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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01월23일 22시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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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건강한 네 가지 삶의 원리


기독교인의 삶의 원칙은 육체의 모든 욕망과 명예나 부귀에 대한 욕심을 버림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금욕주의도 아니고, 인생의 목적은 쾌락이나 쾌감에 있고 도덕은 이 목적을 실제화하는 수단으로 주장하는 쾌락주의도 아니다.

중세기 기독교는 어느 때보다 금욕주의와 극기주의가 팽배했던 시대였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특권층지배계급들이 가난하고 없는 자 약한 자들을 박해하고 지주들이 서로 땅을 뺏기 위해 끊임없이 벌였던 영토전쟁과 십자군과 모슬렘 사라센과의 100년 전쟁 그리고 유럽인구 ⅓을 죽게 한 흑사병의 출현으로 나라들이 어수선하고 편안한 날이 없게 되자 사회적으로 영국에선 로빈 후드(Robin Hood)같은 의적들이 나타났고,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를 중심한 발트 해(Baltic)와 북해, 노르웨이 해양엔 Viking같은 사나운 해적들의 출몰로 불안했으며, 종교적으론 불안하고 힘들며 어수선하고 복잡한 고통의 속세를 떠나 깊은 산속이나 동굴이나 오지사막으로 피해 현실을 도피해서 유유자적하며 은둔생활을 한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당시 현실도피로 은둔생활을 하던 사람들 중에 어떤 이는 일생 동안 진흙탕 속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고 고행을 하며 산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높이 40m, 50, 심지어 100m나 되는 나무기둥 꼭대기에서 일평생을 기도만 하며 산 사람도 있으며(그 중 어떤 사람은 나무기둥 꼭대기에서 40일 금식을 40번이나 한 기인도 있다), 어떤 이는 동굴 속에서 생식(生食)으로 일생을 보낸 사람도 있고, 어떤 수도사는 요가 승처럼 머리를 땅에 대고 물구나무를 선 채 하루 8시간씩 10년을 보낸 사람, 20년 30년, 그리고 평생을 그렇게 산 사람도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생명만 유지할 정도의 소식을 하면서 극기하며 산 사람, 새벽부터 밤까지 죄의 생각이 날 때마다 채찍으로 자기 몸을 때리면서 극기를 한 수도사, 교회와 수도원 계단에 유리조각을 뿌려놓고 무릎을 꿇고 계단을 기어 올라가므로 손발이 만신창이가 되는 고행극기를 한 사람 등 중세기독교 금욕주의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러나 사람이 죄에서 자유를 얻고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은 이러한 금욕주의나 극기고행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이 가능하다. 그래서 가톨릭의 사제 마르틴 루터는 유리조각들이 깔린 베드로 성당 층계를 무릎으로 기어오르다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The just shall live by faith: 합 2: 4, 롬 1: 17)는 진리를 깨닫고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다음, 기독교는 쾌락주의도 아니다. BC 340년, 철학의 도시 아테네 거리에서 “내일 죽으리니 오늘 먹고 마시자”(Let us eat and drink, for tomorrow we die!; 사 22: 13)를 외치며 일어나 400여 년간 유럽을 향락과 쾌락으로 뒤흔들어 놓은 철인 에피쿠로스(Epicurus, 342?-270 BC)의 향락주의, 쾌락주의는 400년 만에 전도자 바울과의 만남에서 단호하게 거부됐음에도(행 17: 18) 인간본능을 자극하고 향락을 즐기는 쾌락주의는 유럽뿐 아니라 기독교 안에 깊이 침투했다. 그래서 먹고 즐기는 식도락과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는 쾌락주의 향락주의는 빠른 속도로 교회 안에 자리를 잡았다. 쾌락주의와 향락주의는 바울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인간이 세상에 존재한 에덴동산에서부터 Epicurism(에피큐리즘) 쾌락주의는 존재했고 그 식도락으로 아담과 하와는 타락했다.

