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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09월20일 21시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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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조심하라
        스스로 조심하라      눅 17; 1-4절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 중 하나는 자유의지(自由意志)이다. 자유의지란 기계조작에 의해 움직이는 로버트나 북한강제수용소에 수감된 10만에서 15만 명의 죄수들이 자유를 빼앗긴 채, 짐승처럼 살다가 속절없이 죽어가는 것처럼 기계적인 삶이 아니라 자유롭게 내 맘대로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내가 원하는 대로 갈 수도 있고 가지 않을 수도 있으며,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내 의지대로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으며, 내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내 결정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자유의지는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특권이다.

‘자유의지(自由意志)가 아니었다면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지옥이 생겨날 이유가 없었을 텐데,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셨는가? 역사 이래 지옥불 속으로 떨어져 버린 수백억의 영혼들을 생각할 때, 그것이 과연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란 말인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줌으로써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타락의 역사와 슬픔을 자초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계산착오가 아닐까? 전지전능한 창조주하나님이 어떻게 이와 같은 오산을 할 수가 있을까?...’ 이러한 의문과 논란은 역사를 두고 계속돼 왔다.

1913년 11월 7일, 알제리 몽비드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아버지는 전사하고, 귀머거리 어머니와 빈곤과 고난 속에서 살면서 철학자와 문학가가 돼, ‘이방인, 시지프의 신화, 칼리굴라, 반항적 인간...’등의 책을 써서 44살에 노벨문학상을 받고 60년 1월 4일, 47세에 자동차사고로 죽은 20세기의 엘리트 지성, 알베르 카뮈 같은 철학자는 이러한 문제가 풀리지 않자 “하나님은 없다”며 스스로 무신론자가 됐음을 선포한다. 그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정당화하면 도저히 이 타락세계가 이해가 안 되고, 이 타락한 세계를 정당화하면 하나님은 안 계신 것이 분명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래서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이러한 타락세계를 지었을 리가 만무하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을 무력한 존재로까지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은 없다”고 외친 알베르 카뮈에 영향을 받은 동시대 실존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 10, 15-1900, 8, 25)도 이러한 문제가 풀리지 않자, “하나님은 죽었다”고 폭탄적인 선언을 한다. 그날 이후 오늘까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는 철학자들과 신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주제가 됐을 만큼 자유의지 문제는 인간이 풀기 어려운 난제 중 하나이다.

인간에겐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선과 악, 빛과 어두움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자유의지를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쪽을 선택함으로 인류역사는 타락의 역사가 됐다. 그래서 6천년 인간역사는 전쟁과 투쟁이 끊이지 않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혼란과 비극이 초래됐다. 그렇다면 이 모든 지구촌의 비극과 저주가 하나님의 오판인가? 하나님은 정말 무능력하실까? 아니면 카뮈와 니체의 말처럼 ‘하나님은 없거나 죽은 것인가?’

아니 옳다. 하나님은 오판한 것도 아니고 무능력한 것도 아니며, 안 계신 것이나 죽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세상을 창조하셨고 에덴동산에 인간을 만드셨다. 하나님의 인간창조 목적은 사랑의 구현이고, 그 사랑을 통해 기쁨을 누리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참 사랑이라면 그것은 자유의지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사랑이어야 한다. 강요된 사랑은 참 사랑일 수가 없고 거기서는 기쁨을 누릴 수도 없다. 자발적으로 가슴에서 우러나온 사랑만이 참 사랑이고 참 사랑만이 기쁨을 누릴 수가 있다. 만일 하나님이 자유의지(自由意志)가 없는 인간을 만드셨다면 그것은 기계나 로버트에 불과하다. 인간을 기계로 지어놓고 그 기계로부터 기쁨을 기대할 수 있는가? 따라서 자발적인 사랑은 반드시 자유의지에서 나오는 사랑이어야 한다. 이런 사랑에서만 기쁨이 흘러나온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을 지으시고 그 인간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고 인간으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아 기쁨을 얻고자 한 것이 하나님의 인간창조 목적이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自由意志)를 허락해야 했다. 성경대로,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시길 원했다면, 하나님이 자유하심 같이 인간에게도 자유의지를 허락해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대로’ 자기를 닮은 사람을 지으시고 아담하와를 아들과 딸을 삼으셨다. 자유의지가 없는 인간은 기계에 불과하니 기계인간을 만드시고 어찌 아들과 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하나님이 절대자유고 절대책임자기에 인간에게도 절대자유와 절대책임을 동시에 허락하신 것이다.

