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교훈을 받아라! 잠 6: 6-11절 - 기독뉴스
모바일보기
기독뉴스 개편사이트 안...
2024년 05월 02일
 
뉴스 오피니언 방송사진 커뮤니티 2세뉴스
기사등록 I 독자마당 I 광고후원 로그인 회원가입
뉴스홈 > 오피니언 > 칼럼 > 김엘리야칼럼
2014년01월20일 16시57분
글자크기 기사내용 이메일보내기 뉴스프린트하기 뉴스스크랩하기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교훈을 받아라! 잠 6: 6-11절
과테말라 시티에서 비행기로는 30분, 백두대간처럼 굴곡이 심한 산길을 따라 난 국도를 달리면 3시간 반에 도달할 수 있는 께찰테낭고의 작은 읍(邑)소재지 알몰롱가는 한때 사탄숭배와 알코올중독자, 마약사범과 창녀들이 득실거리던 과테말라에서 가장 가난한 도시 중 하나였었다. 빈민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우상숭배와 모주꾼들만 모인 도시처럼 대낮부터 독주에 취해 비틀거리는 거주민과 그들을 상대로 윤락을 일삼는 창녀들과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물처럼 흔한 마약에 찌들어 게으름에 노예가 됐던 도시는 하루에도 수십 건씩 발생하는 사건사고로 지옥을 방불케 했다.

1982년, 우직스러울 정도로 하나님말씀을 절대적으로 믿는 젊은 목사 한 사람이 역대 하 7: 14의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Pray and seek My face)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치겠다”(I will hear from heaven, will forgive their sin, and will heal their land)는 말씀을 들고 우상과 마약과 음란, 게으름과 가난과 살인, 각종 질병과 저주와 온갖 범죄들이 난무하는 알몰롱가를 찾아들어갔다.

몇 달 후 금식과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한 젊은 목사 설교에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2-3년 후엔 요나의 설교에 금식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던 니느웨 백성들처럼 오랫동안 악한 죄악 길에서 방황하던 알몰롱가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교회로 몰려와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게 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저들의 죄를 사하시고 그 땅을 고치셔서 알몰롱가를 낙원처럼 만들어 주어 도시를 통째로 바꿔주셨는데 이제 알몰롱가는 중남미에서도 유명할 뿐만 아니라 세계가 주목하는 기적의 땅이 됐다.

과거 알몰롱가의 논과 밭에서 나는 소출은 고작해야 한 주에 트럭 3대의 야채가 됐을 정도로 빈약했었다. 그러나 ‘땅을 고치겠다’는 약속대로 하나님께 고침 받아 기적의 땅으로 변화된 지금은 매일 50트럭 가득히 (레몰라차)빨간 무, (레뽀요)양배추, (시나오리라)당근 등 다양한 야채들이 생산되고, 과거 새끼손가락 굵기 같았던 당근이 이제는 6인치 길이에 무게 4파운드가 나가는 어른팔뚝만한 크기의 당근으로 출하되고 있다.

평생 자동차를 본적도 없던 거주민들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자동차를 우마차처럼 쓰는 부자들이 됐고, 자고나면 한 뼘씩 자라나는 풍성한 소산물을 실어 나를 트럭이 집집마다 있게 됐으며, 모든 차량에 붙어있던 조악한 부적나부랭이는 떼어졌고 대신 하나님 말씀, 성경구절이 쓰여 있게 됐다. 이런 변화는 마을 구석구석으로 번져갔다. 그래서 한때 작은 도시에 36개 술집(깐띠나)들이 성업 중이어서 죄가 범람했었고 마약과 창녀들이 득실거리던 도시에 깐띠나(술집)들이 자취를 감췄으며, 깐띠나들은 눈이 부시도록 풍성하게 자란 푸성귀를 소재로 전통음식을 파는 상점으로 바뀌어졌다. 먹고 놀며 춤추고 죄를 짓던 게으름뱅이들의 도시는 이제 빈둥거리며 놀던 사람들 대신 부지런히 일하는 활기 넘치는 도시가 됐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게으름과 나태함의 도시를 부지런함과 근면의 도시로 만들어 놓았다.

