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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09월08일 13시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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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종류의 공력

신앙생활은 개인적이면서 집단적이고 사회적이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과 자신사이에 개인적인 관계이고, 이웃을 향해서는 어쩔 수 없이 내 신앙이 이웃에게 영향을 받기도 하고 영향을 주기도 하는 집단적이며 사회적관계이다. 그래서 나 때문에 은혜 받는 사람이 있고 나 때문에 시험에 드는 사람도 있으며, 나 때문에 도전받아 신앙생활에 큰 도움을 얻는 사람도 있고, 나 때문에 실망하고 실족하여 교회와 하나님까지 등지고 떠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도 중요하고 사회적으로 이웃과의 관계도 중요하다.

얼마 전, 서울 구의동에 있는 38층 건물 테크노마트 빌딩이 갑자기 상하진동으로 흔들리는 사건이 있었다. 거대한 빌딩이 흔들리자 사람들은 지진으로 건물이 흔들리는 것으로 알고 대피소동이 일어났는데 잠시 후 아무 후속사고가 없자 안심했는데, 그 후 빌딩 진동원인이 12층에 있는 Fitness Center에서 20여명이 태권도와 권투 동작을 결합한 에어로빅댄스인 태보(跆步)때문이라 보고하자 사람들은 하나같이 믿질 않고 여론까지도 빌딩 부실공사로 몰아갔다.

2주 후, 건물주인은 빌딩의 안전도를 증명하기 위해 2주전과 똑같은 상황을 공개 시연케 했는데, 먼저 건물고유의 진동수를 맞추기 위해, 템포를 일정간격으로 조정해 주는 박절기(拍節器) 메트로놈(Metronome)을 진동주파수 2.7헤르츠(Hertz)에 맞게 고정한 후, 태보시연자 23명에게 흔들림 당시와 동일한 상황을 시연하게 했다. 그러자 태보를 시작된 지 8분이 지났을 때, 건물 38층에 설치된 진동계측기에 강한 진동변화가 일어났는데 계측기에 나타난 가속도의 크기는 평소 0.7갤보다 10배나 가까운 수치인 무려 7갤(진동가속정도를 나타내는 단위)이었다. 그리고 계측기 옆에 놓였던 화분의 나뭇잎이 눈에 띄게 흔들렸고 빌딩도 2주 전처럼 상하로 진동했다.

이날 정밀진단을 맡은 건축학회 소속 성균관대 이동근교수는 “실험결과 태보운동 당시 집단 뜀뛰기가 건물 고유진동수와 일치했다는 결론이 나왔다”면서 “이런 일은 확률의 0.1%도 안 되는 경우”라고 말했다. 그렇다. 20여 명이 뛴다고 거대한 빌딩이 흔들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불가능 99.9%, 가능성 0.1%도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하나가 되는 합작일체(合作一體)가 될 때, 100%의 기적을 만들어 낸다. 120명이 열흘 동안 합심으로 기도하므로 성령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왔고, 그 불길이 지구촌을 불태웠듯 우리의 합조일체로 21세기 지구촌기적을 만들 수 있기를 축원한다.

1574년 12월 22일, 오스만제국의 술탄(황제) 무라드 3세 즉위식과 그의 다섯 형제 장례식이 한 날에 치러졌다. 무라드 3세가 자신의 왕좌를 지키기 위해 화근을 미리제거하려고 자기형제 다섯 명을 죽였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오스만제국의 황제 술탄들은 수많은 첩을 거느려서 왕좌를 놓고 이복형제들끼리 피를 뿌리며 죽고 죽이는 살생이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 형제의 싸움에서 승리해 권좌에 오른 왕자는 자기 친형제와 이복형제들을 모조리 비단 끈으로 목 졸라 죽이는 것이 관행이었다. 왕위찬탈 반역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무라드 3세가 즉위할 때는 자기 형제 다섯 명을 죽였고, 무라드 3세의 아들 메흐메드 3세가 즉위할 땐 무려 19명이나 되는 자기형제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왕위찬탈 반역을 근절키 위해 왕이 되는 자가 자기 형제들을 죽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사후 정세불안을 염려한 아비가 미리 손을 쓰는 경우도 있었는데,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술래이만 대제는 후계자로 점찍은 셀림 외에 다른 아들은 물론 손자들까지 모두 제거해 버렸다. 제국의 안정이 최후선 과제인 이들에게 부자나 형제간의 사사로운 정은 사치에 불과했기에 인정사정없이 정적이 될 만한 사람은 모조리 숙청하거나 제거해 버린 것이다. 이 죽음의 살인극은 오스만 제국뿐 아니라 이웃 나라 중국의 반만 년 역사였고 우리나라의 역사이기도 하며, 몽골 캄보디아 일본의 역사 아니 세계의 역사, 인간의 역사이다.

