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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03월14일 20시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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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옷 입은 생명책의 성도
     

지난 화요일, 4월 10일은 제 개인적으로는 결혼 36주년을 맞은 축복의 날이면서 역사적으로는 100년 전 그날, 당시 세계최대 호화여객선 타이타닉호가 영국 사우샘프턴 항에서 뉴욕을 향해 대서양을 출발했던 날이다. 총톤수 5만 2천 톤, 길이 268m 너비 28m 높이 20여m(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눕혀놓은 것보다 더 긴 4층 높이의 배)의 위용을 자랑하는 거대여객선, 호화객실과 고급 레스토랑은 물론 수영장, 체육관, 도서관 등 없는 것이 없었던 ‘떠다니는 궁전’, 그리고 선장경력 26년의 에드워드 스미스의 노련함과 배 밑 수밀격실(水密隔室)이 4개까지 물에 차도 침몰치 않도록 설계된 모든 것이 완벽한 ‘어떤 상황에서도 침몰하지 않는 배’ 그래서 불침선(Unsinkable Ship)’라 장담했던 타이타닉 호는 2,208명의 승객을 태우고 시속 23노트(23knot)의 속력으로 대서양 검푸른 바닷물을 가르며 사람들의 기쁨과 행복과 미래의 꿈을 싣고 새로운 역사기록을 세우면서 바다 위를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100년 전 어제 밤인 4월 14일 밤 11시 40분, 뉴펀들랜드 해역에서 부류빙산(浮流氷山)과 충돌하여 2시간 40분 만에 침몰한다. 이 사고로 승선자 2,208명 중, 1,513명이 사망하고 695명만 살아남았는데, 침몰 당시 생후 2개월이었던 밀비나 딘(Millvina Dean)이 695명 중 마지막 생존자로 살아오다가 지난 2009년 5월 31일 향년 97세로 세상을 떠나므로 현재 타이타닉의 생존자는 아무도 없다.

타이타닉 100년사와 나의 결혼 36주년을 돌아보면서 나는 많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다. 영국 화이트 스타(White Star)사(社)가 건조한 타이타닉은 당시 세계최대 최강의 여객선으로 최첨단기술 장비에 어떤 장애물에도 견딜 수 있도록 완벽하게 제조됐으며 빙산까지도 부술 수 있는 쇄빙장비에 1,178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20대의 구명보트까지 준비된 여객선이었으나 닷새 만에 빙산에 충돌해 1,513명의 귀한 생명과 함께 대서양 바다 속으로 침몰해 사라졌지만, 36년 전, 영주권도 없는가난한 불법체류의 유학생, 돈이 없어 거울보고 뒷머리를 잘라 단발 더벅머리를 하고 다녀야 했고, 버스 타고 대학원 다니며 밤에는 빌딩청소로 학비를 조달했는데 새벽 2-3시 시간이 늦어 버스가 끊기면 Wilshire에서 Western 54가까지(당시 LA. Western Ave의 올림픽 Blvd 이후는 흑인 거주지역의 위험한 거리였다) 그 위험한 길을 걸어서 다녔었으며, 결혼 비용도 아내의 비자금으로 치룰 정도였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결혼 후 2년 11개월 동안에 연년생 세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나의 7년 대학원 공부와 목회를 Full Time 간호사로 일하면서 나를 도운 일에서 지금까지 그렇게 지난 36년을 보필해 준 아내의 희생적인 사랑은 ‘아내가 나를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것 같은 고마움’을 느끼게 하고 그래서 ‘아내 없이는 한 달로 못 살 것 같은 고마움’을 느끼게 한다.