과거엔 알몰롱가에 4개의 감옥이 있었으나 지금은 감옥에 들어올 죄수들이 더 이상 생기질 않아 모두 폐쇄해버렸다. 도시에서 마지막으로 문을 닫은 감옥은 1988년에 재단장(Remodel; Renovation)돼 예식장으로 문을 열었다. 현재 알몰롱가 도시거주민 13,000명의 사람들 중 92%가 하나님을 믿는 ‘예수촌’으로 변했다. 목사 한 사람의 부르짖는 기도와 외치는 설교로 도시의 땅과 사람들이 고침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한때 총인구 1,450만에서 95%가 가톨릭이었고,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 503억불이던 세계 78위 빈곤국 마야인디오 후예들인 과테말라는 1980년부터 시작된 선교의 열풍과 복음과 성령의 역사로, 고단한 영혼들이 살아나고 척박한 땅이 고침을 받아 현재 45%가 예수를 믿는 나라, 남미에서 가장 복음화 된 기독교국가로 발 돋음 하고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복음은 과테말라를 고치고 있다. 죄의 사람들을 의의 사람들로, 악한 사람들을 선한 사람들로, 절망의 사람들을 희망의 사람들로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은 태생적인 게으름의 사람들을 부지런하고 근면한 사람들로 바꾸었다. 우리 중에도 하나님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피골이 상접한 병든 육체와 찌들어진 마음과 사막처럼 핍절된 영혼들이 고침 받는 역사와 게으른 자들이 부지런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역사들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기를 축원한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교훈을 받아라!

세상에서 하나님이 싫어하는 사람 중에 하나는 빈둥거리며 시간을 죽이는 게으른 사람이다. 히브리어로 앗슬라, 앗셀, 레미야란 말로 기록된 게으른 자는 “게으름뱅이”, “빈둥거리는 자”, “농땡이 부리는 자”란 뜻의 Sluggard로 6번, “게으른 자”, “나태한 자”, 태만한 자“란 의미의 Slothful로 17번 등 성경에 ”게으른 사람“이란 단어는 23번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게으른 사람, 농땡이 부리는 사람, 나태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과 예수님의 저주는 소름이 끼치고 무서울 정도이다.

마 25: 14-30의 ‘달란트 비유’에서 예수님은 자기가 맡은 한 달란트를 땅속에 묻어두었다가 주인이 올 때 숨겨뒀던 한 달란트를 내놓는 종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셨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두 가지 진리를 설명해준다(Here we have the truth illustrated by this parable) ⑴ 게으른 종의 정의(定義)이다(The slothful servant was) ‘성경이 말하는 게으른 자는 어떤 사람인가, 성경은 게으른 사람을 어떤 사람이라고 말하는가?’이다. ①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고맙게 생각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 자였다(Ungrateful; 마 25: 18절) ② 하나님께 대하여 도리에 맞지 않는 잘못된 추리의 사람이었다(Erroneous in reasoning; 18, 24절) ③ (최선을 다하라는)주인의 뜻을 왜곡하는 부당하고 부정한 사람이었다(Unjust; 18절) ④ 자기 주인을 비난하기 위해 주인의 결점을 찾고 트집거리를 찾는 자였다(Fault-finding; accusing; 26절) ⑤ 자신을 정당화하는 자기변명의 사람이다(Self-justifying; 24절) ⑥ 일하기를 두려워했던 자였다(Fearful; 25절) 하나님은 실패가 무서워 일하기를 두려워하는 자보다는 차라리 일하다가 실패한 사람을 더 좋아한다. ⑦ 말 그대로 악한 자였다(Wicked; 26절) ⑵ 게으른 자의 처벌(His punishments; “게으른 자들이 받을 형벌”)이다.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겼던 주인은 게으른 사람에게 ①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무섭게 책망하시고 꾸중하셨다(Rebuked: 26절) 장차 심판의 날에 게으른 사람에게 내려질 형벌은 무서운 책망뿐이다 ② 게으른 사람 자신이 입으로 말 한대로 판결을 내리셨다(Judged out of his own mouth; 26절) ③ 게으른 자가 주인과의 신용거래를 실패한대로 판결하셨다(Judged for failure of trust; 27절) 예수님은 우리를 믿고 여러 가지 재능을 주셨는데 그분의 믿음을 저버리고 신용거래를 실패하면 심판을 받을 것이다. ④ 게으른 자의 모든 달란트재능(才能)을 빼앗아 빈털터리로 만드셨다(Stripped of his talent; 28-29절) ⑤ 달란트를 맡겼던 주인에게서 잘려 추방당했다(Cut off and banished forever from his master; 30절) 그래서 게으른 자의 마지막 운명은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나님과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신 달란트 재능을 게으르게 사용하는 자를 싫어하시고, 자기가 맡은 사명을 게을리 하는 사람을 심판하신다. 그렇지만 자기사명을 부지런하고 충성스럽게 수행하는 성도는 사랑하시고 축복하신다.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主人)의 즐거움에 참예(參預)할지어다!”(Well done, good and faithful servant, you have been faithful over a few things. I will make you ruler over many things(I will put you in charge of many things) enter into the joy of your Master; 21, 23절) 칭찬 듣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1. 게으른 사람의 16가지 특성과 진상(16 facts about the slothful; sluggards)
    