죽음을 앞둔 칭기즈칸도 어렵게 구축한 몽골제국의 장래를 위해 총애하던 맏아들을 희생시켰다. 칭기즈칸이 후계자를 정하기 위해 소집한 쿠릴타이 족장회의에서 둘째 아들이 형을 향해 “우리가 어찌 사생아의 통치를 받을 수 있느냐?”며 형수가 다른 부족에 끌려갔다 돌아와서 낳은 자식인 자기 조카를 대놓고 반발하다가 형제간에 주먹다짐이 벌어지자, 칭키스칸이 아들들의 권력투쟁을 막기 위해서 암살자를 보내 첫째 아들 주치를 죽였다고 한다. 이렇게 자기의 의를 내세우기 위해 사랑하는 자식까지도 죽이고 자기의 한 핏줄과 혈연까지도 무자비하게 끊는 것이 세상사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겉은 포장했지만 속에는 자기의 의를 내세우려는 인간의 간악함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 교회 안의 또 다른 역사들이다.

그렇다면 오늘 나의 신앙은 하나님과만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기만 하면 되는가? 그리고 나와 가깝고 절친하고 내게 유익을 주는 사람과만 관계를 맺으면 되는가? 그렇지 않다. 어차피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집단적 존재며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좋든 싫든, 우리는 나에게 유익한 사람만 만날 수도 없고, 내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피할 수도 없는 존재다. 그래서 자신을 향해서는 끊임없이 긴장의 끈을 늦추지 말고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근신하고 근면해야 하고, 이웃을 향해서는 유익을 주고 덕을 끼치도록 말과 행동과 생각까지 경건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두 종류의 공력(功力)

어느 교회보다도 은혜가 충만하고 성령의 은사들이 많이 나타나며 성도들이 뜨거운 열심을 가졌던 고린도교회는 당파싸움이 심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누구보다 지적실력이 뛰어나고 은사가 충만했던 바울을 지지하는 바울 파, 열두 제자 중 수제자인 베드로를 추종하는 베드로 파, 지식적으로 말씀을 잘 가르쳤던 아볼로를 따르는 아볼로 파로 나뉘어져 서로 대립하고 분쟁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있었고 강력해야 할 교회의 힘이 분산되고 있었다. 그만한 열심과 성령의 은사라면 ‘태보효과’로 고린도 도시를 흔들고 유럽과 소아시아까지 뒤흔들어 막강한 복음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고린도교회가 아무 소용도 없는 파벌싸움과 소모적 분쟁으로 아무 역할도 못하고 있는 것을 본 바울은 안타까웠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에서 파벌싸움을 없애고 교회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으니, 그런즉 심는 사람이나 물주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다. 심는 사람과 물주는 사람은 모두 동일한 일군으로 각각 자기가 일하는 대로 각자의 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주의 종들이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위에 쌓는 공력들이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세우면 불에 타 없어져 해를 받을 것이고, 자기 공력이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세우는 사람은 그 공력이 그대로 있어서 상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주의 종들이나 평신도들 중에서 씨를 뿌리는 자나 물주는 자, 전도로 새끼 양들을 낳는 평신도들이나 그 양들을 먹이고 돌보는 주의 종, 성도들의 집을 짓는 주의 종들이나 자기 집을 아름답게 가꾸는 평신도는 모두 각각 다른 분야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요 예수님 위에 자기 공력을 쌓는 자들이란 말이다. 그렇다. 하나님만이 밭의 식물을 자라나게 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만이 양들을 자라나게 하시는 분이시며,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터이며 인간운명의 집을 지을 수 있는 유일한 터(Foundation)이시다. 사람이 아무리 훌륭하고 뛰어나며 탁월하고 강하며 지혜가 출중해도, 식물의 키를 한 치도 자라게 할 수가 없고, 짐승의 성장과 발육을 좌우하는 생명의 원동력이 될 수도 없으며, 인간자신의 영원한 집을 지을 수 있는 만세반석의 견고한 터(Foundation)도 될 수 없다. 따라서 땅 위에 모든 성도, 주의 종과 평신도는 모두 직분 상에 차이만 있을 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동일한 일군이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께서 지상 재림하셔서 성도들의 행위공력을 심판하시는 날 (Judgment of Believer's Works)에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상을 받을 것인데 ‘자기가 일한 것’이 바로 “각 사람의 공력”(Every man's work)이라고 한 것이다.