                            스스로 조심하라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에게 마음대로 먹고 자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절대자유를 주셨다. 그리고 ‘에덴동산 각종나무의 열매는 네가 맘대로 따 먹되 선악과만은 따먹지 말라.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For in the day that you eat from it you shall surely die; 창 2: 17)고 하심으로 그들에게 절대책임도 주셨다. 그런데 아담하와는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자기욕심에 끌려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짓고 타락하므로 영적인 사망자가 된다. 물론 아담하와가 자유의지가 없는 기계인간이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조종해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자유를 선물 받은 아담하와는 자신들의 자유의지에 따라 선악과를 따먹고 사망(死亡)이란 절대책임을 진 것이다. 이렇게 인류의 조상 아담하와가 자유의지로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기록 외에도 성경엔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선을 행하여 축복받은 사람, 자기 발로 지옥을 찾아 들어가듯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악을 행하여 저주를 자처해서 망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오늘 나는 ‘자기 스스로’(By himself) 자신의 자유의지를 따라 죄를 짓고, 자기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을 소개한 후, “스스로 조심하라”(Take heed to yourself!; “스스로 유의하라”, “스스로 주의하라”)는 명제로 하나님의 은혜메시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눈다.

헤브론에서 여섯(삼하 3: 2-5 대상 3: 1-4), 예루살렘에서 열셋(삼하 5: 14-16, 대상 3: 1-8, 14: 4-7)등 다윗의 열아홉(19) 명 아들 중,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당시 이스라엘군 병력을 통솔하는 총사령관 요압과 종교계의 거물 대제사장 아비아달을 포섭해 모반하여 ‘스스로를 높여’(Exalted himself; 왕상 1: 5) 왕이 됐다가 다윗의 근위대 대장 브나야에게 제압당하고 ‘일일천하’로 끝났고(왕상 1; 38-53), 북왕조 이스라엘의 7대왕 아합(왕상 16: 28)은 악처 이세벨의 충동에 영향을 받은 후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 팔려”(He has sold himself to do evil in the sight of the Lord), 히트마케르카(“스스로 자신을 어떤 것의 노예상태가 되게 하는 것”이란 뜻으로 아합이 범죄(犯罪)하는 일에 몰두해 자신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는 상태가 됐음을 의미한다; 왕상 21: 20, 25) 야훼하나님께 죄를 짓다가 전사했으며, 왕하 17: 17에서는 북왕조 이스라엘 19명의 왕들이 하나같이 자신들의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Sold themselves to do evil in the sight of the Lord; ) 하나님의 노를 격발케 하므로 200여년 만에 앗수르에게 멸망당했다고 했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몽둥이로 앗수르를 사용했는데, 앗수르는 이스라엘파멸이 자기 능력이 뛰어나 그 일 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을 도끼와 톱이 자기들을 사용한 주인을 무시하고 스스로 큰 체하며 자기를 자랑하는 것으로 비유하므로(사 10: 15) 스스로 자기자랑에 빠진 자들을 경계했고, 다니엘은 벨사살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따라 ‘스스로 높아져’(You have exalted yourself; 단 5: 23)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성전의 잔들과 기명들에 술을 따라 마시면서 우상들을 찬양하고, 자기의 호흡을 주장하고 자신의 모든 길을 작정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으므로 왕의 권세가 끝났다고 경고했으며, 계속해서 다니엘은 자기시대에서 가까운 장래에 나타날 시리아 왕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와 먼 장래, 종말시대에 나타날 적그리스도가 ‘스스로를 높여’(He magnified himself; 단 8: 11, He shall exalt himself; 11: 36) “자유의지로 자기 뜻대로 행하고, 군대의 주재 만군의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를 모든 신보다 크다 하며, 성전제사를 폐하며 성소를 파괴하고, 비상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훼방하다가 멸망당할 것”을 예언했다.