“내가 증왕에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심덤불이 퍼졌으며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고 돌담이 무너졌기로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었노라.
네가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 24: 30-34)

이 말씀에서 게으른 사람, 자신의 일을 태만히 하는 사람을 지혜 없는 사람으로 단정한 잠언저자 솔로몬은 ⑴ 공통적으로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격을 설명하고 묘사(His personal description; 30절)하기를,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나 성취해야 할 일에 대해서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데 게으르고 무지하며 용기도 없고 정신적인 능력이 없는 무능한 사람이라(He is slothful and ignorant and without courage or mental power to make proper decision about work and to carry them out)고 했고 ⑵ His circumstances(게으른 자의 현재 상황; 30-31절)는 그도 남들처럼 자신이 먹을 식량을 공급하고 번창해 성공할 수 있는 생산이 가능한 농장과 포도원을 갖고 있는데(He has a vineyard and a farm capable of producing his own food and prospering him) ⑶ 그의 농장과 밭의 상태(The condition of his farm(31절)는 가시덤불과 거친 풀들이 자라 온 땅에 덮였고, 돌담과 울타리는 무너져있으며, 게으름으로 오랫동안 돌보질 않아 농장전체는 폐허가 된 채 남아있다(It is grown over with thorns and nettles and the fences are broken down. The whole place is in a ruined state through long neglect)고 했고 ⑷ 그렇게 된 이유(The cause; 30, 33절)는 그가 너무 게으르고 나태해 포도원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농부가 반드시 해야 하는 필요한 일들인 농장을 깨끗하게 치우는 일과 땅을 일구는 일, 밭에 씨를 뿌리는 일을 소홀히 했고, 무너진 농장(포도원)의 울타리와 집을 수리하는 일을 게을리 했으며, 거의 모든 시간을 잠자는데 보냈다(He is too lazy to prune the vineyard; clean up, plow, and plant his field; or to repair the fences and the residence. He spends his time in sleep and neglect of essential duties; 33절) ⑸ 게으름 피우고 잠자기를 즐겨한 결과(The result; 34절)는 장거리 여행자가 마지막 돈을 다 써버리고, 나라가 오랜 전쟁으로 자원이 고갈돼 피폐해지듯 게으른 자에게 절대빈곤, 절대빈궁이 찾아왔다(Absolute poverty as one who travels and has spent his last money, and as one who becomes impoverished through warfare; 34절)고 했으며 ⑹ 이것들을 통해 배우는 교훈(The lesson learned: 32, 34절)은 지금도 게으르고 나태한 자에게는 똑같은 결과가 따른다(To follow the example of the slothful is to come to the same end)며 게으른 자들의 나태함을 경계했다. 그렇다. 게으른 자들이 맞게 될 결과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 언제나 똑 같은 열매인 절대빈궁과 곤핍과 파멸과 가난이다. 하루 24시간을 잠자고 노는 것에 빼앗겨 12시간, 8시간밖에 살지 못하는 게으름뱅이로 인생을 살지 않고, 하루 24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해 36시간 48시간으로 사는 부지런한 사람, 지혜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잠언을 중심해 성경이 말하는 게으르고 나태한 자들의 16가지 특성을 알아보자.
⑴ 게으른 사람은 고분고분하지 않아서 가르치기가 어렵고, 무사태평하여 경솔하고 경망스러우며, 아무래도 좋고,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아 냉담하고 무감각 무관심한 자들이다(They are unteachable, careless, and indifferent; 잠 6: 6-9절) ⑵ 게으른 자들의 공통점은 지나칠 정도로 잠자기를 좋아한다(Love excessive sleep; 잠 6: 9, 19: 15, 24: 33)는 것이다. 솔로몬은 그들에게 How long will you lie down, O sluggard? When will you arise from your sleep?(“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6: 9)며 잠자기를 좋아하는 게으른 자들을 질책했다. ⑶ 잠 10: 26에선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식초(Vinegar)같고 눈에 연기 같다”고 했다. 예수를 믿기 전, 중학교 1학년 때, 나는 부엌 찬장에 소주병에 담긴 식초를 소주인줄 알고 마시다가 숨이 막혀 죽을 뻔했던 적이 있다. 게으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숨을 막히게 하고 초조하게 만들며 윗사람을 짜증나게 만드는 사람(Irritating to others)이란 말이다. 중요한 약속시간에 게으름 피우다 나타나지 않으면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나 초조하며, 게으른 사람을 일군으로 쓰는 주인의 마음은 얼마나 답답하고 천불이 나며 염증이 나겠는가? 당신은 예수님이 보실 때, 답답한 사람인가, 반가운 사람인가?