   1. 두 가지 공력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것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11-15절)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기초를 자기가 닦았지만 그것까지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사도적 권위를 부여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통해 터를 닦은 것으로 고백한다. 그래서 고린도교인 각 사람의 신앙의 기초, 오늘 여러분과 김목사의 믿음의 터(Foundation)도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했다. 그렇다. 우리 믿음의 기초(基礎)와 신앙의 터는 예수이시다. 그리고 우리 일생의 삶, 날마다의 우리 생각과 말과 행동은 우리가 쌓는 공력이다. 그리고 그 공력들은 불에 타 없어지는 공력과 불에 타지 않는 공력이 있는데 불에 타는 공력을 쌓은 사람은 하늘나라에 상급이 없는 부끄러운 구원의 사람이 될 것이고, 불에 타지 않고 그 공력이 남아 있는 사람은 상급을 받을 성도가 될 것이다.

13절에서 “그 날”(The Day)은 예수께서 지상에 재림하셔서 성도들의 공력을 심판하시는 날을 의미하고, “밝히리니”(Manifest: "분명하게 밝히다“)의 헬라어 델로세이는 ”성격의 본질을 드러내어 그것의 실상을 밝힌다“는 뜻으로 성도들의 모든 공력의 본질, 공력이 진짠지 가짠지의 진부여부와 참된 공력이었는지 그렇지 못한 공력이었는지의 진위를 밝히 드러낼 것이란 뜻이며, 그리고 “나타내고”(Revealed)의 아포칼립테타이는 “공력의 드러나는 정도가 완벽하다”는 뜻이다.

그다음 14절은 성도들은 그날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완벽한 불의 시험을 거친 후에 그 결과에 따라 상급을 받을 것이란 말씀이고, 15절에서 “불 가운데 얻은 것 같다”(He himself shall be saved, yet so as by fire)는 말은 구원을 받기는 받되, 화염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사람과 같을 것이란 뜻이다. 롯이 유황불이 쏟아져 내리는 소돔 고모라 성에서 구원은 받았지만 넉넉하고 평안한 구원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소알 성으로 도망치므로 구원을 받았듯이, 심판의 날에 자기 공력이 불타는 사람은 그런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씀이다. 오늘 여러분의 공력은 불에 탈 공력인가, 아니면 불에 견딜 수 있는 공력인가?     

   ⑴ 불에 타서 없어질 가소화적(可燒火的)인 공력들

바울은 성도들의 공력이 불에 타 없어지는 가소화적 공력이 있다고 했다. 바울은 이것을 자연물질에서 불이 쉽게 붙거나 빨리 불에 타는 연소성이 강한 나무와 풀과 지푸라기(짚)의 공력이라고 했다. 성경엔 나무(Wood)란 단어가 140회, 풀(Hay)이 3회, 짚(Stubble)이 16회나 기록됐지만 나무와 풀과 짚의 공력이란 수십 종류의 많은 나무와 풀과 짚의 상징적인 의미나 영적인 의미보다는 문자 그대로 쉽게 불이 붙고 불에 타버리는 물질처럼 예수님의 심판 불에 견디지 못하고 불태워 질 공력을 가리킨다.