100년 전, 세계최고의 타이타닉 역사는 처녀출항 5일 만에 빙산충돌과 함께 어이없게 지중해 바다 속으로 침륜해 끝나버렸지만 시작이 초라했던 김목사의 가정사는 36년 동안 축복을 받아 번성하고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1,513명의 사망자를 낸 타이타닉 침몰 뒤 미국과 영국에서 조난경위와 구명실패의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 총 54일 동안의 마라톤청문회가 있었다. ‘6-7번의 빙산 출몰 경고가 있었는데 왜 빙산을 피하지 못했는지? 1,178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20대의 구명보트에 695명만 타게 된 까닭은 무엇인지?’의 청문회였지만 아직까지도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하고 있는데 청문회 기록에 의하면, 놀랍게도 청문회에서 가장 집요한 추궁을 받은 사람은 타이타닉 호의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가 아니라 사고현장 가까이 있었던 영국 화물선 ‘캘리포니안’의 스탠리 로드 선장과 하버트 스톤 이등항해사와 제임스 깁슨 견습 선원이었다.

캘리포니안은 타이타닉 침몰 때,아주 가까운 곳(약 20km 거리)에 있었다. 캘리포니안이 구조에 나섰다면 타이타닉 선객은 모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 청문회의 최대관심사였다. 그렇다면 캘리포니안은 왜 수수방관했을까? 첫째, 타이타닉의 구조요청 무선이 접수되지 않았다. 이유는 캘리포니안의 무선사 시릴 애번스는 타이타닉의 긴급구조요청(SOS) 타전 35분 전에 무전기를 끄고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선장이나 견습 선원의 위증이다. 타이타닉은 무선불통 후 멀리 보이는 배에 필사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여덟 번이나 밤하늘로 신호탄을 쏘아 구조를 요청했는데 그때 캘리포니안의 항해사 스톤과 견습 선원 깁슨이 신호탄을 목격했다. 스톤은 깁슨에게 “선장실로 달려가 이를 보고하라”고 한다. 깁슨이 선장실로 달려가 보고하자, 침대에 누워있던 선장이 “신호탄 불꽃이 흰색이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하자 “더 이상 말이 없었다”고 하는데, 선장은 “난 깁슨의 보고를 받은 적이 없다. 그가 내 방에 온 것은 기억나는데 무슨 말을 들은 기억이 없다”고 주장한다. 선장과 견습 선원 중 한 사람이 위증했거나, 선장이 잠결에 보고를 받고 제대로 대처를 못했거나 이를 기억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바로 이 한 순간이 타이타닉 조난자들의 운명을 갈라놓았던 것이다.

나는 오늘,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타이타닉의 조난자들을 살리기 위해 칠흑의 대서양 밤하늘로 구조신호탄을 쏘아 올렸던 애절한 마음과 밤중에 캘리포니안의 로드 선장실을 찾아가 위급상황을 알린 20세의 초짜 선원 깁슨의 절박한 심정으로, 사도 요한을 통해서 사데 교회에 보내신 예수님의 계시편지를 당신들에게 전한다. 오늘의 말씀이 영적으로 죽어가는 21세기 현대교회와 종말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영혼을 소생시키므로 영광스런 주님의 날에 당신을 구원의 사람이 되게 하는 생명의 말씀이 되기를 축원한다. 

                        흰 옷 입은 생명책의 성도

사데 교회는 라오디게아교회와 함께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께 칭찬은 한마디도 듣지 못하고 책망만 들었던 교회로 에.서.버.두.사.빌.라(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가장 준엄한 책망을 들은 교회다. 도시 교회와 시골 교회가 차이가 있고 도시 중에도 상류층 거주지와 중류 하류층 거주지에 따라 교회까지도 지적, 경제적, 영적 수준차이가 있듯 사데 교회는 상공업의 흥왕과 더불어 교회가 물질적으로는 부요했지만 사치와 음탕한 문화에 영향을 받아 교인들의 신앙은 이름뿐이었고 영적활기를 잃은 메마른 교회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You have a name that you are alive, but you are dead(“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는 사망선고의 책망으로 사데 교회의 영적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가를 지적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눅 20:  38)고 했다. 사데 교회 교인들은 오늘날 중대형교회 교인들처럼 자신들이 큰 교회, 부자교회, 유명한 교회 멤버인 것을 자랑하고 자부하며 스스로를 “하나님의 사람들, 영적으로 살아있는 자”라고 장담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들,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들, 좀비 교인들’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1. 사데 교회에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