⑷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지만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는다”고 했으니 게으른 자가 남의 종이 되는 것(Servant to others; 12: 24)은 필연이다. ⑸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않는다”(Too lazy to cook food; 12; 27)이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충청도에서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가는 부잣집 아들 선비가 있었다. 평소 남편의 게으름을 아는 부인은 남편이 타고 가는 말 등위에 여비를 넉넉하게 담은자루 여러 개를 싣고 필요할 때마다 여관에 들어가 쉬면서 음식을 사서먹으라 부탁한 후, 마지막으로 남편 목에 떡을 목걸이처럼 달아 주었다. 그런데 열흘 후 사람 편에 남편이 굶어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머슴꾼들을 보내 남편 시체를 가져왔는데, 남편 목에 걸어준 떡이 앞에 것만 없고 뒤에는 그대로 있더란다. 게으른 남편이 앞에 떡만 떼먹고 뒤에 있는 떡은 떼먹질 않고 굶어죽었던 것이다. 오늘도 게으른 사람은 손 움직이기를 싫어해 잡을 수 있는 것도 사냥하지 않는다. 좋은 기회를 다 놓친다. 축복 받을 기회, 기도할 수 있는 기회, 은혜 체험할 수 있는 기회, 전도할 기회, 봉사할 기회...기회를 놓친다. 손을 부지런히 놀려 축복의 기회들을 잡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길 축원한다.