바울은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 진다”(For it is sanctified by means of the word of God and prayer; 딤전 4; 4-5)고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모든 것이 거룩해지기 때문에 성도들은 감사함으로 무엇이든지 먹고 마실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기독교는 향락에 도취해 사는 쾌락주의는 아니다. 기독교는 무엇이든 잘 먹고 목젖까지 차도록 배가 터지게 많이 먹으며 음식을 구별해서 비싸고 좋은 것 정결한 음식만 먹어야 구원받는 종교도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 17)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다”(히 13; 9)고 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죄 많은 현실을 떠나 산 속이나 사막이나 동굴로 도피해 숨거나 자신을 학대하므로 만족을 얻으려는 자학의 금욕주의도 아니고, 밤낮없이 먹고 마시며 인생을 즐기는 쾌락주의도 아니다. 그래서 365일 기도와 금식으로 얼굴이 누렇게 뜨고 피골이 상접해 있는 것은 건강하고 건전한 은혜가 아니고, 먹고 마시는 일을 낙으로 삼아 돼지처럼 먹고 살이 붙어 각종 성인병으로 고생하는 것도 은혜가 아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성도들의 생활은 어떠해야 하는가? 성도의 건강한 삶은 어떤 삶인가?

                    성도의 건강한 네 가지 삶의 원리

   1. 기쁨과 즐거움으로 음식을 먹으라(7절)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건강한 기독교는 먹는 문화에 자유가 있다. 어떤 사이비종교에서처럼 깨지거나 반토막짜리 쌀로 밥을 하면 재수가 없거나(영월 근처-충북 단양군 영춘면-구인사에서는 주지승 밥을 지을 때, 깨지지 않은 쌀 알곡 하나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어서 밥을 한다함) 정월대보름 날엔 반드시 오곡밥을 해 먹어야 그해 신수(身數)가 좋은 종교가 아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처럼 돼지고기는 부정하니 먹으면 안 되고 미꾸라지나 뱀장어는 비늘이 없어서 안 되며 복숭아는 선악과이기 때문에 먹으면 안 되는 먹는 것에 금계조항이 많은 종교가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먹으면 버릴 것이 없으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모든 것이 거룩해 지기 때문이다”(딤전 4: 4-5)고 선언했고, 예수님도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한다”(마 15: 17-18)고 하시므로 먹는 것에 금계제약을 풀었다. 그래서 다른 종교는 먹는 것에 많은 제약이 있고 까다롭지만 기독교는 먹는 것에 금계조항이 없다. 무엇이든 하나님의 말씀과 성도들의 기도로 거룩해지기 때문에 무엇이든 다 먹을 수가 있다. 그래서 기독교가 들어가는 곳은 먹는 문화가 발달했고 먹는 문화가 자유하다.

본문에서 솔로몬은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시라.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음셨음이라”고 했다.  어떤 분이 내게 질문한다. “목사님, 다른 성경에선 포도주나 독주나 술을 마시지도 말고 보지도 말라고 했는데 어째서 본문에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시라고 했느냐? 그렇다면 우리도 포도주나 폭탄주 독주를 마셔도 되느냐?” 고전 10: 23- 24절을 통해 바울이 선포한 그 질문의 답변을 들어보라.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All things are lawful for me, but all things are not expedient)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德)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All things are lawful for me, but all things edify not)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Let no man seek his own good, but every man another's wealth)

