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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04월05일 20시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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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보좌에 함께 앉을 성도(묵강 9)
 

어느 날 오후, 빈둥거리며 방에 늘어져 게임을 하던 아들이 갑자기 물이 마시고 싶어졌다. 그러나 꼼짝하기도 싫은 아들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아빠에게 큰 소리로 “아빠 물 좀 갖다 달라”고 말한다. 아빠는 “냉장고에 있으니 네가 갖다 먹으라”고 대답한다. 5분이 지난 후 아들이 “아빠 물 좀 갖다 주세요”라고 다시 말한다. 그러자 아빠는 톤을 높여 짜증 섞인 투로 “네가 직접 가서 마시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다시 5분 후, 아들이 “아빠 물 좀 갖다 주세요!”라고 하자 화가 난 아버지가 “갖다 먹어! 한 번만 더 부르면 혼내 주러 간다”고 했다. 이제 아버지는 화가 났다. 그러나 아들은 지칠 줄 모르게, 잠시 후에 다시 “아빠, 저 혼내러 오실 때, 물 좀 갖다 주세요!‘라 했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 다이달로스는 손재주가 뛰어난 장인(匠人)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는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크레타 섬의 미궁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자기는 살만큼 살았으니 여한이 없지만 젊은 아들의 미래를 염려하던 다이달로스는 이카로스가 탈출을 계획하자 새의 깃털을 밀랍으로 이어 붙여 아들에게 날개를 만들어 준다. 이카로스는 힘든 노력 끝에 깃털 날개를 양쪽 겨드랑이에 매달고 탈출에 성공한다. 그러나 들뜬 마음에 하늘 높이 마구 올라간 이카로스는 뜨거운 태양열에 밀랍이 녹는 바람에 하늘에서 떨어져 죽고 만다.

지난 4월 13일(금), 북한이 쏘아올린 은하 3호 탄도미사일이 발사 2분도 못돼 공중에서 폭파 분해돼 서해 바다로 떨어졌다. 그날 광명성 3호의 추락을 보면서, ‘게으름뱅이 아들’과 ‘이카로스의 날개’가 생각났다. 마지막 순간까지 유엔안보리가 합법적으로 만류하고 미국 소련 일본 한국 그리고 자기들의 최고우방 선린후원국 중국까지, 6자 회담 당사국들이 당근과 채찍을 들고 회유하고 경고를 했음에도 기어코 일을 저질렀다가 망신만 당한 이북이 ‘게으름뱅이 아들과 이카로스의 날개’ 꼴이 됐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만수대 의사당에서 할아버지 김일성과 아버지 김정일의 혼령(魂靈)을 지하에서 불러내고, 대륙간탄도미사일로 인공위성을 지구궤도에 올려 지하와 지상과 우주를 연결한 ‘3차원 우주쇼’로 ‘강성대국의 김정은 시대’를 열려고 했다. 최고인민회의가 김정은을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으로 추대하는 절묘한 시각에 맞춰 인공위성 광명성(光明星), 은하 3호가 지구궤도에 진입했다는 보고가 회의장에 들어오면 5,000명 대의원들의 우레 같은 함성과 박수로 ‘김정은 시대 개막’을 맞는 것이 4월 13일의 시나리오였다. 이 진행표에 맞추기 위해 시간과 날짜까지 과학이 아니라 정치에 맞추었지만 광명성 3호를 실은 탄도미사일은 2분도 안 돼 공중폭발로 실패한 불꽃놀이로 끝났고 공중분해 돼 서해로 떨어져 수장되면서 ‘세계최초의 29세 사성장군’ 새 지도자의 존엄과 공화국의 위엄도 추락했고 불쌍한 인민들은 또다시 배고픔과 죽음의 고통을 맞게 됐다.

김일성 출생 100주년의 태양절 행사 하이라이트(Highlight)였던 은하3호 탄도미사일의 실패와 공중폭발로 김정은과 사회주의 꼴통 괴뢰는 국제적인 망신과 함께 한 순간에 8억 5천만 달러를 공중으로 날려 보냈다. 이 미사일 발사에 쏟아 부은 8억 5천만 달러는 북한주민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쌀 140만 톤의 양식 값으로, 옥수수로는 250만 톤, 밀가루로는 212만 톤을 구입할 수 있는 돈이다. 그뿐 아니라 미국과 한국이 원조하려던 엄청난 의약품과 양식과 기술원조도 물 건너 가버렸고 유엔안보리 결정으로 극심한 경제제재까지 받게 됐다. 아버지의 화를 부르던 ‘게으름뱅이 아들’의 고집과 미련하고 무모한 ‘이카로스 날개’의 처참한 추락이다.