그다음 선지자 스바냐는 자신의 자유의지 따라 ‘스스로 커서’ 이스라엘을 훼방하고 후욕한 모압과 압몬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당해 영원히 황무해질 것을 예언했고(습 2: 8-11) 성경시대에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세례를 거절한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을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자들’이라고 정죄하셨고(눅 7: 30) 사도바울은 영혼을 멸망케 할 이단(벧후 2; 1)들,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히 6: 6) 진리의 지식을 받은 후에 혼합주의와 종교다원주의로 빠져 하나님 아들 예수를 짓밟고 자기를 거룩케 할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며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이단(히 10: 29)들을 가리켜 “부패하여 스스로를 정죄한 자들”(Being self-condemned; 딛 3: 11)이며 “스스로 죄를 짓는 자들”이라고 단정하면서 이런 자들을 한두 번 훈계하고 멀리하라고 했다. “부패하여서”의 엨세스트랖타이는 “그들은 이미 완전한 타락상태에 있음”을 의미하고, “죄를 짓느니라”의 하마르타네이는 “현재 의도적으로 바른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자신의 자유의지를 죄 짓고 악을 행하며 더러운 시궁창에 던져버리는 사람과 게으른데 투자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절대자유가 선택한 대로 절대책임을 져야했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 따라서 인간의 복과 저주, 나의 잘됨과 잘못됨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행복도 불행도 심지어 천국과 지옥도 당신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 그래서 오늘의 당신의 실재는 어제의 당신의 자유의지 선택의 결과이고, 내일의 당신미래는 오늘 당신의 자유의지 선택이 결정한다. 자신의 자유의지, 나 자신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지혜롭게 선택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그렇다면 나의 자유의지는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 성도들이 날마다, 시간마다, 분초마다 ‘스스로가 선택해야 할 것들’을 알아보자.

   1. 스스로 헌신하라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 32: 29)

40일 금식을 끝내고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을 들고 하산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 우상 앞에서 술에 취해 벌거벗은 채 미친 듯이 춤을 추면서 돌아가며 닥치는 대로 무녀들과 윤간혼음을 하고 부끄럼을 모르고 방자(放恣, Out of control, 파라: 문자적으로는 “풀어놓다, 해이하다, 석방하다”란 뜻으로 “우상 앞에서 벌거벗고 제사 후 윤간혼음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하게 된 모습에 황당하여,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오라”(Whoever is for the Lord, come to me!) “하나님 편인 너희는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형제와 이웃과 친구를 도륙하라”고 소리쳐 외친다. 그때 레위 자손이 모세의 명령을 따라 칼을 뽑아들고 우상숭배에 도취해 있는 자들 3,000명을 도륙한다. 그러자 하나님은 레위인들을 "여호와께 스스로 헌신한 자"(Consecrate yourselves; 출 32: 29)로 칭찬하시고 대대로 받을 ‘레위인 가문의 저주’(창 49: 5-7)를 ‘레위 가문의 영원한 축복’(신 33: 8-11)으로 바꿔주셨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스스로 헌신하는데 투자했던 레위지파가 받은 축복이다.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나실인 헌신’(The vow of a Nazirite; 민 6: 2)은 일평생을 하나님께 바치는 평생헌신과 특별기간 동안만 하나님께 드리는 특별헌신이 있는데, 부족함의 비교대상이 없는 김목사는 전도사, 목사, 몇 번의 40일 금식으로 재삼재사 다짐하는 여러 번의 평생헌신과 21일 14일 10일 일주일의 특정기간을 정하고 수많은 나실인 헌신을 하므로 지금까지 영적인 축복을 받아 누리며,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축복들을 받고 있고, 물질적으로도 많은 축복을 받고 있음을 고백한다.

예배시간에 드릴 헌금이 없어 ‘이 몸을 바친다’며 강대상으로 올라가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고 축복기도를 받은 Livingstone은 선교사와 탐험가로 아프리카를 하나님께로 인도한 위대한 사람이 됐다. 스스로 하나님께 일생을 헌신하고, 자유의지로 수시로 자신을 하나님께 시간을 바쳐 헌신하므로 레위인 축복, 김 엘리야 목사의 축복, 리빙스턴의 축복을 받아 누리기를 축원한다.   

   2. 스스로 성결케 하라!
     Sanctify yourselves!(“스스로를 성결케 하라”, “스스로를 신성케 하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먹는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셨고(레 11; 44) 원망과 불평으로 음식을 먹지 말라고 하셨으며(민 11: 18) 난공불락의 철옹성 여리고와의 백척간두 한판 승부를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기적으로 여리고 정복의 축복을 받으려면 ‘스스로를 성결케 하라’(Sanctify yourself; 수 3; 5)고 명령하셨고, 아이성 정복에 실패한 이스라엘과 여호수아에게 원수를 정복하는 축복을 받으려면 ‘백성을 먼저 스스로 성결케 하라’고 명령하셨으며(수 7: 13)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기를 준비하는 이새에게 아들들을 먼저 ‘스스로 성결케 하라’고 하셨고(삼상 16: 5)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 성으로 모시는데 법궤를 메고 운반할 레위 사람들에게 ‘먼저 몸을 스스로 성결케 하라’(대상 15; 12)고 명령했다.
그렇다. 우리의 삶은 날마다 자신을 거룩함으로 지키도록 ‘스스로를 성결케 해야’ 한다. 어려운 일, 힘든 일, 내가 해결하기 불가능한 일을 만나 하나님의 기적으로 문제해결을 원한다면, 하나님께 기도응답을 받으려면 스스로를 성결케 해야 한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고, 권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잘 모시려면 먼저 자신을 스스로 성결케 해야 한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스스로 성결케 하는데 노력하는 성도들에게 삶의 승리와 기도의 응답과 말씀의 열매들이 풍성하게 맺는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3. 스스로를 하나님께 드리라(롬 6: 13, 16-23)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肢體)를 의의 병기(兵器)로 하나님께 드리라”

