear the Lord, you His saints)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For there is no want to them who fear Him)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엊그제 금요일, 가까운 성도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고 받은 축복을 이렇게 간증했다. 4년 된 차(4년 동안 Maintenance를 잘한 차)가 갑자기 멈춰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간단한 Battery문제인 줄 알고 평소 알고지내는 가스스테이션 기술자에게 보였더니 쉽게 고칠 수 없다며 BMW Service Department를 찾아가라고 해서 딜러를 찾아가 여섯 시간을 기다리면서 차를 고치는데 고급차이니 수리비는 엄청 비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부족하지만 그 동안 저와 우리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하려고 최선을 다한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 수리비가 비쌀 텐데, 두 아이 졸업과 남편의 졸업에 돈이 들어야 하고, 이곳저곳 선교비도 보내고 어려운 목사님과 성도들을 도와야 하는데...차 수리하느라 많은 돈이 들어가면 어찌합니까?...그럴지라도 감사합니다. 잘 고쳐주세요” 
 
이렇게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6시간을 기다리며 보냈는데, 마침내 차가 다 고쳐졌다. Warranty(담보, 보증)도 끝났고, 고급차를 여섯 시간이나 고쳤으니 수리비는 기천 불이 넘을 것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정하고 직원을 만났다. 예상했던 대로 영수증엔 몇 천불이 넘는 수리비내역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157불(?)만 내라는 것이다. 200불도 안 되는 수리비를 지불하고 돌아오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고, 집에 돌아와서는 남편과 함께 감사를 드렸다는 간증이다(남편도 이 정도면 3-4천불이 든다고 하면서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이 자매성도는 시장에서 우연하게 나의 설교테이프를 구해들은 후, 은혜가 돼, 몇 달째 전화로만 나와 신앙상담과 은혜를 나누는 내가 정말로 아끼는 순수하고 경건한 성도이다(얼마 전에 어려운 살림 중에도 설교녹음기기 구입을 위해 정성스런 헌금을 한 성도이기도 하다) 그 동안 그와 그의 가정과 주님께 받은 사명 감당하기를 간절하게 기도해 왔던 나는 그날, 전화를 통해서 이 간증을 듣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성도에게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야훼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렇다. 다윗의 고백대로, 야훼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에겐 부족함이 없게 해주시는 축복이 있다. ‘부족함이 없다’(There is no want)는 말씀은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의식주의 문제를 시기적절하게 해결해주심과 아울러 금생과 내생에서 누리게 될 영적인 행복까지를 약속하신다는 말씀이다. 
 
오늘 부족한 것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성도 여러분, 경제적인 부족 때문에 고민하는 성도 여러분, 애정의 결핍 때문에 밤마다 부부가 방을 따로 쓰며 베개를 눈물로 적셔야하는 여러분, 지혜가 부족하여 일들을 완전하게 매듭지지 못하는 성도 여러분, 야훼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 세상에서 모든 부족한 것들이 채워지는 축복을 받아 누리며, 장차 들어갈 천국에서도 부족함이 없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그러면 야훼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해야 하는가? 성경엔 하나님을 경와한 사람들이 기라성처럼 많다. 수백 수천의 성도들이 자기 시대를 따라 야훼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밤하늘의 별처럼 빛을 발산하는 삶을 살았다. 그 중에 대표적인 세 사람을 소개한다. 
 
   ⑴ 야훼를 경외한 노아
 
바울은 히 11: 7에서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됐다”고 했다. 베드로는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홍수심판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 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않은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해 두신 것이라”(벧후 3: 6-7)고 했다. 그러므로 홍수심판 경고와 방주제조 경고를 받은 노아가 하나님을 경외하여 방주를 짓고 그 가족을 구원했던 것처럼, 장차 하나님의 말씀의 불로 심판 받게 될 저 하늘과 이 지구촌 땅을 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여 영적인 방주(方舟)를 지어 대환난까지 피하고 노아처럼 세상을 정죄하고 당당하게 믿음을 좇은 후사가 되는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⑵ 아브라함의 야훼경외
 
창 22: 12에서 모세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야훼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었다고 기록했다. 모세는 아브라함이 이삭의 심장에 날선 검을 내리꽂으려는 분초를 다투는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이렇게 기술했다. “야훼의 사자(예수)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않았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For now I know that You fear God) 다급하신 예수님이 아브라함을 막으시는 장면으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극적인 상황이다. 그렇다. 외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아브라함의 야훼경외,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조금이라도 아끼거나 인색함이 없이 하나님께 드리는 야훼경외, 이것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외며 우리가 드릴 야훼경외이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이 많이 나올 수 있기를 축원한다.
 
   ⑶ 예수님의 야훼경외
 
히브리서 5: 7에서, 바울은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이 공생애 3년 반 동안 사역을 하시면서, 하나님께 극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자기소원을 말씀드렸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자기를 능히 죽음에서 구원하실 분’으로 인정했다. 그렇다. 나와 당신을 죽음에서 구원하실 분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뿐이시다. 어떤 위대한 영웅도 성자도 아니고 뛰어난 정치가도 과학자도 아니며 세계인이 존경하며 무릎을 꿇는 종교인도 아니다. 전지전능, 무소부재, 영원하신 하나님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통곡을 드리고 눈물을 드리면서 간구와 소원을 올려드릴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야훼하나님 경외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부족한 것이 없는 축복’을 주신다. 비록 힘이 넘치는 백수의 왕, 젊은 사자는 굶고 주릴지라도 야훼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부족함이 없는 축복을 주신다.
 
 
오늘 다윗처럼, 사울을 피했다가 아기스를 만나듯 이 문제를 피했다가 저 문제를 당해 고통을 겪고 있는 성도여러분, 이 사람 피했다가 저 사람으로 고생하는 여러분, 이 고난 피했다가 저 고난으로 고민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이 예배를 통하여 야훼하나님께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 모든 두려움에서 건짐 받는 축복과 주를 앙망하고 바라보므로 광채를 입고 그 얼굴이 부끄럽지 않는 축복을 받으며, 야훼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하므로 모든 환난에서 건짐을 받고, 노아처럼 아브라함처럼 예수님처럼 야훼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동서남북으로, 현재와 미래에 어떤 부족함도 없는 축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김엘리야 목사 (워싱턴주기도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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