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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02월23일 20시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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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를 따라 상(賞)주시는 야훼
아이들 앞에선 말조심해야 한다. 엄마 아빠가 싸우는 걸 지켜보는 아이가 있었다. 싸울 때마다 아빠는 ‘이년’, 엄마는 ‘이놈’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어느 날 부부가 ‘이년’, ‘이놈’하며 싸우는데 지켜보던 아이가 물었다. “아빠, 이년이 무슨 말이야?” 갑작스런 질문에 아빠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응, 그, 그게...그래! 어른들이 여자를 부를 때 하는 소리야” “엄마, 이놈은 무슨 말이야?” 역시 엄마도 당황하여...“그러니까 그게...어른들이 남자를 부를 때 하는 소리란다”

하루는 할머니 집에 놀러간 아이가 할머니에게 얘기했다. “할머니, 아빠 엄마가 싸우면서 이년, 이놈 그랬어요” 그러자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지랄들하고 자빠졌네!” 그러자 아이가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지랄들하고 자빠졌네’가 무슨 말이야?” 갑작스런 아이 질문에 당황한 할머니는 당황하며 “으-응, 그게 말이지...잘했다고 박수친다는 소리란다” 나이가 돼 유치원에 들어간 아이가 많은 학부모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재롱잔치’ 사회를 보게 됐다. 재롱잔치가 끝난 후 단상에 올라와 꾸벅 절을 한 이 아이는 또랑또랑한 말로 이렇게 말했다. “이 자리에 오신 모든 연놈들...!! 다 함께 지랄하고 자빠집시다!”

귀신을 무서워하지 않는 맹구가 어느 날 시골의 한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게 됐는데 귀신이 나왔다. 귀신이 “빨간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 노란 종이 줄까?”며 묻는다. 그러자 맹구는 “나는 신문을 쓴다”고 대답했다. 원통한 귀신이 맹구를 잡기위해 복수의 칼을 갈던 어느 날, 귀신이 이번에는 “빨간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 노란 종이 줄까? 신문 줄까?” 물었는데 맹구가 “혹시 잡지는 없느냐?”고 대답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귀신이 다음 날 “빨간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 노란 종이 줄까? 신문 줄까? 잡지 줄까?”한다. 그러자 맹구가 “오늘은 쉬-하려고 왔다”(오늘은 작은 거)고 대답하자 귀신이 씩씩거리며 갔다고 한다.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이 생전 처음으로 극장에 같이 갔다. “장비야, 네가 막내니까 매표소에 가서 표 좀 사와라” 유비 말에 관우도 거들었다. “그래 장비야, 나이 먹은 형님들은 갈 수 없으니 네가 갔다 와라”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도록 장비가 돌아오질 않는다. 걱정이 된 유비와 관우는 매표소 앞을 가보았다. 가서보니, 장비가 극장을 때려 부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장비야, 무슨 짓이냐?” 유비와 관우가 장비를 보고 놀라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장비가 화를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하는 말, “저 여자가 사람을 차별해 ‘조조(早朝)만 할인해 준다’고 하잖아요”

녹슨 기계에 기름칠을 하면 잘 굴러가듯 웃음을 주는 유머나 해학은 단단히 닫힌 마음을 열어서 편안하게 해주고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윤활유 역활을 한다.  
                    내 의를 따라 상(賞) 주시는 야훼             

사무엘하 22장과 같은 내용을 대중예배에서 사용하도록 약간의 형태를 변조해 저작한 시편 18편은 만승천자(萬乘天子) 성군 다윗이 모든 원수들을 다 정복한 후 그 승리를 감사하며 지은 노래시다. 본편에서 다윗은 “구원”과 “건져내셨다”는 말을 6번(2, 17, 19, 43, 48, 50)이나 사용해 야훼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고 찬양했다. 다윗의 구원과 이김이 나의 구원이 되고, 다윗을 건져주신 기적들이 나의 기적들이 되므로 다윗처럼 하나님을 찬양하며 높이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수많은 원수와 많은 위기에서 하나님의 건져주심을 찬양한 다윗의 열 가지 노래는

   ⑴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성전(聖殿)에서 내 소리를 들으셨도다(6절)
      In my distress I called upon the Lord
    And cried out to my God
     He heard my voice from His temple.