⑹ 게으른 사람은 자기마음으로 바라고 갈망하는 일이 실현된 것같이 생각만하는 Wishful thinker(원망적(願望的) 사고자)일뿐 꿈의 성취를 위해 노력하거나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사람이다(잠 13: 4) ⑺ 잠 15: 19절엔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다”(Life full of troubles)고 했는데, 이것은 가시 울타리 속에서만 안주하는 미련한 가축처럼 게으른 사람은 아주 사소한 장애나 어려움도 극복하기를 싫어하여 모험이나 도전을 두려워 해 그 모든 일을 회피하고 변명하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란 뜻이다. ⑻ “자기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잠 18: 9) 게으른 자들은 나태하여 일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곶감 빼먹듯 모두 탕진하고 낭비하므로 사회에서 위화감을 조성하는 해로운 존재, Great waster(백수건달,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⑼ 잠 19: 24에서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고 했는데, 이것은 게으른 사람은 어떤 계획을 세우긴 했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은 전혀 하지 않는 ‘Are lazy’(“일하기를 귀찮아하는 자”, “나태한 사람”, “게으름뱅이”,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람”; 19: 24, 24: 30-34, 26: 14-15)를 비유한 말이다.

⑽ “일하기를 거절(拒絶)하는 자”(Refuse to work)다. “게으른 사람은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20: 4)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이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21: 25) 게으른 사람은 일확천금의 꿈만 가지고 있을 뿐, 그 마음이 정욕으로 가득 채워져 있을 뿐, 누가 내 문제해결을 해주기를 바랄 분, 도대체가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서양속담에 The early bird catches the worm(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말이 있고, 뉴질랜드속담엔 “맨 먼저 배에 오른 사람이 노도 고른다”가 있으며, 러시아속담엔 “맨 처음에 온 늑대가 제일 살진 닭을 차지한다”고 했고, 한국속담엔 “거지도 부지런해야 더운밥을 얻어먹는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 게으른 사람에게 돌아갈 축복은 없다. 부지런 한 사람에게만이 축복이 약속됐다.

⑾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 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일을 시작해보지도 않고 미리 겁을 집어먹는 자, 일하기를 싫어해 엄살을 부리며 터무니없는 변명을 늘어놓는 자다(Make the most senseless excuses for their laziness; 22: 13, 26: 13) 유대격언에 “게으른 자는 선지자다”란 말이 있다. 게으른 자는 자신이 선지자가 된 듯 ‘밖에 사자가 있다’며 세치 혀로 변명을 늘어놓는 자며 어떤 일에 모험이나 도전을 하지 않는다.  ⑿ “밭에 가시덤불이 퍼졌고,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으며, 돌담이 무너진” 자신의 비참하고 곤고한 현실을 깨닫는 것을 기피하는 자들이다(Are void of understanding; 24: 30) 종말시대에 참으로 지혜로운 성도는 영적으로 자신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깨닫고 열심을 내서 회개하는 성도들이다(계 3: 17-21) 그런 성도들만이 주의 날에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는 축복을 받는다.

⒀ 게으른 자는 자신의 영적 물질적 육체적 소유물이 마귀에게 겁탈당하고 파멸당하도록 쉽게 허용하는 자들이다(Permit property to ruin; 24: 31-34, 전 10: 18) ⒁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딩구느니라”(잠 26: 14) 그렇다. Too lazy to move themselves. 게으른 사람은 침상에서 자기 몸 움직이기를 싫어한다. 침상 떠나기를 싫어한다. 그렇게 머리는 베게에 붙어있고, 몸은 이불에 묻혀있으며, 마음은 공상의 날개를 타고 허공을 헤매는 사람에겐 영적축복이 없다. 침대엔 영권(靈權)이나 신령한 축복이 없다. 침상에서 떨치고 일어나 새벽을 깨우는 사람에게만 신령한 은혜가 있고, 기도응답이 있으며,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 ⒂ “게으른 자는 선히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잠 26: 16) 그렇다. 게으른 사람은 Are conceited(“자만에 빠져있는 사람”), 자기착각에 빠져있는 사람이다. 바른 판단에 근거해 의견을 제시하는 선한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더 지혜롭게 여기는 사람, 완벽하고 지혜로운 여러 사람(다수)의 의견보다 자기가 더 지혜롭다는 착각에 빠져있는 사람이다.

