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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11월20일 20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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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자의 네 가지 삶

1969년, 전도사 2년차의 철없고 허황된 꿈만 있던 시절에, '하나님의 일을 성공적으로 멋있게 하기 위해 예수님처럼 40일 금식을 할 것이다. 능력 있는 부흥사, 유명한 목사가 되려면 모세처럼, 엘리야처럼 40일 금식은 해야 한다'며 금식에 대한 올바른 성경지식이나 아무 준비도 없이 허황된 꿈에 부풀어 겁도 없이 무작정 40일 금식을 도전했다가 열셋째 날에 보기 좋게 실패를 한 적이 있다.

그 뼈저린 금식중단 실패와 잘못들을 아신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지난 목회 45년 동안에 한번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게 하셨고, 세 번의 40일 절식기도를 하게 했으며 한번의 21일 금식기도, 세 번의 21일 절식기도, 그리고 성도들과 연속으로 40일 금식기도를 14번을 하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날들을 먹지 않게 하시고 기도하는 시간들을 가지게 하셨지만 돌이켜보면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금식기도가 더 많았었음을 고백한다.

처음 금식기도를 실패했을 때, 금식 중에 하나님께서 '지혜기도 일천번제'를 나에게 지시하셨다. 성경에 나오는 지혜(491회) 지식(171회) 명철(160회) 총명(27회) 현숙(4회)등 지혜와 관련된 843개 단어와 지혜와 반대되는 어리석음, 미련함, 우둔함, 거만함 등의 243개 단어가 나오는 1000절이 넘는 성경구절을 한국어, 영어, 독일어, 헬라어, 히브리어로 적어서 그 뜻을 노트에 기록한 후 하나님께 1000번의 지혜를 간구하는 '지혜기도 일천 번제'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수백 번을 했던 지혜기도는 1975년 1월 미국에 들어오면서 기도 노트를 가져오지 못해 중단되므로 '지혜기도 일천번제'도 흐지부지 실패했다. 그래서 40일 금식기도 실패와 지혜기도 일천번제의 뼈저린 실패는 많은 세월 내 마음에 무거운 짐으로 남아 있었다. 부끄럽지만 다행히 금식기도의 짐은 벗었는데 지혜기도는 아직도 내게 남아있는 짐이다. 그래서 지혜기도를 다시 하고 있는데 1000번을 채워야 할 나의 '지혜기도 일천번제'를 위해 여러분의 기도를 부탁한다.    
 

                         지혜자의 네 가지 삶

지혜와 지식은 일란성(一卵性) 쌍둥이이면서 지혜와 지식이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은 여러 가지로 많이 다르다. 잠언 1: 7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知識)의 근본"(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the knowledge)라고 했고 잠 9: 10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知慧)의 근본"(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wisdom)이라고 함으로 참 지혜와 참 지식은 하나님 경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일란성 쌍둥이임을 말했다. 그러나 "사물에 대한 정확한 의식이나 상상", "사물을 감지하여 이해하는 작용"인 지식, Knowledge은 학교나 책이나 사람을 통해 얻을 수 있지만 "사물의 실상을 관조하여 모든 의혹을 끊고 바른 깨달음을 얻는 지혜(Wisdom)와 슬기"는 내가 경험하거나 남이 경험한 것을 배우거나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데서 지식과 지혜에 차이가 있다.

그래서 가방끈이 길고 문교부 혜택을 많이 받아 최고 지식을 가진 사람 중에 지혜가 부족한 사람도 있고 초등학교가 교육의 전부인데도 공부 많이 한 사람, 영어 잘하는 사람보다 사업능력이 뛰어나 돈 버는 지혜, 자녀교육의 지혜, 사람을 다스리는 지혜, 인생을 멋있게 사는 지혜는 수십 수백 배나 뛰어난 사람도 있는 것이다. 대학원을 나오고 석 박사, 판검사가 돼 아는 것은 많아도 못하나 박을 줄 모르고 전기만 나가도 기술자를 불러와야 하며 작은 문제만 일어나도 도와줄 사람을 찾아야하는가 하면 배운 것은 없어도 지혜가 많아서 가족들이 편안하게 살도록 해주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사는 데는 지식도 있어야 하고 지혜도 있어야 한다.

