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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08월03일 19시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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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벨의 아내 야엘의 축복
많은 돈 들여 비싸고 좋은 약 사서 복용하거나 비싼 영양식 먹는 대신, 돈 들이지 않고 건강하게 되는 ‘건강 박수’를 소개한다. 첫째, 기도박수(祈禱拍手)이다. 기도하듯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후 열 손가락을 마주대고 양손을 힘차게 부딪치는 박수다. 기도박수 때 양손에서 생기는 마찰진동은 손바닥의 모든 경혈을 자극해 혈액순환이 잘되게 하는데 기도박수는 혈액순환 장애로 생기는 손발 저림 현상이나 신경통에 효과적이고, 특별히 피부를 아름답게 꾸미려는 여성들에게 효과가 좋다. 둘째, 손가락 끝 박수이다. 양손의 손가락 끝부분만 댄 채로 치는 박수로, 거의 소리가 나지 않는 박수지만 시력이 나쁘거나 만성비염이 있는 사람, 코감기에 자주 걸리는 사람, 코피를 자주 흘리는 사람에게 효과가 좋은 박수이다. 셋째, 손바닥박수이다. 손가락을 쫙 펴고 손가락을 약간 뒤로 젖힌 다음 손목은 서로 붙인 채 손바닥으로만 치는 박수이다. 손바닥박수를 치면 사람의 오장(五臟)인 폐 심장 비장 간장 신장의 다섯 가지 내장 기능이 자극을 받아 내장기능을 튼튼하게 해준다.

넷째, 손목과 연결된 손바닥 끝부분을 서로 마주치게 하는 손목박수이다. 박수소리는 둔탁한 소리밖에 낼 수 없지만, 이 부분이 방광과 연결돼 있어 방광을 자극하게 하고 그 결과로 생식기 기능과 정력을 높여준다. 다섯째, 주먹박수이다. 주먹박수는 말 그대로 주먹을 쥔 후 양손을 맞대고 손가락이 닿는 부분끼리 부딪치게 하는 박수이다. 주먹박수는 처음엔 손가락 뼈마디가 조금 아프지만 점점 익숙해지면 목탁소리 비슷한 소리가 나면서 아픈 통증이 없어지고 두통이나 어깨 부위 통증이 치료된다. 여섯째, 손가락박수이다. 손을 마주 보게 한 상태에서 손바닥 끝부분과 손가락은 붙이고 손바닥부분만 살짝 뗀 다음 손가락끼리 부딪치는 박수다. 손가락박수는 심장과 기관지를 자극해 이와 관련된 질병을 예방해주고 치료하는데 좋은 효과가 있다. 일곱째, 손등박수이다. 한쪽 손등을 다른 한 손바닥으로 때리듯 치는 박수로 양손을 번갈아가며 치면 허리와 등, 척추건강에 좋고 요통이 심한 사람도 꾸준히 하면 효과가 좋다. 이것은 전 UC버클리 대학 어윤용 교수의 ‘건강 박수’를 소개한 글이다.

박수를 치고, 손바닥을 치면 건강에 좋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손바닥을 치는 박수(拍手)의 종류가 여러 가지이고 그 효과도 다양하고 크다고 하는 것은 김목사도 새롭게 알게 된 지식이다. 이렇게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이 손바닥을 치는 박수의 건강비법을 현대의학으로 발표하기 3,000년 전, 이미 성경은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O, Clap your hands all peoples! Shout to God with the voice of joy; 시 47: 1)라고 선언했다. 우리가 손바닥을 치고 박수를 치며 즐거운 소리로 외쳐야할 이유는 지존하신 야훼하나님은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시기 때문이며, 그렇게 손바닥을 치며 즐겁게 외칠 때, 야훼하나님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열방을 우리 발아래 복종케 하시며(He subdues people under us)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기 때문이라”(시 47: 2-4)고 선언했다. 그렇다. 우리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박수치며 손바닥을 치면서 야훼하나님을 찬양할 때, 질병치료와 건강축복은 부수적인 것이며 근본적인 축복은 하나님께서 만민과 열방을 우리에게 복종케 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야곱의 영화(The Glory of Jacob)를 기업으로 택하여 주시는 것이다. 당신이 부르는 찬송박자에 따라서 기도박수, 손가락 끝 박수, 손바닥박수, 손목박수, 주먹박수, 손가락박수, 손등박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아울러 영혼과 육신이 복을 받는 성도가 되길 축원한다.