그렇다. 예수 믿는 우리에겐 모든 것이 가능하다(All things are lawful for us: 우리에겐 모든 것이 합법적이고 적법하다) 술을 마시는 것도, 심지어 술독에 빠지는 것도 다 불법이 아니고 위법도 아니다. 담배를 피우는 것도 심지어 마약을 하는 것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신앙이나 건강에 유익하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것들은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만일 김목사가 항상 포도주나 알코올성 강한 폭탄주를 마시고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갈지자로 걸으며, 이성이 마비돼 술주정이나 헛소리를 하며 음주운전으로 일주일이 멀다하고 자동차 티켓을 받고 코트에 다니며, 집에서 죄 없는 아이들과 마누라를 구박하거나 살림살이를 부순다면 어느 교인이 그것을 보고 김목사에게서 은혜를 받겠는가? 이장로가 밤낮 술에 취해 흐느적대며 고성방가하고 다닌다면 누가 그 사람보고 교회에 나오겠는가? 어떤 믿음 없는 사람들처럼 구역예배 잘 드리고 장로와 집사들이 한데 어울려 밤새도록 맥주에서 코냑까지 2차 3차 퍼마시고 마약까지 한다면 누가 그런 사람들을 보고 예수 믿겠다고 하겠는가?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이 가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기에 그런 것들을 멀리하는 것이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 세상 최초에 인간이 포도나무를 심었다. 이때 악마가 찾아와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물자 인간이 “멋진 식물을 심는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악마는 “이런 나무는 본 일이 없는데...”라며 중얼거렸다. 이때 인간은 악마에게 “이 나무엔 달콤하고 맛있는 열매가 노랑 초록 빨강 자색 등 여러 색깔로 달리는데 그것으로 즙을 짜서 마시면 행복하게 된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악마는 그렇다면 자기도 한 몫 끼워달라면서 포도나무가 빨리 자라고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양과 사자와 돼지와 원숭이를 잡아 그 피를 비료로 대신해 쏟아 부었다. 그렇게 해서 네 마리 짐승 피를 마시고 자란 포도나무에서 포도주 술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술을 마시는 사람은 누구나 처음 마시기 시작할 때는 양처럼 순하지만 좀 더 마시면 사자처럼 강포해져서 행패를 부리게 되고 그보다 더 마시면 돼지처럼 지저분하고 더럽게 되며 거기서 더 마시면 원숭이처럼 춤추고 노래 부르며 희롱하게 된다고 한다.

술 때문에 망한 대표적인 나라 소련을 보자. 한때 군사최강 미국과 쌍벽을 이루며 세계를 호령하던 소련이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철의 장막을 거둔 후 그 속에 있는 그들의 실상을 보여주었을 때, 지구촌은 놀랐다. 소련 주민 70% 이상이 알코올 중독자였고 많은 사람이 굶주림과 배고픔으로 아사 직전에 놓여 있었으며 심지어 칫솔 치약 세수 비누까지 없어서 고생하고 있었다. 그래서 6.25이후 미군의 구제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왔듯 소련도 전도하기 위해서 헌옷 신발 노트 세수 비누를 구제품으로 나누어 주니 교회들마다 사람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이처럼 술은 개인과 가정과 국가를 망친다.

그래서 “즐거운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시라”(Drink your wine with a merry heart)는 말씀은 알코올성 액체의 술과 포도주를 즐겁게 마시라는 해석보다는 우리 위해 몸 찢고 피 흘려 ‘이 잔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하신(마 26: 27-29) 예수로 풀어야 한다. 그래서 성찬식에서 예수의 피를 마실 때 즐거운 마음으로 마실 것이다. 그리할 때 그 피가 우리 마음에 뿌려지고 죽음과 질병과 저주의 원수세력을 이기는 복된 성도가 될 줄 믿는다. 

건강하고 건전한 신앙의 사람은 음식도 기쁨으로 먹고 성찬식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신다. 기쁨으로 먹는 음식은 소화도 잘 되고 육체를 건강하게 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마시는 성찬식 포도주는 정신과 영혼을 건강하게 복되게 해준다. 특별한 목적으로 금식기도를 하지 않는 한 그리고 너무 무리하게 낭비하지 않는 한 음식을 기쁨으로 잘 먹으라. 먹는 문화를 즐기시라. 여러분의 식탁을 작은 천국으로 만들고 당신의 성찬식을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는 유월절, 예수님의 최후만찬 새 언약 만찬으로 만드시라. 그리하여 당신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답게 튼튼한 성전, 건강한 육체, 건강한 삶이되기를 축원한다.