성경은 바벨론에서 베들레헴까지 2000리 먼 길을 달려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했던 멜콘, 발사살, 가스퍼 등 동방박사 세 사람을 마고이라고 불렀다. 마고이란 지혜가 있는 현자, 지혜자란 뜻이다. 동방박사 세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었기에 성경이 그들을 지혜가 있는 사람으로 인정했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라야 지혜 있는 사람이 되는가? 동방박사들을 조명하면서 지혜자의 네 가지 삶을 알아본다.


   1. 하늘에 관심을 갖고 연구한 사람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을 때, 예수님의 탄생을 영접하여 축하했던 사람들은 당시 정치가들이나 돈과 권세가 있었던 사회지도층인사가 아니었고 더욱이 종교지도자들도 아니었다. 당시 사회에서 천대받으며 버림받았던 낮은 계층의 목자들이었고 성령의 계시를 받고 성전에서 외롭게 메시야를 기다리던 예루살렘의 시므온과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후 84년 동안 성전에서 기도와 금식으로 세월을 보내던 안나 그리고 동방박사들이었다.

아마 앞으로 저 공중에 재림하실 그리스도, 이 지상으로 다시 오실 재림 예수를 맞을 사람도 그와 같은 사람들일 것이다. 자기 명예와 인기와 성공을 위해 뛰어다니는 목사들이 아니라 자기에게 맡긴 하나님의 양떼들을 생명을 다해 지키며 돌보는 영적인 목자들 그리고 시므온과 안나처럼 영적으로 깨어 성령으로 살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성도들 그리고 동방박사들처럼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성도들만이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동방박사들은 주전 600-700년 전에 이스라엘과 유다에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을 통해 영향을 받아서 메시야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박사들이었을 것이다. 1절에 박사로 번역된 마고이는 2600년 전 다니엘 당시부터 불렸던 명칭으로 다니엘을 위시해 꿈이나 신비한 것을 해석하는 신통력을 지닌 바벨론이나 메데 파사의 제사장들과 왕들과 박사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마고이들은 하늘의 별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렇다. 참 지혜의 사람은 자연계의 하늘의 상태, 눈과 비와 바람을 연구하거나 하늘의 별자리를 연구하는 사람보다는 영적(靈的)으로 하늘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기상을 연구하여 날씨의 맑음과 흐림, 추위와 더위와 시원함, 비와 눈의 강우량과 강설량과 바람의 흐름을 예보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연구하여 시대와 역사의 징조를 밝히 보며 사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하나니 너희가 천기(天氣)는 분별하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標的)은 분별할 수 없느냐?"(Do you know how to discern the face of the sky, but cannot discern the signs of the time?; 마 16: 2-3)고 했다. 자연계의 날씨는 구름이나 바람만 보고도 분별하여 며칠 앞을 예고예상하고 준비할 줄 알면서 어째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하지 못하느냐는 말씀이다.

