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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05월20일 10시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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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부족한 것(눅 18: 18-30)
한 가지 부족한 것    
 
현대의학에선 웃음을 약 중에서 최고의 약이라고 한다. 웃음이 사람에게 주는 유익은 ① 스트레스 해소이다. 엔도르핀과 면역세포의 수를 늘려 병에 맞설 수 있는 힘을 키워주고 불안과 우울증의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의 수치를 낮춰주며 긴장감에서 탈출시켜준다 ② 혈압을 낮춰준다 ③ 인체의 면역체계를 강화시켜 질병을 막아주기도 하고 병을 치료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④ 혈액순환을 개선시킨다. 웃으면 몸에 긴장이 풀리면서 혈관이 이완되고 혈액을 온 몸에 골고루 퍼지게 하며 더 많은 산소를 공급하기 때문에 혈액순환을 돕고 혈관과 심장질환을 예방하고 치료한다. ⑤ 심장 능력을 향상시킨다. 웃으면 신체조직 내에 더 많은 혈액을 펌프질해서 혈액순환을 돕고 심장의 능력을 향상시켜준다 ⑥ 체력을 증가시킨다. 웃으면 근육을 이완시켜 횡경막, 가슴, 복부, 심장, 폐, 간의 장기(臟器)와 몸의 근육을 부드럽게 마사지하며 폐활량을 확장시켜서 체력을 증가시킨다. ⑦ 호흡수를 증가시키고 산소 소비를 늘려 호흡기 장애를 줄이고 핏속에 산소를 공급한다. 
 
이렇게 웃으면 건강이 좋아지고, 건강이 좋아야 행복하기에 옛사람들은 웃음의 문으로 만복이 들어온다는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를 말한 것이다.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가 하나님께 자녀생산 약속을 받은 지 25년 만에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웃음”이란 의미의 이삭(Issac)이라고 지었으니 예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림으로 아브라함부부처럼 행복하게 많이 웃고 많은 축복을 누리며 살 수 있기를 축원한다.
 
그런데 웃음에는 ‘약이 되는 웃음’과 ‘독이 되는 웃음’이 있다. 좋은 웃음은 병을 고치는 양약이 되지만 나쁜 웃음은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이다. 두 종류의 웃음을 알아본다. ⑴ 약이 되는 웃음이다. ① 큰소리로 껄껄대며 웃은 가가대소(呵呵大笑) ② 박수를 치며 크게 웃는 박장대소(拍掌大笑) ③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웃는 앙천대소(仰天大笑) ④ 얼굴을 활짝 펴며 크게 웃는 파안대소(破顔大笑) ⑤ 주위가 떠들썩할 정도로 큰 웃음을 터트려 웃는 홍연대소(哄然大笑) ⑥ 귀엽고 예쁘게, 아름답고 요염하게 웃는 교소(巧笑) ⑦ 이야기하면서 웃는 담소(談笑)와 언소(言笑) ⑧ 눈으로 웃는 눈웃음의 목소(目笑) ⑨ 소리 없이 빙그레 웃는 신소(哂笑)와 무음소(無音笑) ⑩ 소리 내어 크게 웃는 대소(大笑)와 방소(放笑) ⑪ 웃다가 멈추고 다시 웃다가 멈추는 것을 반복해서 웃는 절제소(節制笑) ⑫ 아양을 떨며 곱게 웃는 미소(媚笑) ⑬ 별안간 마구 터져 나오는 웃음인 폭소(爆笑) ⑭ 떠들썩하게 웃는 홍소(哄笑), 그 외에도 매우 기쁜 표정을 짓고 웃는 희소(喜笑)와 어리석게 보일 정도로 바보처럼 웃는 치소(癡笑), 빙긋이 웃는 미소(微笑)와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실수로 피식 웃는 실소(失笑) 그리고 부끄러워하며 다소곳이 웃는 치소(恥笑)도 약이 되는 좋은 웃음이다.
 