그렇다. 야훼하나님은 저 멀리 은하계 건너편 구만리 장천 위 하늘보좌에만 앉아 계시는 분이 아니다. 야훼하나님은 다윗이 ‘In my distress’(재난과 슬픔과 근심과 괴로움과 고통 중에서) 부르짖어 기도할 때, 다윗을 도와주기 위해 땅위 성전에 계셨던 하나님이시며, 오늘 우리들의 절망과 비통과 한숨과 근심에서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건져주고자 지금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성전에도 계시는 분이다. 이 성전에서 다윗처럼 기도응답을 받아 모든 문제들이 해결 되는 축복이 계시길 축원한다.   
   ⑵ 다윗의 기도를 응답하여 땅이 진동하고 산의 터가 요동케 했다(7절)
Then the earth shook and quaked.
And the foundation of mountains were trembling
And were shaken, because He was angry(7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하시는 상황을 ‘땅이 진동하고 산의 터가 요동하는 것’이란 시적표현을 했다.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송을 통해 감옥 터가 흔들리고 감옥 문들이 열리며 죄수들을 결박하고 있었던 쇠사슬들이 끊어져나가듯 다윗이 가지고 있던 영원히 움직일 수 없는 땅과 지구 끝 날까지 땅속에 뿌리박고 있을 저 태산 같은 난해의 문제들이 부르짖는 기도를 통해 해결됐다는 표현이다. 오늘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를 통해 땅이 흔들리고 산의 터가 요동하듯 요지부동의 어려운 문제들과 해결될 방법이 없던 문제들이 뜨거운 물에 얼음 녹듯 풀려져 나가는 역사들이 일어나길 축원한다. 
   ⑶ 다윗이 원수들의 위협에서 야훼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화난 사람의 숨소리와 호흡이 거칠어지고 성난 사람 콧구멍에서 콧김이 거센 연기처럼 뿜어져 나오듯 하나님께서 다윗의 원수들을 향해서 노기충천하시므로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Smoke went out of His nostrils) 그 입에서 불이 나와(Fire from His mouth devoured) 모든 원수들을 불태우셨음을 노래했다(9절) 밤낮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당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분노하사 당신의 모든 원수들을 향해 분노하시고 대적들을 불태우는 역사들이 나타나기를 축원한다.

   ⑷ 다윗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사냥꾼이 그물을 던져 짐승들을        잡듯 다윗의 대적들이 피할 수 없도록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사 덮치셨음을        노래했다(9절)

   ⑸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응답하실 때 근위천사들인 그룹 천사들을 데리시고        임하셔서 강하게 역사하셨음을 노래했고(10절)

   ⑹ 하나님이 다윗의 원수들을 멸하실 때, 흑암과 빽빽한 구름이 태양을 가리듯        인자함의 안면을 바꾸시고 무섭게 징벌하셨음을 노래했으며(11절)

   ⑺ 수억 볼트보다 더 강하고 밝은 번개 불이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번쩍임        같이 무섭고 떨리는 하나님의 광채로 위엄스럽게 다윗의 원수들에게 나타나        그들을 두렵게 하므로 다윗을 보호했음을 노래했다(13-15)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을 인하여
물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15절)

하나님은 기도하는 성도들을 보호하고 구원하시고자 강한 번개 불에 물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숨기지 못하고 벌거벗은 것같이 밝히 나타나듯 성도들을 대적하는 원수들의 밑바닥이 드러나고 그 터가 숨기지 못하고 밝히 나타나도록 무섭게 진노하신다.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연방이 1991년, 70여년 만에 무너질 때, 소비엣 유니언은 15나라로 공중분해 됐고, 레닌의 동상은 부숴 졌으며, 굶주림을 해결하고자 한국에게 구걸의 손을 벌리기까지 망했다.   

   ⑻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16)
   He sent from on high. He took me. He drew me out of many waters.