지금도 세계 각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테러와 민족분쟁, 지진과 기근, 화산의 폭발, 정상을 초월하는 폭설과 폭우, 각종 전염병의 창궐, 흉악해져가는 사람들의 마음, 동성연애와 간음의 거센 물결...하나님을 거역하는 온갖 사상들의 난무(亂舞)들은 세상의 종말을 가리키고 있는데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너희는 왜, 어째서 이 시대를 분별치 못하느냐는 질책이다. 하늘을 연구하는 지혜의 사람들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대를 조명하고 종말을 준비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1980년대 초, 80년 이상 깊은 산 속에서 도를 닦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있는 일본의 고승(高僧)이 더 깊고 오묘한 도를 깨닫고자 불교의 본산지 인도에 갔다. 고승은 인도 유명고찰이 있는 명산에 올라간 후 동굴 속에 들어가 100일 동안 면벽좌선으로 특별참선을 했는데 100일째 되는 마지막 날 밤, 석가삼존(釋迦三尊: 석가모니, 문수보살, 보현보살의 세 부처의 높임말)이나 석가탱화(釋迦撑畵: 석가모니의 화상)가 그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십자가상에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하늘로 올라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그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은 세상 말세 중에 말세이니 너는 헛된 것을 탐구하지 말고 예수를 믿으라. 잠시 잠간 후면 예수께서 심판의 주로 세상에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할 것이니 너는 이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라"는 계시를 받았다.
그 계시를 받고 충격 속에 일본으로 돌아온 고승은 신문과 라디오, 텔레비전에서 자신이 인도의 명산고찰에서 체험한 것을 고백하며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고백한 사건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인류구원이 급하신 하나님은 일본의 1억 7천만과 불교 힌두권의 30억 영혼을 구원코자 일생 동안 불도를 닦으며 하늘의 신비한 뜻을 구하던 일본의 고승(高僧)을 통해서까지 예수 재림과 인류 심판을 경고하신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1986년 4월 6일, 체르노빌 원자로 폭발사고로 수십만이 죽고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으나 깨닫지 못하고 회개치 않자 하나님은 무신론의 종주국 러시아 모스크바 하늘에 직접 역사하셨는데 거대한 손이 모스크바 상공에 나타나 "쏘련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글씨를 써 사람들이 보게 한 것이다. 벨사살 왕의 연회만찬 건물 벽에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을 써서 바벨론 멸망을 경고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모스크바 상공에 거대한 구름 글씨를 30분이나 나타나게 하셨다. 그러자 모스크바 시민들이 두려워 떨며 공포에 휩싸이자 러시아 당국은 색깔이 있는 연막(煙幕)을 공중으로 살포하고 비행기 배기 연기를 뿜어내 사람들이 그 글자를 읽지 못하게 훼방했다. 이 사건으로 모스크바는 세 시간 이상이나 교통이 마비되고 수많은 교통사고가 생겼고 사람들의 동요가 있었다. 이러한 역사가 있었음에도 하나님 모시기를 거역한 러시아는 1991년, 73년 만에 공산주의가 망하고 러시아 연방은 15개 나라로 공중분해 됐으며 기독교의 복음이 홍수처럼 밀려들어가게 하셨다.

지혜의 사람은 비록 몸은 땅에 있지만 마음이 하늘에 있는 사람, 하늘을 연구하는 사람, 하늘 징조에 관심 두는 사람, 하늘에 소망을 둔 사람들이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When Christ is revealed, then you also will be revealed with Him in glory; 골 3:2-4) 동방박사들처럼 하늘을 연구하고 하늘에 마음을 두고 살다가 영광중에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나는 축복들이 계시길 축원한다.

 
   2. 하나님의 지시를 실천하는 사람

예수님은 산상보훈의 마지막 결론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그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부딪혀도 무너지지 않고 든든히 서 있을 것이요 말씀을 듣고 지키지 않는 사람은 비 오고 바람 불고 창수가 날 때 쉽게 무너져버리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라"(마 7: 24-27)고 했다. 그렇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경고(警告)를 들을 때 노아처럼, 하나님의 명령(命令)을 들을 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계시(啓示)가 임할 때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사도 요한처럼, 하나님의 심판 예고를 들을 때 니느웨 성처럼 즉시 실천하는 사람이다.

동방박사들은 하늘에 별이 나타났을 때, 즉시 바벨론을 출발했다. 그리고 동방박사, 마고이들은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을 경배한 후 꿈에 하나님께서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따라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다(12절) 그들이 가는 길에 어떤 위험이 있을까를 미리 계산하지 않았다. 그 길이 얼마나 멀고 힘들 것도 따지지 않았다. 오늘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지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지시, 명령과 율례를 지키는 사람들이다.