⑵ 독이 되는 나쁜 웃음이다. 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억지로 웃는 가소(可笑) ② 간교하게 웃는 간소(奸笑) ③ 가볍고 천하게 웃는 경소(輕笑) ④ 남을 속이며 웃는 기소(欺笑) ⑤ 쌀쌀한 태도로 비웃는 냉소(冷笑) ⑥ 독기를 품고 웃는 독소(毒笑) ⑦ 남을 천하게 여기고 얕보고 비웃는 비소(鄙笑, ) ⑧ 비웃는 태도로 웃는 조소(嘲笑) ⑨ 업신여기며 한번 웃는 일소(一笑) ⑩ 속으로 무시하고 비웃는 암소(暗笑) ⑪ (‘흥’하며) 코웃음 치는 비소(鼻笑) ⑫ 쓴 맛을 다시는 쓴웃음의 고소(苦笑) ⑬ 같잖아서 웃는 거짓 웃음의 가소(假笑) ⑭ 원망하고 나무라며(꾸짖으며) 웃는 기소(譏笑) ⑮ 남을 헐뜯고 비방하는 비웃음의 비소(誹笑) ⑯ 빈정거리며 웃는 치소(嗤笑)는 사람에게 독이 되는 웃음들이다. 기왕 한번을 웃더라도 방소(放笑)에서 가가대소, 박장대소, 앙천대소, 파안대소, 홍연대소, 폭소로 배를 움켜잡고 호탕하게 웃음으로 모든 스트레스를 한방에 날려버리고 혈압도 낮추며, 면역체계를 개선시키고 혈액순환을 개선하며, 심장 능력을 향상시키고 체력까지 증강시키는 약이 되는 웃음을 웃기를 바란다. 
 
나는 거의 매일,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차 안에서 그날 기도 중에 하나님이 주신 응답과 앞으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실 축복을 영상으로 그리고 생각하며 기뻐하면서 하늘을 쳐다보고 차가 흔들릴 정도의 큰 소리로 앙천대소하는데 그러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진다. 그리고 주일마다 교회를 오기 전이나 중요한 모임에 가기 전에, 집의 거울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보면서 소리 없이 빙그레 웃는 신소(哂笑)와 눈으로 웃는 눈웃음의 목소(目笑)로 Image Control하여 마음을 다스리고 출발하는데 이것이 나를 부드럽게 해주고 이웃을 편하게 해주는 자기관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약이 되는 좋은 웃음엔 세 가지 원칙이 있다. ⑴ 크게 웃을수록 좋다 ⑵ 깊고 길게 웃을수록 효과가 커진다. ⑶ 온 몸으로 웃으면 효과가 배가 된다. 크게 웃고, 깊고 길게 웃으며, 온 몸으로 약이 되는 웃음을 웃어서 ‘웃음의 사람’ 이삭의 축복이 함께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한다. 
 
                        한 가지 부족(不足)한 것
 
본문은 마 19: 16-30과 막 10; 17-31과 평행구절을 이루는 내용으로, 본문의 주인공을 마태는 (부자청년 귀공자)‘어떤 사람’으로, 마가는 (재물이 많은 부자)‘한 사람’으로, 누가는 본문 18절에서 (돈 많은 부자)‘어떤 관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관원(官員, A certain Ruler, 아르콘)은 “로마 정부에 의해 임명된 정부 관리”일 수도 있고, “회당을 맡아보는 사람”일 수도 있으며, “산헤드린(Sanhedrin) 공회회원”을 가리킬 수도 있는데 이 청년은 잘 알려진 부자 관원이었다. 참고로 공관복음 모두가 이 ‘부자 청년 관원 기사’를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 뒤에 수록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있는 자와 들어갈 수 없는 자를 분명하게 대조시켜서 교훈하려고 한 의도임을 알 수 있다. 
 