Yield yourselves unto God!(“네 스스로를 하나님께 굴복하라! 스스로 네 자신을 하나님께 넘겨주어라! 네 스스로를 하나님께 양보하라! 스스로 네 자신을 하나님께 포기하라!”) “네 스스로를 하나님께 드려라!” 그렇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하나님께 굴복해 썩어질 육체를 하나님께 드리고 자기 몸을 의의 병기로 쓰임 받게 하면 자신의 몸이 거룩함에 이르는 축복이 있다.

사람은 자기 몸을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된다. 그 몸을 쾌락에 순종하면 쾌락의 종이 되고, 그 몸을 게으름에 순종하면 게으름의 종이 되며, 그 몸을 먹고 마시며 잠자는데 순종하면 그것에 종이 되고, 술과 마약에 순종하면 술과 마약의 종이 되며, 자신의 자유의지로 자기 몸을 음란과 더러움에 순종하면 희대의 탕녀, 걸레인생이 된다.

얼마 전, 어느 청년이 자신의 평생목표는 7만 명의 여자와 잠자리를 하는 것이라고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미혼의 처녀가 자기는 결혼 전에 10,000명의 남자와 잠을 자는 것을 목표로 한다며 지금까지 자기와 몸을 섞은 수천 명 남자들의 리스트를 발표해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자기 스스로를 팔아버린 아합 왕과 이스라엘 왕들처럼 스스로를 팔고 자기 영혼까지 팔아 정욕의 도구로 전락시키면서도 그것이 부끄러운 일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스스로를 팔아 자신의 자유의지를 파멸에 넘겨버리는 사람들은 비단 그런 사람들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순간의 명예와 찰나적인 기쁨을 위해서 천하보다 귀한 자기 영혼을 팔아 마약과 술과 노름 심지어는 부부를 바꾸는 스와핑에 탐닉하는 사람들까지 생기고 있다. 가수나 탤런트의 연예인들은 돈 더 받고 인기를 얻고 그 인기 지키려고 속살 더 많이 보이고 섹시하게 보이려고 서로 경쟁을 하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지도록 유혹한다. 이렇게 스스로를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보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죄의 도구로, 유혹의 도구로, 파멸과 저주의 도구로 바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살인과 도적질과 음란과 사기로 감옥에 들어가 있음에도 오히려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하나님께 굴복하여 스스로를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 자기 몸을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쓰임 받는 사람, 자기 몸이 의의 병기로 쓰임을 받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어둠의 색깔이 짙을 수록 빛이 더 강하고 환하게 비취듯 그런 사람들 때문에 세상에 복음이 널리 전해지고, 그런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숨겨진 비밀들이 밝히 알려지며, 그런 종들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나의 자유의지가 누구에게 굴복하느냐, 내 몸을 누구에게 순종하느냐에 여러분자신의 운명이 달려있다. 시간과 분초의 순간순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 같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당신의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병든 몸을 고치시고 약한 것을 강하게 하여 사용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가 되기를 축원한다.

   4. 스스로 삼가라(Take heed to thyself!; Watch yourself!)     
                   
성도들이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네 번째 방법은 “스스로 삼가는 것”이다. “스스로 삼가라”(Take heed to yourself; Watch yourself)는 말의 히브리어 카라는 “(위험이나 충고에) 스스로 조심하라”, “스스로 주의를 기울여라”, “스스로를 경계하라”는 뜻이다. “스스로 삼가라”는 말씀만 잘 지켜도 인생을 성공하고 신앙생활도 성공하는 성도가 된다. 성경에서 축복의 편에 있는 사람들과 실패의 편에 있는 사람들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삼간 사람’을 보면 알 수 있다. 스스로를 삼간 사람은 축복의 사람들이고 자유의지를 조심하는데 사용치 못한 사람은 저주와 실패의 사람들이다. 그러면 우리가 삼가야 할 것, 나의 자유의지가 신경을 써서 삼갈 일은 무엇인가?

