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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05월18일 13시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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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날 단상

지난 주일은 어머니 주일이었다.

어느 한국교회던지 마찬가지였겠으나 우리 교회도 어머니주일로 섬겼다. 어느 사모님이 늘 그렇듯이 카네이션 코사지를 만들어 오셨다. 청년들이 어머니들에게 코사지 꽃을 달아주셨다. 저는 개인적으로 어머니 날 하면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난다. 나는 나의 어머니에게 얼마나 어머니 날 해드린 것이 있나 생각하니 별로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바다 좋아하시는 어머니와 함께 시티아일랜드의 식당에서 가서 식사한 것이 기억난다.

필자가 태어났을 때는 전쟁 중이라 물자가 없어 산모가 먹지를 못해 젖이 부족해서 어머니가 동네엄마들의 젖을 얻어 먹였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동네 젖을 먹고 자랐다.” 가끔 가다 미안해하면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

미국에 가끔 오시면 어머니는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셨는데 본인이 어느 토요일 늦어서 늦게 들어온 날이 있었다. 분명히 불이 켜져 있어야 하는데 불이 꺼진 채로 있어서 깜짝 놀라 방에 들어와보니 어머니가 불도 안 켜고 지금의 내 콤퓨터 방에 벽을 향해 누워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얼르고 달래고 모시고 나와 스로그넼(Throg Neck Br) 다리를 건너서 사촌동생네 집에 갔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는 이 다리를 건너면서 보는 바닷물을 좋아했는데 다리를 건너면서 바닷물 구경을 시켜주었던 기억이 있다. 당연히 화난 것이 다 풀렸지만 그날 내 가슴이 서늘했던 것이 기억난다. 어머니는, 이제는 고인이 된 어머니는 그래서 항상 나에게는 안타깝다.

17살에 시집와서 19살 어린 나이에 딸을 낳고 젖이 없어 동네방네 아기 낳은 엄마들을 찾아 자식의 젖을 먹였다는 사실이 눈물겨웠고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생각하게 한다.

이제는 나이 30이 넘어 두 애기의 엄마가 된 조카가 엄마아빠랑 미국에 갓 이민왔을 때 몇 달 동안 같이 살았었다. 그때 새벽예배에 갈 때면 늘 나를 쫓아서 같이 참석하곤 했는데 당시 마루에 무릎 끓고 예배를 드렸는데 조카는 내 무릎 앞에서 예배 드리다가 자곤 했었다.

아마 할머니와 그랬던 모양으로 처음에 집에서 이모인 나에게 같이 예배를 드리자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같이 앉아 찬송하고 기도하며 예배를 드리면 조카는 영락없는 할머니의 음정에 평안도사투리까지 쓰면서 기도하고 찬송을 했었다.

동생은 남편이 중동에 가 있는 동안에 친정에서 와서 살면서 애기를 낳았는데 조카는 생후 한 달 만에 유아세례 받고 할머니랑 같이 자고 둘이서 일어나 새벽예배 드리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생후 3달째부터는 교회에 출석했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는 내 동생하고는 참 할 이야기가 많으셨다.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았는지. 본인은 그렇게 엄마 딸의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늘 나는 어머니의 의논의 상대였지 다른 모녀같이, 동생같이 그렇지 못해서 부러웠었다. 다른 동생들의 결혼문제 때문에 어머니가 속이 상했을 때, 우실 때도 나는 들어주고, 눈물 닦아주고, 장장 긴 편지를 보내서 어머니를 설득시켰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는 어려서 사촌들과 같이 큰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어머니의 할아버지가 교회에 쌀을 많이 헌금해서 판돈으로 만든 교회유치원에서 예배드리고, 성탄절, 추수감사절이 되면 한달 전부터 준비하고, 동생들이 성경암송대회에 나가서 잊어버리면 강단 밑에 앉았던 언니들이 알려 주었다고 당시 사촌동생과 만나면 9,10살 적 똑 같은 옛날이야기를 수도 없이 했다.

성탄절 새벽송 돌던 이야기도 하면서 깨소금나게 재미있었던 이야기를 했었다. 외삼촌들이 서울에서 방학에 오면 달리기를 잘했다는 것과 교회에서 나 같은 죄인 등의 트럼펫으로 특송을 불렀던 이야기도 빠짐없는 레퍼토리였었다.

나는 지금도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이야기의 순서까지 기억한다. 그 이야기 다음에는 아버지들, 사촌들 등등… 둘이 앉으면 종일 끝없이 이야기 하시고, 다음에는 좋아라 웃고, 어머니와 이모는 국수 삶아 고추장에 버무려 우리에게 주셨다.

필자에게는 이런 깨소금 재미나는 이야기는 없어도 자랑할 할 일이 있다. 세 살 어린아이 때부터 알던 어린이가 이젠 멋진 키가 큰 중학생이 되어 나에게 어머니 날이라고 카네이션 꽃 한 송이 들고 인사 왔다.

찾아오면 바이올린으로 405장을 독주했었다. 요즘 인터넷을 오래한다고 호소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 커버린 이젠 어른같이 항의하는 모습을 보면서 시간이 많이 지났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

그날 저녁 어느 참으로 신실한 내외가 전화가 왔다. 목사님 이제 예배 다 끝났어요? 그리고 약속을 하고 저녁에 내외와 딸이 찾아왔다. 예쁜 백에 손에 화장품로숀 두 개, 한끼씩 꺼내 먹을 수 있는 일회용 김을 가지고 왔는데, 그 안에는 봉투도 들어있었다.
 
목사님 용돈입니다. 다음에는 더 많이 드릴께요 나에게 말했다. 너무 귀중한 그 액수는 말할 수 없고.. 친필로 쓴 겉장의 내용만 소개하려고 한다.. “To. Dr. 김금옥목사님! 어머님 감사합니다. …내외 드림.” 나는 이 봉투를 오래 간직 할 것이다.

어머니와 같이,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말해주시고 알려주시는 여호와하나님의 그 사랑 때문에 나는 아직도 살아갈 기쁨과 희망에 벅차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여러분 어머님들도 행복하고 복된 5월을 보내기 바란다.

김금옥 목사


김금옥(에버그린장로교회 담임)
www.Kidok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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