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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09월24일 11시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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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
      야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    시 117: 1-2절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품성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사랑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두 가지로 표현한다면 독수리의 두 날개처럼 크신 인자하심과 영원한 진실(眞實)하심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His merciful kindness)에서 인자함의 헤세드는 “자기 백성을 끝까지 지키시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을 가리키고, 진실하심(Truth)의 에메트는 “확고함”, “안정됨”, “신실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는 두 가지 방법은 “한 번 약속하신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키심으로 사랑을 확증해주시는 것”이고, “영원히 지속되는 하나님의 신실함, 결코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이 둘 중 하나라도 빠지면 하나님의 사랑은 반쪽 사랑이고 불완전한 사랑이 될 것이며 그런 사랑은 전지전능 무소부재 영원하신 야훼의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사랑은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만큼 그도 그만큼만 나를 사랑하는 상대적인 사랑이고, 때로는 내가 베푼 사랑과 호의는 무시된 채 자기만 사랑해달라는 자기중심적인 이기적 사랑이며, 심지어는 살모사가 어미를 잡아먹듯 상황 따라 내가 베푼 사랑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나를 대적하는 배신적이며 배반적인 사랑이기도 하다. 따라서 너 없이는 한 순간이라도 살 수 없다는 남녀 간의 이성적인 사랑, 에로스도 변한다. 자식들을 자기 목숨보다 더 아끼고 사랑했던 부모의 사랑, 바다보다 깊고 하늘보다 높은 사랑으로 비유되는 부모의 사랑 스톨케도 상황에 따라 변한다. 그리고 태어날 땐 서로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 태어났어도 죽을 땐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죽자던 도원결의의 친구의 사랑, 필레오도 변한다. 그래서 육신적이고 가시적이며,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사람의 사랑은 상황환경 따라 변하기 때문에 100% 신뢰할 수가 없다. 심지어 때로는 하등동물 짐승보다도 못한 추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지구상에 변하지 않는 유일한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 영원한 사랑,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의 사랑뿐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스스로를 자랑하는 진실함의 촉수(燭數)는 어떤가? 같은 빛이라도 전기뱀장어(Electric eel)의 촉광과 바다 속의 원생동물 야광충(夜光蟲)의 불빛과 개똥벌레 반딧불의 촉광이 다르고, 등잔불과 전등불의 촉광이 다르며, 전등불 중에서도 50, 100, 200, 1000와트 전구의 촉광이 각각 다르듯 사람마다 진실함의 촉수가 같지 않다. 아담의 범죄 이후 죄에서 태어나는 인간의 진실함은 도토리 키 재기식의 진실일 뿐이다. 100, 200, 500와트 전등불빛의 차이처럼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자연인에게 완전하고 영원한 진실(眞實)은 없다. 따라서 1000와트 전등 만 개, 10만 개를 공중에 올려놓는다고 태양만큼 빛과 열기를 지구촌에 보낼 수 없듯, 도덕과 수양이 뛰어난 사람 천만 명의 진실을 모두 합친다 해도 하나님의 영원한 진실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이렇게 인간의 진실함과 신실함은 유한하고 제한적이며 가변적이다.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그래서 믿고 신뢰할 수가 없다.

지구상에서 하나님의 진실하심만 영원하고 그분의 진실하심만 변함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성도,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경험한 성도들은 하나님처럼 사랑 자체는 못돼도,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달과 거울처럼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을 자기가 경험한 것만큼 반사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아낌없이 자신의 시간과 물질, 삶과 운명 그리고 자신의 생명까지 드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주기도문교회가 우리를 향하신 야훼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함을 경험하고 깨달아 세세토록 야훼하나님을 찬양하는 거룩한 교회가 되길 축원한다.