두아디라 남동쪽 33마일 지점의 헬무스(Hermus) 강과 트몰루스(Tmolus) 산 중간, 1500피트 높은 산정에 세워진 난공불락의 성 사데(Sardis)는 주전 700년경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에 하나였고 주전 6세기엔 리디아(Lydia) 왕국의 수도로 세계적인 대도시로 위용을 떨친 도시였는데 당시 리디아의 크리서스 왕은 페르시아를 탈취하고자 침공했다가 오히려 주전 546년에 고레스 왕에게 사데를 빼앗긴다. 그 후 사데는 주전 330년에 알렉산더에게 정복당해 그리스 영토가 됐다가 주전 214년엔 수리아의 안티오커스 장군에게 공략당해 로마 속국이 됐고 주후 17년 대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됐다가 티베리우스 황제의 면세와 원조로 주후 36년에 완전히 복구됐으며 주후 1042년 터키에 정복당해 파괴된 후 현재는 잔해만 남아 있다. 이렇게 사데는 역사적으로 1700년 동안 찬란하게 번창하고 흥왕했던 도시였다.

주전 6세기 사모스 사람 이아도몬의 노예였다가 천부적인 기지와 해학과 화술로 노예에서 해방돼 우화작가로 이름을 떨치고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의 총애를 받아 재계에 출입하며 크게 활동하다가 델피 신전에서 피살된 고대 그리스의 우화작가 아이작 이솝이 많은 우화와 동화를 쓴 곳이 바로 사데인데, 계시록이 기록된 요한 당시의 사데는 모직과 염색업이 발달한 상공업도시로 세계 각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므로 음란과 방탕이 극도로 팽창했던 타락의 도시였다.
사데 교회의 기원은 분명치 않지만 역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사도 요한에 전도로 교회가 세워졌고 주후 2세기엔 변증가와 주경학자로 유명했던 멜리토(Melito)가 사데 교회 감독이 되므로 그 명성이 사방에 떨쳤고 주일마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든 교인들로 교회는 엄청난 부흥이 있었다. 그러나 사데 도시의 음란과 방탕과 사치의 폐풍이 교회 안까지 스며들어 사데 교회는 안일과 부도덕으로 세속화됐고 명목적인 교회로만 남게 됐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데 교회 영적수준에 맞게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는데 이것은 사데 교회가 사치와 부도덕과 허영으로 영적으로 죽은 교회였기에 성령의 역사를 통한 내적생명이 필요한 교회며, 지식적인 형태만 갖추고 완전한 교회라고 자부하는 그들, 살았다 하나 영적으로 죽은 그들, 당시 사데에서 11km 떨어진 곳에 공동묘지가 있었듯 영적으로 공동묘지 같은 사데 교회가 말씀과 성령으로 생명이 넘치는 교회가 돼야함을 강조하신 것이고, 일곱별을 오른손으로 붙잡고 계신 주님께서 그 중에서 신앙을 지키고 있던 소수의 사데 교인을 지키고 계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에서버 두사빌라,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가장 크고 웅장한 교회건물에 가장 많은 교인, 교회 재정이 가장 풍성한 교회, 사회활동이 가장 많았던 교회,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가장 유명했던 교회, 도시의 유지들과 돈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 유명연예인들 박사들 경제인들이 모이는 교회, 주일날이면 캐딜락 링컨 콘티넨탈 벤즈 BMW들이 줄을 이어 모여드는 ‘고소영 교회’의 사데 교회였는데 예수님은 한마디로 ‘죽은 교회’라고 진단을 내리셨다. 사데 교회가 죽은 교회였던 것, 죽기 일보직전의 상태였던 것, 예수께서 도적같이 임하여 갑자기 멸망이 임할 때 피하지 못할 어둠에 속한 위험상태(살후 5; 2-3)였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행위의 온전한 것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For I have not found your works perfect before God: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네 행위의 완전함을 찾을 수 없기 때문”; 2-3절)이었다.

