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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04월10일 09시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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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벳새다 오병이어 기적의 네 주역: 마 14: 13-21 4. 6. 14
2020년 12월, 직장인 김 행복(幸福)씨는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을 집어 든다. 그가 침대에 누운 채 스마트폰을 몇 번 터치하자 토스터와 커피머신이 작동하며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양치질을 하며 거울을 보니 현재 바깥 온도가 영하 8도를 가리키고 있다. 그는 스마트폰으로 자동차의 히터를 미리 틀어놓고 출근을 준비한다. 회사에 도착해서는 프랑스 파리에 있는 직원과 마치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하듯 3차원(3D) 입체화상(Hologram)으로 회의를 진행한다.
 
앞으로 6년 후면 우리 주변에서 보게 될 직장인들의 모습이다. 지금보다 최고 천 배나 빠른 5세대(5G; 5th Generation) 이동통신이 실현되고, 이것을 기반으로 모든 사물이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초 연결(Hyper-Connected)시대’가 도래 하면서 우리 일상생활은 이렇게 바뀔 것이다.

‘5세대(5G)기술’이 실현되면 데이터 통신 속도는 초당 100기가바이트(Gigabit, Gigabyte; 기억용량 단위; 10억 바이트)급으로 빨라진다. 초창기 스마트폰에 쓰였던 3G(3세대)에선 7분 24초, 장기 회전인 LTE(Long-Term Evolution)에선 1분 25초, LTE보다 한 단계 진화된 LTE-A(Advanced)에서 43초가 걸렸던 800 메가바이트(MB) 용량의 영화를 빛의 속도인 1초 안에 Down(내려)받을 수 있다. 
 
이런 빠른 속도를 기반으로 2020년에는 Living Room(거실)에서 TV 대신 입체화상(Hologram)을 이용해 보고 싶은 드라마나 스포츠를 즐기고, 길거리에서 스마트폰으로 고화질(HD)보다 여덟(8)배나 선명한 초고화질(UHD) 영상을 시청할 수 있으며. 사무실에 나가지 않고도 어디서든지 초고속 네트워크에 접속해 업무를 처리하는 ‘모바일 오피스’ 세상이 된다. 스마트폰 하나만 들고 해외로 출장을 가서 한국에 있는 자신의 PC를 켜서 저장된 자료들을 열어 보는 것이 가능한 시대다. 
 
냉장고에 연결된 인터넷을 통해 지금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로 만들 수 있는 음식과 요리법을 체크할 수 있고, 가스오븐에 미리 재료를 넣어두면 모바일 기기를 이용해 집 밖에서도 요리를 만들 수 있다. 거리의 폐쇄회로(CCTV)는 범죄자의 이상행동 패턴을 분석하고 감지해 강력범죄를 예방하고, 신호등은 스스로 알아서 교통량을 측정하여 신호체계를 자동조절하며, 자동차도 24시간 무선네트워크에 연결돼 서로 신호를 주고받으므로 운전자가 신경 쓰지 않아도 자동차가 스스로 알아서 운전해주는 ‘무인주행’이 일상화 되고, 그래서 교통사고까지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꿈같은 세상이 된다.

현재, 세계 11개 주요 이동통신사들과 업계에선 5G(5세대)가 상용화될 2020년에는 지금까지 개발된 초고속. 초대용량 무선통신을 있기에 전 세계에서 500억 개의 기기를 네트워크로 연결하므로 Hyper-Connected(초연결) 시대가 올 것을 장담하고 있다. 그 꿈의 날이 앞으로 6년 후인 2020년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과학은 인류에게 고통이 없고 편하고 살기 좋은 피안(彼岸)의 세계를 약속하며 희망이 넘치는 장밋빛 청사진을 예고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기쁘고 좋은 일도 있겠지만 황량한 사막보다 더 힘들고 고달픈 일들이 더 많다.

그래서 탄탄대로 고속도로를 막힘없이 질주하는 자동차처럼 일이 잘 풀리고 하는 일이 잘돼 삶이 즐겁고 행복할 때도 있지만, 모래와 자갈길인 Silk Road에서 뜨거운 사막열풍과 거친 모래바람을 마주보며 걸었던 대상들처럼 삶의 질곡(桎梏)에서 고통과 아픔을 겪어야 할 때가 더 많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겐 하루하루 삶에서 예수의 기적이 필요하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 오병이어(五餠二魚)로 20세 이상의 남자장정 5천 명을 먹이고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차게 남겼던 본문(本文)을 오늘의 영의 양식으로 주신 예수의 기적이 우리 모두의 삶에서 임하기를 축원한다. 
 