                 야훼의 인자(仁慈)하심과 진실(眞實)하심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라”(Praise the Lord, all nations)로 시작되는 본문 시편 117편은 50장의 창세기, 4장의 말라기 등 구약의 929장과 28장의 마태복음, 22장의 계시록의 등 신약의 260장, 총합계 1189장이나 되는 성경의 장중에서 가장 짧은 장이다.

“여호와를 찬양하라”(Praise the Lord)는 히브리어로 “할렐루야”(Praise ye Jah)로서, 구약에서는 시 104: 35에서 처음으로 사용됐다. 성령 충만한 성도들이 서로 인사할 때나 은혜를 받고 기뻐할 때, 원수가 갑자기 망했을 때나 나를 대적하던 자가 망했을 때, 나나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나도 모르게 ‘할렐루야’가 입에서 함성처럼 나오듯이 탈무드나 미드라쉬에서는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뒤집어엎어 타도하거나 전복시킬 때와 연결시켜서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 ‘할렐루야’를 소리 내어 외쳤고 신약 최초의 ‘할렐루야’도 악한 자들을 심판하실 때와 연관됐다(The Talmud and the Midrash call attention to the fact it is connected with the overthrow of the wicked. The first Hallelujah in the N.T. is also connected with judgement on the wicked; 계 19: 1-2)  따라서 ‘할렐루야’는 승리의 찬양, 감사의 찬양, 하나님을 높이는 칭송의 찬양이다.

시편에서 ‘할렐루야 시’(Hallelujah Psalms), ‘할렐시’는 104: 35을 시작으로, 105: 45, 106: 1, 48, 111: 1, 112:1, 113: 1, 9, 115: 18, 116: 19, 117: 2, 135:1, 21, 146: 1, 10, 147: 1, 20, 148: 1, 14, 149: 1, 9, 150: 1, 6 등 15편이나 된다. 그중에 야훼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찬양하라고 촉구하는 시편 117편, 전체가 다섯 (5)연으로 이뤄져 있는 짧은 단연시(單聯時)면서 우주적인 찬양의 호소가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본문은 “할렐시”이면서 “메시야 찬양시”이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讚揚)하며
너희 모든 백성(百姓)들아, 저를 칭송(稱頌)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仁慈)하심이 크고
진실(眞實)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편저자는 지상의 모든 나라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강조한다. 심지어 저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에게까지도 찬양을 요청하는데 이것은 구약시대에도 이방인의 구원이 선포됐음을 의미한다. 지상의 모든 나라, 지구촌의 모든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초청하는 본문은 ⑴ 1절에서, ‘찬양에 대한 권고’와 ⑵ 2절에서, ‘찬양의 이유’로 짧게 구성됐지만 시 117편이 주는 교훈은 우주적 교훈이다.

먼저, 모든 나라들의 찬양초청이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겐 혁명적인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고 유대인으로 개종하지 않는 한 결코 하나님을 경배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애쓰는 수백 년 동안 나머지 열방들은 인간이 만든 우상을 숭배했다. 그런데 본문에서 시인은 ‘모든 민족과 나라들의 찬양초청’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이방인들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질 것을 예언하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 나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예수 안에서 거저 받은 하나님의 은혜다. 그것이 바로 성탄절의 의미이다. 하늘 영광 버리시고 지구촌에 오신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과 딸 된 것을 감사하는 성도는 크게 ‘아멘’ 하자.

그다음, 찬양의 근거이다. 시편저자는 인간이 하나님을 찬양해야할 이유를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에서 발견했는데 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다. 하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살리시고 구속하셨고(암 5: 12) 이미 죄와 허물로 죽었던 당신과 나를 살리셨으니(엡 2; 1)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다. ⑵ 하나님의 진실하심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끝까지 지키신다. 비록 유대인들이 불순종하고 반역하여 약속의 대열에서 이탈했었어도 하나님은 메시야를 보내시겠다는 언약을 성취하셨다. 따라서 비록 인간은 불순종해 반역하고, 변덕스럽게 약속을 파기하고 멀리 도망쳤어도 하나님은 성경에 기록된 1260개의 약속을 지키셨고, 지키고 계시며 또 지키실 것이며, 우리 각자에게 주신 언약들까지도 반드시 이루시고 성취하실 진실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성탄절이 되기를 축원한다.