   1. 부자 청년 관원의 갈등고민
 
당시 유대인들에게 ‘선한 것’은 오직 율법과 하나님 한 분 뿐이었다. 그래서 사람에게 ‘선한’ 또는 ‘선하다’란 수식어를 붙이지 않았는데 부자청년관원은 예수를 가리켜 “선한 선생님”(Good Master)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청년관원은 소문을 통해 잘 알려진 예수께 대한 존경과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What shall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물은 것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예수께서는 들어주실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인데, 이 부자청년은 사람이 영생을 얻으려면 선을 행해야만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고, 영생 얻는 자격을 갖추는데 혹시 자신이 모르고 빠뜨리고 있는 어떤 행위가 있는지 알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청년에게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니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고 대답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한편으로, 부자청년이 은근히 자부하고 자랑하는 자신의 선행을 꾸짖으시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선의 기준은 인간의 노력이나 업적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며, 참된 선은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인 것을 가르치면서, 또 한편으로는 청년관원이 예수를 신적권능을 소유한 탁월한 랍비, 선한 선생으로 여기고 있는 것을 비난하시고 예수 당신은 탁월한 랍비나 선생이 아니라 예수자신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가르쳤다. 그리고 제 5계명에서 9계명까지 지키라고 언급하시므로 당시 종교인들이 1계명에서 4계명까지인 하나님과의 관계만 중시하고 인간과의 관계를 무시하는 종교인들의 냉혈성도 지적하셨다. 
 
그러자 부자청년관원은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자신 있게 대답한다. ‘어려서부터’란 말을 ‘바미츠바(bar mitzvah)가 된 때부터’라고 해석하는데, ‘바미츠바’란 “율법의 아들”이란 뜻으로, 종교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연령에 도달한 유대 소년에게 주어지는 명칭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아들들이 5, 6세가 되면 율법 공부를 시키고 그것을 준수하게 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란 말은 “소년시절부터”(From my youth)를 가리킨다. 청년관원은 5, 6세 소년시절부터 율법을 지켰기에 그것을 장담하고 자랑했지만 구원의 확신, 영생의 확신이 없어서 예수께 영생의 문제를 물었던 것이다. 그렇다. 율법의 행위, 인간의 어떤 노력과 선행, 도덕과 수양, 구제와 착한 일은 구원과 영생의 자격이 될 수 없다. 만일 인간의 선행과 착한 일이 영생과 구원의 자격이 된다면, 세상의 모든 종교가 가르치는 대로 예수 없이도 양심적으로 착하게 살고 선행을 쌓으면 될 것이다. 그렇더라도 인간의 수양과 노력으로 얻어진 착함과 선행은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는 더러운 걸레조각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보혈을 통한 의로움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영생과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기의 선함을 자랑하는 청년 부자관원에게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One thing you still lack; 22상)고 하시며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다. 청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살아온 것을 이웃 사랑을 실천한 것으로 착각하며 자부했는데 예수님은 “네가 소유한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며 이웃을 위한 전폭적이며 적극적인 헌신을 명령하신 것이다. 그러자 재산이 많았던 부자청년은 이 말씀을 듣고 마음이 상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며 근심에 빠진 채 그 자리를 떠났다.  
 
영생에 대한 고민과 갈등은 비단 부자 청년관원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부자나 가난한 자, 배운 자나 무식한 자, 있는 자나 없는 자, 모든 것을 가진 자나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 천하를 소유하고 통치하는 왕에서 배고픔으로 종살이를 하는 천민까지,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온 인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류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민이고 갈등이다. 그래서 돈 있고 권세가 있는 사람은 돈과 권세로 영생을 사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종교를 찾는다. 어떤 이는 철학과 학문에 매달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착하고 선한 일을 함으로 자기 의로 영생을 얻으려고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속세를 떠나 고산명찰에 들어가 평생 동안 도를 닦기도 하고 테레사 수녀처럼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불사르며 희생하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쾌락을 추구해 몰두하므로 자신이 ‘영원한 존재’인 것을 잊으려고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의 노력으로 얻는 선과 쾌락은 하나님의 절대 선과 기쁨에 비교하면 태양 앞에 촛불일 뿐이며 그것마저도 영생과 구원의 자격이 될 수 없다. 
 
영생(永生, Eternal Life)이란 헬라어 조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생명의 근원 자체인 하나님”을 의미한다. 오늘 청년관원이 예수께 요구했던 영생은 순간적이며 일시적인 것이 아니며, 죽음에 의해 차단되거나 단절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그렇다. 장차 우리가 누릴 영생은 죽음이 그것을 단절시키지 못한다. 찰나지간의 시간이나 공간까지도 영생 안에 침투하거나 개입할 수가 없다. 
 