                     벳새다 오병이어 기적의 네 주역  
 
오늘 본문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오병이어 기적(奇蹟)은 갈릴리 북동쪽 해안에 위치한 벳새다 율리우스(Bethsaida Julius)지방에서 있었던 기적으로, 벳새다 광야의 기적, 벳새다 빈들의 기적, 벳새다 사막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광야(曠野)의 사전적인 의미는 “전망을 가로막는 것이 없는 넓은 들판의 광원(廣遠)” “곡식이 심겨 있지 않는 빈들”로 다소 소박하고 평화로우며 목가적인 뉘앙스가 풍겨지는 장소를 의미하고, 빈들은 “아무 것도 없는 쓸쓸하고 황량한 들판”을 가리키며, 사막(沙漠)은 “거칠고 넓은 모래벌판”, “사막처럼 거칠고 메마른 곳”이란 뜻이 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브엘세바 광야(창 21: 14)에서 가데스 광야(시 29: 8)까지의 19개의 광야(19 wildernesses named; ① 브엘세바(창 21: 14) ② 바란 광야(창 21; 21, 민 10: 12, 12: 16, 13: 3, 26, 삼상 25: 1) ③ 홍해 바다의 광야(Of the Red Sea;출 13; 18) ④ 수르 광야(출 15: 22) ⑤ 신(Sin) 광야(출 16: 1, 17; 1, 민 33: 11-12) ⑥ 시내광야(출 19: 11, 민 1: 1, 19, 3: 4, 14, 9: 1, 5, 10: 12, 28: 64, 33: 15) ⑦ 신(Zin) 광야(민 13 21, 27: 14, 33: 36, 34: 3, 신 32; 51, 수 15: 1) ⑧ 모압 광야(신 2; 8) ⑨ 벧 아웬 광야(수 18: 12) ⑩ 유다 광야(Of Judah; 삿 1; 16, 마 3: 1) ⑪ 십(Ziph; 삼상 23: 14-15, 26: 2) ⑫ 마온 광야(삼상 23: 24-25) ⑬ 엔 게디 광야(삼상 24: 1) ⑭ 기브온 광야(삼하 2: 24) ⑮ 다메섹 광야(Of Damascus; 왕상 19: 15) ⑯ 에돔 광야(Of Edom; 왕하 3: 8) ⑰ 여루엘 들( Of Jeruel; 대하 20: 16) ⑱ 드고아 들(Of Tekoa; 대하 20: 20) ⑲ 가데스 광야(Of Kadesh;시 29: 8)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연구해 보거나 성경이 말하는 광야의 의미를 연구해보면 광야와 빈들과 사막은 결코 가볍게 볼 땅이 아니고, 쉽게 생각할 땅도 아니며, 대강대강 넘어갈 수 있는 호락호락한 땅도 아니다.
 
그렇다. 성경에 나타난 광야와 빈들과 사막은 ⑴ 사람이 없는 땅(욥 38: 26)이다. 믿을 사람이 없는, 대화할 사람이 없는, 마음을 주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내 마음과 같이 믿을 수 있는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이 없는 땅이다. 비가 많이 와서 물은 많아도 마실 물이 없는 것처럼 광야는 사람은 많아도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는 땅이다 ⑵ 혼자 살아야 하는 외로운 땅이다(잠 21: 19) ⑶ 상상도 못하는 온갖 시험을 다 당하고 나를 밑바닥까지 낮추며, 배고픔과 굶주림까지 당하게 하여 하나님 말씀만 삶의 양식과 위로가 되게 하는 고난의 땅이다(신 8: 2-3) ⑷ 오랜 가뭄과 한발로 메마르고 건조(乾燥)해진 땅(The land of drought)이다. 생기가 감도는 초록색은 없고 위험과 죽음만이 깔려있는 회색의 땅이다(호 13; 5) ⑸ 하나님의 종들이 세상에 나타나기까지 하나님 말씀만이 임했던 혹독한 영성훈련(눅 1: 80, 3: 2)의 땅이며, 세례요한이 메뚜기와 석청만 먹었던 육적인 배고픔에서, 정신적인 강인함과 영적으로 무장하는 훈련의 땅이다(마 3: 1, 4) 오늘 하나님께 쓰임 받는 목사 중 70-80%는 처절한 배고픔의 훈련과 말씀에 붙잡히는 영성훈련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이런 훈련이 있었던 목사도 배부르면 변질되고 타락하는데, 이런 훈련이 없는 목사들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⑹ 예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신 곳이다(마 4; 1-11, 막 1: 12-13, 눅 4: 1-13) 그렇다. 사단마귀가 있는 곳이다. 마귀가 에덴동산에서 아담하와를 시험해 넘어뜨린 것처럼 똑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시험했던 땅이 광야이다. 그리고 오늘 마귀가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당신을 미혹하고 유혹하며 시험하는 땅, 마귀가 있는 땅이 바로 광야요 빈들이다. 
 