   1.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
     God's merciful kindness(God's loving-kindness) and the truth

하나님의 인자, 헤세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끝까지 지키시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하므로 버림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여 저주를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신 약속의 말씀 때문에 마지막까지 최대한으로 참고 기다리심으로 인자와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진실하심, 에메트는 “영원히 지속되는 하나님의 신실함”으로 아브라함과 사라가 반복적으로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하나님의 신실함과 미쁘심’을 믿었던 부부에게 약속을 지켜 아들을   낳게 했듯 끝까지 당신의 언약을 지켜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인자를 베푸시는 것과 사람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인자를 베푸시는 것이 있고, 하나님의 진실하심은 일방적으로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자하심을 베푸실 때,

   ⑴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과 호의를 베푸신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을 쏟아 부어 심판하실 때, 롯이 소돔에서 머뭇거리고 지체하자 천사들이 강제로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이끌어 성 밖으로 끌어내 유황불 심판을 모면케 한 것을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다’(The Lord being merciful unto him. They brought him out, and put him outside the city; 창 19: 16)이라고 했다. 마지막 위기에서 건져주심, 마지막 순간까지 도움의 손길로 역사하심, 절체절명의 사고위험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게 하심, 전쟁터나 화재사고, 기차탈선사고, 자동차 추돌사고 같은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탈출케 하거나 마지막 생존자로 살아남게 하시는 것, 그래서 환난 날에 피난처가 돼주시는 것(시 59: 16), 내가 미끄러질 때(위기를 만날 때) 나를 붙잡아 주시는 것(시 94: 18) 내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해 주시는 것(시 103: 4) 이것이 야훼하나님의 인자이다. 야훼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 삶의 현장에 날마다 함께 하기를 축원한다.
 
   ⑵ 사람에게 친절한 사랑과 호의를 받게 하시는 것

모세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시므로’(The Lord showed him mercy)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했다”(창 39: 21-22절)고 했고, 익명의 시편저자는 “저희를 위하여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많은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켜 저희로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다”(시 106: 45-46)고 하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에게 임할 때, 사람에게 잘 보여 일이 잘 풀리고 심지어 원수들에게까지도 불쌍히 여김을 받게 하신다고 했다.

미국비자 받는 일이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웠던 1974년, 실제로 목사 열 명 이 비자를 신청하면 9명은 비자 Reject를 당하던 때에 비자를 받은 것과 1982년 시민권 인터뷰 때에 준비해간 문제는 하나도 묻지 않고 교회 이야기 몇 마디 나누다가 시민권을 받은 것, 4년 5년 7년 동안 이민비자를 못 받은 세 목사가족문제로 미대사관의 영사를 찾아가 만났을 때, 영사가 ‘늦어서 미안하다’며 그 자리에서 사인을 해주고 내주는 영주권들을 받아서 세 가족에게 전달해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었다(그 중 한 사람은 7년 동안에 5천만 원 이상 변호사비를 썼고  8번 이상 거절을 당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다).  

   ⑶ 거듭되는 죄에도 형벌을 연기하고 버리지 않으심

회초리를 든 부모 앞에 납작 엎드려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비는 자식에게 인자를 베풀어 죄의 형벌을 연기하듯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들에게 들었던 몽둥이를 내려  놓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다(민 14: 18-19, 느 9: 17, 시 145: 8) 그리고 회개하는 자의 죄과를 도말해 주시고(시 51: 1) 나의 실수와 부족함을 사유해주시고 내 영혼을 음부에서 건져주시는 것(시 86: 5, 13)이다. 우리 중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하나님이 분노하셔서 몽둥이와 채찍을 들었다가 우리가 회개하고 뉘우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인자를 베풀어 몽둥이와 채찍을 내려놓으신 경험을 한두 번 아니 여러 번 경험한 성도들이 있을 것이다. 그중에 김목사가 단연 제일 많을 것이다. 거듭되는 나의 죄를 회개할 때마다 용서하시고 인자를 베풀어 주신 야훼하나님을 나와 함께 찬양하고 사랑하자.

