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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09월01일 13시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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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밝은 성도가 되자


몇 년 전, 뉴저지에 제인이라는 백인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혼자 살았으면서도 어떤 근심이나 걱정이 없는 사람처럼 항상 평화롭게 웃는 얼굴이었고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인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할머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옆집 사람이 한 달 동안 그녀가 출입하는 것을 보지 못해 궁금해서 제인의 집 문을 두드렸으나 아무 반응이 없어서 경찰에 신고를 했다. 경찰이 집 문을 부수고 들어갔을 때 그녀는 키친 바닥에 잠든 듯 누워있었다. 3-4일이 지난 후 제인의 딸이라는 젊은 여인이 나타났다. 장례식도 없이 Ambulance(구급차)에 실려 간 그녀였는데 상속녀(相續女)가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인부들이 제인 할머니의 집을 청소하면서 구석구석에서 꺼낸 술병이 작은 Pick-up Truck으로 한 트럭이나 됐다고 한다. 그렇게 평화로워 보이며 항상 다정스럽게 웃는 얼굴이었던 그녀가 밤마다 혼자서 독주를 마시며 고독을 달래고 있었던 것이다. 술이 고독의 친구가 될 수 없음에도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인 할머니처럼 고독과 절망에 늪에서 술로 자신을 위로해 보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가?

미국 항공선교회(Mission Aviation Fellowship) 소속이던 다섯 명의 청년들이 아마존 오지 밀림 선교를 하다가 에콰도르 인디언인 와오라니 부족들에게 순교를 당했다. 그 순교자들 가운데 하나였던 네이크 세인트의 아들, 스티브 세인트 선교사의 간증이다. 아버지의 순교 후, 스티브의 가족들은 와오라니에서 아버지를 죽인 민카예 추장과 함께 살면서 선교를 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의 아버지를 죽게 한 아마존 정글과 그 인디언을 용납할 수 없었다. 내가 소년이 된 어느 날, 아버지를 죽인 그는 정글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내게 창 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때 어린 나는 다짐했다. 훗날 내가 크면 이 창으로 당신을 죽이고 말 것이라고...”

스티브는 장성하여 아마존 정글을 떠나 미국으로 가서 공부하게 된다. 대학졸업 후,  안정되고 좋은 직장이 보장됐다. 그런데 어머니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아마존으로 달려간다. 죽어가는 어머니는 스티브에게 “너도 이곳에서 네 아버지가 한 것처럼 아마존 인디안 부족들을 섬겨 달라”고 부탁한다. 그때 분노에 찬 스티브는 차라리 자신을 죽이라고 어머니에게 소리친다. 하지만 십자가의 사랑에 굴복된 스티브는 결국 아버지의 뒤를 따라 미국에서 안정된 재정자문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다 포기하고 아마존의 아우카 부족으로 돌아가 헌신하게 된다. 그리고 현재 스티브와 민카예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하늘가족이 되어 함께 복음을 전하고 있다.

1987년 4월 11일, 북 이탈리아 도시 토리노의 한 아파트 3층 자택에서 세계적인 화학자이자 소설가인 프리모 레비가 뛰어내려 자살을 한다. 유태인이었던 레비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로 ‘이것이 인간인가’, ‘주기율표’, ‘지금이 아니면 언제’ 같은 저서로 자살 당시 이탈로 칼비노와 함께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 최고 작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자살을 한 것이다.

1943년 12월, 그가 24살의 젊은이였을 때, 반파시즘 저항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독일이 폴란드에 세워 4년 사이에 110만 명을 학살한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하던 날, 자신은 운 좋게 살아남고 자기 옆에 서있던 귀여운 여자아이는 엄마 손을 꼭 잡은 채 울면서 끌려가 독살당해 한 줌의 연기로 사라져버릴 때, 어떻게 하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삶의 애착과 살아남고자 몸부림쳤던 그가 2년 1개월(1943년 12월에서 45년 1월까지)만에 마침내 최후생존자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자유를 얻고, 열심히 살아 세계적인 작가가 되고 명예와 부를 누리게 된 67세 전성기에 갑작스런 그의 자살은 세계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술병을 친구삼아 날마다의 밤을 보내다가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 뉴저지 제인 할머니와 아직도 탄탄대로를 달리며 여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삶을 자살로 끝낸 유태인 소설가 프리모 레비의 이야기는 삶의 눈과 영의 눈이 어두웠던 사람들 이야기이고, 스티브 세인트 선교사의 이야기는 영혼과 마음의 눈이 열린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렇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엔 영의 눈이 닫혀 내일을 보지 못하고 칠흑의 밤에서 허우적대는 영적 소경과 영혼의 눈과 마음의 눈이 열린 눈 밝은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공존해 살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제인과 레비의 이야기는 지구촌에서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 진행되고 있는 슬픈 이야기이며, 스티브의 이야기도 계속되고 있는 이야기이다. 당신은 영의 눈과 마음의 눈이 밝은 사람인가, 아니면 영혼의 눈이 어두운 사람인가?