⑺ 재림 주이신 야훼하나님의 길을 예비하고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할 수 있는 처음 사랑과 처음 믿음으로 돌아가게 하는 고난의 땅이다(사 40: 3, 렘 2: 2) 종말시대에 예수님의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을 예비하는, 믿음의 첫사랑을 지키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교회들마다 그리고 신앙이 좋았던 교인들마다 첫사랑이 식어져 가는 이 시대에 첫사랑을 지켜 휴거로 들림 받는 성도와 환난 통과로 천년왕국 성도들이 되는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⑻ 예수님의 천년왕국을 준비하는 땅이다(사 43: 19-20) 장차 지구촌에 임할 대환난에서 성도들이 지상에 세우실 예수님의 천년왕국을 준비하는 일은 적그리스도와 맞서서 마지막까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순교신앙이다 ⑼ 칠년 대환난 때, 음녀바벨론이 출현할 땅(계 17: 3)이다. 가톨릭이 세계종교를 통일하고 기독교박멸운동으로 성도들을 죽일 땅이 광야이다. ⑽ 출애굽 1세들 60만 명이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멸망당한 치욕의 땅, 이스라엘 60만 군대를 통째로 삼켜버린 맨홀(Manhole)과 Black Hole(중력장(重力場)의 구멍)같은 멸망의 땅이다(고전 10: 1-11, 유 1: 5) 그래서 광야와 빈들과 사막에서 멸망한 이스라엘은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우리 신앙을 경계(警戒)해주는 땅이다.
 
광야(Wilderness)의 헬라어 에레모스는 “적막하거나 사람이 살지 않는 땅”, “물과 식물이 없어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 “황야”, “황폐하여 주민이 다 떠나버린 유기된 땅”이란 의미가 있다. 그래서 광야와 빈들과 사막의 현대적 의미는 “자신의 자아가 부숴 지고 깨지는 곳, 교만과 독선이 녹아내리는 곳, 가까운 사람들이 다 떠나고 나 혼자 남은 고독한 곳,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지독한 공격을 당하는 곳, 끝없는 방황 속에 탈진하는 곳,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곳, 나의 계획이 실패하고 내 생각이 전혀 먹히지 않는 곳, 한없이 외롭고 고독하며 한없이 서러운 곳, 서글픈 마음이 드는 힘든 곳”이다. 그래서 광야는 말 그대로 내 힘으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부정적 의미로만 가득 채워진 절망의 땅이다. 
 
그런데 성경시대에 예수님은 그런 광야, 허허벌판 벳새다광야에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셨다. 그리고 그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인 오병이어기적은 네 사람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도 예수님은 그런 기적을 행하실 수가 있으며, 그 기적을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만들어 내길 원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를 기적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길 원하신다, 나도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간과(看過: “예사로 보아 넘김”)치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오병이어 기적의 Motivation(동기부여)이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라는 것이다. 마태는 “예수께서 나와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겼다”(Jesus saw a great multitude, and was moved with compassion toward them; 마 14: 14)고 했다. 예수의 벳새다기적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여러분의 기적적으로 병 고침을 받는 것, 도저히 안 될 일이 되게 하시는 것, 기적적으로 사업이 잘 되고 아이들이 기적적으로 형통하는 것, 어려운 문제들이 쉽게 풀어지는 기적들은 예수님이 불쌍히 여겨 주실 때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어떤 기적도 예수님이 불쌍히 여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불쌍히 여기사”(He felt compassion for them)의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유대인들이 애가 끓는 아픔의 세월을 보냈던 디아스포라 상태로 살아가기 시작할 때에 생겨난 동사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내장 혹은 심장 등 인간의 내부 깊은 곳으로부터 그 아픔을 절절히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을 때,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치료해주신 적도 있지만 대부분은 ‘예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심’으로 병 고침의 기적을 주셨다. 이렇게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은 기적의 동기가 된다. 예수님의 긍휼, 불쌍히 여김으로 기적의 주역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이제 벳새다기적의 네 주역(主役)을 알아본다. 
 
   1. 어린아이
 
벳새다 오병이어 기적은 예수님의 42번 공생애 기적 중에서 유일하게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기적이다(마 14: 13-21, 막 6: 30-44, 눅 9: 10-17, 요 6: 1-14) 그만큼 복음서 저자들은 하나같이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벳새다기적을 비중 있게 다뤘다. 그런데 오병이어기적의 첫 번째 주역은 놀랍게도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던 ‘어린아이’(A lad, 어린 소년; 요 6: 9)였다. 수만 명 무리 중에서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어린소년,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던 어린아이였다. 
 