⑴ 삼가 이방인과 언약을 하지 말고 잡혼(불신자와의 결혼)을 하지 말며 이방신(우상)을 섬기지 말 것이다(출 34: 10-17) ⑵ 삼가 네 마음을 힘써 지켜 네게 행한 하나님의 기적(하신 일)을 잊지 말라(신 4: 9, 15-23, 8: 11, 11: 16) ⑶ 스스로 삼가 하나님의 종을 버리지 말라(신 12: 19) ⑷ 스스로 삼가 이웃에게 악념을 품지 말라(신 15: 9) ⑸ 스스로 삼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렘 17: 21-27) 주일마다 당신의 자유의지를 주일성수에 우선권을 두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이다 ⑹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갈 것이다(Take care what you listen to; 막 4: 24) ⑺ 말씀을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갈 것이다(Take care how you listen; 눅 8: 18) ⑻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지므로 주의 날이 덫과 같이 임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할 것이며 장차 올 대환난을 피하고 환난 전에 공중으로 들림 받아 휴거하여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라(눅 21: 34-36) ⑼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하라(레 20: 7) ⑽ 스스로 삼가서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 죽인 것 먹는 것을 멀리하고 음행을 멀리하면 잘 될 것이다(행 15: 29) 이렇게 성경은 성도들이 스스로 조심할 것, 스스로 삼갈 것, 스스로 경계할 것을 열(10)가지를 말씀했다.

그렇다. 말세성도의 신앙성공은 여러분의 자유의지에 강한 전파를 끊임없이 받을 수 있는 여러 개의 안테나를 달아서 불순한 것이 전파에 잡힐 때마다 스스로를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넘어지는 것은 순식간이고 찰나지간이다.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당신 신앙의 수십 년 공든 탑은 모래성처럼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린다. 거기엔 큰 목사, 작은 목사가 없고, 유명한 목사 이름 없는 목사가 없으며 장로 권사 집사가 없다. 스스로 조심할 수 있기를 축원한다.

경영학에 ‘1대 29대 300법칙’이라고 불리는 ‘하인리히 법칙’이 있다. 1930년대 트레블러스 보험사 관리감독자였던 허버트 하인리히가 산업재해 사례 분석을 통해 발견한 통계적 법칙인데, 그것은 회사(개인)에 대형사고가 발생했다면 이미 그전에 그와 유사한 경미한 사고가 29번이 있었고, 그 주변에 또다시 300번 이상의 사고 징후가 나타났었다는 것이다. 대형사고와 중형사고 사소한 사고의 발생률이 1대 29대 300이라는 말인데, 그래서 대형사고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이전에 이미 경미한 사고들이 여러 번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찬란했던 이집트제국과 막강했던 앗수르, 바벨론, 메데 파사제국, 알렉산더의 헬라제국과 유라시아와 아프리카를 통치하며 호령하던 대로마제국이 어느 날 홀연히 모래성 무너지듯 무너진 것이 아니고, 광활한 만주벌판을 우리 땅으로 삼고 중국대륙까지 위협하던 고구려 백제 신라와 고려와 이조선이 망한 것도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이 아니듯, 세계적인 기업이 모래성 무너지듯 무너지고, 세계적인 목사와 유명했던 부흥사들이 썩은 고목 쓰러지듯 넘어져 비참해지며, 오늘 우리들이 시험에 들어 넘어지고 쓰러져 신앙을 떠나는 영적인 대형사고가 오기 전에 이미 그런 조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성도는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무너짐의 징후를 포착할 수 있도록 항상 눈을 크게 뜨고 스스로 조심하고 스스로 삼가야 한다.

성도들의 신앙 슬럼프화는 특정 순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신앙퇴보가 이뤄질만한 여러 가지 조짐들이 먼저 있은 후 다음에 나타난다. 성도들의 신앙퇴보조짐은 주일 예배 지각을 하거나, 새벽예배 수요예배를 빠지기 시작하거나, 설교에 집중하지 못하고 졸거나, 기도시간은 짧아지거나,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십일조, 감사, 선교, 구제, 건축헌금)이 아까운 생각이 들거나, 교회봉사를 등한히 하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이 지속적으로 반복돼 누적되면 통제불능의 영적 슬럼프가 만들어 진다.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생기기 시작할 때, 작은 일에서부터 채찍과 징계의 손을 대시는데 그럴 때 깨닫는 자가 복 있는 성도다. 하나님의 손을 느낄 때, 스스로 조심하고, 스스로 삼가며, 스스로 자신을 경계하여 일어설 수 있기를 축원한다.