영생은 문자 그대로 천년만년의 시간개념이 아닌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무궁한 생명이다. 그 영생은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외에는 누구도 줄 수가 없다. 영생(永生, Eternal Life-Everlasting Life, 조에)에 대해 좀 더 알아본다. 
 
영생도 구원과 마찬가지로 과거(Past)와 현재(Present)와 미래(Future)의 세 시제가 있다. ⑴ 과거시제(過去時制)의 영생이다. 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의 말을 믿으며 그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는 자는 이미 그 속에 영생이 있는 자며 영생을 가진 자다(요 3: 15, 36, 4: 14, 5: 24, 6: 40, 47, 딤전 1: 16) ②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요 6: 51, 54) 자기를 살펴 죄를 회개하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는 영생을 가진 자다 ③ 하나님의 말씀을 영생의 양식으로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는 자는 영생을 가진 자다(요 5: 39, 6: 68) 육신의 생명과 건강을 보존키 위해 일용할 양식을 먹듯 하나님의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먹는 자는 영생이 있는 자다. 영생이 없는 자는 말씀을 먹지 않는다. ④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믿어서 예수를 따르는 자는 영생을 가진 자다(요 10: 26-28)  
 
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might know Thee,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Thou hast sent; 요 17: 2-3, 롬 5: 21, 6: 23요일 5: 12) Knowing God is eternal life!(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다) ‘아는 것’(Knowing)이란 헬라어 그노스코는 책을 통해 배워서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아는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경에 1486번이나 언급된 ‘안다, 알고 있다, 아는 지식’(Know, known, knowledge)이란 말은 모두 “체험이나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내가 그를 안다’는 말은 “내가 그를 경험해봐서 안다”는 말이고, ‘내가 그녀를 안다’는 말은 “성적인 경험을 통해서 내가 그녀를 안다”는 뜻이다. 그렇다. 하나님을 체험해 알고 예수님을 경험해 아는 것이 영생이다. 기도응답을 통해, 말씀체험을 통해, 축복체험을 통해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고 예수만이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아는 영생의 성도가 되길 축원한다. 
 
⑥ 하나님 아들, 예수께서 그 마음에 있는 자는 영생이 있는 자다(요일 5: 11-12) ⑦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는 그 속에 영생이 있다(요일 5: 13, 20) ⑧ 예수를 믿고 순종하는 자는 영생이 있는 자이고(요 3: 36) 아들을 순종하지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한 자요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는 자다. 하나님과 예수를 통해 영생이 내 속에 있는 성도는 큰 소리로 ‘아멘!’하여 영광을 돌리자.
 
⑵ 현재시제의 영생이다. 구원과 마찬가지로 영생도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를 통해 한번 영생을 받으면 무슨 죄를 지어도 영생을 누릴 팔자’가 아니다. 갓난아이가 70억 중에서 귀한 사람의 하나로 세상에 태어났다고 그의 생명이 70-80년, 100년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질병과 위험을 잘 넘겨야 끝까지 살아남아 장수하는 것처럼 구원과 영생도 현재의 영생을 잘 보존해야 한다. 그래서 현재진행형인 영생의 과정이 필요하다. 
 
영생의 과정은 ①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 이 양식은 아버지 하나님이 인 치신 인자, 예수께서 너희에게 주리라(요 6: 27) 우리가 날마다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듯, 영생의 성도는 날마다 예수께서 주시는 썩지 않는 양식을 위해 일해야 한다. ②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롬 2: 7) ③ 하나님에게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으라(롬 6: 22-23) 우리 삶에서 모든 말과 행실에 거룩함을 이루는 성도가 되라는 말씀이다. ④ 자기 육체를 위해 씨를 심지 말고 성령을 위하여 착한 일의 씨를 심는 자가 되라(갈 6: 8-10) ⑤ 부(富)해지려는 탐심과 돈을 사랑하는 탐욕의 사람이 되지 말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영생을 취하라(딤전 6: 11-12) 날마다 영생을 선택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이다 ⑥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자요 살인자는 그 속에 영생이 없다(요일 3: 15) 말과 혀로만 이웃을 사랑하지 말고 영생의 사람답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자가 될 것이다 
 