                         눈이 밝은 성도가 되자

사람은 눈이 밝은 사람과 눈이 어두운 사람,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성경이 말하는 눈이 밝고 어두운 것은 시력이 좋고 나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 밝거나 어두운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시력(Eyesight, Visual Power, Sight)이 좋다고 영안(靈眼)이 밝은 것이 아니고 시력이 나쁘다고 마음의 눈이 어두운 것이 아니다.

세계에서 시력이 제일 좋은 사람들은 현대문명에 오염되지 않고 항상 맑은 공기를 마시며 초록의 대지를 누비고 사는 Visual Power(시력) 4.0에서 6.0 심지어 7.0까지의 독수리눈을 가진 몽골리언(Mongolian)이라고 한다. 몽골사람들이 비교적 남들보다 시력이 좋아, 낮에 차 운전을 하면서 길에 있는 못을 보고 피해가는 김목사의 눈보다도 몇 배나 좋은 눈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 모두가 영안이 밝은 것은 아니다. 반대로 시력이 나빠 사물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 그리고 시계(視界) 0의 사람들 중에 영안이 열려 사차원과 오차원의 세계를 보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오늘 나는 여러분과 함께 사람의 눈이 어둡게 되는 성경적인 이유, 눈이 밝아질 수 있는 성경적인 비결, 그리고 영안이 밝은 자들이 받을 축복들을 알아본다.

   1. 영안(靈眼)과 심안(心眼)이 어두워지는 이유들

그렇다면 왜 사람의 마음의 눈인 심안과 영혼의 눈인 영안이 어두워지는가? 육신의 눈은 떠서 물체는 보면서 당달봉사처럼 사물의 이치와 삶의 존재적인 의미 그리고 영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Spiritual Blind(영적 소경)의 성경적인 이유는?

   ⑴ 태생적인 소경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신 이유 중 하나는 ‘영적으로 눈이 먼 자들을 다시 볼 수 있게 하기위해서’(Recovering of sight to the blind; 눅 4: 18)였고,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울을 택해 사도로 만드신 것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의 눈을 뜨게 하여(To open their eyes) 어둠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였다(행 26: 17-18) 그렇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태생적인 영적 소경의 존재로 태어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가 어떤 사람이든 모두 Spiritual Blind(영적인 소경)이고, 신령한 사차원 오차원의 영적인 세계도 볼 수 없는 존재다. 따라서 사람은 복음을 통해 빛이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할 때만 비로써 영의 눈이 떠지게 된다. 

   ⑵ 죄의 유혹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롯의 집을 방문한 천사들을 보고 동성연애의 유혹을 받아 죄를 지으려다가 집단적으로 저주를 받고 소경이 됐다(창 19: 11)가 유황불 심판으로 멸망을 당했고, 사사 삼손은 들릴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므로 블레셋 군사들에게 사로잡혀 두 눈이 뽑혀 죽는다(삿 16: 21) 죄의 유혹은 누구나 받을 수 있지만 유혹에 지는 사람은 영적인 소경이 된다. 그래서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지구촌의 유일한 하나님의 선민, 유다가 원수 바벨론에게 맥없이 멸망당하여 화려했던 솔로몬 성전이 불에 타 한줌의 잿더미가 되고, 성전의 금은보화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 오늘 같은 처절한 비극을 당하므로 우리 마음이 피곤하고 우리 눈이 어두워진 것은 조상들이 죄의 유혹에 졌기 때문이라고 절규한 것이다(렘애 5: 16-17) 오늘도 그 죄가 어떤 죄든 죄의 유혹에 지는 사람은 영의 눈이 어두워진다. 죄의 유혹들을 이기는 용기와 지혜의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⑶ 지도자를 잘 못 만날 때

전제정치 왕조시대의 아람군대는 왕과 군대장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상명하복만이 살아남는 길이었기 때문에 전쟁마다 지면서도 아람군대는 벤하닷 왕의 명령으로 이스라엘을 침공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스라엘과의 전면전이 아니라 선지자 엘리사가 전쟁기밀을 미리 알아내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주므로 전쟁을 이기게 한다는 첩보를 받고 아람군대는 도단에 있는 엘리사를 포위한다.