                       주의 보좌에 함께 앉을 성도

주전 3세기 시리아의 안티오커스 2세(BC 261-247년)가 왕비 라오디케를 기념하기 위해 라오디게아로 부르기 시작한 라오디게아는 필라델피아에서 동남쪽으로 45마일,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100마일 떨어진 부요한 내륙 도시로 맞은 편 6마일 지점엔 히에라볼리, 8마일 지점엔 골로새가 있었는데 세 도시는 바울서신에서 밀접한 관계가 있다(골 4: 13, 16)

끝없이 넓게 펼쳐진 라이커스(Lycus) 계곡에 산재했던 여러 도시 중 하나인 라오디게아의 특징은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모직공업의 중심지에 금융업이 성행한 도시였으며, 당대에 유명한 의과대학과 ‘브루기아 가루’로 알려진 안약(眼藥)을 만드는 약학대학이 있었고, 지방 재판소가 있었으며. 약의 신인 스크로비우스를 숭배했던 도시였는데, 주후 60년 대지진으로 도시가 초토화됐을 때는 로마황제의 도시재건 원조제의를 거절하고 자신들의 힘으로 복구할 정도로 부요했던 도시였다. 1세기 말 요한 당시, 라오디게아는 물 사정이 좋지 않아 멀리 히에라볼리와 골로새로부터 수로를 이용해 식수를 공급받았지만 한때 라오디게아엔 유명한 온천이 있어서 한가한 사람들이나 병자들이 각처에서 몰려와 관광지로도 유명했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충성스런 종 에바브라 집사가 설립한 교회(골 4; 16)로 골로새 교회, 히에라볼리 교회와 더불어 바울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했던 교회였는데 그 영향으로 4세기엔 중요한 종교회의가 모일 정도로 200년 이상 부흥 발전했던 중요한 위치의 교회였다. 그러나 라오디게아교회는 다른 도시의 교회들처럼 핍박과 박해도 없었고 니골라당 이단, 발람의 교훈, 이세벨 교훈의 이단 유혹도 없었으며 그저 미온적인 신앙생활로 현상유지나 하는 무사안일주의 악폐에 빠져 있었다.
현대의 부유층교회처럼 부요함으로 말미암아 병이든 중증환자의 교회였다. 현재, 라오디게아 도시는 터키 명으로 에스기힛쌀(Eskihussar)로 불리는 작은 무슬림도시로 남아 있을 뿐이고 교회와 성도를 찾아보기 힘든 폐허가 된 자취에서 옛날의 번영을 짐작해 볼 정도인데 이렇게 예수의 책망을 듣고 회개권면을 들었으나 그것을 거역하고 회개치 않았던 교회와 교인의 말로(末路)는 예나 지금이나 비참하다. 라오디게아교회를 통해 말씀과 은혜의 비밀을 깨닫는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1. 예수님의 모습(14절)

라오디게아교회에게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은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였다. ① ‘아멘이신 주’이다. ‘아멘’이란 히브리어로 “그러 합니다”, 헬라어론 “견실하다”란 뜻인데 본문에 ‘아멘이시오’, 호 아멘은 “진실 그 자체”라는 뜻이다. 기독교인과 아멘은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성도들이 ‘아멘’을 할 때는 ⑴ ‘우리 기도가 하나도 어김없이 이뤄지기를 바랍니다’란 기도의 뜻이 있고 ⑵ 자신의 진술이 확실함을 증거하는 뜻이 있으며(왕상 1: 16) ⑶ 서약을 허락한다는 증거며(민 5: 22) ⑷ 목사님의 설교나 대표기도에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도 동의합니다’라는 신앙고백의 의미(고전 14: 16)가 있다.

하나님은 “아멘의 하나님”(사 65: 16; 70인 역에선 톤 데온 톤 알레디논(“진실한 하나님”)으로 번역됐는데 “진리의 하나님”(The God of truth), “이름이 아멘이신 하나님”(The God whose name is Amen)이란 뜻)이시다. 하나님은 진리시며 신실한 하나님이란 뜻이다. 본문에서 ‘아멘’을 예수의 이름으로 적용했는데 이것은 라오디게아교회의 신실치 못함에 대한 예수의 신실성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며(계 1; 5, 고후 1: 20) 라오디게아교회가 아멘과 밀접한 성도가 되길 원하시는 주님의 간절한 뜻의 반영이다. 안타깝게도 라오디게아교회는 아멘이 없었다. 오늘도 예배에서 찬양과 말씀과 기도와 감사에 ‘아멘’이 없는 교회는 21세기 라오디게아교회다.