⑦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온전한 몸으로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천만 배나 낫다(마 18: 8-9, 막 9: 43, 45) 예수님은 손이 범죄(犯罪)하면 손을, 발이 범죄하면 발을 찍어버리며, 눈이 범죄하면 눈을 빼버려야 영생에 이른다고 하셨다. 이것은 육신의 일부를 잘라버려야 영생을 얻는 다는 말이 아니라 철저한 자기 회개로 죄의 뿌리를 근본적으로 수술해버려야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은혜시대에 영생에 들어가려면 이렇게 철저한 영적수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적그리스도가 통치할 대환난 시대에 666표, Veri-Chip이나 Positive-ID를 손이나 발이나 눈에 받는다면, 그때는 입으로 죄를 고백하는 회개만 가지고는 영생에 들어갈 수가 없다. 666표를 받은 범죄한 손이나 발을 잘라버리거나 지옥으로 들어가게 할 눈(눈에도 666표를 넣을 수 있다)을 뽑아버리는 극단적 처방이 있어야 영생에 들어갈 수가 있다. 우리 중에 한 사람이라도 그런 극단적인 상황을 만나는 자가 없기를 축원한다.
 
⑶ 미래시제의 영생이다. 멕시코 국경을 넘거나 캐나다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들어와 아무 법적근거가 없었다가 세월이 지나 자격이 준비돼 영주권을 신청했다고 모두 영주권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심사과정을 통해 영주권을 받았어도 차후심사에 불법이 드러나면 영주권이 취소될 수도 있고, 탈세나 마약이나 살인 같은 중한 죄를 지으면 영주권이 취소되고 강제출국을 당할 수도 있다(내가 도와준 어떤 목사는 5년 만에 영주권을 얻었다가 주한미대사관 신원조회에서 실격 당해 영주권이 취소돼 파란만장의 고생을 겪은 후 13년 만에 다시 영주권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예수로 말미암아 영생의 성도가 됐어도 마지막 날 저 하늘에서 영생을 얻기까지 맘을 놓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미래시제의 영생,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을 누리는 성도가 되려면 ① 자기들의 믿음을 끝까지 잘 지키다가 죽어 땅속에 묻힌 구약과 신약의 많은 성도들이 티끌에서 일어나 영생을 얻을 것이다(단 12: 2) ② 은혜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서 자기가 버리고 포기한 것의 백배를 보상받고 핍박을 겸하여 받으며 내세에 영생을 받는다. 예수님과 복음과 교회와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핍박과 고난을 받아야 하고 그 고난을 끝까지 이겨야 한다. ③ 대환난 때에 666표를 받지 않고 박해당하는 이스라엘과 성도들을 보호한 사람들은 의인으로 영생을 얻는다(마 25: 46) 
 
④ 이런 성도들은 영원토록 늙지 않고 병들지 않으며 죽지 않게 하는 생명나무 실과를 먹는다(창 3: 22, 24, 계 22: 1-2) 아담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으로 생명나무열매를 먹을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죽었다가 부활 승천한 성도들과 산 채로 휴거한 성도들과 천년왕국에서 새 하늘 새 땅으로 들어가는 성도들은 생명나무열매를 먹는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 강변에 심겨진 생명나무는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어 나무마다 12가지 생명나무열매를 맺는데 열매를 따먹는 자마다 젊어지고 건강해지며 생명으로 충만해지고, 나무 잎사귀까지도 만국을 소성케 하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영생의 천국엔 생명나무열매를 먹으므로 늙는 사람이 없고 병든 사람도 없으며 죽는 사람도 영원히 없다. 그리고 신천신지의 수도, 새 예루살렘 밖에 있는 수많은 나라들과 도시들을 다 살리는 능력이 있다. 주기도문 성도 모두에게 이 영생의 축복을 누리는 날이 오기를 축원한다.        
 