아람군대가 포위망을 좁혀와 엘리사가 생포되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다가왔을 때, 엘리사는 “Strike this people with blindness, I pray”(내가 간구하오니, 저들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는데 이 기도가 끝나자마자 아람군대가 장군에서 졸병까지 집단적으로 모두 소경이 됐다. 그래서 엘리사는 화살 한 개 쏘지 않고 소경이 돼 사로잡은 전쟁포로 아람군대를 수도 사마리아까지 데려갔다(왕하 6: 18- 19) 그런 다음, 포로로 끌려온 아람군대 소경들을 사마리아에서 눈을 고쳐서 보게 하므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고 다시는 이스라엘을 침공하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아람군대를 집단적으로 소경이 되게 한 기적과 그들의 눈을 고쳐서 다시 보게 한 기적은 엘리사가 행한 32번의 기적 중 스무(20)번째와 스물한 번째 기적이다(왕하 6: 20-23)

그렇다. 아람군대 군인들처럼 지도자를 잘 못 만나면 집단적으로 눈이 어두워지고 소경이 된다. 그래서 독재자를 지도자로 만난 이집트, 리비아의 권력자들과 군인들이 민중혁명으로 처형당했고, 시리아 대통령 경호군인들이 눈이 어두워 이성을 상실한 채, 신경가스까지 사용해 수천 명을 사살하는 만행을 저질러 지구촌응징을 눈  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성경대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 눈 밝은 지도자를 만나 눈들이 밝아지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한다.

   ⑷ 계속되는 불순종
 
“여호와께서 또 너를 미침과 눈멂과 경심증(驚心症)으로 치시리라”(The Lord will smite you with madness and with blindness and with astonishment of heart; 신 28: 28) 본문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계속해서 불순종할 때, 정신이상 정신착란 정신분열의 미치는 것과 눈이 멀게 하는 저주와 깜짝깜짝 놀래는 경심증(솨가: “정신이 혼란해져 정상적인 의식 활동이 불가능한 상태”)으로 징계하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신 28: 15-68절까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무려 112가지의 저주재앙과 징계채찍을 내리겠다고 했는데 첫 번째 단계는 15-20절까지에서 15가지(15 Curses in 28: 15-20)의 저주, 두 번째 단계는 21-29까지에서 30가지 재앙, 세 번째는 30-44까지에서 26가지 저주재앙, 네 번째는 48-57까지에서 21가지 징계채찍, 다섯 번째는 58-68까지에서 20가지 재앙, 도합 112가지 저주재앙이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들의 불순종 정도(程度)가 크면 클수록, 길면 길수록 하나님의 저주와 채찍의 강도(强度) Level(수준)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사람의 정신상태가 불안해지고 정신이 분열하거나 정신착란 정신이상이 되는 미침과 점점 눈이 어두워지다가 시력을 잃고 눈이 멀게 되는 것과 시도 때도 없이 불안해하거나 깜짝깜짝 놀래는 경심증은 불순종의 두 번째 단계에 나타나는 저주재앙으로 112가지 저주에서는 39, 40, 41번째에 해당하는 저주이다. 치아를 관리하지 않으면 치석이 생기고 충치가 생겨 이를 뽑아내야 하고, 썩는 물을 방치하면 녹조현상이 생겨 고기들을 죽이고 생태계를 파괴하듯, 불순종이 누적될수록 하나님의 저주와 징계채찍은 점점 더 심해진다. 그리고 불순종이 계속되면 영안도 마음의 눈도 어두워진다.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의 경고말씀을 여러 번 들었으나 끝까지 거역하고 불순종한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군대에게 사로잡혀 두 눈을 뽑히고 쇠사슬로 결박돼 짐승처럼 끌려가 죽는 날까지 감옥생활을 했음(렘 52: 11)을 기억하고 불순종의 죄를 회개하므로 눈이 밝아지는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⑸ 이웃을 미워할 때

요한은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라”고 했고(요일 2: 9)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The darkness has blindness his eyes; 요일 2: 11)고 했다. 이웃을 용서하지 않고 억울한 마음을 가슴에 품은 채 증오와 미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지옥의 생활이며, 스스로 어둠에 붙잡혀 사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은 영의 눈과 마음의 눈이 어둡게 된 사람이라는 말씀이다.