   2. 외모를 아름답게 단장하라(8절)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

한번 따라서 하자. “나는 시시하게 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조잔(凋殘)하게 살 사람이 아니다” “나는 비실비실하며 살 사람이 아니다” “나는 멋있게, 당당하게, 가슴 펴고 살 사람이다!” 예수 믿는 성도들의 삶은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일방통행의 삶을 ‘내로라’며 살아야 한다. 솔로몬은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이 그치지 않게 하라”(Let your garments always be white. Let your head lack no ointment)고 했다. 성도들이 항상 깨끗하고 소박한 흰옷을 입을 것이며 그 머리에 향 기름이 모자라지 않게 하라는 말이다. 물론 이 말의 영적의미는 계 3; 4절처럼 ‘항상 깨어있는 생활을 하라’, 계 7: 13절처럼 ‘환난시험을 이기는 생활을 하라’, 계 19: 14절처럼 ’하나님말씀의 옷을 입으라‘는 의미이며, 예수의 보혈로 죄 씻음 받음으로 깨끗한 생활을 하라는 의미이다. 그러면서 외모를 아름답게 단장하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먹는 문화 뿐 아니라 입는 문화도 앞장서가라는 것이다.

그다음, “머리에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 것”(Let not ointment be lacking on your head)이다. 거룩한 기름(Ointment)은 아무나 만들지 못한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제사장만이 만들 수 있었다(출 30: 22-25, 대상 9: 30) 거룩한 관유는 액체 몰약 오백 세겔, 향기로운 육계 이백오십 세겔, 계피 오백 세겔, 창포 이백오십 세겔 등 최상급 향품(香品)에 감람기름 한 힌을 잘 조합해서 만들어야 하고 그렇게 만든 향 기름은 하나님께 구별된 성막이나 언약궤 분향단 번제단 등대 같은 성소와 지성소 물건에 바르고, 제사장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발라 거룩한 물건 거룩한 사람이 되게 했다. 그리고 아무나 그런 기름을 만들거나 바르면 죽임을 당했다.

그러므로 이 기름을 머리에 있게 하라, 머리에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하라는 말씀은 우리 머리에 고급향유를 바르고 고급향수를 뿌려 항상 냄새가 좋게 하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 생각이 항상 거룩하고 성결하며 고상한데 집착하라,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차있으라는 뜻이다. 그다음,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는 전 7: 1절과 아 1; 3에서 “네 기름이 향기로 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고 한 대로 향기름은 아름다운 이름, 존귀한 명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머리에 향기름이 모자라지 않게 하라는 말씀은 “우리 이름이 성도로써, 목사로써, 집사 권사 아내 남편 부모 자녀로써 부끄럽지 않게 하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사회 정치 군사 경제 문화 예술 모든 분야에서 명성과 이름이 뛰어나야하고 존귀해야 한다.

한때, Made in USA나 Made in Japan은 좋은 물건의 대명사였지만 이제는 Made in Korea가 전자제품에서 자동차까지 심지어 영화와 노래와 김치 라면까지 세계인들이 엄지를 치켜들고 "Korea No. 1"이라며 좋아할 정도가 됐다. 그만큼 한국의 국력과 인지도와 Reputation(명성)과 Name Value가 높아 졌다. 그런데 만일 한국회사가 중국 사람들처럼 물건을 불량품 가짜나 짝퉁을 만들어 보라. 순식간에 한국의 위상이 땅에 떨어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Brand 상표가 붙은 성도들이 이름값을 못하면 안 된다.

사라가 127세에 죽어서 아브라함이 사라의 매장지를 구할 때, 헷 족속 에브론은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니(You are a mighty prince among us) 우리 묘실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라”며 매장지를 무상으로 주고 싶어 할 정도로(창 23: 6) 아브라함의 이름은 유명했고, 그의 아들 이삭도 그랄 왕 아비멜렉이 “야훼께서 너와 함께하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니 우리와 화친을 맺자.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창 26: 28-29)고 할 정도로 이름이 알려졌으며, 애굽의 총리 요셉도 그 이름이 우레처럼 이집트와 중동에 퍼졌고 아브라함의 5대손 욥도 동방사람 중 가장 큰 자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 모세 엘리야 엘리사 다윗 솔로몬 모르드개 다니엘의 이름도 당대에 태양처럼 빛났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당신 남편이 ‘내 아내와 결혼한 것이 일평생의 선택 중 최고의 선택이었다’, 당신 아내가 ‘우리가 다시 태어날 수는 없지만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남편을 택할 것이고, 저 천국에서 남편과 함께 영원 영원토록 살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뛴다’, 당신 자녀들이 ‘나는 우리 아빠 같은 남자, 우리 엄마 같은 여자를 남편으로 아내로 선택하겠다’고 할 수 있고, 다른 성도들이 ‘박집사 같은 신앙, 서장로 같은 믿음, 이권사 같은 신앙인격을 닮고 싶다’고 할 유명해지는 축복과 존귀한 이름이 나타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3. 행복한 부부생활을 하라(9절)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Live joyfully with the wife whom you love all the days of your vain life.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分福)이니라”