‘행위의 온전한 것’(Perfect, 페플레로메나)이란 하나님 보시기에 절대적인 완전함이 아니라 “인간이 행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의 온전함”을 의미한다. 사데 교회는 하나님 앞에 완전한 것은 차치물론하고 사람들의 도덕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는 말이다. 주일마다 교회는 나가고 찬양대 주일학교 교사 집사 권사 장로로   헌신 봉사하여 거룩한 성도인척하면서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은 세상 사람보다 못했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 구원은 율법을 지키거나 도덕적인 생활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삶 속에서 의롭고 바르게, 성도답게 살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 20)고 하셨다.

‘행위의 온전함’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 완전할 수는 없지만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생활과 인격의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 저 바다 속 절벽에 붙은 전복이 달이 가고 해가 가면서 조금씩 자라가는 것처럼, 루레이 동굴의 석순이 떨어지는 물과 함께 10년 20년 30년이 지나면서 조금씩 자라나는 것처럼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우리 신앙연륜과 함께 자라는 것인데 이것을 성화(Sanctification)라고 한다.

성도들이 맺어야 할 생활과 인격의 열매는 ① 사랑(Love, 아가페): Divine Love(“하나님의 신적인 사랑”); “이웃의 건강한 삶을 위해 강하고 간절하며 부드럽고 동정심 많게 헌신하는 것(A strong, ardent, tender, compassionate, devotion to the well-being of someone; 고전 13; 4)을 가리킨다. ② 희락(喜樂, Joy, 카라): ”자신과 이웃이 이미 받았거나 앞으로 받게 될 축복을 기대하며 기뻐하는 감정적인 흥분(興奮)과 즐거움”(The emotional excitement, gladness, delight over blessings received or expected for self and for others) ③ 화평(和平, Peace, 에이레네): “혼란과 동요와 요란한 소동과 여러 시험 중에서 마음에 평온함과 안식, 희망의 신뢰, 조화와 질서를 지키고 확신을 간직하는 것”(The state of quietness, rest, repose, harmony, order, and security in the midst of turmoil, strife and temptations) ④ 오래 참음(Longsuffering, 마크로두마이): “자신의 유혹에 약함과 타인의 공격과 여러 상처들과 자극에 투덜대는 불평이나 분노나 화냄이 없이 오래 참고 견디는 것”; Patient endurance; To bear long with frailties, offence, injuries, and provocation of others without murmuring, repining, or resentment)

⑤ 자비(慈悲, Gentleness, 크레스토테스): “순화된 인격과 행동에서 나오는 부드러운 성향과 부드러운 언어와 친절함과 평온한 성품과 교양”(A disposition to be gentle, soft-spoken, kind, even-tempered, cultured, and refined in character and conduct) ⑥ 양선(良善, Goodness, 아가도스네): “하나님처럼 삶과 행동에서 착하고 친절하며, 덕과 자비와 관대함을 나타내는 것”(The state of being good, kind, virtuous, benevolent, generous, and God-like in life and conduct ⑦ 충성(忠誠, Faith, 피스티스): “하나님과 그의 모든 말씀을 온 맘으로 확신하고 신뢰하며 믿고 의지하여 그것을 삶의 원칙으로 거룩하게 마음에 심고 사는 것”(The living, divinely implanted, acquired and created principle of inward and wholehearted confidence, assurance, trust, and reliance in God and all that He says

⑧ 온유(Meekness, 프라오테스): “보복과 복수의 감정이 없이 모든 마음의 아픔과 상처를 참고 분노와 격정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정중함과 친절과 관대함을 유지하는 기질”(The disposition to be gentle, kind, indulgent, even balanced in tempers and passions, and patient in suffering injuries without feeling a spirit of revenge ⑨ 절제(Temperance, 앵크라테이아): “자제와 극기”(Self-control) “강한 욕망이나 불타는 격정에서 관대함의 중용을 지키는 것”(A moderation in the indulgence of the appetites and passion) 이것이 성도들이 평생 동안 맺어야 할 신앙인격이며 신앙의 열매다.