칠학년을 앞에 둔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김목사가 느끼는 것이 있다. 헛되고 무상한 지난 세월에, 나를 해치고 무너뜨리려 하고, 비난했던 사람들을 왜 좀 더 사랑하지 못했나 하는 후회이다. 뒤돌아보니 인생이 그렇게 긴 것도 아닌데...미련하게 살아온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여러분, 복수나 미움 대신에 따뜻한 마음의 사랑을 되돌려 주는 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미운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 원한과 증오를 품고 사는 것은 암 덩어리를 가슴에 안고 사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미운 사람이 망하는 것을 보기 전에 내가 먼저 병으로 쓰러지거나 스스로 불행을 끌어안고 살다가 파멸된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영과 마음의 눈을 밝게 하지만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눈을 멀게 한다. 용서받을 수 없는 내 죄를 예수님께 용서받은 것처럼 나도 자신과 이웃과 원수를 용서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한다.

1979년, 세 살짜리 조엘 소넨버그는 고속도로에서 발생한 연쇄추돌 사고로 전신의 85%에 3도 화상을 입었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불에 녹아 붙어버리고 코와 입, 귀와 눈꺼풀도 형체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50여 차례의 수술을 받은 그는 거의 2년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친구들과 마음껏 뛰어 놀아야 할 유년시절을 독한 약 냄새와 하얀 붕대를 벗 삼아 보낸 것이다.

병원을 나와 세상으로 나온 뒤에도 불운은 계속됐다. 화상으로 인한 흉측한 외모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피하거나 모진 말로 괴롭혔다. 그러나 그를 위해 늘 기도하고 끊임없이 격려해준 가족들의 도움으로 조엘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켰다. 자신을 외면하고 멀리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고 더욱 따뜻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다. 발가락, 손가락이 없지만 축구선수와 농구선수로 활약했다. 산악자전거와 클레이 사격을 즐기며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꿔 나갔다. 이런 노력으로 고등학교 때는 전교 학생회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끔찍한 교통사고가 일어난 지 18년 후,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낸 운전자를 처벌하는 재판이 열렸다. 그때 증인석에 선 조엘은 가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증오심으로 소중한 나의 남은 인생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미움과 증오는 더 큰 고통을 낳을 뿐이니까요”

날마다 기도하면서 자신이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감사하게 됐다는 조엘 소넨버그는 용서와 사랑으로 불운한 삶을 행복으로 바꾼 사람이다. 용서는 상대를 위해 한 것이었지만 그 결과는 자신에게 행복과 평안으로 돌아왔다. 그렇다. 당신의 인생은 미움과 증오로 세월을 허비할 만큼 길지 않다.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도 다 살 수 없는 짧은 인생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눈 밝은 성도로 살아가기를 축원한다.

   ⑹ 외식적인 신앙(사 29: 9-14절)

선지자 이사야는 자기가 살았던 시대에 하나님의 종들인 선지자(The Prophet)와 선견자(The seer)들과 장차 다가올 모든 시대와 그리고 종말시대인 말세에 하나님의 종들인 목사들이 영적인 소경이 돼 하나님의 묵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된 네 가지 이유(4 causes of spiritual blindness)를 이렇게 말했다.