②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증인으로써 참된 자란 뜻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신실함을 증거하기 위해 온전한 순종과 충성으로 구약 예언을 성취하셨음을 시사한다(계 1; 5, 9: 2, 13, 고후 1: 20).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타락한 죄인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며 진리를 증거키 위해서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증인이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증인으로써 참된 자였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증인들이 구약과 신약에 대략 남녀 4000명이 등장한다. 그리고 2000년 기독교사와 21세기 종말시대인 지금도 하나님의 증인들이 바닷가 모래처럼 많았고 우후죽순처럼 등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증인들 중엔 불충성하고 성실치 못한 증인, 거짓 증인, 잘못된 증인이 허다했고 지금도 허다하며 앞으로도 허다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다. 바울은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다...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했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 충성하셨다”(히 3: 2, 5-6)고 했다. 바울의 선언대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진리를 증거 하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풍찬노숙하시며 전도하시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충성되고 참된 증인의 사명을 완수하셨다. 이보다 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 또 어디 있겠는가?
 
③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분’이다. ‘창조(創造)의 근본이신 이’(헤 아르케 테스 크티세오스 투 데우)에서 근본, 아르케(“시작”)는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의 최고 근원”이란 뜻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처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이 지은바 됐다는 피조물의 원인자, 창조자 자신이시며 창조의 근본이란 뜻이다(잠 8: 22, 요 1; 1-3, 고전 1; 30, 골 1; 15, 히 1; 2-3)

4세기의 신학자 아리우스는 ‘예수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피조설로 예수님의 신성을 반대하여 파문을 일으키므로 정통교회에서 이단으로 낙인 됐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 피조된 분이 아니라 바로 창조주 자신이신 하나님이시며 육신으로 나타나기 전에도 신성으로 선재하셔서 일하신 분이시다(요 1; 1-2) 그래서 예수님은 물질세계뿐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서도 창조의 근본이며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수 있는 창조의 원인자이시다.(고후 5: 17)

라오디게아교회는 웅장한 교회당, 수많은 청중, 주일마다 구름떼 같은 교인들이 모이는 교회였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자체가 확실하지 못했다. 신앙의 정체성이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라오디게아교회에게 자신을 하나님의 진실하신 아들임을 확신시키려고 “아멘”으로 나타나셨고, 당신의 증거를 참 마음으로 받아 드리게 하려고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 나타내셨으며, 그들의 신앙을 새롭게 창조할 목적으로 “창조의 근본”으로 나타내셨던 것이다. 그러나 참 신앙과 영적인 일에 관심이 없었던 라오디게아교회는 신앙보다는 세상적인 성공과 안일에 만족하여 자신들의 영적인 상태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교회는 예수님께 무서운 책망을 듣는다.             

   2. 예수님의 세 가지 책망(15-17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덥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困苦)한 것과 가련(可憐)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I know you're your works; I know your deeds) 그렇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교회의 모든 행위,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계셨고 오늘 우리들의 행위 모두를 낱낱이 알고 계신다. 라오디게아교회는 교회건물이 큰 것과 교인이 많은 것, 교회행사가 많은 것과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 유명한 목사를 모신 것과 자기들이 라오디게아 교인된 것에 만족하고 있었지만 자기들의 영적상태가 곤고하고 불쌍하도록 가련하며 가난한 것, 눈먼 것과 벌거벗은 상태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다. 라오디게아교회가 받은 세 가지 책망은

   ⑴ 미지근한 교회(Lukewarm and nauseating; 16절)

라오디게아교회는 차지도 않았고 덥지도 않았다. ‘차다’는 것은 세상에 속하여 냉혹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것을 의미하고, 덥다, 뜨겁다는 것은 신앙을 위한 끓는 열정을 의미한다. 그들은 이름만 신앙인과 교인이었지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과 말씀의 뜨거운 체험이 없었다. 뜨겁다, 덥다(Hot)의 제스토스는 “끓는 것”, “신앙을 위한 끓는 열정”을 가리키는데 라오디게아교회는 그런 끓는 열정이 없었다. 신앙은 빙점(氷點: 액체가 고체로 바뀌는 온도)보다는 비등점(沸騰點:액체가 끓어오르게 되는 온도; 물의 비등점은 1기압에서는 섭씨 100도)을 요구한다. 솥에 쌀이 비등점을 통과해야 맛있는 밥이 되고 비등점을 통과치 못하면 생쌀 그대로 있거나 묽은 죽이 되듯 신앙도 성령 충만, 말씀 충만의 비등점을 통과해야 참 신앙, 뜨겁고 맛있는 신앙이 된다. 그런데 라오디게아교회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들의 신앙은 미지근한 신앙이었다(They are lukewarm: 그들은 미지근했다. 흐리멍덩했다. 미온적이었다) 미지근한, 클리아로스는 “열심은 있는데 적당하게 있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미지근한 라오디게아교회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I will spue(spit) you out of My mouth)고 책망하셨다. 당시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6마일 떨어진 히에라볼리에서 온천수를 끌어오고 8마일 떨어진 골로새로부터 수로를 통해 얼음 같은 찬물을 공급 받았는데 끓는 물보다 더 뜨거운 온천수와 얼음보다 더 차가운 냉수가 먼 거리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미지근하게 됨으로 식수로 사용하기에 적합지 않아 물을 마시는 많은 사람들이 토했는데 예수님은 바로 그것과 연결해 신앙이 미지근한 라오디게아교회를 ‘입에서 토하여 내치시겠다, 거부하고 버리겠다’고 하신 것이다. 오늘도 예수님은 미지근한 신앙, 미지근한 믿음은 거부하신다.  