부부(夫婦)는 1, 2, 3, 4의 촌수도 없으면서 일생에 가장 오래 동안 함께 사는 삶의 동반자다. 부부가 서로 사랑할 때는 촌수를 따질 필요가 없도록 가까워서 무촌이고, 헤어지면 더 이상 아무 관계가 없게 되므로 무촌이다. 그래서 성경은 “네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分福)이라”(This is your reward in life)고 했다. 저 태양 아래서 사는 우리 일평생에 가장 큰 상급이 아내요, 헛되고 헛된 우리 평생에서 가장 큰 축복이 남편이란 말씀이다. 그래서 부부는 서로가 해 아래서 하나님이 주신 최대의 상급이고 분복이므로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 중에는 많지는 않지만 하나님께 사명 받은 사람들 중엔 행실이 올바르지 못한 창녀, 부부사이에서 아이들을 낳고도 탕녀기질로 다른 남자를 찾아갔던 여자를 아내로 데리고 살아야 했던 불행한 호세아(호 3: 1-5)나 말씀사역 중에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하나님께 보내 상처(喪妻)하므로 쓰라린 상처를 받아야 했던 에스겔(겔 24: 15-17)처럼 사명을 위해서, 사명 때문에 가정과 부부의 행복을 하나님께 허락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하지만 그런 사명자들은 억지로 행복의 파랑새를 잡으려고 하지 말라. 그들은 부부행복을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물과 기름이고, 남편이나 아내가 죽기까지 헌신해도 모래성 쌓기이다. 그래서 김목사가 감히 말해주기가 죄송하지만, 남들처럼 행복을 얻지 못해 당신 마음이 아프고 못 견디도록 괴로우며 그래서 신앙적 회의와 신학적 고민과 갈등이 있더라도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들처럼 하나님이 주신 사명만을 위해 묵묵히 충성하시라.

그러나 이러한 숙명적인 사명자 외에 모든 성도들과 주의 종들은 해 아래서 하나님께 받는 분복인 남편과 아내, 아내와 남편은 행복하게 살 것이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배우자와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축복이고 당신들의 특권이다. 신앙이 잘못된 어떤 사람들처럼 금식기도 한다고 가족밥상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게 하지 말라. 철야기도하고 심방전도 한다고 아이들이 굶는지 남편이 먹는지 굶는지 모르도록 살림을 엉망으로 하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전도가 막히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가족구원이 안 된다.

독일 교회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발츠 목사가 미국을 방문하던 중 어느 교회에 들렸을 때이다. 미국교회 목사가 발츠 목사에게 자기 교인 한 사람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이 집사는 우리 교회 평신도 챔피언이다” 그러자 무슨 뜻인지 잘 알아듣지 못한 발츠 목사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그때 미국교회 목사는 자랑스럽게 설명을 시작했다. “이분은 한 주일 저녁 모두를 교회에서 지내는 분이다. 월요일에는 청년회에, 화요일엔 교회 회의에, 수요일엔 성경공부와 재정부 모임에, 목요일에는 선교모임에, 금요일에는 장년부모임에 그리고 토요일에는 찬양대 찬양연습에 그리고 주일엔 주의 날이니 온 종일 교회에서 지내는 분이다. 이분의 열심에 도전할 분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분을 평신도 챔피언이라 부른다”