   ① 입으로만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때문이다
      Drawing near God with the mouth alone: 사 29: 13)
   ② 입술로만 하나님을 존경할 뿐이다
      Honoring Him with the lips only
   ③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다
      Removing the heart far from Him
   ④ 사람의 교훈 정도로만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이다
      Fearing Him only after the precept of men

한 마디로 시대마다 하나님의 종들이 외식(外飾) 때문에 영적인 소경이 된다고 한 것이다. 예수님도 외식하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율법학자들을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책망했다(마 23: 16, 17, 19, 24, 26) 외식하는 자, 호이 휘포크리타이는 “타인의 흉내를 내는 사람”, “배우”란 뜻이다.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각본에 따라 울고 웃는 배우처럼,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믿음이 좋은 사람인척, 기도하는 사람인척, 경건한 목사인척, 헌신된 선교사인척, 사랑이 많은 성도인척... 외식하는 사람이 바로 눈이 어둔 사람, 영적 소경이란 말이다.

   ⑺ 신앙 인격성장의 중단

고급식당 중엔 여러 가지 음식을 한꺼번에 차려놓고 손님들이 맘대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하는 식당도 있지만, 맛있는 음식을 한 가지씩 Serving해서 손님들이 식도락을 즐기며 골고루 맛을 보고 즐거움을 느끼도록 해주는 Full Course Serving 식당도 있다. 성도의 신앙인격도 어느 날 한꺼번에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단계와 과정을 거치는 Full Course로 성장한다. 베드로는 성도들의 Full Course 신앙인격성장을 ‘믿음에서 덕으로, 덕에서 지식으로, 지식에서 절제로, 절제에서 인내로, 인내에서 경건으로, 경건에서 형제우애로, 형제우애에서 사랑으로’(벧후 1: 5-6)라고 했다. 신앙인격의 계층적 단계를 믿음에서 사랑까지, 일층에서 팔층까지로 설명한 것이다.

경부선 KTX열차가 서울을 출발하자마자 부산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서울을 출발해 영등포, 수원, 대전을 지나고 대구를 통과해 마침내 부산에 도착하듯 성도들의 신앙인격성장은 반드시 믿음에서 출발해 덕, 지식, 절제, 인내의 단계를 거치고 경건과 형제우애의 과정을 통과한 다음, 마지막으로 사랑에 도달하는 정해진 Routine (절차와 수순)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사랑에 도달한 성도를 ‘신의 성품,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한 자’(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 벧후 1: 4)로 말했고, ‘주 예수를 아는데 게으르지 않은 부지런한 성도’, ‘열매 있는 성도’,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실족하지 않을 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성도’라고 했다. 그리고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며 앞을 내다볼 줄 모르는 근시안(近視眼)의 사람이라”(For he who lacks these qualities is blind or short-sighted; 벧후 1: 4-11절)고 했다.

믿음에서 출발했지만 덕과 지식과 절제에서 머물러 있다면 영적으로 아직까지 시력 0.1, 0.2의 근시안이고, 인내와 경건까지 와서 멈춰있는 성도는 0.7, 0.8의 근시안이며, 형제우애에서 멈춘 사람은 시력 0.9의 근시안이다. 미워하거나 증오할 원수가 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 할 수 있는 사랑에까지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영적영안의 시력은 근시안이다. 원수를 사랑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나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나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눅 6: 27-28) 사랑에까지 도달한 사람만이 Spiritual Visual Power가 1.0, 2.0, 3.0, 4.0, 5.0의 눈 밝은 성도란 말씀이다. 신앙인격이 성장하지 않으면 영안이 어두워진다. 당신의 화려한 신앙경력만큼 신앙인격이 성장하기를 축원한다.

그 외에도 ⑻ 신앙이 교만할 때 영적인 소경이 되고(계 3: 17) ⑼ 자기 이익만 도모하는 탐욕자가 될 때(사 56: 10) ⑽ 뇌물을 좋아하여 받을 때(출 23: 8, 삼상 12: 3) ⑾ 복음 전도를 훼방할 때(행 13: 11) ⑿ 육체적인 본능의 욕망(엡 5: 3-5)인 어둠에 붙잡힐 때(요 12: 35-36) 눈이 어두워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우리 눈을 어둡게 할 것들, 우리를 영적인 소경으로 만들 유혹의 요소들이 지뢰밭처럼 꽉 들어차있다. 이 모든 것들을 이기고 눈이 밝은 성도로 살아가기를 축원한다.