지금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 우리 관심은 여러분의 Spotlight(스포트라이트; 세인의 주목)를 받고 있는 설교자 미남 목사일 수도 있다. 헌금을 많이 드리는 대머리에 풍채 좋은 사업가 장로일 수도 있고, 사회적인 지위와 명성이 있는 정치가 장군 변호사 의사 교수로서 교회를 충성하는 주일학교교사 집사 권사 안내원일 수도 있으며, 팔등신 미모에 최고교육을 받은 찬양대대원일 수도 있다. 그래서 연세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나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이나 코 흘리게 어린아이는 우리의 관심대상에서 제외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부자들이 많은 헌금을 드릴 때, 가난한 과부가 드린 보잘 것 없는 구리동전 두 렙돈(Two small copper coins; 눅 21: 1-2)을 ‘모든 사람이 봉헌한 헌금 중에서 가장 많은 헌금으로 인정하신 것’처럼 사람들이 생각하는 관심과 다르다. 벳새다 광야, 오병이어기적에서 첫 번째 주역은 놀랍게도 가난한 어린아이였다. 어린아이가 이 기적의 출발점이었다. 이 아이가 없었다면 아마 오병이어기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예수님께 쓰임 받은 어린아이처럼 예수님 눈에 발견돼 쓰임 받는 기적의 도구가 되기를 축원한다. 
 
성경시대에 유대인들은 집을 떠나 여행을 할 때 대부분 사흘 치 양식을 싸서 떠났는데(막 15: 32) 그들이 먹는 떡(빵; 음식)은 부자들은 밀기울을 완전히 벗기고 정제한 빛깔이 희고 고운 가루로 밀떡을 만들었고, 가난한 사람은 여러 가지 다른 잡곡을 섞거나 완전히 보리 가루로만 떡을 구워먹었다. 당시에 밀떡과 보리떡의 크기는 직경 15cm, 두께 1.5cm 가량이고 누룩을 넣은 둥근 모양이었다. 요한은 어린아이가 예수님께 드린 떡을 거칠고 값싼 보리떡(요 6: 9, 13)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보리떡과 함께 드린 두 마리 물고기는 어떤 생선인지는 모르지만 20cm 정도의 ‘갈릴리 호수 담수어’인 ‘베드로고기’(Peter fish)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유대인들의 저녁은 늦은 낮인 오후 3시부터 시작되는 시간을 제 1저녁이라고 불렀고, 해가 저문 일몰 이후부터 시작되는 시간을 제 2저녁이라고 불렀는데 15절의 ‘저녁이 되매’는 제 1저녁시간이고, 23절의 ‘저물매’(When it was evening)는 제 2저녁시간을 가리킨다. 
 
며칠 동안 계속된 예수님의 벳새다광야 부흥회가 끝나가는 제1 저녁이 됐을 때였다(When it was evening; 15절) 예수님은 부흥회가 며칠 동안 있었고 집회에 참석한 청중들이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집으로 먼 길을 간다면 길에서 기진하고 쓰러질까 염려가 돼 “너희가 저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Give them something to eat; 16절)고 하셨다. 그러자 안드레가 군중 사이를 다니면서 ‘가지고 있는 음식이 있으면 내 놓으라’ 소리쳤고, 마침내 어린아이를 통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구해왔는데 이것으로 예수님이 20세에서 50세까지의 남자 장정만 5천 명, 그 이상과 이하의 남녀노소 줄잡아 30,000여 명을 배불리 먹이고 12바구니가 남는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이다.
 
벳새다기적의 첫 번째 주역, 어린아이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첫째로, 어린아이의 금식이다. 그렇다. 오병이어기적은 어린아이의 금식에서 시작됐다. 다른 사람들이 먹으면서 예수님 말씀을 들었을 때, 이 아이는 도시락을 먹지 않고 금식하며 말씀을 들었다. 예수님 설교에 은혜를 받다가 먹지 못했는지, 말씀에 도전을 받아 금식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린아이는 수만 명 군중들이 즐겁게 먹고 마시는 동안 금식을 했는데 그 금식이 벳새다 오병이어기적의 씨앗이 됐던 것이다.
 
저(김목사)는 지금 주님의 특별한 은혜와 신령한 축복을 누리고 있다. 2000년 6월 30일 새벽 4시에 내가 하늘로 들림을 받아 하나님의 보좌를 본 이후 오늘현재까지 언제, 어디서 기도를 해도 사단과 귀신들의 공격을 받지 않는 특별한 은혜가 계속되고 있는 것에서, 계시 중에 장차 지구촌에서 내가 해야 할 우주적 사명을 알려주신 것 그리고 이 일들을 전후해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의 말씀들을 더 넓고 높고 깊게 깨닫는 특별축복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으며, 작은 축복으로는 여러 날 동안 외국 부흥회나 선교를 다녀와도 시차적응에 어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피곤을 모르는)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 등 많은 축복과 은혜를 받아 누리고 있다. 
 
며칠 전, 저는 이런 축복을 감사하면서, 축복의 원인을 생각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물론 김목사의 규칙적인 생활과 꾸준한 체력단련의 운동, 강인한 정신력 등 여러 가지 외적원인을 말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금식기도(나와 성도들의 금식기도)였음을 깨달은 것이다. 
 