                       헤벨의 아내 야엘의 축복

사사기 5장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왕 야빈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20년 동안의 가나안 학정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노래한 내용이다. 여선지자요 사사였던 여걸(女傑) 드보라는 이스라엘과 가나안과의 전쟁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노래로 승리의 시를 기록했는데, 이 시를 통해서 드보라는 무엇보다 먼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송한다(2-5, 9, 11, 13, 31절) 그다음 이 전쟁에 즐거움으로 헌신하여 적군과 싸운 이스라엘 두령들과 방백들 그리고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마길, 스불론, 잇사갈 지파를 축복한다(2, 9, 14, 15, 18절) 그러나 참전 결심은 했었지만 이것저것 계산하고 망설이다가 불참한 르우벤 지파와 자기들의 이기적인 생업에만 열중하고 전쟁을 수수방관했던 길르앗, 단, 아셀 지파의 나태함을 비난했다(16, 17절) 그리고 이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의 주역이 됐던 헤벨의 아내 야엘의 업적을 노래하고 그녀가 받을 축복을 노래한다(24-31) 야엘의 축복을 노래한 본문은 우리에게 몇 가지 귀한 교훈을 준다.

   1. 삶의 절차와 신앙의 Routine(과정)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다스린 기간은 대략 30년이 되고, 여호수아보다 늦게 태어나 영적지도자로써 백성들에게 신앙적인 영향을 미쳤던 장로들이 여호수아가 죽은 후 생존했던 기간은 20년 정도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 야훼하나님을 섬긴 기간은 대략 50여년이 된다. 그래서 위대한 신앙인물이며 역사의 산 증인들인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죽자마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의 길을 버리고 타락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을 보면서 지도자 한 사람의 죽음이 국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가를 배우게 된다.

여호수아 이후, 초대사사 옷니엘부터 열여섯 번째 사사며 선지자였던 사무엘까지 400여 년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타락→하나님의 책망과 징계→백성의 회개와 부르짖음→하나님의 구원사역’의 Routine으로 반복된다(사 2: 11-23) 그러나 사실은 사사시대 400년 뿐 아니라 사울부터 시드기야까지 왕정시대 400-500년의 역사도 ‘축복과 평안→범죄와 타락→책망과 징계→회개와 부르짖음→하나님 구원역사’의 Routine으로 반복됐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판에 박히듯 정해진 절차의 신앙 Routine은 사사와 이스라엘 국가뿐 아니라 믿음의 선진들 개개인의 신앙생활에서도 발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으며, 다윗이 그랬고 엘리야와 예레미야도 그랬으며 신약의 사도들도 그랬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의 믿음생활도 예외 없이 이 Routine에 의해 다람쥐 채 바퀴 도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신앙엔 올라감과 내려옴의 Up and Down이 있다. 뜨거울 때가 있고 식을 때가 있다. 열심일 때가 있고 냉랭할 때가 있다. 새벽기도가 날마다 기쁘고 새로울 때가 있고, 새벽기도가 지겹도록 괴롭고 귀찮을 때가 있으며, 주일날이 사랑하는 애인 기다리듯 손꼽으며 기다려지는 때가 있고 너무 빨리 주일이 와 한 달에 한번만 있었으면 좋겠다하는 때가 있다. 오늘, 지금 당신의 신앙은 ‘축복→게으름→징계→회개→구원’의 Routine 중 어디를 지나가고 있는가?

똑같은 오솔길, 매일 달리는 고속도로, 날마다 지나쳤던 길이지만 항상 빨리 달렸을 때는 몰랐었는데 Traffic에 걸리거나 앞 차 사고로 차들이 정체돼 거북이 속도로 서행하게 되면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이 보이고, 여기에 이런 것이 있었나할 정도로 전혀 새롭고 다른 것들을 발견하게 되듯, 내가 처한 신앙 Routine에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즐겁게 살지만 곤고한 날에는 깊이 생각하는 지혜”(전 7: 14)를 얻으므로 귀한 것들을 깨닫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한다.

