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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09월21일 21시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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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조심하라(II)
            스스로 조심하라(II)      눅 17: 1-4절

2013년의 마지막 달을 보내면서, 복잡다단했던 금년을 유종의 미로 거두고, 2014년을 새롭게 사는데 도움이 될 “부부를 하나로 만드는 일곱 가지 법칙”을 소개한다. 부부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부부가 서로 하지 말아야 일곱 가지 규칙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C자로 시작돼서 “7 C 법칙”이라고 부른다. ⑴ Don't Compare. (“결코 남과 비교하지 말라”)이다. 통계학적으로 남자가 결혼을 후회하는 때는 결혼식을 마치고 친구들과 기념촬영을 할 때라고 한다. 결혼식준비에 정신없이 뛰어다닐 땐 몰랐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신부 친구들 중에 자기 부인보다 훨씬 예쁘고 아름다운 여자가 있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여자들은 남자보다 먼저 결혼에 후회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남자로부터 청혼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란다. 남자들이 청혼하면서, 반지를 선물하는데 바로 그때 여자들 마음속에 ‘혹시 다른 남자는 이것보다 더 크고 비싼 반지를 주지 않을까 하는 비교의식이 생긴다고 한다. 그때부터 싹트는 비교의식은 사사건건 결혼생활 내내 갈 수 있는데 그래서 정말로 부부가 하나 되고 행복하게 살려면 Don't compare(남과 비교하지 말라)는 것이다

⑵ Don't Curse(절대로 저주하지 말라) “당신은 항상 그래. 당신은 가망이 없어. 당신 생각은 고작 그거야? 당신은 결코 발전이 없다” 등 “당신”이란 말로 대화를 시작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 이유는 ‘당신은’ 이란 말은 통례적으로 상대방을 판단하는 말투여서 불쾌감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나”(I, 아이)라는 말로 대화를 시작하는데. 상담학에선 이것을 “I(아이) 메시지”라고 한다. 예를 들면, “나를 당신이 도와줘야겠어. 나는 당신으로부터 이런 것이 필요해.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등이다. ⑶ Don't Command(절대로 명령하지 말라) “내 말대로 해라.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나를 따라오라” 등 상대편 인격무시의 명령이나 힘으로 논쟁을 끝내려고 해선 안 된다. ⑷ Don't Challenge(결코 도전하지 말라) 부부가 서로 ‘할 수 있으면 해보라, 해 볼 테면 해보라’는 식의 도발적이고 자극적인 언어를 삼갈 것이다. 어떤 것을 ‘하지 말라’고 하면 반항하든지 그것을 꼭 하고 마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⑸ Don't Contempt(결코 상대방을 경멸하거나 업신여기지 말라) 상대방을 깎아 내리지 말 것이며, 편견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부부는 상대편의 약점이나 부족한 것을 들춰내 모욕하거나 멸시하거나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상대방을 깎아 내리거나 판단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행동하는 자기교만’이다. ⑹ Don't Contradict(절대로 상대방의 말을 반박하지 말라) 상대가 말하는 도중에 그 말을 가로막거나 부정하거나 반박하거나 반대하지 않는 것이다. 보통사람은 일분에 150개의 단어를 입으로 말할 수 있고, 귀로는 650개의 단어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대화중 일분사이에 500개 단어가 마음을 맴도는 지루함이 생긴다. 이 말은 우리가 상대방의 말을 들을 때, 이미 내가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경솔하게 상대편이 말하는 것을 가로막거나 반박하는 실수를 하고 자기 말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훈련되고 성숙한 사람은 상대편의 말을 끝까지 잘 경청한 후 자기의견을 표현하는데 그런 부부는 ‘언로가 뚫린, 하나가 된 부부’이다. ⑺ Don't Confuse(절대로 당황스럽게 하거나 혼란시키지 말라) 말로 상대편을 혼동시키거나 갈피를 잡지 못하게 혼란에 빠트리지 않는 것이다. 부부 대화중 자신이 불리해질 경우, 엉뚱한 말로 화제를 바꿔 의도적으로 대화를 혼동시키지 않아야 부부사이에 갈등이 해소되고 부부가 하나가 된다.