그런데 사데 교회는 이런 것들이 없었다. 외형적으로 교회는 부흥돼 대형교회였고 부자교인들이 많아 헌금도 많다보니 사회사업과 대외활동을 많이 했으며 다른 교회처럼 이단의 유혹도 없었지만 영적으로는 생명이 없고 성령의 열매가 없던 죽은 교회였다. 그러나 ‘행위의 온전한 것이 없던 문제’가 어찌 1세기 말의 사데 교회만의 문제이겠는가? 오늘 우리 교회와 나는 ‘온전한 것’이 있는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성령의 열매가 맺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2. 회개 권면(3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성령의 인도를 받는 영적인 영향보다 사치하고 음란한 세상문화와 세속생활의 영향을 받은 사데 교회와 교인들의 영혼은 핍절되고 쇠약해져서 거의 죽기 일보직전에 있었다. 그래서 사데 교회는 회개와 함께 일깨움이 필요했고 새로운 각성이 필요했으며 다시 견고케 돼야 했다. 메마른 땅에 단비가 필요하듯 성령의 단비, 은혜의 단비가 필요했다. 타다 남은 나무에 미약하게 타고 있는 마지막 불을 다시 일으켜 요원의 불길을 일으키듯 마지막 남은 믿음이 다시 일으킴을 받아야 할 교회였다. 사데 교회가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는 회개를 해야 하는데 온전한 회개는 몇 가지 단계를 거처야 한다.

   ⑴ 어떻게 받았고 어떻게 들었는지를 생각하라
      (Remember how you have receive and hear)    

생각하라(Remember, 므네모뉴에)는 “생각하고 기억하라. 염두에 두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받았는지 생각하라.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어떻게 받았는지, 성령을 어떻게 받았는지,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어떻게 받았는지 생각할 것이며 질병의 치료와 기도응답을 어떻게 받았는지를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지난 날 말씀을 어떻게 듣고 어떻게 깨달았는지를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옛날 사진들을 볼 때, 과거의 아름다운 기억을 회상함으로 새로운 현재를 경험할 수 있듯 당신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과거의 은혜와 현재의 은혜를 생각할 때, 다시 돌이키는 힘을 얻을 수 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축복과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의 은사를 어떻게 받았는지, 어떻게 들었는지를 생각하고 돌이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 성도들에게 ① 예배를 위하여 주일(안식일)을 기억하라(출 20: 8)고 했고 ② 감사하는 말이 충만하도록 과거에 어떻게 인도함을 받았는지 기억하라(신 8: 2)고 했으며 ③ 겸손해지기 위해, 종은 주인보다 크지 못함을 기억하라(요 15: 20) ④ 인생의 경험으로써 옛날을 기억하라(신 32: 7) ⑤ 인생의 본분으로 늙기 전 청년 때에 창조자를 기억하라(전 12: 1) ⑥ 신앙의 경고로써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 32) ⑦ 인류종말의 날에 기롱하는 자들이 있을 것을 기억하라(유 17-18) ⑧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어떻게 받고 어떻게 들었는지를 생각하라(계 3: 3) ⑨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인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 1) ⑩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자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를 생각하라(딤후 2; 8)고 했으니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하는 위에 ‘오늘 나의 죽게 된 영적상태를 생각하여 회개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⑵ 그 생각을 지키라(Keep it; Hold it fast!)

이미 받았고 들었던 말씀을 굳게 잡으라는 말씀이며, 현재 나의 영적상태가 위기상황인 것을 깨달은 그 생각을 계속해서 굳게 잡고 회개하라는 말씀이다. '듣고 잊어버리지 말라, 성경을 읽고 느낀 말씀과 설교시간에 깨달은 것을 망각하지 말라, 그 생각을 지키란 말씀'이다. 예배시간에 들은 것으로 끝내지 말고 그 깨달음을 굳게 붙잡아 회개까지 열매를 거두라는 말씀인 것이다.