그렇다. 하나님은 당신과 내가 동서남북 사면팔방으로 원수들에게 둘러싸인 사면초가, 진퇴유곡, 백척간두 위기에서 부르짖고 기도할 때, 야훼하나님만 바라보고 부르짖어 간구할 때, 화재를 피해 위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 마지막으로 건물옥상까지 피해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는 사람에게, 공중위에서 구조대원이 헬리콥터의 사다리로 건져내듯 위에서부터 건져내신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기적으로 건져주신다는 말씀이다. 오늘도 위에서 건져주는 그런 기적은 우리 삶의 현장에서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당신에게 부르짖음이 없는 것이다.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얻지 못하네...” 그렇다. 주님께 부르짖는 고함이 없어서 복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다윗은 계속해서 노래하기를 He drew me out of many waters(“그분이 나를 많은 물에서 끌어 내셨다-건져 내셨다”)고 노래했다. 그렇다. 많은 물에서,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재난 중에서, 많은 위기에서, 헤어날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극적으로 건져주셨다는 노래다. 이것이 야훼하나님께 기도하던 다윗이 받은 축복이고, 오늘 기도하는 당신과 내가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구원과 기적과 축복이다.

   ⑼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 이여,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17절)고 노래했다.

그렇다. 세상에 나를 잡아먹으려고 달려드는 원수들이 얼마나 많고 강한가? 얼마나 악독한가? 얼마나 지혜가 많고 똑똑한가? 그들의 입은 독을 뿜어내는 독사의 독이며 그들의 혀는 아첨하는 혀다. 우리의 선한 양심으로는 그들을 상대하거나 이길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들의 처지는 사납게 달려드는 하이에나 들개들 앞에 피할 수 없는 연약한 한 마리의 양과 사슴 한 마리와 같다. 그러나 다윗은 고백하기를 “저희가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야훼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다”(They prevented-confronted me in the day of my calamity. But the Lord was my stay(버팀줄, 정신적인 받침, 의지 등): 18절)고 했다. 다윗의 고백대로 야훼하나님이 다윗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시고 정신적인 Mentor가 되셨으며 그의 강한 의지가 되셔서 달려들던 원수들이 다 무너져 혼비백산 도망쳤다. 다윗의 승리가 나의 승리가 되기를 축원한다.
   
   ⑽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19절)
He brought me forth also into a large place.
He delivered me, because He delighted in me.
   
다윗의 열 번째 감사노래는 다윗을 대적하는 원수들이 중공의 인민군들이 인해전술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파도처럼 몰려오고 또 몰려오듯 다윗의 길을 막고 또 막았지만 야훼하나님이 다윗을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사 넓은 곳으로 인도하셨다고 노래했다. 그렇다. 당신이 기도 줄을 붙잡고 있는 한, 당신이 야훼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어 간구하는 한, 당신의 길을 막는 원수들이 아무리 강하고 개미떼처럼 몰려오며, 당신을 위협하는 문제들이 사면팔방으로 둘러싸도 당신은 싸이지 않고, 망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당신을 기뻐해 구원하시고 야훼하나님이 당신을 넓은 곳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가정과 자녀들과 당신 사업과 사명을 넓은 곳으로 인도해주는 축복이 넘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을 열 가지로 노래한 다윗은 자신이 평생 동안에 보고 경험했던 하나님을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慈悲)함을, 완전(完全)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With the merciful Thou will  show Thyself merciful, with an upright man Thou will show Thyself upright. With the pure Thou will show Thyself pure: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룩한 사랑의 사람, 자비한 사람(헤세드: “사랑을 품은 자”-“하나님을 향해 경건한 사랑을 품은 자”)에게는 주의 자비함을 보이시고, 완전한 사람(타밈: ”마음이 고결하고 순결한 순수한 사람“)에게는 주의 완전함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나바르: ”자신을 세속의 더러움과 죄로부터 분리시켜 날마다 의로움과 순수(純粹)함을 추구하는 거룩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깨끗하심을 보이시고, 사특(邪慝)한 자(익케쉬: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벗어나 왜곡되고 삐뚤어진 자)에게는 주의 거슬림을 보이시는 분(With the froward Thou will show Thyself froward: 언행심사가 왜곡되고 반항적이며 비뚤어진 자에게는 주님의 거슬림을 보이시는 분)이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자비를 사모하는 사람에겐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의 성경에서 자비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관심이 많게 하여 자비를 밝히 깨닫고 알게 하시며 자비하신 하나님을 경험케 해 자비한 성도가 되게 하시고, 완전한 자에겐 완전한 하나님을 경험하여 완전한 하나님을 닮게 하시며, 깨끗함을 사모하는 성도에겐 성경에서 깨끗하신 하나님과 깨끗하게 산 사람들을 보게 하여 배우게 하므로 점점 더 깨끗한 성도가 되게 하시고, 생각과 행동이 왜곡되고 반항적이며 비뚤어진 사특한 사람에겐 하나님의 거슬림을 보여 그의 삶과 길이 비뚤어지게 하신다. 그래서 사람들의 관심 따라 의사 변호사 교수 정치가 사업가 운동선수가 되듯 성도들이 성경에서 어떤 것을 사모하고 어떤 것에 관심이 많은가에 따라 그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 그가 경험하는 하나님이 각각 다르다는 말이다.