   2. 눈이 밝아지는 비결

우리의 마음눈과 영의 눈이 유리바다처럼 맑고 밝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⑴ 예수를 만나야 한다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기적은 여러 번 있다(마 9: 29, 20: 30, 막 8: 25, 10: 46, 눅 18: 35. 요 9: 6 등) 그들은 하나같이 예수를 만나서 눈이 뜨는 기적을 체험했다. 아담의 범죄 이후 태어날 때부터 태생적인 소경으로 출생하는 인간은 예외 없이 인류의 참 빛, 예수 만남을 통해서만 영의 눈이 떠진다. 예수 없이 영의 눈이 떠진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고 앞으로도 아무도 없다. 그래서 사람이 일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예수 만남의 사건’은 인생최대의 사건이다.

당대 최고의 고위 사제들과 율법학자들로 구성된 71명의 산헤드린 공회원 중 한 사람이었던 니고데모가 예수를 만남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중생하는 도리를 깨닫고 새 사람이 되므로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진리 위에 진리, 옥상옥(屋上屋)의 진리를 깨닫고 그 눈이 밝아졌던 것처럼 예수를 만남으로 Born-Again의 영안이 열리는 기적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⑵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일용양식처럼 먹어라

다윗은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The statutes of the Lord are right, rejoicing the heart)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한다”(The commandment of the Lord is pure, enlightening the eyes; 시 19: 8)고 말했다. 야훼의 계명은 순결하여, 야훼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을 계발하고 무지와 미신에서 깨어나게 한다는 고백이다. 계속해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은 금(金)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다”(Sweeter than honey and the honeycomb; 10절)고백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꿀과 석청보다 더 달다고 했고 또 다른 시편저자는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다”(Yes, sweeter than honey to my mouth; 시 119: 103)고 고백했다.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하루 종일 굶다가 산골짜기 돌 틈에서 흘러나오는 석청을 지팡이 끝으로 찍어 먹은 후 눈이 밝아졌다고 했다. 그렇다. 요나단이 꿀을 먹은 후 눈이 밝아졌듯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먹으면 영의 눈과 마음의 눈이 밝아진다. 그래서 선지자 에스겔과 사도 요한은 말씀의 두루마리를 먹자 그 배에서 꿀같이 달았고(겔 3: 3, 계 10: 10), 그 눈들이 밝아져 수천 년 후에 일어날 세기말적인 묵시들을 보았고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천기누설의 예언들을 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도 지능과 지혜가 턱없이 부족한 목사인 것을 자신도 인정하지만 나에게 많은 계시들을 깨닫게 하시고 전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음식처럼 날마다 먹어버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말에 있는 김목사도 감히 시편저자처럼 “내가 주의 법(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O how I love Thy law!)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It is my meditation all the day) 주의 계명(誡命)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證據)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法度)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시 119: 97-100)를 고백한다. 이것은 나의 자만이나 교만이 아니다. 구약을 한 달에 한번, 신약을 두 달에 열 번을 읽으면서 깨달은 은혜의 고백이다. 주 앞에 서는 날까지 이 일을 계속하리라 날마다 다짐하는 김목사 위해 기도를 부탁한다.

   ⑶ 부르짖어 기도하라

예수님께 고침 받은 소경들은 “Lord, have mercy on me, Son of David”(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마 9: 27, 20: 30, 막 10: 47, 48, 눅 18: 38, 39)를 소리쳐 기도했던 자들이었다. 다윗도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Enlighten my eyes!)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하오며, 두렵건대 나위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겼다 할까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이 기뻐할까 하나이다”(시 13: 3-4)라고 자기 눈 밝아지기를 부르짖어 간구했다. 영안과 심안이 밝아지기를 부르짖어 간구하는 성도들의 눈들이 밝아지는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⑷ 마음껏 울어라

1997년,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때, 영국의 우울증환자가 반으로 줄었다는 보고가 있다. 순탄치 않았던 그녀의 일생과 사고현장이 방송되고 그녀의 장례식이 거행되면서 영국인들은 다이애나의 죽음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는데 그 후, 우울증을 호소하며 정신과를 찾는 사람들이 반으로 줄었다는 것이다. 다이애나의 죽음을 원인으로 시작된 눈물이 태풍처럼 개개인의 감성 밑바닥까지 훑고 가면서 영국인들의 가슴속 깊이 쌓였던 스트레스와 분노와 아픔들이 함께 씻겨 내려갔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다이애나 효과’ (Diana Effect), 다이애나 베니핏(Diana Benefit; 유익 또는 은혜), ‘다이애나 신드롬’(Diana Syndrome)이라고 부르는데, 나를 위해 울든, 남을 위해 울든, 무엇 때문에 울든 시작점은 달라도 눈물로 인해 인간의 마음이 거쳐 가는 간이역과 종착점은 ‘개운함→행복→건강’이라는 것이다.