‘부부를 하나로 만드는 7C 법칙’은 부모가 자식 부부사이에 끼어들어 일일이 간섭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실력 있는 전문상담자나 권위 있는 Mentor들이 해결해 줄 문제도 아니다. 부모나 상담자나 Mentor나 친구는 조언자일 뿐 마지막의 모든 것은 남편과 아내, 부부스스로가 결정할 문제며 두 사람스스로가 해결할 문제이다. 그렇다. 마지막 몫은 내 스스로, 부부스스로의 몫이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승리, 믿음의 축복, 성령이 충만한 은혜생활도 여러분 스스로에게 달렸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길을 안내해주는 Leader와 Guide, Mentor일 뿐 최종결정자는 여러분 스스로이다. 오늘 나는 전주일(前 主日)에 이어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II)” 두 번째 말씀으로 은혜를 나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각자자신의 자유의지를 따라서 ⑴ 스스로 헌신(獻身)하라(Consecrate Yourselves; “네 자신 스스로를 봉헌하라, 네 스스로를 하나님께 바쳐라”; 출 32: 29)고 하셨고 ⑵ 네 스스로를 성결케 하라(Sanctify Yourselves; 수 3: 5)고 하셨으며 ⑶ 스스로를 하나님의 도구, 의의 도구로 드려라(Yield Yourselves unto God; 롬 6: 13, 16-23)고 했다 ⑷ 네 스스로를 조심하라(Take heed to thyself; Watch Yourself; 눅 17: 3)로서 성도들이 삼갈 것, 조심할 것을 열 가지로 말씀했고 ⑸ 스스로 하나님께 순복하라(Submit Yourselves to God; 약 4: 7)고 하셨으며 ⑹ 스스로 주 앞에서 자기를 낮추라(Humble Yourselves in the sight of the Lord; 약 4: 10)고 경계하셨고 ⑺ 스스로를 거룩한 믿음 위에 건축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스스로를 지키라(Building up Yourselves on your most holy faith and Keep Yourselves in the love of God; 유 1: 20-21)고 말씀하셨다.

오늘도 거기에 계속해서, ‘내 자유의지를 어느 쪽에 순종해야 하는가? 내가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길은 어떤 길이며, 내 스스로 선택할 것은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본다. 오늘 “김 엘리야목사야, 너의 자유의지(自由意志)는 반드시 이것을 선택해야 한다, 이장로 박권사야, 어떤 일이 있어도 너는 이것을 따라야 한다, 네가 사는 길은 네스스로 이것을 선택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명령의 말씀은
  
   ⑴ 실족(失足)을 ‘스스로 조심하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容恕)하라 하시더라”(눅 17: 3-4)

본문은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지 말고 네 자신스스로도 실족되거나 실족 당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실족케 하는 것”(Offenses: “범죄,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함”), 스칸달론은 원래 새나 짐승을 잡기 위해 쳐놓는 “덫이나 올무나 파놓은 함정”을 가리키는 말로,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모든 행위와 걸림돌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네 이웃이 네게 죄를 짓고 회개하면 용서하라. 용서하지 않으면 그것이 그를 실족케 할 수 있고, 그것이 네 자신을 실족케 할 수도 있다’고 하셨다.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 그 마음에 천국을 소유한 성도는 누구나 예수님께 대해 무한한 용서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기 때문에 타인에게도 동일한 사랑을 베풀어야 할 빚을 지고 있다. 그래서 내가 이웃을 용서하지 않는 것 때문에 이웃이 실족치 않을까 조심할 것이고, 내 스스로가 실족치 않기 위해 조심할 것이란 말씀이다.

“조심하라”(Take Heed to Yourselves), 프로세코는 “어떤 일에 대해서 몰두(沒頭)하는 것”으로 이웃과 자신이 실족치 않도록 항상 자신을 살피는데 전력을 다하라는 뜻이다. 내가 하는 무의식적인 말이나 나의 작은 행동에서라도 이웃과 자신이 실족치 않게 스스로 조심하는 것은 성도의 지혜로운 생활의 열매이다.
 