제가 선교를 다녀온 캄보디아나 미얀마, 볼리비아 더운 지방의 나무 중에는 쇠처럼 무겁고 수질이 단단한 나무가 있다. 이런 나무는 도끼가 튈 정도로 단단하고 기계톱이 망가질 정도로 수질이 강한데, 나무를 만져보면 쇠를 만지는 기분이 들 정도고 나무 색깔도 짙은 갈색과 검붉은 색깔로 녹슨 무쇠처럼 생겼다. 그래서 현지인들은 그 나무로 교회를 지으면 수백 년은 갈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쇠나 철은 불에 타지 않지만 그런 나무는 불에 탄다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 당신의 헌신과 충성과 봉사의 공력들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으로 근사하게 포장됐어도 그 공력이 나무나 풀이나 짚이면 심판 불에 타버린다. 불에 타 없어질 공력들이 불에 타지 않는 금과 은과 보석의 불가소적 공력이 되기를 축원한다.

불에 탈 가소화적 공력을 말하기 전에 먼저, 김목사의 지난 45년 6개월의 목회에서 불에 타 없어졌을 부끄러운 공력들을 회개하면서 은혜를 공유하는 것이 여러분 신앙에 작은 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한두 가지를 소개한다.

이전까지 13-4년의 공력은 차치하고 1981년 12월 26일부터 40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철야기도를 한 것에서부터 두 번을 더 야채주스를 마시며 40일을 기도한 것, 물만 마시며 21일을 기도한 것에서 두 번 더 야채주스로 21일을 견디며 기도한 것 그리고 교회부흥을 위해 성도들과 40일 연속금식을 열네 번이나 한 것 그리고 하나님의 기적과 교회부흥과 김목사의 목회성공(?)을 위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금식기도와 철야기도와 뼈를 깎는 노력의 성경연구와 성경읽기 등이다. 이런 것은 마땅히 주의 종으로 당연한 일이고 다른 분들은 이것보다 훨씬 많은 공력을 쌓아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충성하는데 나는 이것들을 자랑거리로 여가고 나팔을 불었으니 주의 날에 공력이 불 탈 것과 나 자신의 작은 그릇이 부끄러울 뿐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공력이 불 탈 일은 삼가 하려고 한다.

며칠 전 동료목사가 자기교인 중에 일 년 52주에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몇 년 동안 일주일에 두 번을 Vacuum을 하며 깨끗하게 성전청소를 하는 성도가 있고, 한 주에 한 번 화장실 청소를 하는 성도도 있으며, 자기가 부흥회를 떠날 때면 그때마다 여비에 보태고 맛있는 음식 사드시라고 거마비를 주는 성도가 있어서 목사가 Healing이 된다는 간증을 듣고 내 일처럼 흐뭇해 그 성도들을 축복기도를 했었다. 특히 교회창립기념행사와 취임식행사에 선물을 투명봉투에 넣었으면 좋겠다는 목사 말에 비록 많은 돈이 든 것은 아니지만 남녀선교회 회장인 부부 집사가 컴퓨터로 검색해 멀리 3-4시간 되는 버지니아까지 가서 봉투를 구입해 왔다는 간증에 같은 목사로써 기쁨을 함께 나누고 그들을 축복했다.

교회마다 이런 충성스런 교인들이 있어서 목사들은 목회의 피곤함과 마음의 상처들을 Healing받는다. 어떤 교회는 47년 간 한 주일도 빠지지 않고 본교회의 주일학교교사로 충성한 교인이 있고, 강원도 영월엔 52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아침에 새벽종을 친 성도도 있으며, 어느 권사는 18년 동안 매일 새로운 Tea를 따뜻하고 맛있게 끓여 새벽기도 하는 목사를 공궤했다고 하고(담임목사가 신문 게재함)  몇 년 동안 소중하게 모은 결혼자금을 건축헌금에 모두 바친 처녀성도, 불신자를 전도하기 위해 신장을 이식해준 성도, 3년에 한 번씩 담임목사의 고급승용차를 새로 교환해주는 성도, 매주일 꽃으로 찬양으로 전도로 헌신하는 성도, 때마다 축구장처럼 넓은 교회 터 잔디를 깎는 성도...등 교회마다 충성되고 신실한 성도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이 있다. 그렇더라도 그러한 공력들이 나무와 풀과 짚(지푸라기)처럼 불에 타 없어질 공력이 있고, 금과 은과 보석처럼 불에 타지 않고 남아 상급이 될 공력이 있다. 당신의 공력이 불에 타지 않는 공력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⑵ 불에 타지 않을 불가소적(不可燒的) 공력들