암 전문의로 많은 암환자를 만나 대화를 나눴고 그 과정과 치유법을 소개한 ‘암 치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암을 손님처럼 대접하라’, ‘울어야 삽니다’ 등의 베스트셀러를 낸 암 전문의 이병욱 박사는 “가장 정직하게 눈물을 흘리는 시간은 환자에게 꼭 필요하다. 모든 것을 토해내듯 울라.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은 상처들을 완전히 끌어올려 쓸어내지 않으면 마음에 병이 생기고 이것은 곧 몸의 병이 된다. 눈물을 흘리면 면역 글로블린G 같은 항체가 두 배 이상 증가하면서 암세포를 억제하거나 감소시킨다. 병이 치료되길 원하면 마음껏 울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울려면, 횡격막(橫膜隔)이 떨릴 정도로 크게, 오래 울라”고 말한다.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사라의 집에서 쫓겨난 하갈은 브엘세바 들판에서 방황한다. 집에서 가지고 출발한 가죽부대의 물을 떨어졌고, 뜨거운 사막 들판 어디서도 마실 물을 구할 수 없게 된 하갈은 아들과 함께 목 놓아 방성대곡하며 운다(She lift up her voice and wept: 창 21: 16, 19) 그러자 야훼의 사자 예수님이 하갈의 눈을 밝혀 맑고 시원한 샘물을 발견케 하므로 하갈 모자는 살아난다.

그렇다. 슬퍼도 울고 기뻐도 울며, 즐거워도 울고 원통해도 울라. 사람들은 삶의 골목에서 순간순간 힘들어질 때, ‘어디 한적한 곳에 가서 실컷 울다 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울고 나면 가슴이 시원해졌다고 한다. 여러분들이 TV 드라마에서 슬픈 장면을 보고 울거나 슬픈 노래를 듣고 울거나 기쁜 일이 있어서 울어도 마음이 시원해지거든 하물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인생의 모든 아픔을 하나님께 호소하며 통곡할 때이겠는가? 통곡과 눈물의 기도로 마음의 눈이 열리고 영혼의 눈이 열리는 기적들이 일어나기를 축원한다.

그 외에도 벳세다 소경은 예수님의 안수기도를 받고 눈이 떠졌고(막 8: 22-26) 바울은 다메섹의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고 눈이 떠졌으며(행 9: 10-19)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 후, 주막에서 예수님의 축복기도를 받고 그 눈들이 밝아졌다(눅 27-31) 주의 종들의 안수기도를 받아 눈들이 밝아지고 축복기도를 받아 눈들이 밝아지는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3. 눈 밝은 성도의 의무

마 6장은 산상보훈 중에서 ‘성도의 사대 의무’를 강론하신 예수님의 교훈이다. 예수님은 거듭난 성도는 마땅히 ⑴ 구제의 의무(마 6: 2-4) ⑵ 기도의 의무(5-15) ⑶ 금식의 의무(16-18) ⑷ 천국 적금의 의무(19-34) 사대의무를 행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과 헌금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취사선택 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지금까지 국방의 의무, 교육의 의무, 납세의 의무, 근로의 의무, 환경보존의 의무를 국민의 5대의무로 지키고 있는데, 그 중에도 자기수입에서 세금을 내는 납세의무와 젊은 청년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복무를 해야 하는 국방의무, 자녀들을 교육하는 교육의 의무는 의무 중에 의무이다. 마찬가지로 구제, 기도, 금식, 헌금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당연히 지켜야 할 의무다. 그리고 그 의무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의무를 행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면 이미 자기 상을 받은 것으로 그들이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급은 없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의무인 천국적금의 의무, 헌금의 의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눈이 밝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의무이며 특권이다. 영안이 밝은 사람, 영의 눈이 밝은 사람만이 하늘나라에 적금을 제대로 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눈 밝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삶의 Priority가 된다. 눈이 밝은 성도로 한 평생 밝게 살다가 영원한 천국에서도 밝게 사는 축복들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김엘리야 목사(워싱톤주기도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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