그다음 다윗의 청천백일의 고백은 “내가 오늘 이 같은 축복을 받는 것은 나의 의 때문이요, 내 손의 깨끗함 때문이라”고 한 말씀이다. 20-22절을 본다.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賞) 주시며
(The Lord rewarded me according to my righteousness)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According to the cleanness of my hands, He has recompensed me)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그렇다. 다윗이 13년에 걸쳐서 21번이나 당했던 사울의 살해위협에서 검산도곡을   헤치고 나오듯 수많은 사선을 넘고 이웃의 여러 나라들을 정복하여 명실상부한 통일 이스라엘의 국왕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의를 따라 상을 주신 상급의 결과란 말이다. 물론 다윗의 의는 하나님 없는 인간적인 수양이나 도덕적인 의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은 의(義)이다. 오늘 신약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이신득의 이치처럼 구약성도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의인이 되는 것은 불변의 법칙이다. 그래서 다윗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생득적인 의인(경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영적으로 태어날 때(요 1: 12-13) 공통으로 얻어지는 칭의)이 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영접하였으므로 생득적인 의인이 됐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을 받은 것은 그의 생득적인 의와 성화적인 의가 조화를 이뤘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의 육체와 생활과 영혼의 구원과 기적적인 축복들도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생득적인 의와 생활 속에서 날마다 거룩함을 이뤄가는 성화적인 의가 조화를 이룰 때이다.

돌배나무가 참배나무와 접붙임을 받았어도 원줄기에 붙어서 잘 자라야 맛좋은 참배를 열매 맺을 수 있듯, 우리가 예수 믿어 말씀과 성령으로 중생한 생득적 의인이 된 것만으로는 여러 가지 구원과 축복을 맺지 못한다. 생활 속에서 날마다 거룩함을 이루는 성화적인 의인, 성령을 따라 사는 성화적인 의인이 돼야 풍성한 구원과 축복들을 받을 수 있다(갈 5: 16-17)

이제 구체적으로 다윗을 축복의 사람이 되게 했고 구원의 사람이 되게 했던 성화적인 의, 우리들이 다윗처럼 축복과 구원의 사람이 되게 할 성화적인 의를 알아보자. 본문 21-23절까지를 본다. 다윗은 자기가 의롭게 살고 손이 깨끗하게 산 것을 자랑하지 않으면서도 겸손하게 그렇지만 강한 확신으로 말하기를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 목전에 내 손의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1. 다윗의 다섯 가지 의(義)
   ⑴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켰다(I have kept the ways of the Lord; 21상)

다윗이 율법에 기록된 야훼하나님의 명령을 지켰다는 말이다. 다윗시대의 율법과 성경은 양피지에 기록된 모세오경 율법뿐이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제정한 법도에 순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인간의 의와 불의가 판가름 났다. 하나님만이 절대 의를 소유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제시한 모든 법도는 하나님의 성품을 대변한 것이기에 의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법도를 지키는 것이 바로 인간의 의였다.

다윗은 모세를 통해 제시하신 하나님의 율법과 규범에 일치한 삶을 살며 그 법도를 지켰다다. 그것이 다윗의 첫 번째 의였고, 그것이 다윗이 하나님의 보호로 원수들에게서 보호를 받고 기적적인 축복들을 받을 수 있었던 원인이다.

주기도문 교회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의롭게 살고 깨끗하게 사는 것은 고상하게 철학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인생을 음미하면서 문학적으로 사는 것도 아니다. 규칙적으로 주일날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에서 하는 선교나 구제 사업에 동참하는 종교적인 생활도 아니다. 그리고 앙상하게 말라버린 겨울나무처럼 여러 가지 죄와 악으로 암매해진 연약한 양심, 죽은 양심을 따라 사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의는 하나님의 도를 지키며 사는 것이다. 이 길 외에 어떤 삶도 깨끗하고 의로운 삶은 되지 않는다.