외국선교는 미국, 영국, 호주가 한국보다 수십 년을 먼저 했고 선교사도 그들이 한국보다 몇 배나 많다. 그런데 한국 선교사들은 외국 선교사들이 20년, 10년 복음을 전하다 선교를 포기하고 떠난 곳에 들어가서 성공적으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그래서 풀러신학원을 중심해 세계선교를 담당한 선교기관의 전문가들이 한국선교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한국교회가 선교에 성공하는 비결이 무엇인가? 한국 선교사들이 선교사역에 성공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그런데 한국 선교의 성공비결 답변은 놀랍게도 "무경험, 무전(無錢), 무모함의 3원칙"이었다. 한국 교회는 선교경험도 적고 돈도 없으면서 무모할 정도로 무데 뽀로 밀어붙이는 것이 선교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외국 선교회는 선교지가 결정되면 선교비를 준비하며 선교계획을 세워서 훈련된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한국교회는 기도 중에 선교의 응답을 받으면 즉시 앞 뒤 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믿습니다'하고 선교지로 떠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전략이 맞아 떨어져 한국선교사들이 가는 곳마다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님의 소개로 불신자와 결혼해 남편의 핍박을 받으며 어렵게 신앙생활을 하던 여 집사가 자기가 출석하며 섬기는 본 교회 부흥회에서 많은 은혜를 받았다. 자기와 결혼만 해주면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약속했던 남편은 결혼과 함께 교회 출석은 그만두고 여 집사 신앙까지 박해하고 교회를 가지 못하게 해 어려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부흥회에서 큰 은혜를 받아 그가 처녀시절에, 목회자 사모나 선교사가 되겠다며 헌신했던 처음 믿음,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보니 부끄럽고 송구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부흥회 마지막 날, 전 교인이 성전 건축을 약속할 때, 여 집사는 "교회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벽돌 비용을 모두 바치겠다"고 약정헌금을 했다.

목사님이 장로들을 통해 여 집사의 가정 형편을 알아보니 부부가 교회출석을 하는 부부교인도 아니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가정도 아닌 것을 알고 건축위원장을 통해 '집사님의 마음과 정성은 이미 하나님께서 받으셨으니 벽돌 헌금에 부담 갖지 말라'고 했다. 그랬더니 여 집사가 정색을 하고 '제가 믿음으로 약정했으니 벽돌헌금을 꼭 드리겠다'는 것이다. 목사님이 몇 차례 권면했지만 여 집사가 끝까지 고집하므로 목사님은 한편으로는 염려가 됐지만 여 집사께서 기도하고 믿음으로 결정한 일이니 장로들과 함께 그를 위해 기도하기로 하고 하나님께 맡겼다.

여 집사는 부모님이 반대하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목사 사모나 선교사로 하나님께 헌신했을 자신이 남편 하나 구원 시키지 못하고 자기 신앙마저 이런 모습인가 했었다가 은혜를 받고 보니 성전 벽돌 헌금은 자신이 해야 한다고 작정은 했지만 가진 돈은 없고 불신 남편이 건축헌금으로 은행 대출을 해주진 않을 것이고...그래서 '벽돌 헌금을 위한 40일 작정 새벽기도'를 시작했다.

이렇게 작정기도를 한지 다섯 주간이 지난 어느 날, 여 집사가 새벽기도를 가고 있는데 갑자기 방법대원 두 사람이 쫓아와 다짜고짜 '남들 다 잠자는 새벽에 다닌다'고 도적이라고 몰아 부치며 여 집사를 사정없이 두드려 팼다. 새벽기도를 가는 것이라고 말했는데도 씩씩대며 주먹질, 발길질을 해댔다. 여 집사는 매를 맞고 그 자리에서 기절해 의식불명이 됐는데 마침 다른 교인이 새벽기도를 가다가 그것을 본 후 여 집사를 병원으로 옮겨 목숨을 건졌고 매를 맞으면서 품속에서 떨어뜨린 성경책을 보고 방범대원들이 사람 잘못 친 것을 알게 됐다.

병원에 입원한 후에도 의식불명으로 있다가 며칠 만에 깨어나려는데 마침 그때 방범대원들과 자기 남편이 보상비 합의를 보고 있더란다. 처음엔 방범대원 한 사람이 1000만원씩 2천만 원, 그 다음엔 4천, 그다음엔 6천만 원으로 보상비가 올라가다가 마지막엔 치료비는 방범대원이 다 지불하고 보상비 6천만 원을 받기로 최종 합의가 됐다. 그래서 의식에서 깨어난 여 집사가 남편에게 '40일 작정 새벽기도' 이야기를 했더니 남편이 두말없이 보상비 6천만 원을 벽돌헌금으로 드리라고 하더란다. 그 다음 남편이 아내의 믿음에 감동을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고 은혜를 받아 그 교회에 충성스런 집사가 됐고 여 집사는 축복으로 받아 중소기업을 하면서 교회를 섬기고 있다고 한다.