   5. 스스로 하나님께 순복하라(Submit yourselves to God)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順服)할지어다
마귀(魔鬼)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 7)

“순복하라”의 헬라어 휘포타게테는 단순과거 명령형으로 “즉각적으로 순복하라”는 뜻이다. 원래 ‘순복하라’는 말의 문자적인 뜻은 “자신을 더 낮은 위치에 두라”는 의미이지만 “하나님께 순복하라”는 말씀은 단순한 복종을 요구하는 의미보다는 “철저하게 낮은 위치에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겸손히 아뢰며 자신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하신 본문은 하나님께 즉각적으로 순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을 방해하는 마귀를 대적해야 된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주일성수를 하거나 성경을 읽거나 새벽기도를 하거나 십일조를 드리거나 선교사역을 결정하려고 할 때,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 앞에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는 성령님과 하나님의 뜻을 싫어하고 불순종하며 거역하는 마귀가 온다. 그때 달콤한 말로 나를 유혹하는 마귀를 대적해서 쫓아버리고 즉각적으로 하나님께 순복해야 한다는 말이다. 금요일까지 주일성수를 준비하며 기도하고 있었는데 토요일에 예배에 빠지도록 친구의 달콤한 유혹이 오고, 이번부터는 십일조를 하려고 결심했었는데 마귀가 사정이 생기게 하여 십일조 드리려는 마음을 흔들어 놓으며, 많지는 않지만 작정하고 목사님의 선교비용을 도우려고 계획했었는데 마귀가 급한 일이 생기게 하여 선교헌금을 훼방하는 생각을 넣고, 새벽기도를 기도답게 하려고 교회에 나왔는데 마귀가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 생각을 넣는다. 그럴 때, 마귀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이름으로 대적해 쫓아버리고 즉각적으로 나의 생각과 자유의지를 성령님께 순복하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경건훈련이다.

40-50년을 해왔으나 아직도 김목사에게 힘든 것은 새벽기도와 성경읽기와 설교준비 그리고 체력단련의 운동이다. 선교여행이나 부흥회로 출타 중엔 기도와 성경 읽기만 간신히 유지되고 설교준비와 운동은 전혀 못하는데, 평상시도 오랜 세월 동안 해온 일이기에 습관이 됐을 만도 한데 사실은 매일 매일 전쟁이다. 새벽기도도 열 번 중에 다섯 번은 피곤하다는 핑계로 ‘오늘은 일찍 끝내고 쉬고 싶다’는 마귀의 유혹을 받으면서 전쟁을 치른다. 그때마다 마귀를 대적해 쫓아내고 자유의지를 성령님께 순복하여 사투를 벌이면서 기도의 고지를 점령하는데 그때에 기쁨은 기도의 비밀을 아는 사람만이 갖는 축복이 있다.

매일 오전 8시 정도에 기도를 마치고 귀가해 12시 반까지 성경 읽기와 운동하는 것도 나의 자유의지를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경건훈련으로 내겐 또 하나의 전투다. 성경 20-30페이지를 읽고 15-20분의 휴식시간마다 Push up과 Weight Lifting(역기 들기)과 Toe-Lift(발끝으로 몸 들어올리기), Body-Stretching과 경락마사지를 일주일에 4-5번 하는 것인데, 매일 200페이지의 성경 읽기에서 Stretch(몸 풀기)와 경락마사지는 매주평균 7,500번 Push-Up과 Weight-Lifting과 Toe-Lift는 매주평균 일만 이천 번에서(12,000) 15,000번씩 한다. 내가 이렇게 성경을 읽고 땀 흘리며 운동할 때, 손자가 지하 독서실에 내려와 내가 하는 것을 보고 저도 방 안에서 두 발로 주저앉아 주먹을 쥐고 Carpet위에서 고사리 손으로 Push-up을 하고, 역기를 만지며, 계단에서 내 팔을 붙잡고 Toe-Lift를 따라하는데, 그때마다 나는 ‘저 세 살짜리 아이가 먼 훗날 할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할까?’(아이 속에 새겨진 할아버지 자화상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하며 혼자 웃을 때가 있다(손자가 나를 보려고 지하실에 내려올 때마다 우연의 일치처럼 예외 없이 내가 성경을 읽고 있거나 컴퓨터로 설교를 준비하고 있거나 뒤뜰에 나가 운동을 했다)

이렇게 특별한 약속이나 해야 할 일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 새벽기도 후 점심시간까지 성경을 읽는 것과 운동하는 것이 내 스스로 오랜 세월 해왔던 영성훈련과 체력훈련의 경건연습인데도 매일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오늘만 쉬고 싶은 유혹과 게을러지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래서 나의 자유의지를 하나님께 순복하는 영적싸움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를 절감한다. 그러나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며, 여섯 달과 일 년이 지나면서 조개 살 속에 박힌 모래가 영롱한 진주가 되듯 나의 신앙인격이 성숙해지고 경건이 노화순청의 경지에 이르러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목사가 되는 소망에 오늘도 그 싸움을 계속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는 고귀한 신앙인격자가 되는 것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날마다,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할 때만이 가능하다. 이것은 타인이 결정해주지 않는다. 자기스스로가 결정하는 일이다. 매일 당신의 자유의지를 하나님께 순복하는 지혜가 있기를 축원한다.