염세주의 철학의 거성, Arthur Schopenhauer가 어느 날 공원벤치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있었다. 해가 넘어가게 되자 공원지기가 문을 닫으려고 순시하다가 그를 발견하고는 “여보시오, 당신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사람인데 해가 지는 줄 모르고 앉아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여보시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줄 알았다면 여기, 이렇게 오래 앉아 있겠소?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고민하고 앉아 있는 것이요”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쇼펜하우어의 고백처럼 철학(哲學)은 인생의 실존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내가 누구냐”도, “나는 어디서 와서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디로 가느냐?”의 문제도 답을 못준다. 그 질문은 2400년 전, 철학의 도시 아테네 거리 시장바닥과 정자나무 아래와 장엄한 아테네신전 뜰 안에서 “네 자신을 알라”고 외치던 소크라테스부터 지금까지 대답을 얻지 못한 철학자들의 영원한 질문이다. 그래서 철학적 삶은 의로운 삶도, 깨끗한 삶도 될 수 없다. 끝없는 안개 속을 헤매는 오리무중의 삶일 뿐이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자살해 죽은 총으로 자살해 죽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헤밍웨이처럼 문학을 위해 살고 문학 때문에 죽는 문학적인 삶도 깨끗한 삶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평생 도를 닦으며 사는 종교적 삶은 어떤가? 그것도 정답은 아니다.

그렇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사람 앞에서도 깨끗한 삶은 야훼하나님의 도를 지키는 삶이다. 여호와의 도(The ways of the Lord)에서 도(道, The way, 떼렉)는 “계시해 주신 말씀”을 의미한다. 그래서 여호와의 도는 성경을 통해 문자로 기록돼 우리가 언제라도 읽을 수 있는 말씀이고, 성전에 나와 주의 종들의 설교를 통해 듣고 배우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그 말씀을 지키는 삶이 의로운 삶이요 깨끗한 삶이며 그런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축복해 주신다. 설교를 많이 듣고 성경공부를 오래 하며 유명한 목사들의 설교테이프를 많이 듣고 배워도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축복이 되지 않는다. 다윗처럼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켰나이다” 고백할 수 있는 성도, 그래서 다윗이 받은 축복을 함께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⑵ 악하게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21하)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I have not wickedly departed from my God.

다윗은 자기의 두 번째 의를 “악하게 하나님을 떠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악하게 떠났다”는 히브리어 라솨는 “고의적으로 반역하는 것”, “의도적으로 거역하는 것”을 의미하니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가리킨다.

‘악하게 하나님을 떠났다’는 말은 미국에 사는 것이 싫어서 어렵고 힘들게 취득한 영주권 시민권 다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듯 신앙생활이 힘들다고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버리고 죄악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고, 찢어지게 가난한 것이 싫고 병까지 들어버린 남편이 싫어서 아이들 데리고 도망가는 비정한 여인처럼 의도적으로 믿음을 버리는 것, 고의적으로 교회를 떠나는 것, 악하게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사람에겐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이 없다. 시험을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 역경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키는 사람,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농사꾼처럼 힘들고 어려워도 자기의 사명을 붙잡고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요, 그런 사람이 의인이니 그러한 의인들이 다 되기를 축원한다.

   ⑶ 야훼하나님의 규례와 율례를 버리지 않았다(22절)

“그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For all His judgments were before me,
and I did not put away His statutes from me.

21절에서 다윗이 지켰던 ‘여호와의 도’가 양피지에 기록된 모세오경의 말씀이라면 야훼하나님의 규례와 율례는 말씀 안에서 성도들이 지켜야할 세부적인 규칙의 말씀을 가리킨다. 그렇다. 다윗은 당시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세율법 양피지 말씀을 읽으며 지켰고, 그 가운데 기록된 규례와 율례를 버리지 않고 지켰는데 바로 그것이 그의 의였다.

규례(規例, Judgment, 미쉬파트)는 “성문화된 법전 또는 율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모세오경 전체를 의미하고, 율례(律例, Statutes, 호크)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칙”이란 말로 “십계명 같은 야훼하나님의 특별포고령”을 가리킨다.