목사가 늘어놓는 자랑에 혼돈에 빠진 발츠 목사가 “아, 그래요. 그러면 이분은 가족이 없습니까?” “왜요, 이분은 아이가 셋이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니는 직장은 없나요?” “왜요, 사업을 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그는 전혀 다른 사회생활은 하지 않습니까?” “왜요, 그는 공화당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때 손님으로 왔던 발츠 목사가 정중하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나는 이분을 평신도 챔피언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분은 앞으로 적어도 한 주에 이틀 저녁은 가족과 함께 지내고 하루 저녁은 직장동료와 지내고 또 다른 하루는 정치하는 분들과 지내셔야 할 것입니다. 이분이 정말 그렇게 훌륭한 평신도 챔피언이라면 한 주일 동안에 이틀 정도만 봉사하게 하고 나머지는 기독교인 아버지(어머니)를 필요로 하는 가정에서 그리고 기독교인 정치인을 필요로 하는 정치단체에서 지내셔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김목사는 여러분이 남편과 아내와 가족을 내팽개치고 일주일 내내 밤마다 교회에 와서 사는 평신도 챔피언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교회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나는 여러분이 주일 수요일(금요일) 그리고 새벽예배 등 정규예배에 잘 참석하고 가정생활에 충실한 성도되는 것을 원한다.

식구들이 한 상에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한 후 아이들이 공부하러 자기 방으로 가면(아니면 부부가 저녁을 먹은 후) 부부가 오붓이 앉아 하루의 이야기, 사는 이야기, 아이들 장래이야기를 하든지 TV를 보면서 서로의 행복을 나누면 남편 전도, 부인 전도가 쉬워진다. 그러나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고 온 남편이 저녁을 먹고 옆에 있는 부인을 찾는데 부인은 벌써 교회로 달려가 “주여, 믿습니다”만 하고 있다면,  “닭 쫓던 개 지붕 처다 보는” 여구앙정(如狗仰頂)의 남편은 사는 재미, 힘들게 일하는 재미, 당신을 아내로 얻은 재미를 잃게 되고, 당신과 함께 예수님과도 담을 쌓게 된다. 그러면 남편전도는 힘들어지고 가정행복도 물 건너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도 건전하게 하고 가정생활도 건강하게 하라. 매일새벽기도 한다는 핑계로 낮잠이나 자고 이웃집에 놀러 다니면서 가정에 소홀하지 마라. 새벽기도 하는 것만큼 가정에 더 충실하라. 새벽기도 하는 거룩한 사람답게 남편에게 더 관심을 갖고 자녀들을 더 사랑하라. 그것이 성경이 당신에게 명령하는 성공적인 성도의 삶의 원리이다. 주기도문 성도들 가정마다 행복한 부부생활이 있기를 축원한다.
 
중국에 어떤 처녀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전쟁이 터져 남편이 징병돼 얼마 후 남편이 전사했다는 통보가 왔다. 실의에 빠져있던 젊은 부인에게 부모와 이웃들이 ‘나이도 젊고 지식도 있고 예쁘니 홀로 사는 것보다 재혼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면해 재혼을 했다. 그런데 재혼한지 1년 후 죽었다던 남편이 살아 돌아왔다. 그래서 두 남편이 서로 자기 아내라고 주장하다가 소송을 제기하여 법원에서 판결을 받게 됐는데 소송을 담당한 판사도 어떻게 판결을 해야 할지 몰라 부인에게 두 사람 중 어떤 사람이 더 좋은 남편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부인은 둘 다 좋은 남편이라고 한다. 그래서 결정을 못 내린 판사는 일주일 간 휴정하고 한주 후에 속개한다고 했다.

일주일 후, 두 남편이 나와 있는 법정에서 판사는 뜻밖에의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에게 불행한 소식을 드려 죄송하다. 부인이 지난 주 수요일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내일 장례를 치러야하는데 누가 그 시체를 떠맡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러자 첫 번째 남편은 경제적 손실을 생각하고 시체 떠맡기를 거절했는데, 두 번째 남편은 “제가 죽은 아내의 시체를 맡아 장례를 치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때 교통사고로 죽었다던 여인이 법원 문을 열고 법정에 나타났다. 판사는 “첫 번째 남편은 귀찮고 손해되는 일은 안하고 사랑만 받으려 했으니 이 여인의 남편 될 자격이 없고, 두 번째 남편은 희생과 손해를 각오하고 이 여자를 사랑하여 시체를 맡겠다고 했으니 남편으로서 자격이 있다. 이 여자를 아내로 데려가라”고 판결을 내렸다. 오늘 당신은 어떤 남편인가? 어떤 아내인가? 우리 평생의 헛된 모든 날에 행복한 부부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4. 일을 열심히 하라(10절)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Whatever your hand finds to do, do it with your might.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For there is no work, nor device, nor knowledge, nor wisdom in the grave where you are going.