   ⑵ 스스로 속인 교회(Proud and self-satisfied: 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17절) 라오디게아교회가 두 번째로 받은 책망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속인 교회였다.

머리카락을 잘려 하나님의 능력이 떠났음에도 역발산기개세한 초능력의 괴력이 있을 것이라 착각하던 삼손처럼 라오디게아교회는 자기들이 가장 하나님 사랑을 독차지한 교회, 하나님의 축복을 제일 많이 받은 교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교회로 착각했다. 그래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I am rich, and have become wealthy, and have need of nothing; I increased with goods and have need of nothing; “부요하여, 페플루테카: 현재완료형으로 “이제 완전히 부요한 상태에 도달했다”)고 장담했다. 우리 교회는 “부요하여 더 이상 바랄 것이나 부족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 사업은 안정권에 있고 자녀들은 다 잘 되고 있으며 식구들도 모두 건강하니 더 바랄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들의 장담대로 라오디게아교회는 오늘의 중대형교회와 사회적으로 안정된 교인들처럼 실제로 상당히 부요했고 부족한 것이 없는 교회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비참한 영적상태를 보셨다. 그래서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지적하신 것이다.

   ① 곤고함의 교회

곤고함(You are wretched: “너는 불행한 자다, 너는 비참하고 가엾은 사람이다”)의 탈라이포로스는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약탈되거나 파괴당한 상태”로 그 어떤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상태(시 137: 8)를 가리킨다. 바울이 육신적인 노력과 정신력으로 죄와 마귀와 유혹을 이겨보려고 투쟁했지만 처절하게 실패한 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며 탄식하며 절규했듯(롬 7: 24) 영적으로 산산조각이 나서 죄를 이길 힘도, 유혹을 이길 힘도, 기도할 힘도, 찬송할 힘도 그리고 봉사할 힘마저 없게 된 영적권세가 없어져버린 파산상태를 말한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물질의 부요만을 축복으로 착각해 거기에 만족하면서 영적으로는 아무 힘이 없는 무기력의 교회, 무능상태의 교회였다. 이것이 라오디게아교회의 영적 현주소였는데 오늘 당신의 영적현주소는 어떤가?
 
   ② 가련한 교회

가련(可憐)한 것(You are miserable: “너는 비참한 자다, 너는 몹시 불행한 자다)이란 엘레이노스는 ”처절하게 깨져버린 비참한 상태“를 가리킨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물질적 부와 정반대로 영적으로 가련하기 짝이 없는 처절하고 불행한 상태였다.

   ③ 가난한 교회

가난한 것((You are poor), 프토코스는 “영적으로 너무 가난하여 그리스도를 섬길 수 없는 비참하고 참담한 상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는 처량하고 한심스러운 불행한 상태”를 의미한다. 교회생활은 오래했지만 신앙의 초보조차 모르는 영적 갓난아이에 불과한 한심한 상태라는 말이다. 당신은 주님을  자신의 의지와 지식으로 자신 있게 섬길 수 있도록 영적으로 부요하고 건강한가?

성경은 사람이 가난하게 되는 이유를 ①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지 않으므로(신 15: 4-5) ② 게으름으로(잠 6: 10-11, 10: 4) ③ 연락을 좋아함으로(잠 21: 17) ④ 과도하게 아끼고 인색함으로(잠 11: 24) ⑤ 술 취하고 탐식하므로(잠 23: 21) ⑥ 잠자기를 좋아하므로(잠 20: 13) ⑦ 훈계를 저버리므로(잠 13: 18) ⑧ 가난한 자를 학대함으로(잠 22: 16) ⑨ 눈이 악하므로-이기적이고 인색한 사람이 되므로(잠 28: 22) ⑩ 방탕함으로(잠 28: 19) ⑪ 당신의 가난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믿지 않으므로(고후 8: 9) ⑫ 하나님을 높이지 않으므로-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자가 되므로(시 113: 1-9, 삼상 2: 7-10) 가난해진다고 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이런 여러 가지 이유들로 영적인 가난뱅이가 돼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길 수 없는 비참한 상태였다.