초대사사 옷니엘은 메소포타미아 학정 8년에서, 왼손잡이 사사 에훗은 모압의 18년 압제에서, 여선지 드보라와 바락은 가나안의 20년 폭정에서, 므낫세 지파의 깁보르, 큰 용사 기드온은 미디안의 7년 학정에서, 천출(賤出) 사사 입다는 블레셋과 암몬 자손의 십팔(18) 년 학대에서 그리고 역발산기개세한 괴력의 사사 삼손은 40년의 블레셋 폭정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했다. 이러한 구원역사는 이스라엘의 깨달음과 회개가 빠르면 짧은 기간의 징계채찍의 고통이 있었고, 이스라엘의 깨우침과 회개가 늦으면 늦는 것만큼 사사를 일으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역사도 늦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 지금 당신의 신앙 Routine 궤적(軌跡)이 징계와 채찍 중에 있다면 속히 회개와 부르짖음으로 그곳을 탈출해 나와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의 Routine 안으로 들어오라. 당신의 깨달음과 회개와 부르짖음이 빠르면 빠를수록 당신의 육체와 삶을 치료하고 고치며, 회복시키고 축복을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도 더 빠르게 나타날 것이다.

   2. 하나님이 팔아버린 이스라엘
사사기 3: 8과 4: 2, 10: 7에서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우상숭배를 했을 때, 이스라엘을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팔아버렸고,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팔아버렸으며, 블레셋과 암몬 자손의 손에 파셨다고 했으며, 사사기 6: 1과 13: 1, 16: 23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악한 죄를 지었을 때,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고,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셨다고 했으며, 사사기 2: 14에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다”고 하므로 대적에 손에 붙이시는 것과 대적에게 팔아넘긴 것을 동의어로 사용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대적의 손에 붙이는 것은 대적과 원수들에게 노략을 당해도 속수무책인 상태를 말하고, 파는 것(Sold, 마카르)은 “노예로 넘긴다”는 말로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을 대적에게 싼값에 팔아넘겨 소유권을 넘겨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며 죄를 지을 때, 이스라엘을 대적의 손에 붙여서 노략을 당하게 하셨다. 집과 재산과 아내와 남편 자녀를 빼앗기게 했고, 빼앗기면서도 ‘아야!’ 소리도 못하게 했다. 그래서 역사에 두 번 다시 지을 수 없는 최고의 성전인 솔로몬 성전이 하루아침에 불에 타 무너져 한 줌의 잿더미가 되게 하셨고 성전 안의 금과 은 모든 보화도 송두리째 바벨론으로 가져가게 하셨다(단 1: 2) 그리고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 그들을 대적의 손에 팔아버려 다시는 대적을 이기지 못하게 하셨다.

38년 전, 제가 가난한 유학생으로 공부할 때, 최고의 소원이 찌그러진 차라도 내 차를 가져보는 것이었다. 밤에 버스를 타고 LA Down Town에서 빌딩 청소를 하고, 함께 청소를 하는 친구 목사가 Western 6가까지 Ride 해주고 헤어지면, (새벽 1-2시엔 시내버스가 없어) Wilshire 거리에서 Western 54가까지 두세 시간 이상 거리도 길도 사람도 캄캄한 지천에 위험이 깔린 흑인 동네를 걸어서 집으로 갈 때, 달과 별을 보면서 하염없이 울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소원은 영주권과 내 차였었다.

결혼 초에도 차가 없이 버스를 타고 시장을 볼 때면 차 있는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한국일보에서 중고차를 판다는 광고기사를 보았다. 그 중고차판매 광고내용이 ‘정말 아까운 차!’였다. 형편이 어려웠던 우리 부부는 거금 1,000불에 그 차를 구입했는데 차를 처음 샀을 때, 내 차라는 기쁨에 너무 좋아서 밤중에도 자다가 일어나 차를 확인해보고 새벽에도 아파트 차고에 가서 차를 확인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가 Spanish가 많이 살고 있는 동네여서 신경을 많이 썼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런 차는 거저주어도 가져갈 사람이 없는 똥차였는데도 당시 나에겐 재산목록 1호였기에 그 차를 애지중지했었다.

그런데 그 차가 전주인의 말대로 ‘정말 아까운 차’였을까? 전주인은 팔기 위해 기발한 문구로 광고를 냈지만, 우리에겐 ‘정말 피를 본 차’였다. ‘정말 아까운 차’를 탄 1년 반 동안, 길을 가다가 아무데서나 멈춰서는 일은 다반사였고, 그때마다 아내는 운전대를 잡고 나는 뒤에서 밀어서 Gas Station까지 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때는 금식 사흘째 되는 날에 차를 밀어서 언덕을 넘어야 하는 때도 있었다. 운전초보에 차 기능도 알지 못하는 나로썬 짜증이 나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했으며, 이것 고치면 저것이 문제고, 저것 고치면 그것이 고장 나니 쉴 새 없이 나오는 수리비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정말 아까운 차’는 차라리 새 차를 사는 것이 훨씬 나을 정도로 우리 부부에게 고생을 많이 시킨 차였다.