그렇다. 우리가 죽어 저 공동묘지에 묻히거나 한줌의 재로 변해 유골함에 안치되면 죽음의 세계 음부엔 아무 일도 없다. 일을 위한 장단기의 어떤 계획도 없다. 그 일을 성공시키기 위한 지식도 지혜도 없으며 일의 성공여부에 따른 명예도 없다. 세상의 모든 일을 끝내고 쉰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은 사람은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미하며 예배하는 일만 있고 힘든 노동은 없으며,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치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은 영원한 지옥유황불 속에서 몸이 불에 타 없어졌다가 다시 살아나 다시 불에 타 없어지거나 뱀과 구더기와 벌레들에게 물리고 뜯겨 없어졌다가 다시 살아나 또 뜯겨 없어지는 고통의 허우적거림이 일이라면 일이다. 죽은 후엔 일이 없다. 살아 있을 때만 일이 있고 계획도 있으며 지식도 지혜도 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았을 때 열심히 일할 것이다. 내 혈관에서 뜨거운 피가 흐르고 나의 맥박이 고동치고 있을 때, 부지런히 일할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힘들고 고되게 일을 해도 가장 힘들게 일하는 중노동자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하나님이 주신 에너지의 60-70%를 사용하고 죽고, 보통사람은 30%도 못 쓰고 죽는다고 하며, 정신노동도 일생 동안 머리를 쓰고 뇌를 사용한 과학자들이 30-40% 그리고 보통사람은 10-15%도 쓰지 못하고 죽는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밥을 반 정도만 먹다가 굶어죽는 것처럼 육체노동자나 정신노동자 모두 하나님이 주신 에너지를 반 정도만 쓰고 죽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육체와 정신을 70%만 사용해도 지금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 수 있다. 당신의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해 일하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축원한다.

테레사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이다. 한 여인이 찾아와 고민을 털어 놓으며 울부짖었다. “저의 삶은 너무 권태(倦怠, 앙뉘-Ennui)롭다. 인생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겠다.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다” 그러자 테레사가 그녀에게 이런 충고를 했다. “그래요, 제가 살고 있는 인도에 오면 당신에게 진정한 삶을 드리겠습니다. 죽기 전에 제가 있는 곳에 꼭 한번 와 보세요”

그래서 그 여인은 인도로 갔다. 거기에는 죽어가는 사람들, 병으로 거동도 못하는 환자들,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곳에서 테레사는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하고 있었다. 그 여인은 거기서 테레사를 도와 그들을 돕고 보살펴 주었다. 온 종일 다른 사람을 치료하는 일에 자기 삶과 시간을 쏟다 보니 삶의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중에 그 여인은 이렇게 고백했다. “제가 살고 있는 인도에 오시면 삶을 드리겠습니다고 하신 말씀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다” 이 여인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발견하고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여 새로운 기쁨과 능력의 삶을 살게 됐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성경을 믿는 성도들은 테레사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희생하고 봉사하며 노벨평화상 상금까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바치며, 이 여인처럼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도 영혼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 구원과는 상관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인정으로 가난하고 병든 자를 돌보며 사랑하고 희생하는 것이 보편적 은혜라면 하나님을 알고 예수 믿은 죄 사함의 감격에서 가난한 자를 사랑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는 것은 은혜 위에 은혜, 특별은혜이다. 이렇게 성도들의 사랑과 희생과 헌신은 구원을 받기 위한 공덕설의 헌신이 아니라 구원 받은 감사함에서 드리는 헌신이어야 한다. 당신이 해 아래서 일을 당하는 대로 몸과 마음 아끼지 말고 힘을 다해 일하는 성도가 되길 축원한다. 

       
김엘리야 목사(워싱톤 주기도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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