당신이 성령의 감동을 받을 때, 주저 말고 믿음으로 도전하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믿음으로 실천하라. 주님께서 당신 마음에 음성을 들려주시거나 마음을 감동하실 때, 동방박사, Wise men 마고이들 처럼 지체하지 말고 실천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3. 실수(失手)를 돌이키는 사람

그렇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자기의 실수를 깨달을 때 바로 돌이키는 사람들이다. 여러 달 동안, 별의 인도를 받아서 2000리 먼 길 유대 땅까지 온 박사들은 '저 별은 예사로운 별이 아니다. 유대 나라 왕궁에 경사가 있는 징조다. 다른 곳으로 갈 것 없이 왕궁으로 가서 왕을 배알하자'고 의논을 했다. 그리하여 박사들은 아무 의심이나 주저함이 없이 예루살렘 헤롯 왕궁을 찾아갔다. 그리고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Where is He who has been born King of the Jews?)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다(For we have seen His star in the east, and have come to worship Him)"고 했다. 그리고 몇 달 전 바벨론 하늘에 나타난 신기한 별의 이야기와 그 별의 안내를 받고 예루살렘까지 오게 된 경위를 헤롯에게 설명했다. 그러나 헤롯의 냉담한 반응과 싸늘한 왕궁의 분위기 그리고 자기들이 왕궁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이제까지 하늘에서 빛나던 밝고 환한 별빛이 사라진 것을 통해 왕궁의 경사가 아닌 것을 직감한 박사들은 자기들의 판단착오였음을 깨닫고 즉시 왕궁을 떠난다.  
    
왕궁을 떠나는 박사들에게 헤롯은 그 별이 언제 나타나기 시작했는지 물었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말처럼 베들레헴에서 유대인의 왕을 만나 그에게 경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왕궁에 들러 자기에게 자세히 알려주어 자신도 가서 경배할 기회를 만들어 달라며 부탁을 한다. 미궁을 헤매다가 미로를 빠져나온 사람처럼 헤롯 궁을 나온 박사들은 그때까지 자취를 감췄던 별이 다시 나타나 그들의 길을 안내하기 시작하자 안도의 한숨을 쉬고 크게 기뻐하며 베들레헴으로 찾아가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며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린다.

         10절을 보자.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When they saw the star, they rejoiced with exceeding great joy.)

그렇다. 참 기쁨은 나의 실수를 돌이킬 때에 나를 찾아온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장애물을 제거할 때 내게 찾아온다. 내가 잘못된 자리에서 떠날 때, 있지 말아야 할 곳에서, 실수의 자리에서, 죄와 악과 오만한 자의 자리에서 떠날 때, 나를 찾아온다. 설령 그 자리가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자리라도, 그 자리가 성공하는 자리라도, 그 자리가 등 따뜻하고 배부를 수 있는 자리라도 하나님 앞에서 죄의 자리 실수의 자리라면 떠나는 것이 지혜자이다. 마고이들이 헤롯 궁을 떠날 때, 큰 기쁨이 그들에게 임했던 것처럼 신앙적 실수, 영적인 실수, 물질적 실수, 대인관계의 실수를 떠나는 당신에게 큰 기쁨이 밀물처럼 임하기를 축원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한 사람이 예수 믿다가 타락해 신앙을 포기한 사람과 끝까지 신앙을 잘 지킨 두 사람의 가정을 150년 동안 조사하여 연구 보고한 내용이다. 먼저, 예수 믿다가 타락한 마틴 칼리콕(Martin Kalicock)의 가정이다. 그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타락하여 알코올 중독자가 됐는데 150년 동안의 그의 가계족보를 살펴보니 150년 동안에 그를 통해 480명의 자손들이 태어났는데 그들 중에서 143명이 저능아(低能兒)가 나왔고, 36명의 사생아(私生兒)가 나왔으며, 23명의 알코올 중독자, 22명이 간질환자, 그리고 3명이 사형언도를 받고 사형을 받았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끝까지 잘한 리차드슨(Richardson)은 150년 동안에 502명의 자손을 낳았는데 그들 중에서 크리스천 사업가가 160명이 나왔고 39명의 대학교수가 나왔으며, 20명의 판사와 18명의 목사, 10명의 정치가와 80명의 의사가 나왔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실수를 안 할 수는 없지만 실수와 실패 속에서도 낙심치 않고 잘못을 고쳐가며 신앙을 지킬 때, 주님의 축복으로 나 자신 뿐 아니라 우리 자손들에게까지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이 계속되는 역사가 있을 줄 믿는다.