   2. 한 가지 부족한 것
 
예수님은 영생 얻기를 소원했던 부자 청년관원에게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했다. “네게 있는 한 가지 부족한 것 때문에 너는 영생 얻기가 힘들다”는 말씀이다. ‘한 가지 부족한 것’(One thing you still lack, 헨 소이 레이페이: 22상) 의 문자적인 뜻은 “네게 한 가지 남은 것”이란 의미로 ‘네 손에 움켜쥐고 있는 것’, ‘네가 놓지 못하고 있는 재물’을 가리킨다. 청년은 자기가 마지막으로 움켜쥐고 있는 재물을 놓지 못하고 근심하면서 영생의 곁을 떠났다. 그러자 예수님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셨다.
 
약대와 바늘귀(Camel and needle's eye)는 두 가지로 해석한다. 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큰 대문 옆에는 한 사람이 겨우 왕래할 수 있는 작은 문이 있는데(덕수궁이나 경복궁 대문 옆에 작은 문이 있듯) 이 작은 문을 바늘귀 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덩치 큰 낙타가 바늘귀 문을 억지로 들어가려고 하나 들어가지 못하는 모습처럼 부자는 영생 얻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⑵ 약대란 헬라어 카멜로스와 “선박용 밧줄”인 카밀로스는 발음이 비슷하다. 그래서 선박용 굵은 밧줄을 바늘귀에 집어넣기가 어렵듯 부자는 영생에 들어가기가 힘들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자가 자기 노력으로 영생을 얻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는 것은 불가능하며 인간이 소유하여 즐기는 재물이 영생을 얻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데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를 가르치는 말씀이다. 본문의 주인공 부자청년관원은 ‘한 가지 부족한 것’ 때문에 영생의 문턱에서 탈락했는데 혹시 오늘 당신에겐 ‘한 가지 부족한 것’, One thing you still lack, 헨 소이 레이페이, “네게 한 가지 남은 것”이 있진 않은가? 
 
   3. 주의 종들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
 
잘 아는 대로 계시록 2, 3장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 에서버두사빌라 교회 사자에게 전한 편지이다. 당시 소아시아엔 63개 교회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7개 교회를 선택해 편지를 보낸 것은 초대교회에서 현대교회까지의 각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지구촌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일곱 교회 신앙으로 구별해 비교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오대양육대주에 산재한 수백 만 교회와 수십억을 자랑하는 21세기 현대교회도 서머나 교회와 필라델피아교회처럼 예수님께 칭찬(稱讚)만 듣는 교회와 성도가 있고, 사데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처럼 책망(責望)만 들을 교회와 교인들이 있으며 에베소, 버가모, 두아디라 교회처럼 예수님의 칭찬(稱讚)과 책망(責望)을 함께 듣는 교회와 성도들이 있다. 
 
에서버두사빌라,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는 일곱 교회 목사들에게 보낸 편지였다. 그리고 서머나와 필라델피아 교회를 제외한 다섯 교회가 예수님께 책망을 들은 것은 다섯 교회 목사들의 부족한 것 때문이었다. 아시아의 다섯 교회와 21세기 지구촌 교회 주의 종들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 ‘몇 가지 부족한 것’을 알아본다. ⑴ 에베소교회이다. 에베소교회는 그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 악한 이단을 용납지 않음, 자칭 사도와 그들의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 여러 가지 시련을 참고, 예수이름을 위해 견디고 게으르지 않은 것, 니골라당 이단을 미워하고 배척한 것 등 칭찬 들을 장점이 누구보다 많았던 교회였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와 목사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처음 사랑을 버린 것”(You have left your first love; 계 2: 4)이였다. 
 
⑵ 충성된 예수의 증인 안디바가 순교를 당하면서까지 믿음을 지켰던 버가모 교회에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육은 더럽고 무익해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서 죄를 지어도 한번 구원받은 영혼은 끝까지 구원 받는다”는 발람과 니골라 당의 영지주의 이단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극단적인 칼빈주의와 구원파 같은 이단교리를 따르는 자들이 있었다. ⑶ 그들의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 많은 것을 예수님께 칭찬 들었던 두아디라 교회의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주의 종들을 미혹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 음녀 이세벨을 내치지 않고 인정에 끌려 용납한 것이다. 
 