   ⑵ 스스로 돌이키라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 18: 32)

에스겔 18장은, 이스라엘백성이 현재 당하고 있는 바벨론포로생활은 이스라엘백성들 각 개인이 스스로 지은 죄 때문인 것을 분명히 하고 응분의 책임을 묻는 것이다. 이런 특성을 담고 있는 본장은 내용의 흐름에 따라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① 죄에 대한 모든 책임은 죄를 지은 당사자가 담당하는 것이다(1-4절) ② 의로운 삶에 대한 책임은 당사자가 지지만, 그것이 자기 아들을 구원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5-13절) ③ 아버지가 악을 행하더라도 아들이 의를 행하면 살 수 있다(14-20절) ④ 악인이 자기가 지은 죄를 회개하면 죄에 대한 책임이 없어지고 의인이 되지만 그가 현재 의로운 삶을 살지 못하면 과거의 의로운 생활도 구원조건이 될 수 없다(21-29절) ⑤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기 때문에 구원을 받으려면 각자 스스로가 회개해야 한다(30-32절)

스스로 돌이키고 살라!(Turn Yourselves, and live) 그렇다. 죄인이 사는 길과 악인이 사는 길, 버림 받은 자들이 사는 길은 스스로 죄를 회개하고 사는 것이다. 죄인과 악인이 파멸의 구덩이에서 살아나올 수 있는 길은 스스로 돌이키고 사는 것이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해 의인이 됐다가 타락하여 지금 죄 가운데 빠져 살고 있다면, 그가 사는 길도 스스로 회개하고, 스스로 돌이키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죄에서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는 길 뿐이다.

‘스스로 돌이키고 사는 것’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다. 나를 낳아준 나의 부모도, 내 속에서 태어난 나의 자녀도, 한 배에서 태어나 피를 함께 나눈 형제자매 나의 혈육도, 그리고 40년 50년 70년을 동고동락하며 함께 살아온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도 내 영혼을 살릴 수가 없다. 천하보다 귀중한 당신영혼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스스로일 뿐이다. 당신이 영원히 살기 원한다면, 당신이 영생을 얻기 원한다면 당신스스로 돌이켜 회개하라! 자신의 자유의지로 돌이켜 회개하므로 영생을 누리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한다. 

   ⑶ 스스로, 강하고 담대(膽大)하라.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 27: 14)

신명기 31: 6-7에서, 120세에 자기 사명을 끝내고 임종을 앞둔 모세는 자기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영도할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너는 강하고 담대(膽大)하라”고 두 번이나 권면했고, 지금까지 이스라엘과 자신에게 태양같이 큰 존재였던 Big Shot(거물) 모세, 누구도 넘을 수 없는 Big Bug(실력자, 거물) 모세와 비교할 때, 조족지혈인 자신을 보면서 한없이 작아지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네 번이나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셨으며(신 31: 23, 수 1: 6-9) 죽은 모세를 이어 자신들을 영도할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백성들은 “오직 당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라”(Only be strong and courageous; 수 1: 18)고 그를 격려했다. 그다음 여호수아는 자신과 함께 가나안 정복전쟁을 치루는 군장들에게 “강하고 담대하라”(수 10: 25)고 독려했고, 다윗은 역사에 전무후무한 웅장하고 장엄한 성전을 건축하려는 아들 솔로몬에게 두 번이나 “강하고 담대하라”고 권면했으며(대상 22: 13, 28: 20), 앗수르의 침공으로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해 백성들이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히스기야 왕은 “우리와 함께하는 야훼하나님은 저들과 함께하는 육신의 팔보다 크고 강하니,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대하 32; 7-8)고 격려하고 백성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므로 전쟁을 이겼다. 이렇게 스스로 마음을 강하게 하고 스스로 자기 마음을 담대하게 하는 것은 ‘인생을 승리하는 비결’이다.

그다음 시편 27: 14절에서 다윗은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Wait for the Lord) 강하고 담대(膽大)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Be strong, and let your heart take courage. Yes, wait for the Lord)라고 선포했는데 ‘바랄지어다’의 히브리어 카라는 ”간절한 기대감으로 고대하다“란 의미이고, ”강(强)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란 말씀은 ”강하라 그러면 그가 너의 마음을 강하게 하시리라“(네 자신이 마음을 강해지려고 힘쓸 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강하게 될 것이란 뜻)란 의미이다. 따라서 마음이 강하고 담대하려면 나의 자유의지가 강하고 담대해 지려고 스스로 노력해야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강하게 하다”(Be strong; 하자크)는 “손에 힘이 있는 상태”를 가리키고, “담대히 하다”(Be courageous; 아마츠)는 “무릎에 힘이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는 것”은 “마음에 끈을 놓지 않고 용기를 갖고 있는 상태, 나약한 무릎을 보이지 않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늠름하게 서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는 말씀은 매순간 나의 자유의지가 “스스로 강하고 담대(膽大)하려고 노력해야 하나님도 나를 강하고 담대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다”는 말이다. 그렇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내 자유의지가 스스로, 자원해서 강해지려고 노력하고 담대해 지려고 힘쓸 때, 하나님도 우리를 강하고 담대하게 만들어 주신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 될 수 없다. 강하고 담대하도록 힘쓰는 자 되기를 축원한다.