그 후, 38년 동안 가능하면 중고차는 사지 않으려고 마음먹고 살아왔지만 우리 부부는 가끔씩 ‘정말 아까운 차’를 농담으로 이야기 하면서 웃는다. 여러분, 그 사람이 그 차가 정말 아까운 차였으면 팔았겠는가? 아마 팔지 않고 좀 더 탔을 것이다. 어떻든 그가 싼 값에 팔아넘긴 것은 더 이상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였다. 

그렇다. 우리는 입던 옷이나 소장하고 있던 물건이 싫증나거나 사용가치가 떨어지면 Yard-Sale로 값싸게 팔아버린다. 몇 년을 애마로 타던 차도 싫증나면 For-Sale로 팔아버린다. 이렇게 쓸모없다고 생각되거나 더 좋은 것이 나타나면 가지고 있던 것을 팔아치운다. 심지어 아떤 것은 돈도 받지 않고 구세군(Salvation Army)이나 Veterans Administration(재향군인 원호청)이나 Purple Heart에 Donation(기증)해 버린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를 팔아버리는 것이라면, 우리의 신앙은 어떤 상태인가? 그리고 그 운명은 어떻게 되겠는가? 삿 2: 14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팔아치웠을 때,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고 했다. 어찌하든 당신은 하나님이 값싸게 팔아버리는 존재가 되지 말아야 한다.

왼손잡이 사사 에훗이 죽은 후, 이스라엘이 악을 행하므로 야훼하나님께서 하솔에 도읍(都邑)한 가나안 왕 야빈(Jabin)의 손에 이스라엘을 팔아버렸다. 그러자 야빈은 군대장관 시스라(Sisera)를 앞장세워 하나님이 팔아서 자기들의 노예가 된 이스라엘을 20년 동안이나 모질게 학대하고 괴롭혔다(Sisera oppressed the sons of Israel severely for twenty years:삿 4: 3) 힘들게 지은 농산물과 재산을 약탈하고 남자들은 잡아다가 강제부역을 시켰으며, 부녀와 처녀들은 성노리개로 강간하고 유린했으며, 극심한 세금으로 모든 재산을 탈취했다. 이렇게 20년 동안 가나안의 지독한 학대와 짓누름을 통해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죄를 깨닫고 야훼하나님께 회개하며 부르짖자 하나님이 여선지자 드보라와 사사 바락을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이 사사기 4장과 5장의 기록이다. 오늘도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많은 고통 중에서 야훼하나님께 지은 죄를 회개하며 부르짖는 여러분의 기도를 응답하사 모든 원수의 속박과 저주에서 자유케 되는 역사들이 일어나길 축원한다.
   3. 헤벨과 시스라(4: 11-17)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여선지자요 사사인 드보라도 아니고 사사 바락 장군도 아니다. 전혀 이름도 없는 무명의 여인 헤벨의 아내 야엘이다. 원래 헤벨은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이며, 겐(Kedesh)족속으로(삿 1: 16) 팔레스틴으로 이주하여 유다 지파 경내에서 살았었다. 그러다가 자기 맘대로 가족을 떠나 납달리 지파의 ‘사아난님 상수리 나무’ 곁으로 이사해 살다가 이스라엘 백성을 등지고 이스라엘의 압제자 하솔 왕 야빈과 손을 잡았다. 일정시대에 나라를 배신해 창씨개명까지 하고 일본의 앞잡이가 된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헤벨의 아내를 사용하여 민족의 원수 시스라를 죽이고 20년 가나안 학정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케 하셨으니 실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헤아리기 어렵고 측량하기 어려운 오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야엘은 자기 남편이 압제자와 사귀고 있었고 자신 또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4: 11) 이스라엘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오늘도 하나님은 근심과 고난 중에서 회개하며 부르짖는 성도들을 위해 사람과 물질과 환경을 동원해 예측할 수 없는 기적으로 역사하신다. 헤벨의 아내 야엘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축복하신 하나님의 역사, 약한 자를 들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당신의 삶 속에서도 일어나길 축원한다.