다윗이 하나님의 규례인 모세오경을 자기 곁에 두고 읽고 묵상하며 지켰고, 하나님의 율례요 특별포고령인 십계명(十誡命), “①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라 ②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 ③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④ 안식일을 기억하여 지키라 ⑤ 네 부모를 공경하라 ⑥ 살인하지 말라 ⑦ 간음하지 말라 ⑧ 도적질하지 말라 ⑨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 ⑩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를 자기 앞에 두고 묵상하며 지켰듯이, 오늘 우리도 십계명을 잘 지키는 의로운 성도가 되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십일조를 잘 지키므로 야훼하나님의 구원과 축복들을 받아 누리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⑷ 하나님 앞에서 완전했다(23상)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完全)하여”
I was also upright before Him.

“나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했다”는 선언은 I have walked myself upright before Him(내가 그분 앞에서 정직하고 고결하며 올바르게 살았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고 바르게 살았다)는 고백이다. 얼마나 자신이 넘치는 고백인가? 오늘 나는 다윗처럼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가?

‘완전하여’의 히브리어 타밈은 “마음의 고결함 또는 순결함”을 가리킨다. 그 마음에 사악한 생각이 전혀 없는 상태로 욥이 가졌던 하나님 앞에서 ‘순전하고 정직한 마음’과 나다나엘이 가졌던 ‘간사함이 없는 마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전혀 죄가 없는 완전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신실함과 의로움을 인정하실 만한 순수한 상태를 의미한다. 하나님 앞에서 고결하고 순결하며 순수한 마음을 가짐으로 다윗이 받은 축복을 함께 받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한다.

   ⑸ 죄악에서 자기를 지켰다(23하)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I kept myself from my iniquity.

다윗은 자기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다고 했다. 죄악(Iniquity, 아원)이란 “구부러진 것, 패역”이란 뜻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대하는 대신관계에서나 사람을 대하는 대인관계에서 어떻게 하든 죄를 짓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사울과의 관계에서는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는 신앙을 보였다. 그러나 자신이 약하여 정욕시험에 빠져  밧세바를 간음하고 신하 우리야까지 차도살인을 한다. 그런데 그렇게 죄를 지었을 때는 그 죄의 심판에서 철저하게 회개하므로 스스로를 지켜서 다시 일어섰다. 이것이 다윗의 의다.

죄를 짓지 않았을 때인 사울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 손대는 죄’를 멀리하려고 비참하고 처절하도록 자신을 지켰고, 연약함 때문에 밧세바를 범한 간음죄를 지었을 때는 죄의 징벌을 끝까지 받고, 처절하게 당하고 견디면서 회개하여 파멸에서 자신을 지켰다. 그러므로 다윗의 축복은 거저 받은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의 구원과 축복도 쉽게 오는 것이 아니다. 다윗처럼 ⑴ 야훼하나님의 도를 지키고 ⑵ 악하게 하나님을 떠나지 말며 ⑶ 하나님의 규례와 율례를 버리지 말고 ⑷ 하나님 앞에 완전하며 ⑸ 자신의 죄악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다섯 가지 의를 하나님께 보임으로 예비하신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들을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한다.

   2. 다윗의 네 가지 축복

이렇게 다윗이 의롭게 살 때, 야훼하나님은 다윗에게 네 가지 큰 축복을 주셨다.

   ⑴ 곤고함에서 건져주시는 축복(27절)

“주께서 곤고(困苦)한 백성은 구원(救援)하시고”
For Thou will save the afflicted.