성도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따르는 길은 행복하고 즐거운 길만은 아니다. 고통과 아픔이 있는 십자가의 길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스스로 강하고 담대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스스로 좌절하고 낙심하여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하나님말씀(복음)과 교회와 내가 받은 사명의 길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며 낙심되고 게을러 질 때마다 1991년 이스라엘 성지순례 때에 걸어갔던 예루살렘 비아 돌로로사를 생각하면서 ‘주를 위한 고난’을 감사하며 모든 시련들을 승리한다.

라틴어로 “슬픔의 길”이란 뜻의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는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장소로부터 십자가에 달리신 골고다까지의 약 800m 언덕길을 의미하는데 오늘날은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 슬픔의 길”로 불리며 세계 각처에서 오는 많은 순례자들이 이 길을 걸으면서 은혜를 받는다. 비아 돌로로사 길은 14세기 프란시스코 수도사들에 의해 정해진 길로, 복음서에 근거한 역사적인 길 보다는 순례자들의 신앙적인 길로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는 길이다(역자 주: 성지의 많은 거룩한 흔적(장소와 기념물)들이 성경에 근거한 것보다는 관광(돈 벌기)을 위해 지정된 것이 많다. 비아 돌로로사도 그 중에 하나이지만 나는 성경의 기록을 생각하며 은혜를 받았다)

비아 돌로로사에는 14개 지점의 중요한 장소가 있는데, 첫 번째 지점은 비아 돌로로사가 시작되는 장소로,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신 본디오 빌라도 재판정(裁判廷)이 있는 곳이고, 제 2지점은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께 가시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힌 후 조롱한 곳이며, 제 3지점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첫 번째로 쓰러지신 곳이고, 제 4지점은 슬퍼하는 어머니 마리아를 만난 장소며, 제 5지점은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까지 가기 시작한 장소며, 제 6지점은 베로니카가 물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준 곳, 제 7지점은 예수님이 두 번째로 쓰러진 곳, 제 8지점은 예수께서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면서 자기를 따르는 큰 무리의 여인들에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Daughters of Jerusalem, weep not for Me, but weep for yourselves, and for your children; 눅 23: 28)고 말씀하신 곳이고, 제 9지점은 예수님이 세 번째 쓰러지신 곳이다. 그리고 제 10지점에서 14지점은 예수께서 처형당하신 골고다 언덕 위로써, 10지점은 예수님을 못 박기 위해 병사들이 예수의 옷을 벗긴 곳, 11지점은 예수님을 눕혀서 십자가에 대못을 박은 곳, 12지점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곳, 13지점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내려놓은 곳, 14지점은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지낸 곳이다.

성지순례 후 지난 33년의 세월 동안, 고난과 시련이 내게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고, 내 십자가가 너무 힘들다고 생각됐을 때마다, 나는 스스로 비아 돌로로사를 생각하며 강하고 담대하게 고난의 터널을 묵묵히 통과해 왔다.

얼마 전, 미국 장로교단에서 목사 사모 750명에게 “만일 당신이 다시 결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목사와 결혼하겠는가?”라는 앙케트(Enquete) 조사를 했는데 750명 사모 중에서 단 한 사람도 목사와 결혼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데, 같은 질문을 한국 목사 사모들에게 했더니 ⅔이상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단다. 한국 교회 목사사모만큼 힘들고 고생하는 직업도 많지 않은데(매일 새벽기도부터 교회 궂은일은 다 담당하고, (목사는 대접이라도 받지만)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욕만 얻어먹는 직업?) 그래도 그 길을 사명으로 알고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모들 때문에 한국교회가 이렇게 든든하게 서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오늘 여러분 중에 내가 걸머진 평신도사명의 짐이 무겁다고 생각되거든, 오늘 자기신앙 지키는 일이 어렵고 힘이 든다고 생각되거든, 그리고 오늘 낙심과 절망이 쓰나미처럼 나를 덮쳐눌러 일어날 힘이 없거든, 아무 죄도 없는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며칠을 굶으시면서 견디기 힘든 고문을 당하시고, 날카로운 쇠고리들이 달린 채찍을 맞아서 온 몸이 찢어져 피를 흘리시면서 200근이 넘는 무거운 십자가를 등에 지고 채찍을 맞아가며 비아 돌로로사를 걸어 올라가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스스로 강하고 담대하게 하여 모든 시험들을 넉넉히 이기고 승리하기를 축원한다.
                    