⒃ 게으른 사람은 신뢰하거나 신용할 수 없는 불충성한 사람(Unfaithful to trust)의 사람이다(마 25: 26) 구약 어디에서도 하나님은 게으른 사람을 믿고 일을 맡긴 적이 없고, 신약에서 예수님도 게으른 사람을 믿고 당신의 일을 맡기신 적이 없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을 수행했던 수천 명의 역사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부지런한 사람들이었다. 지금도 당신의 일을 맡기기 위해 하나님은 부지런한 사람을 찾고 계시고 예수님도 근면하고 정직한 사람을 찾고 계심을 기억하라. 오늘 당신은 게을러서 예수님이 열외로 제쳐놓은 사람인가? 아니면, 부지런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인정받아 주님께서 주님의 일을 기쁨으로 맡기실 사람인가?

게으름과 부지런함, 나태함과 근면함은 당신의 삶의 환경마다 그 상황과 색깔이 다르다. 학생의 부지런함과 가정주부의 게으름이 다르고, 직장인의 근면함과 사장의 나태함이 다르며, 집사 장로 권사의 부지런함과 목사의 게으름이 다르다. 당신은 학생으로, 직장인으로, 집사 권사 장로로, 목사로 부지런한 사람인가 잠자기를 좋아하는 게으른 사람인가? 가까운 장래와 먼 훗날에 ‘그때 하루 한 시간만 더 기도했다면, 하루 30분만 성경을 더 읽었더라면, 그때 주일성수와 십일조생활을 충실하게 했다면...,비참한 오늘의 나는 아닐 것이고, 지금의 아픔과 고통은 없었을 것이라’ 후회하는 날이 없게 되길 축원한다.

“나는 죽어서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의 질문은 삶이 질척거리다 못해 나태의 나락에 빠져버린 사람을 죽비처럼 내리칠 물음이다. 그리고 삶이 방향을 잃은 채 이리저리 방황하고 표류하는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고, 나아가 비계처럼 쌓인 자만과 오만을 사정없이 찌르는 삶의 송곳 같은 물음이다. ‘기억’이란 단어 때문에 과거지향적인 질문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너무나 현재진행형적인 물음이고 곧바로 다가올 미래와 결부된 질문이기에 두렵기까지 한 물음이다.

노벨상 창설자인 알프레드 노벨은 “나는 죽어서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라는 물음이 삶의 송곳이 돼 그의 인생을 막판에 송두리 채 뒤집어 놓은 사람이다. 1985년 11월 27일, 노벨은 자기가 미리 쓴 유서를 살아생전에 전격 공개하며 자기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의미 있는 상을 만들겠다고 공표했다. 그런데 노벨이 이렇게 마음을 먹게 된 동기는 공교롭게도 언론의 오보로 인해 그가 살아서 자신의 부음(訃音; 사람이 죽은 것을 알리는 통지)기사를 미리 봤기 때문이었다.

노벨이 자기 유서를 공개하기 7년 전인 1888년, 그의 친형 루드비그 노벨이 프랑스 칸에서 사망했다. 그런데 당시 한 신문이 이것을 알프레드 노벨의 사망으로 혼동해 “죽음의 상인, 사망하다”란 제목의 부음기사를 내보냈다. 그 기사를 본 알프레드 노벨은 충격에 휩싸였다.

당시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총 350개 이상의 특허권을 가지고 있었고 폭탄제조공장과 탄약제조공장을 포함해 90개가 넘는 사업체를 거느린 당대 굴지의 사업가였는데, 노벨은 자신이 평생 독신으로 고군분투하여 살아온 삶이 결국 사람들에게 ‘죽음의 상인’으로밖에 기억되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접하고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7년 동안 “나는 죽어서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를 고민한 끝에 ‘죽음의 상인’이 아니라 ‘인류에게 수여되는 최고로 가치 있는 상의 창설자’로 기억되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던지기로 결심한다. 삶의 송곳 같은 물음이 장쾌한 삶의 역전극을 연출하게 한 것이다.