   ⑷ 주의 성전에 들어가 주를 경외하고 경배하게 하심

다윗은 시 5: 7에서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고 고백했고, 6: 4에서는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라 고백했으며, 13: 5에서는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겠다”라며 야훼하나님을 찬송했고, 23: 6에서는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라”고 고백했다.

오늘 우리가 집에 있거나 여행 중에라도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고 언제라도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며 찬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었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낙심과 절망과 죄에 빠진 나의 영혼을 건져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것(시 31: 7-8, 16, 21)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이며, 주의 성전을 찾아가 기도할 때마다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는 것(시 66: 20, 69: 13, 16)도 그리고 내 마음이 주의 구원을 기뻐하는 것도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했기 때문이라는 다윗의 고백이다. 그 끝이 없는 주의 인자하심, 넘치고 또 넘치는 풍성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뢰하고 찬양하며 경배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⑸ 모든 원수를 이기게 하심

만승천자 시성(詩聖) 다윗은 자기를 치는 원수들이 사면초가로 둘러싸고 있을 때,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 것이다(He will send from heaven and save me)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실 것이라”(시 57: 3)고 고백했고, “나의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내 원수의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실 것이라”(시 59: 10)고 고백했으며, “하나님께서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자신을 보호해 달라”(시 61: 7)고 부르짖었고,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해 달라”(시 143: 12)부르짖었다. 또 다른 시편저자는 시 118편(1, 2, 3, 4, 29)과 136편(1-26)에서 모든 원수들을 이기게 하신 야훼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하라고 노래했다.

그렇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나와 함께 하시면 모든 원수를 정복하는 기적이 있다. 모든 경쟁자를 뛰어넘는 축복이 있고, 모든 대적들을 이기는 축복이 있으며, 뒤에서 맹렬하게 나를 추격하는 원수들과 앞에서 숨어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원수들까지 이기게 하시는 축복이 있다. 주의 인자와 진리로 모든 원수들을 이기고 정복하며 뛰어넘는 축복들을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한다. 

   ⑹ 근심 중에서 부르짖는 기도를 응답하심

시편 107편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것을 찬양해야 하는 46가지 이유를 들어 노래한다. 그 중에 28가지 이유는 인간이 각양각색의 근심 중에서 부르짖어 기도할 때 고통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들에 대한 찬양이고(1-7, 8-14, 15-20, 21-30) 나중 18가지 찬양의 이유는 부자와 가난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찬양하는 것(God's works of providence to rich and poor; 31-43절)이다.

나의 짧은 목회 중에서 셀 수 없는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문제에서 남편, 자녀, 사업의 문제, 신앙문제, 이웃과의 돈 문제, 애정문제로 잠 못 이루며 고민하고 근심, 걱정으로 괴로워하면서, 그 근심 중에서 새벽기도로 부르짖고, 철야기도로 부르짖으며, 금식기도로 부르짖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기이한 도움을 받아 문제해결을 받은 사람들을 보았다. 오늘도 이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하심은 현재진행형이다. 끝난 일이 아니다. 근심 중에서 부르짖어 간구함으로 기이한 도움으로 문제해결을 받는 역사들이 일어나기를 축원한다.
      