   6. 스스로 주 앞에서 자기를 낮추라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 10)

Humble yourselves in the sight of the Lord, and He shall lift you up!(하나님의 눈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시리라!) 그렇다. 나의 자유의지를 ‘스스로를 주 앞에서 낮추는 경건훈련을 할 것’이다. 주님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는 훈련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를 나타내 과시하고 자기를 자랑하려는 존재,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존재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말로 이웃을 평가절하 하고 이웃을 깎아내리며 사람들 앞에서 무안을 주고 창피를 당하게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겸손하게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낮춘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남보다 좀 더 예쁘고 키도 늘씬해 크며, 사업도 잘되며, 교회도 부흥돼 교인도 많고 헌금도 많으며, 이목구비가 출중해 자랑거리가 될 수 있겠지만 사람을 외모로 판단치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천국에서는 나보다 남이 자랑거리가 훨씬 많을 수 있음을 명심해, 당신의 자유의지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스스로를 겸손케 하는 자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7. 스스로를 믿음 위에 건축하고 하나님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지키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 20-21)

예수님의 동생이며 속사도인 유다는 Building up yourselves on your most holy faith!(“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스스로를 건축(建築)하라”), Keep yourselves in the love of God(“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스스로를 지키라!”)고 했다. ‘거룩한 믿음 위에 스스로를 건축하는 것’은 주의 종들을 통해 전해 받은 복음을 잘 상고하고 연구하여 터 되신 예수 안에서 뿌리를 내려 영적으로 성숙하라는 말씀이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 안에서 자기스스로를 지키는 것”을 가리킨다. 영적으로 성숙하는 것과 자기스스로를 지키는 것은 신앙성공의 양두마차다.

어린아이는 일 년 지나면 걷기를 시작하고 두세 살이 되면 기저귀를 떼는데 신앙생활 4, 5년에도 제 발로 걷지도 못하고 똥오줌 못 가린다면 영적으로 발육부진의 지체아이다. 교회생활 몇 년이 됐어도 목사가 심방하고 집사 권사가 전화해야 주일성수를 한다면 문제 있는 교인이다. 그리고 성숙한 성도는 유혹들을 이겨내고 스스로를 지키는 성도이다.

스티븐 레빗은 스포츠에서 승부조작가능성을 통계학적으로 접근한 미국의 경제학자다. 그는 1989년 1월부터 2000년 1월까지 12년 동안 일본 스모선수 281명이 3만 2천 번의 시합에서 승부가 조작된 것을 분석해 발표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므로 유명해진 학자다.
스모는 한국씨름 천하장사에 해당하는 요코즈나가 속한 마쿠우치(幕內)를 정점으로 주료(十兩)를 포함한 상위 리그와 그 밑의 하위 리그로 나뉘는데, 주료 안에 들어야 월급도 받고 인간답게 사는 대접을 받는다. 그 이하 품계의 선수는 월급 한 푼 없이 허드렛일로 보낸다. 한 대회에서 15경기에서 8승 이상을 거둬야 승격되고 주료 안에 들게 되기 때문에 스모선수는 주료가 되기 위해 피땀나는 노력을 한다.

레빗은 7승7패의 탈락위기 선수들이 8승을 위해 벌인 마지막 경기를 집중해서 조사했는데 그들이 8승6패, 9승5패 선수들과 겨뤘을 때 80%와 73.4%의 승률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평소에 50%에 불과한 승률이 80%대로 치솟았다는 결론인데, 레빗의 조사로는 이미 주료가 된 8승6패, 9승5패의 선수들이 7승7패의 선수에게 뒷돈을 받거나 다음번에 져주기로 약속을 하고 일부러 져줬기 때문이었다. 조사결과 선수들이 돈을 주고받으며 승패를 조작한 것이 사실로 밝혀져 일본열도가 발칵 뒤집혔는데, 일본의 국기(國伎) 스모가 ‘짜고 치는 고스톱’이 되자 일본국민은 충격에 빠졌고, 간 나오토 총리는 ‘일본인들에 대한 배신’이라 성토했다. 이 일로 스모가 존폐의 기로에 섰다고 한다.