제가 9년 동안의 반석교회 사역을 접고 1993년 워싱턴을 떠났다가 4년 반 만에 워싱턴으로 다시 돌아온 후 1997년 말부터 주기도문교회를 시작해서 지난 17-8년 동안에 교회부흥과 성전회복을 위해 40일 연속금식을 성도들과 함께 7번(한국에서도 7번을 함)을 한 것에서, 개인적으로 21일 금식을 2번(한번은 물, 한번은 야채주스), ‘나실인 특별 성결헌신’으로 14일, 10일, 일주일, 5일 금식을 14번 한 것, 그 외에도 주님께서 많은 금식을 하게 하신 것이 나로 이런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어린아이의 금식을 귀중하게 보시고 벳새다기적을 만드신 주님께서 여러분과 부족한 저의 금식을 축복과 은혜로 갚아주심에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둘째는, 보리떡을 보리떡으로 갚아주셨다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드린 보리떡이 밀떡이 된 것이 아니고 작은 생선이 팔뚝만한 대어가 된 것이 아니다. 아이가 바친 그대로 받았다. 그렇다. 심는 대로 거두었다. 당신이 주님께 무엇을 어떻게 심던지 심는 대로 거둔다. 물질을 심으면 물질의 축복을 받고, 시간을 드리면 지혜와 총명을 거두며, 몸으로 심으면 건강을 얻고, 주의 종을 잘 받들면 자녀들이 복을 받는다. 정성을 다해 드리면 정성어린 축복을 받고, 정성 없이 대충대충 드리면 대충대충 받는다. 당신이 무엇으로 심던지, 어떻게 심던지 심는 대로 거둘 것을 명심해 제대로 심고 많이 심고 정성껏 심을 수 있기를 축원한다.
 
   2. 두 번째 주역, 안드레
 
벳새다 광야에서 해가 서산으로 기울자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자’(15절)고 말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을 보낼 필요 없다(They do not need to go away). 너희가 저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You give them something to eat)”고 말씀했다. 청천벽력이다. 재정을 맡고 있는 가룟 유다는 현재의 재정사정을 알고 있었고, 청중 숫자를 계산하는 제자들도 얼마치 떡을 사야할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무리를 해산시켜 빨리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만이 문제해결책이라고 믿었던 것인데, 예수님은 “너희들이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이다.
 
제자들은 우선 그만한 돈도 없거니와 만일, 돈이 있더라도 이 광야 사막들판에서 그 많은 떡을 살 식당도 없으며 운반할 방법도 없으니 죽든 살든 차라리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부정적이며 무책임한 말을 쏟아낸 것이다. 하나님의 기적을 부인하고 세상에 만연하고 있는 금전만능 적이고 지극히 타산적인 사고에서 발설하는 현대교인들의 무책임한 말과 똑같은 부정적인 말이다. 여러분, 이런 말과 언어에선 하나님의 도움과 예수님의 기적은 없다.
 
이렇게 11제자들이 사람 숫자 계산하고 돈 계산하며 설왕설래 갑론을박하고 있을 때, 안드레가 용감하게 일어나 무리 가운데 다니며 ‘먹을 것이 있는 사람은 좀 내노라’고 외쳤다. 그러자 어린아이 하나가 오병이어, 도시락을 내 놓았는데 그것을 받아든 안드레는 단숨에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들고 예수께 달려와 “여기 한 아이가 바친 오병이어가 있다”며 예수님께 드렸다. 그렇다. 오병이어기적은 한 사람 안드레의 적극적인 믿음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4000여 평 대지와 작지만 오두막집 성전을 구입한 것이 벌써 12년이 지났다. 앞으로 4년 반이 지나면 땅 값 잔액을 모두 지불한다. 12년 전, 이 땅을 구입할 때도 그리고 대형 트레일러 두 개를 합쳐 성전을 만들 때도, 우리는 11제자처럼 부정적으로 돈 계산이나 환경을 계산하지 않았다. 안드레처럼 적극적인 믿음으로 문제에 부딪히며 돌진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당시 김목사와 주기도문성도들은 무모하리만치 용감했다(무식하게 돌진하는 나를 잘 따라주었다) 울울창창한 거목나무들을 작벌하고 2년 이상을 밤낮없이 7-10m 이상 되는 불길이 하늘로 치솟도록 나무를 태웠고, 가파른 산언덕을 도저로 밀어 평지들판을 만들었으며(그때 나와 전혀 상관없는 조경 사업가가 무료로 교회부지에 잔디를 심어주었다), County Permit도 없이 성전을 세웠고, 좁은 교육관을 부수고 두 배 이상을 확장했다(내가 한 것을 보고 우리처럼 시도했던 몇 교회가 철거명령을 받아 건물을 철거했다) 
 
그러다가 4년 후 어느 날, 카운티 검사관이 찾아와 3일 안에 교회 Permit(다섯 종류의 Permit)을 내지 않으면 건물사용을 중단시키겠다고 한다. 나는 기도할 뿐이었다. 그런데 사흘 후에 다시 만난 그가, 그 자리에서 자기가 내 줄 수 있는 Permit은 자기가 내주고, 상관이 낼 수 있는 Permit과 자기 동료나 부하직원이 낼 수 있는 Permit은 그들에게 전화로 허락을 받아내 주어, 순식간에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됐다. 할렐루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적극적인 믿음의 응답이었다. 
 