   4. 야엘의 축복

사사기 4: 17-22절은 야엘이 가나안의 군대장관 시스라를 죽인 기사이고, 본문은 드보라가 시스라를 죽인 야엘을 칭송하며 그녀가 받을 축복을 노래한 내용이다. 가나안 왕 야빈은 철병거 900승을 갖추고 있었고(4: 3, 13), 백전노장 시스라 장군과 그의 막강한 군대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름도 없는 여인, 야엘을 통해 장군 시스라를 죽이게 하시고 그 일로 전쟁을 이기게 하셨다. 그래서 드보라는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모든 여인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거한 여인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Most blessed of women is Jael. The wife of Heber the Kenite. Most blessed is she of women in the tent; 삿 5: 24)라고 야엘을 축복한 것이다. 야엘은 자기들의 집과 장막에서 두려워 떨며 전쟁터에 나간 남편과 자식들을 염려하며 전쟁이 이기기를 손 모아 기다리던 이스라엘의 모든 여인보다 뛰어난 복을 받았다. 그리고 야엘이 받은 축복의 High-light(절정)은 31절에 “여호와여, 주의 대적은 다 이와 같이(시스라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옵소서”의 축복이다.

그렇다. 야엘은 ⑴ 하나님께 ‘주를 사랑하는 자로 인정을 받은 것’이었다. 하나님이 인정해주심,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는가? 마더 테레사처럼 일평생을 헌신하고 구제하며 살았더라도 하나님이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평생헌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 세계제일의 큰 목회를 하고 수만 명의 제자를 둔 목사라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가난한 농사꾼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보다 부끄러운 목사이다. 야엘처럼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The Lord knows the way of the righteous)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시 1: 6)고 했고,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는 자라”(고후 10: 17-18)고 했다. 아무리 자신의 뛰어난 업적을 스스로 자랑하고 자기 공로를 자랑하며 자기의 성공을 자화자찬해도 주께서 칭찬하지 않는 자, 야훼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자는 심판의 날에 버림을 당할 것이다. 야엘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것처럼 당신의 기도와 전도와 헌신, 봉사와 헌금과 선교, 찬송과 말씀과 충성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주님께서 칭찬하는 축복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야엘의 두⑵ 번째 축복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은 축복이다(Let the friends of Jehovah shine forth in glory as the sun in all his might) 미래가 영광스럽게 되는 축복이다, 저 이른 아침에 수평선을 뚫고 힘차게 솟아오르는 동녘의 태양을 누가 막을 수 있는가? 저 고산준령의 산봉우리를 뚫고 치솟아 올라오는 태양을 누가 막을 수 있는가? 그렇다. 야엘이 받은 축복은 그 미래가 하나님의 영광이 보장되는 축복, ‘해가 힘 있게 돋음 같은 축복’,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축복이었다. 그러면 야엘은 어떻게 해서 그러한 축복을 받았고, 오늘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영광이 보장되는 미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가?             

   ⑴ 자기정체성을 분명히 알라

동아시아 전문가인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하버드대 박사는 “고래 틈에 낀 ‘새우 콤플렉스’를 이젠 그만 버리라”는 특집을 통해 한국인들이 자기정체성을 알아야 된다고 강조했는데 상당히 공감이 가는 말이다. 그는 한국인들이 21세기 한국의 기적을 이야기 할 때마다 자랑스럽게 “한국전쟁이 끝나던 1953년,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67달러, 소말리아 수준이었다”는 말을 단골메뉴로 사용하는데 이것은 한국경제의 눈부신 성장을 말할 때는 맞는 말이지만, 세계인들에게 한국문화 수준까지 낮추어 평가하게 하는 잘못된 말일 수도 있다고 충고한다.