나는 각본에 따라 진행되는 영화나 연속극이 재미가 없어서 불확실성이 전제된 스포츠, 예측불허의 경기결과에서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끼게 하는 스포츠경기를 좋아하는데 스포츠마저 그렇다면 TV에서 얻을 것이 무엇인가? 이렇게 식상케 하는 ‘짜고 치는 고스톱’, ‘짬짜미 승부’를 경제용어로는 “인센티브(Incentive)의 유혹”(사람을 거짓된 환희와 감동에 빠뜨리는 배신과 죄악의 “자극적인 유혹, 유인하는 유혹”)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비단 일본스모 뿐 아니라 지구촌을 열광시키는 FIFA(세계축구연맹)와 유럽축구에서도, 한국의 인기종목 쇼트트랙 선수선발과 축구 배구에서도, 그리고 세계 모든 스포츠계에서도 만연해 있다. 심지어 세계최고의 교회와 목사들이 있다는 한국교회에도 “짜고 치는 고스톱”, “조작의 유혹들”이 있을 정도다. 부정한 유혹은 달콤하게 다가온다. 목사와 성도들이 순간의 치명적 유혹을 스스로 뿌리치지 못하면 본인도 망하고 조직도 망하며 하나님의 영광까지 가린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스스로 자기를 지키는데 사용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예수님은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다(There are also eunuchs who made themselves for the sake  of the kingdom of heaven: 마 19: 12)고 하셨다. 태생적인 고자는 결혼이 불가능한 성교불능의 남자로 태어난 자들(Those born impotent who are incapable of marriage; 신 23; 1)을 가리키고, 사람이 만든 고자는 고대 이집트나 바벨론 중세 영국 프랑스 중국 일본 한국 등 세계 각국에서 왕국의 청지기가 되거나 공주들이나 왕자들을 돌보기 위해 왕궁에 살았던 거세된 환관들(Those made eunuchs by men to be chamberlains and to care for harems and apartments of queens and princesses; 왕하 20: 18, 렘 29: 2, 34: 19, 41; 16, 사 56; 4, 행 8: 27-39)을 가리킨다. 그다음 천국을 위해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들이다. 말씀 그대로 하늘나라를 위해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수술로 거세(去勢)하여 고자(鼓子)가 된 사람들을 가리킨다(Those who make themselves eunuchs for the sake of the kingdom of heaven by operation) 아내에 대한 불만족과 불행 때문에 결혼을 안 하는 싱글이나 이혼 후에 혼자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수술을 받아서 고자가 된 사람을 가리킨다. 김목사 같은 보통사람은 꿈도 꿀 수 없는 자기희생의 사람이다. 한 때, 성결교단 목사로 명성을 날렸던 양도천 목사는 천국을 위해 스스로 생식기를 잘라내 고자가 됐었지만 스스로 만든 이단(세계 일가공회)에 빠져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그가 끝까지 바른 신앙을 지켰다면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께도 많은 사랑을 받았을 것이고 천국에서도 상급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과 저주로 쓸쓸하게 그 일생을 마쳤다. 

2013년을 한 달 남기고 12월 첫째 주일 예배를 드리는 성도 여러분, 줄 끊어진 연처럼 자신의 자유의지의 끈을 놓은 채, 귀중한 세월을 게으름과 방탕에 방임(放任)하여 마귀와 죄의 노예로 살았던 김목사는 지난 날로 족함을 고백한다. 여러분도 같은 고백이 있기를 소원한다. 그래서 이제 이후 나와 여러분이 자신들의 자유의지와 절대자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가정의 행복과 교회의 부흥을 위해, 전심을 다해 헌신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예수님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내게서 나의 목숨을 뺏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린다(I lay it down of Myself; 요 10: 17-18) 그런 이유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라”(For this reason The Father loves Me!)고 하셨다. 한 점의 의혹이나 삶의 미련이나 후회도 없는 고백, 이 얼마나 자신 있는 고백이며, 얼마나 멋있고 품위 있는 고백인가? 오늘 당신은 이런 고백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나의 목숨을 뺏는 자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뺏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해, 영생을 위해 나의 자유의지를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스스로 내 목숨을 버리기 때문이다”를 고백하는 예배가 되고, 예배이후의 삶이 되기를 축원한다.

“자유의지로 스스로를 하나님께 헌신하라. 스스로를 성결케 하라. 스스로를 하나님께 드려라. 스스로 삼가라. 스스로 하나님께 순복하라. 스스로 주 앞에서 자기를 낮추라. 스스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지키라” 이 길만이 당신이 살 길이며, 이 길만이 축복의 길이며, 이 길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길이며, 이 길만이 우리가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할 길이다.    

 

               
김엘리야 목사(워싱톤주기도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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