재미있는 인터넷 유머 ‘터프한 닭’을 소개한다. 어느 농부가 빨간 닭 까만 닭 노란 닭, 세 마리 닭을 키우고 있었다. 어느 날 닭고기가 먹고 싶던 농부가 닭을 잡으려고 빨간 닭을 잡아 털을 뽑으려는데, 닭이 목소리를 깔고 점잖게 말했다. “이봐, 장사 한두 번 해? 목부터 따야지!” 농부는 빨간 닭이 너무 터프해서 포기하고 까만 닭을 잡기로 했다. 그래서 물을 한참 끓이고 있는데, 까만 닭이 성큼성큼 와서 끓는 물에 발을 퍽 담그더니 말했다. “물은 이만하면 됐고...된장은 준비됐나?” 농부는 까만 닭도 너무 터프해서 포기하고 비교적 얌전하게 생긴 노란 닭을 잡기로 했다. 이번에는 닭이 선수 치지 못하게 잽싸게 잡아야겠다고 생각한 농부는 노란 닭을 얼른 잡아서 목을 비틀었다. 그리고 털을 뽑기 시작했는데 노란 닭이 낮고 침착한 음성으로 “형씨, 구레나룻은 건들지 마쇼!” 닭고기를 먹으려다 터프한 닭에 공갈에 놀란 농부는 닭잡기를 포기했다는 유머다.
 
마귀사단은 당신이 순순히 쉽게 축복받는 것과 기적을 체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벳새다광야에서 이미 시간도 늦었고 돈도 없으며 빵집도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제자들을 낙심했듯이, 마귀는 돈도 없고 수술가망도 없으며 의사가 사형선고를 내렸다며 우리 마음에 공갈위협과 불안공포를 심어주고, 사업자금도 없고 기술도 없으며 도와주는 사람도 없다며 기적을 믿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마귀 공갈위협에 두려움을 갖고 불안에 떨고 있는 한 기적적인 치료도, 기적적인 축복도 없다. 적극적인 믿음으로 돌진해 기적과 축복을 쟁취하기를 축원한다.
 
   3. 기적의 주인이신 예수님
 
천지창조 이후,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40년 동안에 2,080일의 안식일을 제외하고 14,610일 하루도 빠짐없이 만나를 내리신 14,610번의 만나기적 외에 모세를 통한 42번의 기적, 엘리야를 통한 16번의 기적, 엘리사를 통한 32번의 기적 그리고 예수님을 통한 42번의 기적과 사도들을 통해서 그리고 속사도들과 오늘 우리를 통해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강에서, 자연계와 물질세계와 영계에서 그리고 사람의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통해서 나타난 수많은 초자연적기적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모두 예수님이 그 주인공이시다. 오늘 본문의 벳새다광야 오병이어기적도 예수님의 기적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없는 기적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사단을 통한 기적이다.
 
1차 대전이 끝난 후인 1930년대 초, 세계는 경제공황으로 대 위기를 맞았다. 나라마다 실직자와 알코올 중독자, 마약 중독자와 마술 숭배자들이 넘쳐 났고 거리마다 백수건달과 창녀와 동성연애자들과 각종 범죄자들이 범람했으며, 집집마다 정신과 육체가 파탄된 자들로 넘쳐났다. 이때에 혜성처럼 나타나 사람들에게 Positive Thinking(긍정적 사고)으로 지구촌에 희망을 던져준 사람이 Norman Vincent Peal 박사다. 그는 ‘가능성을 회복하라’, ‘행복한 성공을 부르는 삶의 지혜’, ‘자기실현’, ‘적극적 사고방식’이란 책들을 통해서 “일이 뜻대로 잘 안 되고 있을 때, 절대 실패의 이미지를 가져선 안 된다. 대신 성공하고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는 훈련을 하라, 성공하려면 자기의 가능성을 믿으라, 꿈을 갖고 목표를 세워라, 행동을 일으켜라, 끈기를 가지라”고 가르쳐 세계인들의 정신을 일깨웠고 그 영향을 받아 혜성처럼 등장한 목사 사업가 정치가 교수들이 우후죽순처럼 역사무대에 나타났다.
 