한국은 각종 지표와 국가 브랜드 이미지로 볼 때 이미 선진국이고 국제사회에서 지도적 역할을 맡아야하는데도 한국인들은 스스로 높은 평가에 익숙치 못하며, 여기서 열심히 안 하면 빈국으로 떨어질 것이라 우려한다. 심지어 지정학적으로 세계최강인 중국, 일본, 러시아에 둘러싸인 ‘고래 사이에 낀 새우’로 자신들을 인식하고 스스로 자기를 비하해 약소국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큰 격차로 한국을 능가하는 선진국은 지상에 없다. 이미 한국은 세계가 우러러보는 수준 높은 국가다. 한국인들은 이것을 새로운 정체성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약소국이란 잘못된 인식은 ① 선진국에 걸 맞는 책임을 외면하게 되고 ② 선진국형 국가전략이 아닌 개발도상국에 맞는 정책을 택함으로 불편한 족쇄를 차게 되며 ③모범국가로 거듭나는 기회를 잃게 돼 식민지의 부정적 이미지를 해소할 기회를 놓치게 되고 ④ 경제적으로도 큰 피해를 받는다. 2011년 한국 수출 규모는 5,560억 달러(약 625조원)였다. 그런데 한국이 국제적으로 당하는 ‘Korea Discount’는 평균 9.3%, 수출액 기준으로 58조원에 해당한다. Made in Korea라는 것 때문에 당하는 손해액이다. 만약 제대로 대접받아 58조원을 더 받아서 그 돈을 대외원조에 썼다면 한국은 지구촌 최대의 구세주가 됐을 것이라며 페스트라이쉬 교수는 이런 국제적인 수모에서 벗어나려면 한국인의 정체성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 한국인은 자기 품안에 있는 보물을 찾아야 한다고 충고하면서 교수는 비유로 무가보주(無價寶珠) 이야기를 한다.  어떤 사람이 친구에게 귀한 보석을 받았다. 그런데 친구는 보석을 잘 숨겨준다고 그가 잠든 사이, 보석을 옷 안쪽에 넣고 바느질로 기워 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떠났는데 말할 겨를이 없어 친구에게 보석 이야기를 못했다. 한편 평생 가난했던 주인공은 옷 속의 보물을 모른 채 산다. 그리고 오랜 세월 후 친구를 만난 뒤에야 자신이 항상 보석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귀한 보석이 있어도 찾아 쓰지 못하면 아무 가치가 없듯 한국인들은 먼저 자기 품안의 보물,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으라는 충고다.

페스트라이쉬 교수는 전 세계에서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보물을 ① 개인적 차원에서 고결한 도덕적 삶과 학문적 성취에 대한 결연한 의지와 행동으로 나타나고,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선비정신 ② 한국의 기적을 일궈낸 세계최고의 교육열 ③ 한국역사에 살아 있는 민주주의 전통(고구려 때에 28명의 왕 중 포악한 군주 3명이 신하의 손에 축출되거나 죽임 당했다) ④ 여러 사람이 모여 의견을 교환하는 사랑방 제도 ⑤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하는 통역전문가를 양성하는 역관제도이다(조선은 이미 17-18세기에 중국어, 일본어, 몽골어, 만주어 전문가가 있었고 현재도 한국인의 언어실력은 전 세계최고 실력을 갖고 있다) ⑥ 자율적 규범을 강조하는 예학(禮學) ⑦ 그 외에도 옛 골목과 전통시장, 추석, 정겨운 농촌은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든 한국이 내세울 수 있는 자랑스러운 유산이라고 거론했다.

페스트라이쉬 교수는 마지막으로 이러한 한국의 정체성, 한국의 참모습을 세계에 알리는 방법을 ‘1,000개의 거울’로 설명한다. 큰 잔디밭에 1,000개의 거울이 있다. 그런데 거울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빛을 반사하면 별 효력을 낼 수 없다. 그러나 한 지점으로 빛을 모으면 강철도 녹인다. 한국인들이 자기정체성을 바로 알고 그 인식을 일치시킨다면 21세기 세계사에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야 현대 기아 삼성 LG 같은 New Brand들이 더 많이 창출되고 Made in Korea라는 이유로 더 값을 받을 수 있는 ‘Korea Premium'이 창출될 수 있다는 그의 결론이다.

야엘은 자기정체성을 분명히 앎으로 축복을 받았다. 비록 남편이 적장 시스라와 친분을 갖고 있지만 자신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살고 있는 여인임을 알았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를 분명히 알았다. 오늘 하나님은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신앙의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누구인가? 오늘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렇다. 이사야가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I have called you by name, you are Mine!; 사 43: 1하) 고 말한 대로, 지구촌 70억 중에서 하나님이 당신 이름을 지적해 부르셨기에 당신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벧전 2: 9)이라 선언하고, 사도 요한이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와 제사장이 된 자들”(계 1: 5하-6상)이라 선언한 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족속, 거룩한 나라와 그의 소유된 백성, 그리고 왕 같은 제사장이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다. 이러한 정체성을 알고 자부심을 갖는 사람은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칭찬해주시는 축복, 해가 돋음 같은 미래보장의 야엘의 복을 받는다.