바울의 말대로 금과 은과 보석의 공력들이다. 성경에 금(Gold)은 479회, 은(Silver)은 316회, 보석(Precious Stone)은 396회가 언급됐고, 성경에 나오는 보석(寶石)만도 19종류(19 Precious Stones in Scripture)나 되지만 본문에 언급된 공력은 성도들의 공력이 금의 공력, 은의 공력, 보석의 공력이란 말이 아니라 금과 은과 보석처럼 불에 타 없어지지 않을 불가소적 공력이란 말이다. 그렇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위하고, 예수님을 위하며, 복음과 교회를 위하고, 주의 종들과 이웃 성도를 위해 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의 공력들은 불에 타버릴 공력도 있고, 불에 타지 않을 공력이 있다. 그래서 많은 공력을 쌓고도 불에 타버리므로 상급이 없을 성도가 있고, 적은 공력을 쌓고도 심판의 불에 타지 않고 공력이 그대로 남아서 상급이 클 성도도 있다. 어찌하든 여러분의 공력은 불에 타지 않는 불가소적 공력이 돼 그날에 예수님께 칭찬과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한다. 

   2. 공력(功力)의 진단(診斷)

그렇다면 오늘까지 당신의 공력은 가소화적 공력이었는가? 아니면 불가소적 공력이었는가? 그것도 아니면 안타깝게도 어떤 공력은 이미 불에 타서 없어졌고 어떤 공력은 남아 있는가? 지금이라도 자신의 공력을 진단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건강하다고 장담했다가 폐암말기 간암말기의 청천벽력을 당해 수습치료의 길이 없어 속절없이 죽는 것보다는 건강진단으로 미리 예방하는 것이 삶의 지혜이듯 성도들이 자신의 신앙공력을 진단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신앙의 지혜이다.

1342년 12월 영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줄리안은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많은 영향을 끼쳤던 영국의 대중적인 신비가며 14세기 여성 영성가였다. 본이름은 모르지만 은둔생활을 했던 교회이름을 따 노르비치 성(聖) 줄리안(St. Julian of Norvich, 1342-1413년)으로 불리는 그녀는 서른한(31세) 살 때 사경을 헤맬 정도로 극심하게 앓던 중 15번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평생 동안 외부와의 관계를 끊고 줄리안교회 다락방 독방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1413년 71세로 죽는 날까지 모든 시간을 묵상과 기도의 시간으로 보내므로 14세기 신비가들 중 가장 바울적인 성자로 추앙을 받는다.

줄리안이 어느 날, 환상 중에 천사를 만나 자기의 열심과 금식과 기도로 채워진 경건생활을 은근히 자랑을 했다. 그러자 천사가 줄리안이 자랑하는 그녀의 열심덩어리를 꺼내 분석을 해서 보여주는데, 그녀의 열심덩어리 100근 속에 그녀의 야심(당파심)이 20근, 명예심이 30근, 강압심이 15근, 의무심이 15근, 불평이 15근이나 되고 순수한 열심은 5근 뿐인 것을 보여주었다. 부끄럼을 느낀 그날 이후 줄리안은 자기교만을 회개하고 죽는 날가지 경건하게 살았다고 한다. 오늘 당신의 순수 열심은 몇 근쯤일까? 하나님이 인정하실 불에 타지 않을 공력은 몇 %나 되겠는가?

20세기 세계적인 주경학자였던 Finis Dake 박사는 20세기 성도들의 공력 중에서 불에 탈 나무와 풀과 지푸라기의 공력과 불에 타지 않을 불소화적 공력을 예리하게 분석해서 글을 남겼는데 이것이 내 신앙공력 축적에 지침이 돼서 소개해 본다.