⑷ 사데 교회의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영적으로 죽게 된 상태에서 회개하여 살아나지 않고 더러운 옷을 입은 채 그대로 있는 것 이었다 ⑸ 라오디게아 교회는 당시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 가장 큰 교회였고, 헌금도 많이 나오는 교회, 교회 활동이 가장 활발한 교회, 일주일 내내 각종 모임과 기관 활동이 끊어지지 않던 교회였다. 그러나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교회로 영적(靈的)으로는 곤고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이 멀어 있었으며 벌거벗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부족은 한두 가지가 아니라 총체적인 부족이었다. 그들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열심을 내어 회개하는 것뿐이었다. 돈을 지불하고 물건을 구입하듯, 라오디게아 교회는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영적으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것을 덮어야 하며,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해야만 하는 위급상황이었다.
 
그렇다면 21세기 종말시대를 살아가는 주의 종들도 예수님의 칭찬을 들은 서머나 교회의 사자처럼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고난을 당하므로 환난과 궁핍을 겪더라도 죽도록 충성하는 종들이 돼야 할 것이고, 필라델피아 교회 사자처럼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인내로 말씀을 지키고 예수이름을 배반치 않는 종이 돼야 할 것이며, 에베소교회 사자처럼 해가 가고 달이 가며 날이 갈수록, 시간마다 때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목사가 돼야 한다. 특히 주님의 다시 오실 날이 가까운 종말시대에 첫사랑을 회복하는 목사, 전도사, 부흥사, 신학교수, 기도원원장, 신학생들이 돼야 한다, 버가모 교회 사자처럼 독버섯처럼 퍼지고 있는 각종 이단을 멀리해야 할 것이며, 두아디라 교회 사자처럼 사사로운 인정 때문에 죄를 용납하거나 불의와 타협치 말아야 하고, 사데 교회 사자처럼 영적으로 살아나 흰옷을 입는 목사가 돼야 하며,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처럼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문을 열어서 예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고 내가 예수 안에 들어가 그분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신령한 종이 돼야 할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부족한 것을 채우는 종들만이 양들을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는 참 목자가 될 것이고, 말세에 그런 종들을 만나는 성도들만이 영생의 축복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될 것이다.
 