이제 “나는 죽어서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의 비수 같은 질문, 송곳 같은 물음을 당신스스로에게 던져보자. 이 물음은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당신의 길을 성찰하게 만들며 스스로 ‘진정으로 기억되고 싶은 모습’이 되기 위해 주어진 오늘에 최선을 다하고 내일로 나아가게 할 것이고, 게으름으로 점철됐던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하고 부지런함과 근면함으로 새롭게 살도록 당신자신을 채찍질 할 것이다. 게으름을 떨쳐버리고 부지런함을 소유하는 사람은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의 보물을 갖는 축복의 사람이다. 게으름에서 깨어나기를 축원한다.

2. 개미에게 교훈(敎訓)을 받아라!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糧食)을 모으느니라”(잠 6: 6-8, 30: 25)

본문에서 지혜의 왕, 솔로몬은 게으른 자들에게 ‘개미에게로 가서 지혜를 얻으라, 개미에게 교훈을 받으라’고 말한다. 동양인들 사이에서 개미는 “근면의 표상이며 부지런함을 상징(象徵)”하는 대표적인 피조물(The ant is a remarkable creature-and emblem of industry among Orientals)이다. 성경이 말하는 개미와 곤충학에서 말하는 개미는 어떤 곤충이며, 그래서 인간이 개미에게 배워야하는 지혜는 무엇인가?

⑴ 지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근면한 곤충이다(Most laborious insects in existence) ⑵ 최상으로 산업(공업)화된 곤충(Most highly industrialized) ⑶ 적당한 시기에 양식을 준비한다(Collect food in proper seasons) ⑷ 새끼들에게 상냥하고 다정스럽게 애착을 가지게 한다(Fondly attached to the young) ⑸ 동료들을 위한 강렬하고 날카로운 예지능력을 가지고 있다(Have keen foresight for others) ⑹ 드러내 보이거나 나타내려고 일하지 않는다(Work quitely without show) ⑺ 일을 마칠 때까지 지루해 하거나 싫증내지 않고 끝까지 열심히 일한다(Work unwearily until work is done) ⑻ (개미왕국)군집(群集)공동체의 최선의 유익을 위해서 놀랄 정도의 조직계통으로 함께 일한다(Work together in astonishing systems of organization to the best good of the whole community) ⑼ 지하터널을 뚫고 자기들의 집을 짓는데 독창력이 있고 손재주가 뛰어난 목수(木手)들(목공들)과 석수(벽돌공-석공들)들이다(Are ingenious carpenters and masons, building their own system of homes and underground tunnels)

⑽ 주도면밀하고 꼼꼼하며 정성들여 자기들 집을 청결케 한다(Keep their homes scrupulously clean) ⑾ 공동체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 서로 돕는 일에는 누구도 일정한 직업이 있지 않다-공동체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No one among them exist without a definite job in life to help meet the needs of the community) ⑿ 대적과 원수들로부터 자기 집과 새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죽기까지 싸운다(Fight to death to protect their own homes and young from enemies) ⒀ 개미들의 집단적이며 사회적인 삶은 여러 면에서 인간의 삶과 비교가 된다(Their social life compares with that of human beings in many respects) ⒁ 개미들은 고도로 총명하고 지혜롭다(They are intelligent and wise; 6절) ⒂ 개미들은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주권통치자의 강요가 없이도 필생의 사업(일)을 자발적으로 잘 수행(隨行)한다(They carryout life's work without being forced to do so by a guide, overseer, or ruler; 7절) 이것이 성경이 그것들의 지혜를 칭찬하고, 곤충학에서 그것들의 지혜를 밝혀낸 미물의 곤충 개미들이다. 솔로몬은 만물의 영장 인간들에게 ‘개미에게 가서 지혜를 배우라’로 설파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일확천금을 꿈꾸면서 공상과 허상 속에서 살며, 나태함으로 이웃을 괴롭히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게으름의 사람들에게 ‘개미의 지혜’를 배우라고 한 것이다.

잭 휘태거는 2002년 크리스마스에 3억 1500만 달러의 파워-볼에 당첨돼 세금을 공제하고 일시불로 1억 1300만 달러를 받은 희대의 행운아였다. 미국 복권역사상 세 번째로 많은 금액이지만, 한 사람이 받은 금액으론 사상최대였다. 휘태거는 복권당첨 이전에도 West Virginia, 시골마을 스콧 디포에서 3개의 건설회사를 운영하던 백만장자였다. 하지만 억만장자가 되면서 그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했다.  