   ⑺ 요동치 않게 하심

다윗이 지은 시편 20편은 전쟁을 위한 기도의 시(詩)이고, 21편은 전쟁승리를 감사한 시이다. 전쟁을 이긴 다윗은 시 21; 7에서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극히 높으신 자의 인자함으로 요동치 아니하리이다”(Through the mercy of the most High he shall not  be moved)라고 고백한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인자함으로 원수들의 공격이 있었지만 나라가 흔들리지 않았다는 고백이며, 자기 왕위가 요동치 않았다는 고백이다. 그렇다. 당신의 사업과 사회적 지위와 지금까지 쌓아올린 업적과 명성과 명예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야훼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십년 이십년 오십년 아니 평생 동안 쌓아올린 공든 탑 같은 탄탄한 명성과 명예가 쓰나미에 빌딩이 무너지고 바닷물에 모래성 무너지듯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있는가? 그래서 성경은 “주를 아는 자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하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풀어 달라”(시 36: 10)고 했으며 다윗은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시 40: 11)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 인자하심을 더하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항상 보호해 주신다. 하나님을 알되 사랑의 하나님만 아는 자가 아니라 악과 불의를 징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까지 아는 자에게 인자하심을 더하시고 그분의 인자와 진리를 구하는 자를 보호해 주신다. 하나님이 지키시므로 신앙과 가정과 사업과 직책과 명예까지 요동치 않는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⑻ 진실함으로 장가드시는 하나님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 2: 19-20)

과거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결혼한 부부관계였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그 부부관계는 깨졌고 이스라엘은 이혼 당한 여인, 버림받은 여인이 됐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다시 부부관계가 되겠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천년왕국 때에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한다. 대환난 때에 이스라엘이 수천 년 동안 지은 모든 죄를 Holocaust를 통해 징계 받으면서 그들이 회개하고 민족적인 구원을 받아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때를 의미한다.

이사야는 천년왕국 때에 이스라엘 땅을 “나의 기쁨은 그녀 안에 있다”는 뜻의 헵시바로, 이스라엘 민족을 “결혼한 부인”이란 뜻의 쁄라(Beulah)라고 부를 것이라 예언했는데(사 62:4-5) 호세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장가드는 것으로 말했다. “장가들어”란 히브리어 아라스는 이스라엘을 간음하므로 이혼 당했던 불결한 여자로 생각하지 않고, 순수한 처녀로 인정하여 새로운 결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한 재혼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뿐 아니라 신분의 회복까지를 의미한다. 그만큼 천년왕국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다.

이 결혼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결혼에 대한 지참금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⑴ 의(In righteousness)로 결혼하심이다. 의(義), 체데크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으로 주관적이고 내적인 공의를 가리킨다. ⑵ 공변됨(In judgment)으로 결혼하신다. 공변됨이란 미쉬파트는 사사롭지 않고 공평정당한 객관적이고 정의로운 판단을 말한다. 천년왕국은 의와 공변됨의 나라가 될 것이란 뜻이다. ⑶ 은총(In lovingkindness)이다. 은총은 인자함과 같은 히브리어 헤세드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하나님의 친절과 사랑으로 계약의 의무들을 신실하게 지키는 충성을 가리킨다. ⑷ 긍휼히 여김(In mercies)이다. 긍휼(矜恤), 라하밈은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부드러운 자비와 동정심을 의미한다. ⑸ 진실함(In faithfulness)이다. 진실함의 에무나는 흔들리지 않는 신뢰와 불변하는 성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영속적인 성공을 보증하는 야훼하나님의 신실함을 의미한다.

그렇다. 천년왕국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과 진실함으로 장가드신다. 그래서 천년왕국은 인류역사상 가장 공의로운 왕국, 끊임없는 하나님의 친절과 사랑이 계속되는 왕국,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부드러운 자비와 동정심이 천년 동안 계속되는 나라,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신뢰와 변치 않는 하나님의 성실과 신실함이 천년 동안 계속되는 주님의 나라가 된다. 상천하지에 어떤 신, 어떤 영웅, 어떤 성자, 어떤 인간이 자기를 버리고 다른 남자 품에 안겼던 여자를 용서하고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과 진실함으로 그 여자에게 장가를 들 수 있을까? 아무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환난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민족적인 이스라엘과 적그리스도와 맞서서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살아남아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을 아내로 맞아 결혼해 주실 것이다. 그 영광의 날을 맞는 성도들이 우리 중에서도 많이 나올 수 있기를 축원한다.