   ⑷ 스스로 할례(割禮)를 행하라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렘 4: 4)

날카로운 차돌로 생식기 표피를 잘라낸 할례의 후유증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던 세겜 족속들은 아픔 때문에 저항 한번 못해보고 야곱의 아들, 레위와 시므온이 휘두르는 칼질 살인극에 모두 희생양제물이 됐다(창 34: 24-31) 이것이 의술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구약시대의 할례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기 죄와 그 열조의 죄와 및 그들이 나를 거스린 허물을 자복하고 또 자기들이 나를 대적하였으므로 나도 그들을 대적하여 그 대적의 땅으로 끌어갔음을 깨닫고 그 할례 받지 아니한 마음이 낮아져서 그 죄악의 형벌을 순히 받으면 내가 야곱과 맺은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레위 26: 40-42)고 하심으로 영적 할례가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셨다.

그렇다. 마음 가죽을 베는 할례는 차돌로 생식기표피를 잘라내므로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이제까지 하나님을 떠나 살면서 지었던 자신의 죄와 허물을 스스로 가슴아파하며 그것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그분께 속하는 것이며, 죄악을 징계하는 하나님의 채찍을 순순히 받고 스스로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이다.

모세는 장차 이스라엘과 유다가 하나님께 범죄하므로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당해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시작으로 그들이 전 세계로 흩어져 살면서 모든 나라와 민족들에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며 고통과 박해를 당하고, 마지막 칠년대환난 때에 적그리스도의 박해로 지구촌 유태인 ⅔(슥 13: 8-9절; 대략 1400-1500만)가 대학살을 당한 후, 비로써 그들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마음 가죽을 베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3400년 전에 예언했다.
지구 종말 대환난시대에 있을 이스라엘의 회개와 민족적인 구원은 하나님의 섭리로 성취될 것이니 하나님께 맡길 일이지만, 은혜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서 병들고 파괴된 우리 마음과 육체, 영혼과 생활이 치유 받을 수 있는 것은 ‘자기스스로 할례를 행하는 것’이다. 나 스스로 마음 가죽을 잘라내고 하나님께 속하는 길 뿐이다. 죄악의 형벌을 순히 받고 회개하여 스스로 할례를 행하므로 나를 향해 불같이 일어났던 하나님의 분노가 끝나고, 회개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야훼하나님의 긍휼의 약속대로 하나님이 권고하시는 축복들이 넘치기를 축원한다.    
       
   ⑸ 스스로 정결(淨潔)케 하라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할지어다”(사 52: 11)

본 구절의 일차적인 의미는 70년 바벨론 포로생활을 끝내고 장차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귀환할 때, 오랜 포로생활 중에 몸에 밴 이방종교 의식을 제거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법대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으니, 본토귀한의 대역사 전에 정결의식을 수행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훗날 신약시대에 바울은 본절을 인용해서 성도들이 세상으로부터 나와 모든 세상적인 영향력으로부터 단절할 것을 명령했다(고후 6: 17-18) 그렇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기 위해서는, 벧엘로 올라가는 야곱이 모든 이방신상과 귀고리 장식품들을 다 버리고 자기스스로를 정결케 하고 의복까지 바꿨듯이(창 35: 2-5)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모두 벗어버리고 새사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그리고 본문의 궁극적인 의미는 장차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 받을 정치와 경제 바벨론, 적그리스도의 모든 죄에서 탈출하라는 말씀이다. 사도요한은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 2, 4)고 했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 가운데서 도망하여 나와서 각기 생명을 구원하고 그의 죄악으로 인하여 끊어짐을 보지 말지어다”(렘 51: 6) “나의 백성아, 너희는 그중에서 나와 각기 나 여호와의 진노에서 스스로 구원하라”(렘 51: 45)고 예언했다. 그렇다. 대환난 마지막 때, 성도들이 구원 받는 길은 온갖 더러운 죄와 타락의 소굴인 적그리스도의 바벨론을 탈출해 자기 스스로를 정결케 하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바벨론에서 본토로 귀환하는 자들 중에서 특히 성전의 기구들을 운반하는 제사장들과 레위 인들은 더더욱 스스로를 정결케 해야 했듯(왕하 25: 14-17, 스 1: 5-11, 단 1: 2) 장차 대환난이 끝나고 천년왕국에서 ‘예수님의 모든 소유를 맡을 특별사명의 사람들’(마 24: 47)은 더더욱 스스로 자기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한다.