곤고(困苦)함이란 지칠 곤, 괴로울 곤(困)자와 쓸 고, 괴로울 고, 씀바귀 고(苦)자를 합친 말이니 “지치고 괴로운 삶의 환경, 삶이 씀바귀처럼 쓰디쓰고 비참한 환경”을 가리킨다. 그래서 성경은 곤고함(Afflicted)을 ① 노예생활(Slavery; 창 16: 11, 출 1: 11-12)로 말했고 ② 밥을 굶는 배고픔(Fasting; 레위 23: 27-29, 사 58: 3)으로 말했으며 ③ 감당하기가 어렵고 무거운 과중한 일(Heavy responsibility; 민 11: 11) ④ 물질을 다 잃게 되는 손해(Material lose; 룻 1; 21) ⑤ 많은 시련들(왕상 2: 26, 시 25: 16,사48: 10) ⑥ 전쟁에서 패배함-실패(Defeat in war; 왕하 17: 20, 시 129: 1) ⑦ 육체의 질병(Bodily disease; 욥 6: 14, 30: 11) ⑧ 배고픔(Hunger; 사 58: 10) ⑨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Sufferings for Christ; 고후 1; 6, 8: 2, 11: 23-28, 히 10: 32-33, 11: 37) ⑩ 박해와 핍박(Persecution; 막 4; 17) ⑪ 정신적 고통(Mental torment; 창 29: 32) ⑫ 압제와 압박당함(Oppression; 창 41: 52) ⑬ 무자(無子: 자식을 낳지 못함)함(Barrenness; 삼상 1; 11) ⑭ 원통함과 극심한 모욕(Insults; 삼하 16: 12) ⑮ 포로 당함의 환난; Captivity; 대하 33: 12) ⑯ 희망이 없는 상황(Hopeless situations; 출 1; 11, 3: 7) ⑰ 구류(拘留) 당함, 쇠사슬에 매임(Imprisonment; 시 107: 10) ⑱ 죄의 형벌을 당함(Punishment for sin; 삼하 7: 10, 왕상 11; 39)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깨끗할 때 이러한 곤고함의 모든 상황에서 건져주시는 축복을 주신다. 당신의 의로움을 통해 모든 곤고함(자신, 가정, 자녀, 남편, 아내, 사업, 질병, 압박과 설움)에서 건짐을 받는 축복과 기적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⑵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주시는 축복(28절)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로다”
Thou will light my candle;
The Lord my God will enlighten my darkness

이 말은 모든 문제와 고통과 어둠에서 건져주신다는 히브리 관용어이다. 그리고 이 말의 영적인 의미는 꺼졌던 촛불에 불을 붙여 환하게 해주듯 “다시 번영케 하신다”는 뜻이다. 그렇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때, 내 손이 깨끗할 때, 하나님은 어둡기만 하던 나의 과거와 칠흑의 어둠 같은 나의 현재를 빛으로 환하게 해주신다. 가시에 찔리고 절망에 갇혀있던 내 삶을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와 같은 안정된 삶으로 바꿔주신다. 손대는 일마다 안 되던 재수 없던 사람을 손대는 일마다 잘 되는 재수 있는, 복 받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다. 가난에 찌들려 비틀어질 대로 비틀어진 삶을 주름지고 구겨진 옷을 Steam Iron으로 다려서 반듯하게 펴놓듯 당신의 삶을 펴 주신다. 질병과 저주에 짓눌려 살던 나약한 삶을 건강이 넘치고 활기가 넘치는 삶이 되게 하신다. 당신의 의가 이러한 축복을 만들 수 있기를 축원한다.
  
   ⑶ 적군 위를 달리는 축복(29상)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敵軍)에 달리며”
For by Thee I can run upon a troop.

여러분, 예수 믿으면 대적이나 원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문제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대적들이 더 많아지고 더 강한 원수들이 덤벼든다. 고난이 더 많아진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원수와 대적들을 넉넉히 이기게 하신다. 장애물처럼 어려운 문제들을 만나지만 그 장애물들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그래서 천군만마의 적군 위를 달리는 용맹한 장수처럼 그리고 검산도곡을 헤치고 전진해 달려가는 불사조의 장수처럼 문제들을 이기고 대적들을 물리치며 인생을 승리하며 살아가는 용맹스런 성도로 살게 하신다.

몇 해 전, 성지 이스라엘을 순례했을 때에, 말을 탄 목동 몇 사람이 열댓 마리 개를 데리고 수백 마리 양을 몰고 가는 장면을 보면서 크게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몇 마리 개와 사람 몇이 천여마리나 되는 양떼를 인도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인데도 그들은 아무 문제없이 질서정연하게 양떼를 몰고 간다. 그래서 가던 안내자에게 부탁해 버스를 멈추고 목동과 양떼를 자세히 보았는데...처음에는 개들이 스크럼을 짜고 떼를 지어 걷거나 뛰어가는 양들을 밖에서 포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주둥이로 밀거나 소리 내어 짖어서 길을 안내하더니 나중에는 바쁘니까 양들의 등 위를 타고 뛰어다니면서 질서정연하게 길을 안내하는데 하나의 예술이었다.