   ⑼ 하나님의 언약이 변치 않음

사 54: 10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But My kindness shall not depart from you)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Neither shall the covenant of My peace be removed)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다.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란 말은 기왕에 너희에게 준 인자함의 헤세드 언약을 끝까지 지킬 것이란 의미이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을 옮기지 않겠다“는 말씀은 겔 37: 24 -26에서 약속한 대로 “내가 이미 너희에게 한 언약, 내가 너희를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너희 가운데 세워서 다윗의 위를 이을 한 왕이 너희를 통치할 것이라”는 언약을 의미한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지상 재림으로 세상에 세워질 천년왕국의 언약을 가리킨다. 이 천년왕국 언약은 산들이 떠나고 작은 산들이 옮겨질지라도 반드시 지켜질 것이란 말씀이다. “산(山)들이 떠나고 작은 산들이 옮겨질지라도”(For the mountains shall depart, and the hills be removed)란 말은 예수께서 천군천사와 부활성도 휴거성도를 데리고 지상으로 오실 때, 예루살렘 맞은 편 언덕 감람산으로 오시는데, 예수님이 감람산에 서실 때,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면서 감람산은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지고 산의 반은 북쪽으로 옮겨가고 반은 남쪽으로 옮겨가고 가운데는 큰 골짜기를 이루는데 예루살렘성전으로부터 흐르는 생명강물이 그 골짜기를 흘러가며 생명수강이 되고 그 물이 남쪽으로는 사해를 출구 삼아 사막으로 흘러가고 서쪽으로는 지중해로 흘러들어가 오염된 전 지구를 살아나게 할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산들이 떠나고 작은 산들이 옮길 것이라’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This will be fulfilled literally, for the mount of Olives will be spilt and removed along with other mountains and hills at the 2nd advent of Christ and when God makes an outlet to the Dead Sea(10절, 겔 47장, 슥 14: 1-5)

예수님이 다시 오셔야만 하나님이 지구촌인류에게 약속한 공의의 나라가 세워진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야 성경의 모든 약속이 모두 다 성취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지상 재림과 그분의 나라 천년왕국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결정이며 극치이다.
      
   ⑽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심(렘 31: 3-4, 33: 11)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범죄하므로 전 세계에 흩어져 살게 된 디아스포라 이스라엘, 2700년 동안 나라 없는 민족으로 전 세계에 유리방황하며 온갖 박해를 다 받아온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신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칠년대환난에서 이스라엘이 당시, 지구상의 유대인 ⅔(대략 1500-1700만; 슥 13: 8-9절)이 학살을 당하는 Holocaust후에 그들이 국가적으로 회개하므로 민족적인 구원을 받아 천년왕국에 들어가므로 이스라엘이 다시 세움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그 스펙터클한 역사의 파노라마를 안고 살아온 이스라엘, 파란만장하고 부침과 굴곡이 많았던 이스라엘이 마침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새 역사 위에 다시 세움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란 말이다. 그리고 2000년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마지막 칠년대환난을 믿음으로 이긴 성도들을 세워주시는 것이 야훼하나님의 인자하심인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힘입어 주의 날에 주의 나라에서 세움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2. 하나님 사랑의 종결, 성육신