먼저, 성도들의 공력 중에서 불에 타서 없어질 나무와 풀과 지푸라기의 가소화적 공력과 그 백분비 비율(Percentage)이다. ⑴ 이단적인 잘못된 교리(False Doctrine)가 7% ⑵ 이웃과의 관계에서 이웃에게 손해를 끼치고 어려움을 주는 것(Conduct related to others)이 8%나 되고 ⑶ 시기 질투로 일하는 것(Envying)이 9%나 되며 ⑷ 다툼과 투쟁, 싸움과 불화(Strife)의 공력이 7% ⑸ 타인과의 불일치와 분열, 서로의 의견차이로 나누이는 것(Division)이 8%이고 ⑹ 편견과 편협, 광신과 자기고집(Bigotry)이 7% ⑺ 개인적인 야심(Personal Ambition)이 10%나 되며 ⑻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을 듣기 위해서(Love of Praise)가 8%이고 ⑼ 자기교단에 대한 자만(Pride of Denomination)이 10%이며 ⑽ 악기나 노래나 뛰어난 기술 같은 자기 재능에 대한 교만(Pride of Talent)이 11%나 되고 ⑾ 타인 위에 군림하려는 권위에 대한 사랑(Love of Authority)이 8%나 됐다. 이렇게 해서 20세기 교인들이 붙잡고 있는 불에 타 없어져 버릴 나무와 풀과 지푸라기의 공력이 100% 공력에서 무려 93%나 됐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물질로 몸으로 시간으로 드리는 헌신과 충성의 공력이 80-90%가 헛수고라는 진단이다. 충격적인 진단이며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그다음, 불에 타지 않을 금과 은과 보석의 공력, 불소화적 공력은 ⑴ 하나님 사랑, 예수님 사랑(Love of God)이 4%이고 ⑵ 이웃을 사랑하는 Love of Man이 3%였다. 20세기 뿐 아니라 21세기의 성도들까지도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해서, 나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 때문에 부활 승천하셨으며 나를 위해 다시 오실 예수님을 사랑해서 정성을 다해 헌금을 드리고, 철야기도와 금식기도를 드리며, 선교하고 충성하며, 주일을 성수하고 봉사하는 것이 100%에서 4% 밖에는 안 되고, 예수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내가 손해를 당하고 불이익을 당하며, 원수까지 사랑하여 용서하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 나를 대적하는 자들 위해서 기도해주고 축복하는 Love of Man이 100% 공력에서 3% 밖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접하고 솔직히 김목사는 입에 말이 적어졌다. 할 말이 없어졌고 하고 싶은 말도 적어졌다. 부끄럽게 지금까지 쌓아온 잘못된 공력을 모두 잊어버리고 새롭게 공력을 쌓으려고 몸부림을 치며 경건훈련을 하면서 하루하루 차곡차곡 나의 공력을 쌓고 있다. 사람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던, 사람들이 보든 보지 않던, 성공과 실패를 초월하여 지금 나는 불에 타지 않을 불소화적 공력을 쌓는 일만이 최대관심사이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의 공중 재림으로 들림 받아 주 앞에 서게 되든지, 칠년대환난에 남겨져 주의 일을 하다가 순교를 당하고 주 앞에 서든지, 내가 환난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예수님의 지상 재림 때에 나의 작은 공력들이 불 심판을 잘 견디고 내가 사랑하는 나의 주님께 인정을 받아 천년왕국에 들어가서 보상을 받게 되든지 지금이후의 나의 모든 공력이 금과 은과 보석의 공력, 불에 타지 않는 불소화적 공력이 되는 것만이 김목사의 유일한 소망이요 소원이다.