그 중에 세계사에 우뚝 설 정도로 성공했던 사람이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 수정교회(Crystal Church)목사 로버트 슐러였고 한국에서 세계적인 대교회를 목회한 유명한 목사들이다. 적극적 사고방식, 잠재의식인 사차원의 힘, 신념의 마력, Positive Thinking은 한 마디로 하나님 없이도, 인간의 긍정적인 신념과 사차원잠재의식을 개발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사상과 사고방식이지 결코 하나님의 참 복음이 아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성령을 받으면 부정적이던 사람이 긍정적인 사람이 되고, 진취적이며 낙천적인 사람이 되며, 적극적인 사람이 되어 삶이 변화되고 성공하며 축복을 받는 것은 맞지만, 하나님 없이 인간의 적극적사고와 사차원의 잠재의식을 개발하여 성공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는 ‘적극적사고’로 새벽별처럼 떠올라 30년 이상 ‘역사적으로 성공한 목사’, ‘세계적인 목회자’로 명성을 날렸다. 강력한 지진에도 견딜 특수공법의 골조공사와 장당 1000불이 넘는 유리가 5000장 이상 들어가게 지은 수정교회(Crystal Church)는 세계 십대 건축물로도 명성을 날렸고, 몸이 불편한 사람들은 Parking Lot의 자동차 안에서도 예배를 드릴 수가 있는 Drive-In-Church로도 유명했으며, 주일마다 세계도처에서 수백 명씩 몰려와 교회를 구경하고 슐러의 ‘긍정적사고 메시지’를 듣기 위해 구름떼처럼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평일에도 교회는 관광명소로도 유명해 많은 안내자들이 상주해있었다. TV와 라디오, 인터넷, 웹사이트, 사이버로 슐러 목사의 ‘적극적 사고’ 메시지는 씨줄 날줄의 전파를 타고 지구촌으로 퍼져나갔다. 그래서 목회성공을 꿈꾸는 세계의 많은 목사들에게 슐러 목사는 꿈의 로망이었다. 
 
사람들은 수정교회가 대를 이어 수백 년은 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슐러 목사의 은퇴와 함께 세습으로 후임목사가 된 아들과 가족 간의 내분, 교회 종탑에서 투신자살한 교회중직의 문제 그리고 방만한 교회운영을 감당 못한 심각한 재정파탄으로 Crystal Church(수정교회)는 거대한 항공모함이 순식간에 바다 속으로 침몰하듯 그 찬란했던 역사적 교회가 사라져버리고 하루아침에 가톨릭 성당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천지개벽과 같은 초대형 사건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참 복음이 아닌 성공복음, Positive Thinking, 인간의 적극적사고가 가져온 종말의 한 단편이다. 
 
그렇다면, 로버트 슐러 말고, 예수 없이 인간의 적극적사고, 잠재의식 개발과 사차원의 능력, 관상기도, 자기계발의 긍정적사고, 마인드 컨트롤, Positive Thinking으로 인기를 끌고 교인들을 불러 모아 성공의 고속도로를 질주하던 목사와 교회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 예수님을 교회에서 몰아내고 자신들이 기적의 주인공이 됐던 그들이 있는 곳은 천국의 어디인가? 그들이 천국에 갔든 지옥에 갔든, 지금 세상에 있든,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포장해서 당신들이 전한 적극적사고와 긍정적사고 사차원의 성공복음이 진정한 예수님의 복음이었는가를 묻고 싶다.           
          
벳새다 오병이어기적의 주인은 오직 예수님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당신 삶에서 기적을 베푸신 분은 예수님이시고, 앞으로 기적을 베푸실 분도 나사렛 예수시다. 예수를 통한 기적으로 삶이 은혜와 축복으로 넘치기를 축원한다.
 
   4. 12제자(弟子), 12사도(使徒)들
 
본문 19절과 평행구절인 막 6: 41절, 눅 9: 16절, 요 6: 11절에선 예수님이 오병이어를 손으로 잡으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 후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He breaking the loaves, He gave them to the disciples)고 했다. 심지어 또 다른 기적인 보리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인 칠병이어 기적에서도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마 15: 36, 막 8: 6)고 하셨다. 이것은 축구 배구 농구 야구 운동경기에서의 승리가 뛰어난 선수 한 사람의 승리가 아니라 공격과 수비를 함께 도운 선수 모두의 승리인 것처럼 예수님의 기적에 여러분 당신들을 참여시키려는 예수님의 의도인 것이다. 그렇다. 기적의 마지막 몫은 당신의 몫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주신다 해도 당신이 순종하지 않으면 그 기적이 도중에서 중단될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현대교회에서 예수이름으로 각종 질병들이 치료 받고, 많은 귀신들이 떠나가며, 여러 가지 문제들이 해결 받는 기적들이 떠나버린 것은 예수께서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를 축사하고 떼어준 떡과 고기를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 병자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에게,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 떼어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혼자 5천 명과 4천 명에게 일일이 떡을 떼어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떡과 고기를 제자들에게 떼어주셨다. 그리고 제자들은 수만 명 무리에게 그 떡과 고기를 떼어 주므로 예수님 기적에 동참했다. 
 