“스스로 정결케 하라”(Purify Yourselves) 그렇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해 날마다 스스로를 정결케 해야 한다. 하나님의 종들은 더더욱 자기스스로를 정결케 해야 한다. 생각도 언어도 행동도 생활도 정결케 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누구든지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딤후 2: 21)고 했다. 이렇게 자유의지로 성도들이 스스로를 정결케 하는 것은 은혜시대 뿐 아니라, 환난시대에도 그리고 천년왕국시대에도 반드시 필요하다. 스스로를 정결케 하므로 은혜시대와 환난시대, 천년왕국에서까지 축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길 축원한다.

   ⑹ 스스로 도피자가 되라(사 66: 19)

이사야 66장은 천년왕국과 그 후에 있을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예언이다. 그 중에 15-17절은 천년왕국이 끝나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최후심판기록으로 천년왕국에서 죄 지은 자를 심판하시는 내용이다. 여호와께서 불에 옹위돼 강림하셔서 혁혁한 위세와 맹렬한 화염으로 견책하시며 불과 칼로 모든 혈육, 천지창조의 아담 때부터 천년왕국 끝까지의 모든 악인들을 심판하시는데 그때 여호와께 살육당할 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때 야훼하나님께 살육당할 자들은 ‘스스로 거룩히 구별하며 스스로 정결케 하고 동산에 들어가서 그 가운데 있는 자를 따라 돼지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들로 그들이 다 하나님의 심판의 불로 함께 망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수준에서의 거룩함과 정결함으로 스스로를 구별한 것이 아니라 마귀의 유혹을 받아, 자기스스로의 수준에서 거룩함과 정결함으로 구별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

그다음 18-21절은 천년왕국에 대한 기록으로, 하나님이 모으신 열방과 열국족속 중에서 하나님의 심판 받을 자들을 피한 자들, 하나님의 최후심판을 모면할 자들Escapee(도망자들)를 전 세계로 보내어 하나님의 영광을 선파하고 그들로 여호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게 하고 그들 중에서 제사장과 레위 인을 택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하실 것이란 말씀이다.

이 말씀은 난해절로서 ① 대환난 때에 그 환난을 피해 살아남은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해석하는 것과 ② 천년왕국 때에 하나님께 심판받을 죄를 짓는 자들(15-17절의 사람들)을 피하는 자들로 해석하는 것이 있는데, 15-17절이 하나님의 최후심판기록이고, 22-24절도 하나님의 최후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기록인 것으로 보아 전후문맥으로 볼 때, 천년왕국에서 끝까지 스스로 죄를 짓지 않고 무저갱에서 잠간 동안 놓여나와 세상을 유혹하는 마귀의 유혹까지 물리치는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22-24절은 천년왕국에서 끝까지 신앙을 잘 지킨 성도들이 산 채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살 것을 기록한 말씀이다. 이 사람들은 죽지 않고 공중으로 휴거된 성도들처럼 한 번도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산 채로 신천신지에 들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죽음을 보지 않을 성도들은 휴거 성도와 천년왕국에서 끝까지 신앙을 지킨 성도들이다. 만일 우리 중에 90세에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성도가 있다면, 그는 1090세 나이 때에, 한 번도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채 영원한 하늘나라, 신천신지로 가게 된다.