복권에 당첨된 후, 그는 자신이 다니던 3개 교회에 700만 달러를 헌금하는 등 일확천금한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3년, 음주운전으로 두 차례나 체포됐고, 2004년에는 음주측정 거부와 불법무기 소지로 구속됐으며, 나이트클럽과 카지노, 경마장에서 일어난 폭력사건으로 연이어 소송에 휘말렸다. 휘태거는 자주 가던 스트립클럽 주차장에 세워둔 그의 스포츠카에서 현금과 체크 54만 달러를 도난당했고, 그가 거액의 현금을 갖고 다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의 승용차, 사무실, 집에는 수차례 도둑이 들기도 했으며, 손녀의 18살 먹은 남자친구가 휘태거의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되므로 그 부모가 휘태거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얼마 후엔 17세 손녀마저 실종됐다가 마약과용으로 숨진 채 발견됐는데 이것은 휘태거가 손녀에게 무분별하게 용돈을 줘 마약에 빠졌고 그 일로 죽음을 맞게 한 것이다. 그리고 휘태거 자신도 도박과 유흥과 방탕한 생활로 4년 만에 전 재산을 탕진하고 무너져버렸다.

일하기 싫은 게으름으로 복권에 당첨했던 사람들 중 대부분은 현재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거나 이미 비참하게 죽어갔다. 1988년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1620만 달러 복권에 당첨됐던 윌리엄 포스트는 그의 유산을 노린 형제로부터 살해위협을 받고 갖가지 음해에 시달리다가 모든 재산 다 날리고 말년엔 사회보장 연금에 의존해 살다가 쓸쓸하게 삶을 마감했고, 1997년 텍사스 주에서 3100만 달러짜리 복권에 당첨했던 빌리 하렐은 고급자동차와 부동산을 구입하고 가족과 교회, 친구들에게 돈을 뿌리고 흥청망청 살다가 2년 만에 자살로 삶을 끝냈으며, 2001년 남편과 공동명의로 1100만 달러 복권에 당첨됐던 빅토리아 젤은 약물과 술에 취한 상태에서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람을 죽인 죄로 미네소타 주 교도소 신세를 지고 있다. 이런 예는 부지기수이다. 그렇다. 일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자의 마지막은 파멸이다.

“당신은 죽은 후 무엇으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겠는가?” “당신은 주님 앞에 설 때, 어떤 사람으로 심판을 받겠는가?” 게으른 사람인가, 부지런한 사람인가? 잠자기를 좋아하는 게으름의 삶에서 나를 짓누르고 있는 이불을 걷어차라! 그것만이 당신이 살 길이다. 역사는 부지런한 사람을 위해 빈자리를 내놓고 있다. 당신의 하루의 역사는 새벽부터 시작된다. 새벽을 깨우라! 새벽을 정복하는 사람은 역사를 정복한다. 이제 이후의 삶이 날마다의 새벽을 깨우는 부지런한 자의 역사로 새롭게 쓰는 축복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김엘리야 목사 (워싱톤주기도문교회 담임)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트위터로 보내기페이스북으로 보내기미투데이로 보내기 뉴스스크랩하기
김엘리야칼럼섹션 목록으로
 

이름 비밀번호
 66979480  입력
댓글콘선택 : 댓글 작성시 댓글콘을 클릭하시면 내용에 추가됩니다.
[1]
뉴스홈 > 오피니언 > 칼럼 > 김엘리야칼럼
다음기사 : 야훼의 축복을 받은 이삭 (창 26: 12-25) (2014-02-10 19:32:23)
이전기사 :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라 엡 3: 14-21절 1. 12. 14 (2014-01-11 18:51:59)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회사소개 보도지침 저작권 규약 이용약관 사업제휴 직원채용 광고후원 기사제보 연락처 don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