   ④ 눈먼 교회(Blind Church)

눈먼 것(Blind), 투플로스는 문자 그대로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라오디게아에 특수한 안약과 의과대학이 있는 것과는 반대로 라오디게아교회는 영적인 시각장애자, 영적인 당달봉사로 분별력이 없는 교회였다. 무엇이 진리이고 비 진리인지,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어떤 길이 바른 길이고 잘못된 길인지,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마귀의 계획인지...도무지 영적인 분별력이나 지각이 없어서 소경처럼 한치 앞도 분간 못하며 비틀거리고 허우적거리는 교회였다. 그러나 영적으로 눈먼 교회가 어찌 1세기말의 라오디게아교회 뿐 이겠는가? 부끄럽게도 21세기 종말시대에도 라오디게아교회와 그런 교인은 교회마다 얼마든지 있다.  

   ⑤ 벌거벗은 교회(Naked Church)
 
벌거벗은 것(Naked), 굼노스는 “옷을 입지 않은 벌거벗은 상태”를 가리킨다. 당시 라오디게아엔 검정색 양모가 유명해 도시인들과 교인들이 고급양모로 옷을 만들어 입어 맵시를 자랑했었지만 라오디게아교회는 수치스럽게도 영적으로 벌거벗은 상태였다. 오늘 우리 중에도 비싸고 좋은 고급 옷을 입고 자기의 아름다움과 맵시를 뽐내고 자랑하지만 영적으로는 옷을 입지 못한 사람이 있다.
벌거벗음의 상징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는 ① 노아의 술 취함과 벗음-방심과 교만(창 9: 21, 렘애 4; 21) ② 영적인 궁핍(욥 24: 10) ③ 아무 소유가 없음-가진 것이 없다(욥 1; 21, 전 5; 15) ④ 하나님에게서 분리됨-버림받음과 수치(사 20: 3, 미 1; 8, 나 3: 5) ⑤ 수치와 부끄러움에 처해 있음(삼상 20: 30, 겔 16: 7-8, 나 2; 7) ⑥ 영적간음과 대적에게 파멸 당함(겔 16: 39) ⑦ 구사일생으로 간신히 살아남아 있는 상태(암 2; 16) ⑧ 황폐함(렘애 1: 7-8) ⑨ 굴욕과 치욕(나 3: 5) ⑩ 영적인 잠에 취해 있는 것(계 16: 15) ⑪ 하나님의 심판(호 2: 3) ⑫ 영적 싸움에서 패배함(행 19:14-16) ⑬ 아무 준비 없이 주를 따름(막 14: 51-52) ⑭ 자기의 신앙을 지키지 못함(계 16: 15)을 가리킨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주께서 보시기에 영적상태가 이랬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만족하다고 착각하여 ‘나는 부자라, 부요한 자’라고 자부하며 자긍했었으니 죽음이 Count-down(초읽기)의 내일모래로 다가온 말기암환자가 그것을 모른 채 희희낙락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오늘 영적으로 곤고하고 가련하며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상태에서 ‘이만한 교회건물, 이 정도의 교인과 헌금, 교회활동과 사회사업, 구제와 선교라면 우리는 성공한 교회요, 우리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만하고 자긍하며, 안일주의에 빠져있는 많은 현대교회를 과연 주님은 어떻게 보시겠는가? 
 
   ⑶ 예수를 문밖으로 쫓아낸 교회

더 불행하고 불쌍한 것은 라오디게아교회가 예수님을 교회에서 내쫓아버린 교회였다는 것이다. 안식일과 주일의 주인이요 교회의 머리와 주인이신 예수님을 내쫓은 교회였다. 어느 가난한 흑인 교인이 교회에서 쫓겨나 교회 앞 산모퉁이에서 3년 동안이나 교회에서 들리는 찬송소리를 들으며 주일예배를 혼자 드리다가 어느 주일, 거기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래서 “어째서 예수님이 교회에 계시지 않고 이곳에 오셨느냐?” 여쭈었다. 그러자 예수님이 “나도 너처럼 가난하다고 예배당에서 쫓겨났다”고 했다고 한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교회에게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리라”고 하셨다. 그렇다. 라오디게아교회는 교회의 주인이시오 머리이신 예수를 쫓아낸 교회였다. 그런데 오늘 지구촌 교회에서 예수를 쫓아내고 자기들이 예수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님을 쫓아내고 예수 노릇하는 총회장 지방회장 기관장 개 교회목사들 그리고 기도를 많이 한다, 은사 받았다, 헌금 많이 한다, 계시 받았다...면서 예수님을 쫓아내고 자칭 예수가 된 자들은 라오디게아교회를 입에서 토하여 내치리라는 말씀을 들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교회에서 예수님을 쫓아내지는 않았는가? 오늘 우리는 가정에서 가게에서 직장에서 예수님을 추방해 밀어내지는 않았는가? 어느 경건한 목사는 당회나 제직회 가 모일 때, 의장석을 예수님 자리로 비워두고 회의를 진행하므로 그 교회엔 아무 잡음이 없다고 한다. 우리 예배와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에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경건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3. 예수님의 권면과 약속(18-21절)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케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은 입에서 토해 내쳐버리도록 구역질나는 교회, 더 이상 쳐다보기도 싫고 상종하기도 싫은 교회, 아무리 찾아봐도 칭찬거리는 없고 책망할 것밖에 없는 교회였지만 당신의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이기에 포기치 않고 마지막 소망을 기대하며 라오디게아교회를 세 가지로 권면하셨다.