   4. 당신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
부자 청년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다면, 오늘 당신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없는가? 내가 받을 영생에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나의 ‘한 가지 부족한 그 것’, 내가 받을 영생을 방해하는 장애물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에겐 ‘한 가지 부족한 것’이 믿음인 사람이 있다. 하나님도 믿지 않고 사람도 믿지 못하는 불신 때문에 인생을 불행과 파멸로 달려가는 사람들이다. 남편도 안 믿고 아내도 불신하며 이웃도 믿지 않고 의심의 안경을 쓰고 사는 사람은 삶이 고달프다. 그다음 어떤 사람의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덕이다. 덕(德)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레텐은 예수님의 덕을 닮은 “도덕적인 탁월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를 닮아 덕이 있는 성도로 칭찬 듣는 자가 돼야 하는데, 쉽게 분노하고 가볍게 짜증을 내며 변덕을 부리고 화를 내므로 죄를 짓고 기도가 막힌 채 성도의 거룩한 삶을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지식의 결핍이다. 지식은 성도들이 덕 있는 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와 통찰력을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을 말한다. 말씀지식이 없는 삶, 말씀을 멀리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사는 어둠의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에겐 절제(節制, Self-control)이다. 신약성경에서 절제는 육체적 욕망의 지나친 방종과 이방세계의 성적남용에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됐으며 성령의 역사로 이뤄지는 성령의 열매에 속한다(갈 5: 23) 쉴 새 없이 솟아나는 샘물처럼 끓어오르는 음욕과 성적인 방종의 ‘한 가지 부족한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은혜에서 떨어지고, 각종 은사를 잃어버리며, 영생에서 제외되고 탈락됐는가? 미끄러운 빙벽에서 추락하는 산악인들처럼 현대는 목사 장로 평신도들이 무차별로 음욕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말세이니 우리 모두 정신을 차리자. 어떤 사람에겐 인내(忍耐)이다. 인내하지 못하고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격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놓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조금만 참았으면 되는데,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됐는데,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렸으면 좋았을 텐데...후회되는 일이 많다. 특별히 환난이나 어려움을 당할 때, 참고 인내하지 못하는 것이 나의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다음은 경건(敬虔)이다. 경건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헌신하여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킨다. 나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경건이라면 경건을 연습해 경건의 모양뿐 아니라 경건의 능력도 소유하는 거룩한 성도가 돼야 한다. 그다음은 혈육을 나눈 가족 간의 사랑과 믿음 안에서 형제자매가 된 성도들 안에서 피차 사랑하는 형제우애를 못하는 것이 ‘한 가지 부족한 것’인 성도도 있다. TV를 통해 몇 십 년 만에 만나는 이산가족들이 서로 끌어안고 눈물 콧물 흘리며 기뻐하는 감격적인 만남을 볼 때마다, 미국에 이민 온 많은 형제자매들이 몇 년씩 소식을 끊고 왕래도 없이(그래서 그들도 이산가족이나 다름없다) 서로 등을 돌리고 사는 서글픈 일들이 부끄럽게 생각되고, 영생을 누릴 천국백성인 성도들이 시기 질투로 서로 말도 안하고 미워하며, 오전엔 목사파가 예배를 드리고 오후엔 장로파가 예배를 드리며, 교회 이편에선 기도하고 저편에선 찬송을 부르는 일도 있으며, 한 교회에서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면서 같은 찬송을 부르고 같은 설교를 들으며 같은 하나님을 찾고 같은 예수이름으로 기도하는 것들이 부끄럽기만 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사랑인 성도도 있다. 봉사 충성 헌신 심지어 선교까지 다른 것은 다 잘해서 칭찬들을 모범적인 성도인데,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 원수도 포용하고 용서하는 사랑, 내 속에 그런 사랑이 없는 것이 ‘나의 한 가지 부족한 것’인 성도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받을 영생의 걸림돌이라면 다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가 영원토록 살게 될 영생을 포기할 만큼 더 존귀한 것이 세상에 어디 있으며 영생과 바꿀 정도로 귀한 것이 무엇인가? 
 
3-4년 전 어느 날, 하나님께서 저에게 “5년 가까이 너를 힘들게 하여 경제적 손해, 정신적 충격, 육체적인 질병 그리고 영적인 손해와 교회부흥을 훼방한 어느 목사를 두 달 동안 축복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셨다. 나에게 그 사람은 이름조차 부르기 싫었고 두 번 다시 생각하기도 싫었던 사람이었다. 법적소송 중에 수 없이 말을 바꾸는 거짓말과 교언영색의 기만으로 내 피와 뼈를 말리는 고통을 준 목사였다. 그때 물질적인 손해 외에 고혈압과 당뇨로 5번이나 Stroke을 맞아 당한 나의 육체적인 괴로움과 아픔(지금까지 여진(餘震)처럼 남아 있다)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쓰라린 상처였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고 다 잊어버린 과거가 됐는데, 새삼스럽게 그를 위해 두 달간이나 축복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처음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가 내게 와서 용서를 빌어도 받아 줄 수가 없는데, 그를 위한 축복기도라니...!’ 가당치 않는 일이다. 그렇게 며칠을 고민했는데, 어느 날 주님이 ‘오늘까지 나를 인도하신 주의 은혜, 부끄럽고 송구스런 내 과거의 많고 큰 죄들을 용서해주신 예수님사랑’을 생각나게 하시고, “네 원수를 사랑하며 너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너를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눅 6: 27-28)는 말씀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때, 두 달 동안 순종한 축복기도로 내가 받은 말씀축복과 신령한 영적은혜는 대단히 큰 축복이었다.  
 
베드로는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고 했다(벧후 1: 5-6, 11) 당신의 급한 성격, 분노, 게으름, 인색함, 음욕, 시기질투, 변덕, 미워함,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의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영생을 위해 배설물처럼 다 버리고 내려놓을 수 있기를 축원한다.                                   
 

김엘리야 목사 (워싱턴주기도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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