해리 아이언싸이드 박사는 소년시절에 구두점 직공으로 일한 적이 있다. 그가 하는 일은 소가죽을 구두본에 맞춰 자르고 물에 담궈 흠껏 적신 후 가죽이 단단해지고 다 마를 때까지 계속 두드린 다음 구두창에 못을 박는 일이었다. 그가 한 번은 거리에 나갔다가 다른 양화점 앞을 지나게 됐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직공은 가죽을 두드리지도 않고 물에서 꺼내자마자 구두창에 못을 박는다. 호기심이 생긴 해리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이렇게 소가죽을 두드리지 않고 무조건 못을 박아도 품질 좋은 구두가 될 수 있습니까?”며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빠른 시간에 많이 만들어 내야 돈을 많이 벌지, 그걸 말리고 두드릴 시간이 어디 있는가?”고 대답한다.

해리는 자기 양화점으로 달려가 주인에게 ‘우리도 그렇게 해보자’고 했다. 그러자 주인은 성경 골로새서 3: 23절을 보여주며, “나는 돈을 벌기 위해 구두를 만드는 것이 아니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거지. 만일 심판 날에 주님께서 ‘넌 참으로 비열한 짓을 했다. 최선을 다하지도 않았고’라고 말씀하신다면 어쩌겠나? 나는 주님께서 웃으시면서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시는 말씀을 듣고 싶단다”

원하든 원치 않던 오늘 우리는 자신의 공력을 쌓고 있다. 지금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도, 예배에서 찬양을 드리고 기도를 드리며 감사예물을 드리는 것도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모두 자기공력을 쌓는 것이다. 그리고 공력 쌓는 일은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계속된다. 내 생명의 끝 날이 돼 주님 앞에 서게 되든지, 주님이 오시는 날이 먼저가 돼 주님 앞에 서게 되든지 우리는 매일 매시 공력을 쌓는다.

나의 공력을 불에 타지 않게 바르게 쌓자! 왕위 찬탈 반역을 막기 위해 미리 손을 써 형제들을 죽인 오스만제국 황제술탄들의 음모와 몽골제국의 장래를 위해 아들을 죽여 미리 위험물을 제거한 칭기즈칸의 간교한 지혜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구실로 ‘하나님과 교회의 이름으로’ 8500만에서 1억의 성도들을 죽인 교황청의 종교재판과 기독교박해의 간사한 지혜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타이틀 아래, 자기 의를 앞세워 교회를 박해했던 바울의 열심처럼, 오늘 교회 안에서 자기의 안위와 성공출세를 위해 얄팍한 지혜로 이웃을 죽이고 짓밟는 잘못된 공력들과 ‘꿩 잡는 새가 최고라’며 교회부흥, 선교 구제, 선행의 기치를 내걸고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서 그럴듯한 명분으로 행하는 모든 잘못된 공력을 배설물처럼 버릴 것이다. 잠시 동안의 성공 때문에 하나님의 등불인 양심까지 팔아먹지 말자. 아무리 목적이 좋더라도 방법이 더 좋아야 한다. 주님의 일은 결과도 좋고 동기도 좋아야 하지만 결과보다는 동기가 더 좋아야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있었던 불에 타서 없어질 잘못된 가소화적 공력들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잘못된 열심, 이웃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 시기질투, 잘못된 교리와 이단적 교훈, 편견과 편협의 고집불통, 예수 팔아 성공출세를 꿈꾸는 개인적인 야심, 자기재능의 교만, 권위에 대한 집착과 사랑, 사람에게 칭찬을 들으려는 동기의 헌신봉사 충성도 다 버려야 한다. 그리고 교만과 자랑도 버려야 하고 게으름과 인색함과 불충성과 틀에 박힌 Mannerism의 헌신도 버려야 한다. 그래야 불속에 들어 간 나무와 풀과 지푸라기는 타버리고, 금과 은과 보석은 타지 않고 남듯이 당신의 공력이 주님 심판의 불을 견뎌 이기고 남을 수 있다. 그것이 당신 신앙의 목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그래야 예수의 마지막 칭찬과 상급이 있다.

당신의 불에 탈 가소화적 공력은 어제(Yesterday)까지, 오늘 예배 전까지로 족하다. 이제부터는 안 된다. 오늘 예배 후부터는 안 된다. 불에 타지 않는 공력을 쌓으라. 이제 이후에 공력만이라도 불에 타지 않는 공력이 돼 그날에 우리 예수님께 칭찬과 상급을 받는 축복의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김엘리야 목사(워싱톤주기도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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