우리의 의로 우리 앞으로 다가오는 모든 육체적, 정신적, 환경적, 영적인 원수와 대적들을 이기고 힘차게 달려가는 야훼하나님의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⑷ 담을 뛰어넘는 축복(29하)

“내 하나님을 의지(依支)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
And by my God I can leap over a wall.

내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높은 담을 뛰어넘은 축복,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은 축복, 내 생각으로 불가능한 일 내 힘으로 안 되는 일 내 경험으로 가망이 없는 일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해결됐다는 고백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의인들에게 이러한 축복을 주신다.

인생은 장애물 경기, Huddle 경기이다. 이 일이 끝나 이젠 평안하겠지 하면 다른 문제가 다가온다. 이 가게문제 해결되면 저쪽 일이 불거져 나오고, 남편문제가 해결되니 아이들 문제가 나타난다. 친정 문제가 끝나자 시댁 문제가 나타난다. 문제들의 연속, 장애물 경기, 그것이 인생의 삶이다. 이럴 때,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장애물 앞에서 좌절한다. 넘어지고 자포자기(自暴自棄)한다. 그러나 다윗처럼 야훼하나님을 의지하는 의로운 사람은 높이뛰기 선수가 장대를 의지하고 목표물을 뛰어넘고 장애물을 뛰어넘듯 넉넉히 불가능의 벽을 뛰어 넘는다.

2002년, 8개월이 넘게 성전 부지를 찾아다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현재의 성전대지를 구입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성전대지를 구입하자마자 카운티 Permit도 없이 믿음으로(배짱?) 밀림 같이 울창한 나무들을 베어 넘기고(나무들을 2년 동안 불태웠는데 허가 없이 나무를 벌목하거나 불태우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땅을 고르게 한 후, 건물허가도 받지 않고 대형 트레일러 두 대를 들여 놓아 붙여서 성전을 만들었다. 그리고 교육관 Fellowship Hall이 너무 비좁아서 증축허가도 없이 두 배 이상이나 확장공사를 하고 창고까지 무허가로 지었다.

그리고 7-8년이 지난 어느 날, 카운티 직원이 교회를 찾아왔다. 사용하고 있는 교회건축 허가증과 교육관과 창고 건축 Permit을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허가증이 없으면 4일 내로 모든 Permit을 내고 그렇지 않으면 모든 건물을 사용할 수 없게 하겠다는 것이다(당시 나를 만나려고 카운티 직원이 네 번이나 왔었는데 만나지 못했다가 다섯 번째 나를 만났다고 한다).

나는 삼일 동안 부르짖어 기도했다(당시 교회는 교회, 교육관, 창고 건물 Permit을 낼만한 돈이 없었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 카운티직원과 교육관 사무실에서 대좌했다. 그런데 사람은 같은 사람인데 나흘 전 사람과 그날의 사람이 전혀 다르다. 나흘 전엔 Permit이 없다고 하니 ‘불법이기 때문에 예배당 사용이 불가능이다’라며  위압적으로 나를 대했던 사람이 그날은 순한 양처럼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날, 카운티직원은 내 앞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Permit은 자기가 직접 내주고, 자기상관이나 부하직원이 내줄 수 있는 Permit은 내 앞에서 카운티사무실로 전화를 해서 모든 Permit을 다 받아내 주었다. 할렐루야!

그날 이후 지금까지 주님의 구원의 역사와 축복의 역사는 주기도문 교회와 김목사에게 함께 하고 있음은 성도여러분이 보시는 그대로다(몽고메리와 하워드 카운티 몇몇 교회들이 우리처럼 성전을 구입했다가 Permit 문제로 예배당을 사용치 못하고 있다)

김목사와 주기도문 교회와 성도여러분이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하나님의 규례와 율례를 지키며, 악하게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며, 모든 죄악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의의 사람들로 사는 한, 야훼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든 곤고함에서 건져주실 것이다. 주께서 우리의 등불을 켜서 다시 번영케 하실 것이다. 주께서 우리로 모든 대적과 원수들 위를 달리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장애물의 담을 뛰어넘게 하실 것이다. 우리의 의를 보상해주시는 야훼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성도, 의인된 성도로 의로웠던 다윗이 받은 의인의 구원과 축복을 풍성하게 누리는 삶이 되기를 축원한다. 

김엘리야 목사(워싱톤주기도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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