   ⑵ 두려움을 정복하라(25-27절)

전쟁영웅이요 장군이며 용사인 시스라가 작전실패로 바락 군대에게 패전하고 도망하면서 헤벨의 집까지 왔다. 남편 헤벨이 집에 없을 때였지만 침착한 야엘은 시스라를 정중하게 영접하고, 시스라가 물을 구하자 최고급 우유를 대접하므로 그를 안심시킨다. 피곤에 지친 시스라는 야엘에게 이스라엘 추격대가 오면 ‘그런 사람 없다’고 말해 자기를 보호해 줄 것을 부탁한 후 깊은 잠에 빠진다. 그때부터가 야엘의 고민시간이었다.

‘이스라엘을 20년간이나 학대한 시스라를 죽여야 하느냐 살려두느냐? 남편의 친구 시스라를 보호해야 하느냐, 하나님의 원수 시스라를 죽여야 하느냐? 내가 시스라를 죽이려다 만일 그가 잠에서 깨어난다면 오히려 내가 죽임을 당할 것이 아니냐? 약한 여자로 강한 남자를 상대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차라리 남편이 돌아올 때 남편과 함께 거사를 도모하는 것이 어떨까? 아니, 내 말을 듣고 남편이 거절하면 시스라를 죽일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운명은 어찌되는가?...수많은 상념과 염려, 불안과 두려움이 야엘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마침내 야엘은 온갖 두려움과 염려를 털어버리고 잠에 떨어져 있는 시스라 곁으로 가 그를 흔들어 깨본다. 그렇지만 겁이 나서 함부로 행동을 못한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다시 그를 흔들어 깨워본다. 몇 번을 그렇게 해본 다음, 확신이 서자 마지막으로 야엘은 천막 쇠말뚝과 해머를 들고 들어가 시스라 얼굴을 옆으로 돌려놓은 후, 시스라 관자놀이(His temple)에 천막 쇠말뚝을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때려 박아 그를 죽인다. 베두윈 유목민 생활을 했던 그녀에겐 말뚝 박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당시 최고명성을 떨치던 장군을 죽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가나안의 영웅, 장군, 용사 시스라는 베두윈 유목민의 나약한 아녀자 야엘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치열했던 이스라엘과 가나안과의 전쟁은 끝난다.

야엘은 두려움을 물리치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 오늘도 하나님은 두려움을 물리치고 믿음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앞으로 나가는 자들을 축복하신다. 다른 사람은 돈도 있고 경험도 많으며 지식과 아는 사람이 많은데, 그와 경쟁해야 할 나는 돈도 없고, 경험도 적으며, 영어도 잘하지 못하고, 불리한 조건뿐이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도전하므로 야엘의 복을 받기를 축원한다.

   ⑶ 원수들의 기대를 무너뜨려라

본문 28-30절은 드보라가 시스라의 어머니와 시녀들 간의 대화를 가상하여 노래하고 있는 장면이다. 드보라는 시스라 장군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전쟁에서 한 번도 져 본적이 없는 백전백승의 용사이기에 이번 전쟁도 이길 것이며, 시스라와 가나안 군인들이 수많은 전리품을 가져올 것이며, 군인들마다 이스라엘의 처녀 한두 명씩은 데려올 것이라고 노래했을 것이지만 하나님은 시스라를 죽인 야엘의 거사를 통해 시스라 어미와 시녀들의 모든 기대를 무너뜨렸다고 노래했다. 그렇다. 야엘이 적군들의 기대를 무너뜨렸듯이 오늘 우리도 모든 원수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축복의 사람이 돼야 한다.

원수들은 우리가 망하기를 원한다. 내가 타락하기를 원하고 우리가게가 망해 알거지가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원수마귀는 우리가 죄를 지어 저주받아 멸망당하기를 소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망해서는 안 된다. 잘 돼야 한다. 저주받고 지옥에 가서도 안 된다. 반드시 축복의 사람이 돼야 한다. 원수들의 모든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복의 사람, 은혜의 사람, 능력의 사람들이 모두 되기를 축원한다.     


김엘리야 목사(워싱톤주기도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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