   ⑴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케 하라

금은 믿음을 상징하고 불의 연단은 시련을 의미한다. 라오디게아교회가 시련을 통해서 믿음을 사라는 권면이다. “사라”(Buy), 아고라사이는 To be in the market place; To do business there(“장터에 가서 거기서 장사하라”)는 말은 하나님과 거래하라는 상업용어인데 하나님과의 거래는 ① 시장에서 물건을 사려면 값을 지불해야 하듯 죄로 말미암아 죄와 마귀의 노예가 된 인간은 하나님께 구속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그것은 죄를 회개하는 것과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다. ② 값을 지불해야 값지고 귀한 정금을 살 수 있듯 예수 위한 시련을 자원하므로 불로 연단된 믿음을 사라는 말씀이다. 불 시험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로 성도로써 당하는 불이익, 손해, 고난, 핍박을 가리킨다. 그런 시련을 당할 때 믿음이 부요해지고 그런 고난에서 선을 행하는 중에 자기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하는 성도만이 주께서 오실 때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벧전 4: 12-19).
      
   ⑵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라오디게아는 직물의 명산지여서 흰옷을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었는데 예수님이 흰옷을 사서 입으라 한 것은 미지근한 신앙을 회개하고 예수 보혈로 죄 씻음 받은 의의 흰옷을 입으라는 뜻이다. 아버지께 돌아온 탕자가 받아 입은 옷, 회개의 옷이다. 

   ⑶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당시 라오디게아에 유행하던 안질과 눈병을 안약으로 치료했듯이 영적인 안약인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과 기도로 영적인 눈을 밝히 보게 하라는 권면이다. 영안이 밝아지기 위해 참 빛과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워야 하고, 부르짖고 기도해야 하며(막 8: 22-26, 10: 46-52, 요 9: 6-7),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며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는 성령(고전 2: 10-15, 골 1: 27, 2: 3)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그것을 위해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투자 없이 장사할 수 없듯 영적인 투자 없이 하나님과 거래가 불가능하다. 

그렇다. 불로 연단한 정금의 믿음을 사고, 죄 용서와 구속의 흰옷을 사며, 영의 눈을 밝게 하는 안약을 사는 일에 투자(投資)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대교인들의 비극은 하나님께 시간을 투자하는 것에 인색하다. TV보고 친구 만나고 직장 나가고 잠자고 놀러 다니며 인터넷 하는 데는 물 쓰듯 시간을 쓰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은 ‘피곤하다, 바쁘다, 시간이 없다’며 인색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당신이 그러한 게으름에 빠져 있는 동안 하나님께 시간을 투자해 장사하여 정금신앙을 사고, 의의 흰옷을 사며, 안약을 사서 눈을 밝게 하는 사람들이 지구촌 곳곳에 아직도 많이 남아있음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반드시 그들에게 거룩한 보상을 하실 것이다. 지금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께 투자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길 축원한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 흰옷을 사라, 안약을 사라’고 권면하신 예수님은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셨다. 열심을 내어 회개하여서 정금 같은 믿음과 의로움의 흰옷과 영안을 밝게 하는 안약을 사지 않는 자들을 책망하고 징계하겠다는 경고이면서 회개하여 금과 흰옷과 안약을 사는 자들과는 친밀한 교제를 나누겠다는 약속이다.