예수님이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부자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나사로를 보고 “나사로를 내게 보내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고, 그것을 거절당한 부자가 “그러면 나사로를 살아있는 내 형제들에게 보내 지옥을 증거하고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 부탁하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어떤 이들의 해석처럼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는 예화가 아닌 실제 이야기다)에서 천국과 지옥이 거리가 먼데도 서로 볼 수 있고, 대화도 할 수 있음을 말씀하셨듯이(눅 16: 19-31) 이사야도 장차 새 하늘 새 땅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지옥에 있는 자들을 볼 수 있을 것을 본문에서 증언했다.

예수님의 증언은 부자와 나사로 두 사람이 죽은 후에 있었던 실제이야기였고, 이사야의 증언은 장차 천년왕국에서 육체를 가지고 산 채로 새 하늘 새 땅에 들어갈 성도들이 지옥의 참상과 그곳에 들어갈 사람들의 실상을 예언한 말씀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천년왕국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들을 스스로 피하라’,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자가 되라”는 것이다. 그래야 천년의 축복을 한 순간의 범죄로 무너뜨리지 않는 사람이 된다. 이것이 ‘스스로 도피자가 되라’는 메시지다. 우리 중에서 천년왕국의 축복을 끝까지 지키므로 새 하늘 새 땅까지 영원한 축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나올 수 있기를 축원한다.

내가 Montgomery County Senior Volleyball Team에 가입해서 금요일마다 6인조 배구를 하는데, 신장 1m 80, 1m 90인 60대 이상의 노인들 팀이지만. 젊었을 때 선수출신들이라 기량이 뛰어나 그들과 운동할 때마다 땀을 많이 흘린다. 한인목사배구팀에서는 내가 연장자에 속하지만 Senior팀에선 젊은 선수로 통한다. 나도 한국 같으면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사람인)지공거사가 됐고, 극장도 경로우대로 반값에 관람할 수 있는 나이지만 아직도 땀을 흘리며 즐겁게 운동할 수 있는 건강을 주신 것과 환경을 주심에 감사한다.

어느 교회 경로잔치에서 “어르신들은 모두 참석하시라” 했더니 70대 초반까지 근처에 얼씬도 않더란다. 경로당에 가면 커피 심부름이나 할 정도로 요즘 60대는 노인 측에 들지도 못한다. 그래서 25세까지는 청년기, 50세까지는 장년기, 75세까지는 갱생기로 하고 76세 이후를 노후기로 정할 정도로 인생의 사이클도 재조정해야 맞을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어떻게 멋있게 늙어갈 것인가가 중요하다.

노인이 지켜야 할 행동원칙 “7 Up 규칙”을 소개한다. ① Clean Up(항상 깨끗하게 씻어라) ② Dress Up(옷을 정갈하게 차려입으라) ③ Shut Up(입을 다물고, 잔소리 하지 않기) ④ Show Up(모임에 잘 나라라) ⑤ Pay up(지갑을 잘 열어라-돈을 잘 써라) ⑥ Cheer Up(기운을 내라-기뻐하라) ⑦ Give Up(포기하라-더 이상 사회의 지도층이라는 감상에서 현실을 직시하라) 이것을 잘 지키면 품위 있게 늙어가고 자식들이나 이웃들에게도 존경받는 노인이 된다는 것이다. 지공거사가 사는 길이다.

지공거사가 사는 법 뿐 아니라 우리 성도들이 인생을 승리하고 신앙을 승리하는 법칙들이 있다. ① 실족치 않도록 스스로 조심할 것이다 ② 어려움을 만날 때, 스스로 돌이킬 것이다 ③ 어떤 환경에서든 스스로 강하고 담대할 것이다 ④ 죄를 깨닫게 될 때, 스스로 마음 가죽을 베고 할례를 행할 것이다 ⑤ 날마다 스스로를 깨끗케 하고 정결케 할 것이다 ⑥ 마지막 천년왕국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도록 스스로 피하는 자가 될 것이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버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살지 말고, 스스로 팔려서 악을 행하던 아합처럼 되지 말고, 자신의 자유의지를 마귀의 유혹에 빼앗겨서 헌금통의 돈을 훔치던 가룟 유다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던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하나님께 의지하며 살았던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바울 바나바 디모데처럼 살아서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큰 그릇 깨끗한 그릇으로 쓰임 받으며 살고, 저 영원한 천국에서도 영생의 축복을 누리며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김엘리야 목사(워싱톤주기도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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