   4. 다른 길로 돌아가는 자들

그렇다.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사람, 하나님의 지혜가 그 마음에 있는 사람은 다른 길로 돌아가는 사람들이다. 12절을 보자.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박사들께서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돌아가는 길에 내게 알려서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는 헤롯의 당부를 받은 박사들이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갔다는 말씀이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여섯 개 꿈 이야기 중 두 번째 꿈 이야기이다.(마 1: 20, 2:12, 13, 19, 22, 27: 19)

역사기록을 보면 동방박사들은 헤롯을 찾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지시대로 다른 길로 고국 바벨론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동방박사들을 기다리던 헤롯은 예상했던 시간이 돼도 그들이 돌아오지 않자 군사들을 풀어 바벨론으로 가는 모든 길목을 다 지켰다고 한다. 그러나 꿈을 통해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박사들은 길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은 험한 산악 길과 거친 광야 길로 바벨론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넓고 편한 대로를 가도 2000리 길은 힘들고 어려운 길이다. 그러나 길이 없는 산과 골짜기와 가파른 절벽의 오솔길을 간다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며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렇다. 지혜자는 때때로 사람들이 걷지 않는 전인미답의 길,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말씀 안에서 인생을 다른 길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 세상은 제 멋대로, 자기가 좋은 대로, 자기 의지에 따라 살지만 지혜의 사람은 다른 길을 간다. 세상에서 10대는 쫓아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축구공이요, 20대는 쫓아다니는 사람이 줄어서 농구공이며, 30대는 그저 한 명만 따라다녀서 골프공, 40대는 바람나면 어디로 튈지 모르기에 럭비공, 50대는 서로 남에게 미룬다고 탁구공이라고 하여 둥근 공처럼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사람은 세조(世潮)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교회 올 때는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왔지만 예배 후에는 남을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는 마음을 안고 돌아간다. 성경을 몰랐을 때는 남편 알기를 돈 벌어오는 기계, 아내 알기를 식모나 파출부로 알았지만 말씀을 배운 후엔 남편이 나의 주님이 되고, 아내가 나와 함께 영생과 천국의 유업을 함께 상속받을 자로 알아 존귀하게 여기게 된다. 예수님을 몰랐을 때는 보이는 이 세상이 천국이요 내 배가 하나님이었지만 예수님을 알고 난 후엔 이 세상은 잠시 잠간 살다가 떠나는 나그네며 영원한 천국을 준비하는 곳이며 살아계신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으로 알고 산다. 이제까지는 불의한 길, 악한 길, 죄의 길, 넓은 길을 정신없이 달려왔지만 이제부터는 의로운 길, 선한 길, 좁은 길로 십자가 지고 걸어간다. 다른 길을 가는 것이다.

성경엔 길(Way)이란 말이 무려 863회나 언급됐는데 지구촌 인생들이 걸어가는 길 만도 50여 가지나 있다. 그 중에 예수님을 모르는 저주받은 자들이 가는 길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욥 8: 13), 악인의 길(욥 22:15, 시 119:101, 왕상 15: 27), 사람을 멸망시키는 길(욥 30: 12), 강포자의 길(시 17:40, 게으른 자의 길(잠 15: 19. 24), 이익만을 탐하는 자의 길(잠 1: 19), 광야의 길(출 13:18, 신 8:2), 패역한 길(민 22: 32, 삿 2:9), 죄인의 길(시 1:1), 음녀의 길(잠 1: 15, 7: 25, 27), 굽은 길(잠 10: 9), 험한 길(잠 13: 15), 미혹한 길(약 5: 20), 발람의 길(벧후 2: 15), 가인의 길(유 11) 등 수많은 지옥의 길이 있다.