책망(責望, Rebuke)이란 헬라어 엘렝코는 “잘못을 확인시키고 폭로시킬 뿐 아니라 말로 꾸짖고 낮추고 야단을 쳐서 훈계하는 것”(말로 교훈하고 다스리는 것: 눅 3; 19, 딤전 5: 20)을 의미하고 징계(懲戒, Chasten), 파이듀오는 자식이나 제자를 훈련시키고 교육시키는 뜻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채찍으로 징계하거나 환난을 통해 교육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징계는 책망의 구체적인 방법이다. 하나님은 말씀이나 꿈이나 종들을 통해서 잘못을 확인시키고 말로 타이르고 야단치며 훈계하는데도 듣지 않으면 채찍으로 징계하거나 환난으로 징계하신다.

선지자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으면, 일 년에 한번 드리는 희생을 매일 드리고 삼년에 한 번 드리는 특별 십일조를 삼일에 한 번을 드려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지적하면서(암 4: 4-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말로 야단치고 타이르며 훈계하는 단계를 지나 ① 양식이 떨어지게 하는 기근의 채찍징계(암 4: 6) ② 가뭄과 한재로 농작물의 피해(사업이 어려움)를 당하게 함(7-8) ③ 태풍이나 토네이도 바람으로 치시는 풍재와 농작물을 벌레나 곤충이 먹는 충재 같이 갑자기 당하는 사건들(9) ④ 염병과 전쟁으로 죽이고 노략 당하게 하심(10) ⑤ 지진(11)으로 책망과 징계를 내렸지만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았다고 책망했다. 그러한 회개기회를 놓치면 형식적인 희생과 십일조를 아무리 드려도 구원의 기회가 없게 될 것이란 말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랑하는 성도들의 잘못을 방관치 않으시고 사랑어린 훈계책망과 사랑의 채찍을 통해 회개를 기다리신다. 주님께서 책망하고 징계할 때 회개하고 돌아오라. 자동차 브레이크에 소리가 나고 엔진에 불이 들어올 때가 고쳐야 할 기회다. 당신의 생활 속에 나타나는 소리들과 빨간불 경고등이 회개의 기회다. 회개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축원한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21절) 책망 밖에 들을 것이 없고 그래서 주께서 입에서 토해 내쳐버릴 운명의 교회, 예수를 내쫓아 버린 라오디게아교회였지만 그 중에서 이기는 자에게는 축복하겠다는 주님의 약속이다. 대다수 교인들이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는 착각 속에서 영적으로 자신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 가난한 것과 눈먼 것, 벌거벗은 것’을 모른 채 아무 자각이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라오디게아교회에서 귀가 있어 성령의 음성을 듣고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서 열심을 내어 회개하여 불로 연단한 정금믿음을 사서 영적으로 부요케 하고, 흰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으며,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영안이 밝아지는 극소수의 이기는 성도들에게 하시는 주님의 약속이다.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는 축복! 그렇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500여 성도들에게 선교사명을 주신 후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막 16: 19, 눅 24: 50-51, 행 7: 55-56) 그리고 그 예수님은 장차 천군천사와 부활성도 휴거성도를 데리시고 심판주로 지상에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고 영광의 보좌에 앉아 천년 동안 세상을 다스리신다(마 19: 28, 25: 31, 눅 22: 30) 본문에서 이기는 자들에게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겠다”고 하심은 천년왕국에서 주와 함께 세상을 통치할 축복과 저 영원한 하늘나라 천국에서 주와 함께 영원토록 영광을 누리게 하겠다는 약속이다. 소수겠지만 라오디게아교회에서 이기는 자들이다. 495 Beltway를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 수천수만 대의 자동차 홍수물결에서 몇 대의 차가 97번 Georgia Ave에서 빠져나오듯 지구촌의 수천만, 수억의 교인 중에서 ‘라오디게아교회의 미지근한 신앙’을 탈출해 나와 회개하고 믿음이 부요해지고 노아처럼 의로움의 흰옷을 입으며 영안이 밝아지는 이기는 성도들에게만 주어지는 축복의 약속이다. 주기도문교회가 한 사람 빠짐없이 이런 축복의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4. 예언적인 적용

교회사적으로 라오디게아교회는 주후 1900년대부터 교회의 휴거와 대환난이 시작되는 때까지를 의미한다. 라오디게아란 Right of Laity(“민권교회, 평신도 교회”)란 뜻으로 문자 그대로 평신도들이 권력을 주장하는 교회 평신도들에 의해 교회가 좌지우지하는 시대를 가리킨다. 주의 종들인 목사, 전도사보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더 많이 알고, 영적체험을 더 많이 하며, 평신도들의 권한이 강화되므로 맘대로 주의 종들을 세우기도 하고 쫓아내기도 하는 시대이다.