그렇더라도 12제자, 12사도는 기적의 공동창조자는 아니다. 기적의 분배자일 뿐이다. 기적의 창조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뿐이고, 복음이신 하나님의 말씀  뿐이다. 말씀이신 예수 외에 기적의 창조자는 될 수 없다. 그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바친 어린아이도 기적의 동참자이고, 안드레도 기적의 동참자이며, 12제자 12사도도 기적의 동참자, 기적의 분배자일뿐 기적의 창조자는 아니다. 그래서 당신이 예수이름으로 병 고치는 능력을 나타내고 희한한 능력을 나타냈어도 기적의 창조자인 것처럼 교만하지 말라. 모든 영광을 하나님과 예수님께만 돌릴 수 있기를 축원한다. 그래야 버림 받지 않고 끝까지 쓰임 받는 겸손한 종으로 축복을 받는다. 
 
뿐만 아니라 오병이어기적은 수만 명 무리가 배불리 먹고 12바구니에 가득 차도록 남았으니 이것은 12제자들이 들고 있었던 바구니마다 떡과 고기로 가득 찼다는 말이다. 12제자, 12사도가 각각 한 바구니씩 거둔 것이다. 예수님의 기적이 12제자들의 기적이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12바구니의 떡과 고기는 예수께 그것을 바쳤던 어린아이에게도 선물로 주기도 했겠지만 나머지는 예수님의 전도일정에 양식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오병이어기적에서 5천 명과 12바구니, 5와 12라는 숫자는 모세오경과 열두 지파를 가리키는 것으로 유대인들에게 의미 있는 숫자로 이해가 되면서, 훗날 많은 학자들로부터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 됨을, 그리고 사천 명을 먹인 기적은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이 생명이 되심을 나타내기 위해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기적의 영적인 의미는 예수님은 온 인류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3G(3rd generation)시대, 4G(4th generation)시대(3세대와 4세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6년 후인 2020년엔 5G(5th Generation: “제 5세대”) 이동통신시대를 맞는다. 스마트폰 하나만 가지고도 살 수 있는 인류역사상 가장 편리한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렇다면 지구촌인류의 손엔 행복의 파랑새는 잡혀져 있는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그 대답은 ‘아니 올시다!’이다.
 
5천년 역사의 긴 잠에서 깨어난 잠자던 사자 중국, 이제 미국과 쌍벽을 이루며 세계사에 우뚝 서서 중국굴기를 외치는 중국, 상전벽해라, 자고나면 도시가 생겨나고 도시마다 마천루빌딩 숲이 만들어지며 인구 1000만이 넘는 메가 도시들이 즐비하고, 첨단과학 선진국에서 군사대국으로도 손색이 없게 된 중국, 그래서 살기 좋게 해주고 배부르게 해주자 서민들까지 증오해오던 공산주의를 반대하지 않는 중국을 보자. 중국이 그렇게 살기 좋아진 나라가 되고 흥청망청 돈을 쓰는 나라가 됐어도, 중국과 몽골에 걸쳐있는 동서의 길이 1600km 북쪽에서 남쪽까지 800km나 되는 중앙아시아 최대의 사막, 고비사막에서 날리는 황사(黃砂)는 중국전역을 괴롭히고, 편서풍을 타고 한반도와 일본을 건너 하와이까지 건너와 각종 질병을 유발한다. 
 
현재 지구촌엔 대략 120여개의 사막이 있다(고비사막을 위시해 아시아에만 40개의 사막이 있고, 아프리카엔 사하라사막을 비롯해 16개 사막이 있으며, 북미엔 모하비사막을 비롯해 크고 작은 30개의 사막이 있고, 유럽에 9개, 호주에 12개, 남미에 12개 등) 그런데 가뭄과 한재로 우리나라보다 더 넓은 지역이 해마다 황무지사막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막이 늘어간다. 그리고 지구촌에 사막처럼 광야황무지는 더 많고 더 넓다. 
 
그렇다. 아무리 세상이 좋아지고 첨단과학이 발달해 살기 편리한 5G(5세대) 이동통신시대가 된다고 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은 인간을 죽이고 도적질하며 멸망시키는 사단마귀 귀신들이 있는 한, 자연의 광야만큼 정신적인 광야, 경제적인 황야사막, 인간이 살아가기 힘든 황량하고 살벌한 영적인 빈들과 사막과 광야가 처처에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광야가 우리를 찾아온다. 그래서 우리에게 벳새다광야의 기적이 필요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잘 것 없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기적을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그래서 기적의 주역 어린아이처럼 사신 하나님께 금식하며 매달려 볼 것이다. 한 달에 사흘 한번이라도, 일주일에 하루라도, 하루 한 끼라도 금식하며 하나님의 기적을 기도하고 간구하므로 여러분 삶에 예수님의 기적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그리고 머리 싸매고 주판알 굴리며 계산만 하던 제자들의 자리를 박차고 적극적으로 도전하던 안드레처럼 믿음으로 도전하므로 기적들이 당신 삶에 있기를 축원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떼어주는 떡과 고기를 들고만 있지 말고 믿음으로 예수이름을 사용해 기적들을 만들어내는 축복의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김엘리야 목사 (워싱턴주기도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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