그다음, 축복받은 사람,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성도들이 가는 길은 생명의 길(시 16: 11, 잠 6: 23), 주의 길(시 25: 4, 44:8, 출 33: 13), 평탄한 길(시 27:11, 잠 5: 6, 창 24:21, 스 8:21), 공평의 길(잠 2:8, 8: 20), 의로운 길(잠 12: 27, 시 26: 7, 1: 6, 23: 3), 선한 길(왕상 8: 36, 잠 2: 9), 광명의 길(욥 24: 13), 주의 법도의 길(시 119:27, 30: 32), 영원한 길(시 139: 24), 지혜로운 길(잠 4: 11), 곧은 길(잠 11: 5), 명철의 길(잠 21; 16) 겸손한 자의 길(암 2: 7), 여호와의 길(사 40:3), 깨끗한 자의 길(잠 21: 8), 평강의 길(눅 1: 79, 롬 3: 17), 구원의 길(잠 16: 17)이 있다.

이렇게 많은 길 중에서 지금 당신이 걸어가고 있는 길은 어떤 길인가? 성경은 확실하게 말씀하시기를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There is a way which seems right to a man, but its end is the way of death; 잠 14: 12, 16: 25) 그렇다. 사람이 보기엔 바른 길 같고 최선의 길 같으나 그 마지막은 사망으로 들어가는 길, 지옥의 길, 심판의 길이 있다. 그래서 인생의 모든 길이 다 바른길이 아니다. 지금 나는 멸망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가고 있는가? 지옥의 길이 아닌 생명과 영생의 길을 가고 있는가? 2000년 전, 첫 번째 성탄절에 왔던 길을 되돌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다른 길로 돌아갔던 동방의 박사들처럼 이 시간 이후 당신의 길이 지혜자로 다른 길을 가는 자 되기를 축원한다.

지금까지는 기도 안하던 사람이 지금 이후로는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 오늘까지는 성경을 멀리했던 사람이 오늘부터는 성경을 사랑하고 읽는 사람이 되며 어제까지는 예배와 전도를 등한시하던 사람이 오늘부턴 새로운 예배의 사람이 되며 지금까지는 남들이 가는 길을 함께 갔던 사람이 이제부터는 전혀 새로운 다른 길을 가며 예배 전까진 미움과 증오로 가득했던 마음이 사랑과 불쌍히 여김으로 채워져 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성경은 "지혜는 너무 높아서 미련한 자의 미치지 못할 것이다"(Wisdom is too high for a fool; 잠 24: 7)고 했다. 그렇다. 가방끈이 길다고, 경험이 많다고, 교회를 다닌다고, 집사 권사 장로의 직분을 받았다고, 인생의 연륜이 길다고 아무나 지혜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에 없는 미련한 자, 어리석은 자에게는 지혜가 너무 높다. 그래서 지혜자의 삶이 고귀한 것이다. 지혜자는 하늘의 징조를 통해 역사와 세계를 보는 사람이다. 지혜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에서 실천하는 사람이다. 지혜자는 자기 실수를 깨닫고 고치는 사람이다. 그리고 지혜자는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이다. 지금 당신은 지혜로운 사람인가? 나는 지혜의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는가?

1776년 죠지 워싱턴 장군이 영국을 향해 독립을 선언하고 전쟁을 시작했다. 어느 날 전쟁터에서 중요한 참모회의를 하기 위해 가던 중 길가에 조그마한 교회를 발견하자 장군은 가던 길을 멈추고 교회에 들어가 기도를 했다. 부하들은 '지금은 촌각을 다투는 시간이다. 한가하게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워싱턴은 "나의 갈 길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니 나는 기도해야 한다"며 그곳에서 30분이나 기도를 한 후 모임장소에 갔는데 도착해보니 그 사이에 영국군이 그곳을 공격해 다른 장군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 30분 기도가 그를 살린 것이다. 사람들과 의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과 의논하고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알았던 워싱턴은 마침내 독립전쟁을 이겼고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됐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사람, 그가 지혜의 사람이다. 당신은 지금 남들이 가는 길, 남이 인정해 주는 길을 가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길인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지혜자의 삶을 살아 역사와 하나님의 생명책에 후회 없는 삶의 족적을 남기는 축복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김엘리야 목사(워싱톤주기도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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