시편저자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함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함의 구체적인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성탄(聖誕)이다. 물론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은 마지막까지 호의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것에서 천년왕국에서 이스라엘과 성도들을 다시 세워주시는 열 가지로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함의 종결,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의 마지막 결정(決定)은 예수님의 성육신이다. 이것이 성탄절의 의미이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하늘의 영광을 다 포기하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의 성탄이 없이는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함의 열 가지 표적들이 다 나타나거나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해도 성탄절의 참의미는 없다. 그래서 예수 없는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 예수 없는 성탄절은 그림자를 붙잡는 헛된 일이다. 이 성탄절에 예수님이 당신 마음에 왕으로 태어나는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2000년 전, 첫 번째 성탄절에 예수님을 만나 그분께 경배한 사람들은 ⑴ 들판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이었다(눅 2: 8-14) 하늘에 천군천사들이 예수님 성육신의 성탄을 제일 먼저 알려준 사람들은 목자들이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도 아니었고, 산헤드린의 정치가들도 아니었으며, 왕이나 타락한 선지자나 제사장도 아니었다.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이었다. ⑵ 성령이 그 위에 계셨던 예루살렘의 시므온이었다(눅 2: 21-35) 성령과 교통했던 시므온, 성령의 지시를 받았던 시므온이었다. ⑶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던 여선지자 안나였다(눅 2: 36-39) ⑷ 하늘의 징조를 연구하며 하늘의 뜻을 기다렸던 동방박사들이었다(마 2; 1-12)

2000년 전,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성육신은 성탄이란 단막극으로 끝난 사건이 아니다. 성탄은 지구촌을 향한 하나님의 대서사시의 시작이다. 성탄은 예수님의 성육신에서 삼년 반의 공생애와 십자가의 죽으심, 사흘 만에 부활하심과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 그리고 세상종말에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천년왕국을 세우시는 것까지가 성탄의 Providence(섭리)며 Panorama(전경)이다. 그 예수님의 성탄은 예수님의 부활승천에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까지 진행됐다. 이제 마지막 남은 성탄의 Finale는 예수님의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이다.

2000년 전, 예수님의 성탄을 맞았던 사람들은 2000년 후 종말시대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을 성도들의 예표이다. 첫 번째 성탄을 맞았던 사람들은 예루살렘 왕성의 헤롯이 아니었다. 성경을 지식적으로만 연구하고 알아서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Where Christ should be born?) 묻던 헤롯에게 “유대 땅 베들레헴이니, 이는 성경이 그렇게 예언됐기 때문이라”고 앵무새처럼 답변한 대제사장과 서기관 같은 종교지도자들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민족을 해방시킬 메시아로 믿고 기다리던 열심당원 종교가들도 아니었다.

⑴ 들판에서 밤중에 자기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이었다. 데스뉰토스, “밤을 새워가면서”, 필리쏜테스 “양들을 파수하며 지킨” 목자들(눅 2: 8)이었다. 자기들에게 맡긴 성도들의 영혼을 밤을 새워가며 지키고 보호하는 주의 종들이다. 다시 오실 주님은 이런 종들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부르시며 그들이 수고한 대로 상급을 주실 것이다. ⑵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예루살렘 시므온이었다(눅 2: 25) 의롭게 살고 경건하게 사는 주의 종들과 성도,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주의 종들과 성도들, 이런 성도들이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성도들이다.

⑶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주님을 섬겼던 여선지자 안나였다(눅 2: 36-39) 어떤 일이 생겨도 성전을 떠나지 않는 성도, 주야로 금식하는 성도, 아침과 저녁으로 기도하므로 주님을 섬기는 성도가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맞을 수 있는 성도다. ⑷ 하늘의 것, 위엣 것을 생각하며 하늘의 징조를 예의주시하는 동방박사들 같은 성도들이다(마 2; 1-12)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골 3: 2-4)고 했다.

20세기 전, 첫 번째 성탄의 네 주역인 들판의 목자들처럼, 예루살렘의 시므온처럼, 바누엘의 딸 안나처럼, 저 동방의 박사들처럼 마지막 종말시대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찬양하면서 살다가 성탄의 마지막 무대장면인 예수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을 복되게 맞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천년왕국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찬양하고, 새 하늘 새 땅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영원토록 찬송하며 사는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김엘리야 목사(워싱톤주기도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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