예수님은 오른손으로 주의 종들을 붙잡고 계신다. 그러나 라오디게아교회는 예수님의 권위를 도전해서라도 주의 종들을 자기 맘대로 하려는 타락한 교회시대다.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를 교회 밖으로 쫓아낸 시대, 주께서 세우신 주의 사자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시대, 주의 종들이 평신도의 눈치를 보면서 목회하는 시대다. 그래서 목회자들의 열심은 식어지고 예수님은 문밖에 세워둔 채 자기들이 모든 것을 주관하려는 시대다. 성경도 인간의 과학과 이성에 맞는 것만 설교하고 고등비평 신학이론을 도입해 성령으로 감동된 성경을 맘대로 삭제하며 난도질한다.
     
1900년대 초에 독일에서 시작된 이성주의와 고등비평신학은 전 세계를 휩쓸었고 이제는 칼 알타이즈가 “하나님은 죽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 없는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제창한 사신신학이 대환영을 받고 있다. ‘전 세계 교회는 하나가 돼야 한다’며 시작된 에큐메니컬 운동을 펼친 21세기 교회는 Post-Modernism(혼합주의)과 New Age(새 시대운동)와 손을 잡고 예수님을 교회에서 쫓아 낸지 오래됐다. 저들은 ‘지구촌의 어떤 교회, 어떤 종파 심지어 이교종파라도 종교집단은 하나가 돼야 한다, 하나님 없이도 예수 없이도 선하게 살고 착한 일 하며 양심적으로 살면 구원 받을 수 있다.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심지어 동성연애자들에게 목사안수를 주며 그들의 결혼을 합법화했다.
 
라오디게아교회, 아멘도 없고 충성도 없으며 참된 증인도 영적생명도 없는 교회, 세속에 물든 쾌락주의, 미지근한 신앙의 적당주의와 안일주의, 자긍과 자만으로 가득찬 21세기 라오디게아교회는 오늘도 주님의 책망과 징계와 심판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중에서 성령의 음성을 듣고 자신의 곤고함과 가련함, 가난함과 눈먼 것과 벌거벗음을 통렬히 회개하고 열심을 내어 믿음이 부요해지는 성도, 의롭게 사는 성도, 영안이 밝아져 신령한 것을 밝히 보는 성도에겐 축복이 약속돼 있다. 주님께서 당신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음성을 들으라.

영국 런던의 성 바울 성당엔 유명한 화가 할랜 헌트의 “세상의 빛”이라는 성화가 걸려있다. 이 그림에는 잡초가 창틀까지 자라고 문의 돌쩌귀가 녹이 슬어 굳게 닫혀져 있는 초가집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에서 예수님은 손에 등불을 들고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그림을 보고 있던 어떤 사람이 화가 헌트에게 “좀 잘못된 게 있는데요. 문에 손잡이가 없습니다”고 말했다. 그러자 화가는 “그림이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손잡이는 집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은 우리가 열어야 한다”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문은 안에서 우리가 열어야 한다. 예수님은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실 뿐이다. 현대교회는 이제 문을 열어야 한다. 종말교인들은 이제 문을 열어야 한다. 당신도 이제 문을 열어야 한다. 예수님은 지금도 문을 두드리고 계실 뿐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Behold, I stand at the door, and knock)는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의 초청이며 예수님의 인내의 선포다. 서서(Stand, 헤스테카)는 현재완료형으로 “오래도록 계속 서 계셨다”는 뜻이고, 두드리노니(Knock, 크루오)는 현재형으로 “현재도 계속해서 두드리고 계신다”는 뜻이다. 커피가 식어버린 채 몇 시간 동안 애타게 애인을 기다리듯, 밤이슬과 새벽 서리를 맞으며 술람미를 기다리던 솔로몬처럼 지금 예수님이 당신을 그렇게 기다리고 계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목사 설교로, 꿈으로, 계시로, 당신 양심의 소리로 당신 마음을 두드리신다. 하나님의 종들과 신실한 백성들을 통해서, 성령님의 여러 가지 역사를 통해서, 환경에서 환난과 고난과 어려움의 징계와 채찍을 통해서 당신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문 두드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예수님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I will come in to him and will sup(dine) with him and he with Me: 20절) 그는 예수님과 더불어 먹는 축복이 있을 것이다.

라오디게아교회의 사상과 신앙이 온 세상을 삼키고, 몽골 땅이 사막화돼 가듯 흑암세력이 세상과 교회를 침식해가며, 신성한 교회들마저 세상과 야합해 타락하고 신앙들이 미지근해져가는 21세기 종말시대의 성도여,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주께서 당신 마음을 두드리시는 음성을 들어서 회개하여 당신만이라도 뜨거운 신앙으로 정금믿음, 의의 흰옷, 밝은 영안을 지키면서 은혜시대에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신령한 교제의 성도가 되고 마지막 주의 날에 주님과 함께 보좌에 앉는 축복까지 받는 은혜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김엘리야 목사(워싱톤주기도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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