   ⑶ 회개하라(And repent)

‘그리고 회개하라’란 말씀이다. 회개하라(Repent, 메타노에손)는 “단번에 결정적으로 죄에서 돌이키라”는 뜻이다. ‘회개하는데 시간 끌지 말고 즉시 하라’, ‘단번에 회개하라’이다. 회개하기를 주저하거나 다음으로 미루면 마귀에게 진다. 마귀가 틈을 탄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 자극을 주실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을 송곳처럼 찌를 때, 이 생활이 계속되면 머지않아 어떤 일이 생길 것이라고 느낄 때, 그때가 회개할 때다. 회개기회를 놓쳐 후회하는 자 되지 말고 회개기회 붙잡아 용서받고 사랑받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⑷ 일깨우라(Wake up)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If therefore you shall not watch, I will come on you as a thief, and you shall not know what hour I will come upon you) 일깨우는 것(Wake up, Watch, 그레고레세스: “조심하다”)은 회개의 열매다. 회개하는 사람은 있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또 다시 죄에 자리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주의하고 경계(Watch)한다. 이것이 회개의 열매인 것이다.

‘일깨우라’는 말은 사데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사데는 트몰루스 산봉우리에 세워진 성채로 삼면이 450m나 되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이루어진 난공불락의 성이었지만 아크로폴리스를 방어하던 사람들의 방심과 경계소홀로 두 번이나 몰래 탈취를 당했었다. 이처럼 아무 어려움이나 핍박이 없어 보이는 사데 교회도 ‘살아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경성하고 깨어 있어야 했었으나 그들은 안일과 게으름으로 방심하다가 영적사망 선고를 받은 것이다.

오늘 말세 성도들이 마귀의 궤계를 이기고 환난 날에 이기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무장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비하여 신부의 순결을 지키며 늘 긴장 속에서 깨어 있어야 한다. 방심과 안일과 게으름에 빠져 있으면 주께서 도적같이 임하실 것이다. ‘도적같이’(As a thief, 클렙테스)란 관용구(慣用句)의 성경적 의미는 “전반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킨다(마 24; 43, 살전 5: 2, 벧후 3: 10, 계 16: 15) 그래서 주님께서 ‘도적같이 오신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갑작스런 징벌”(시 7: 11)을 의미하고, “예기치 않았던 예수님이 내리시는 환난”(살전 5; 2)을 가리키며, “상상치 못했던 예수님의 무서운 심판”을 가리킨다. 게으름과 방심과 안일함과 퇴보로 당신이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일깨지 않으면 주께서 도적같이 당신에게 임하실 것이다. 당신 영혼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게으름과 나태, 방심과 안일에서 회개하고 깨어 일어서므로 주님의 오심을 기쁨으로 맞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3. 예수님의 칭찬(4절)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예수님의 칭찬과 책망을 함께 들었던 에베소 버가모 두아디라교회는 먼저 칭찬을 듣고 나중에 책망을 들었는데 사데 교회는 먼저 책망을 듣고 나중에 칭찬을 들었다. 사데 교회 교인 대다수가 영적으로 죽은 자요 소수만이 산 자였기에 그만큼 예수님 마음이 참담했고 초급했으며 안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칭찬할 여유나 마음이 안정할 여유마저 없으셨다. 사데 교회를 볼수록, 사데 교인을 생각할수록 분노와 격앙된 감정이 앞섰다. 그렇다면 오늘 당신의 영적상태는 어떤가?

부모가 문제 자녀를 보고 격분해 정신없이 야단치고 책망한 후 화가 풀어질 때 비로써 차분하게 아이를 칭찬하며 타이르듯, 예수님도 사데 교회를 무섭게 책망하신 후 비로써 그들을 칭찬하셨는데 그 칭찬은 놀랍게도 “사데 교회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성도 몇 명이 있다(But you have a few names even in Sardis which have not defiled their garments)는 것과 그들 몇 명은 예수님께 합당한 성도로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닐 성도라”(And they shall walk with Me in white, for they are worthy)는 것이다. 대다수가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데 교회에 극소수의 예외 성도가 있다는 말씀이다. 타이타닉 승선자 모두가 죽을 줄 알았는데 695명이 살아남아 그나마 위로가 되듯, 지진으로 수천 명이 죽었는데 그 중에 매몰 된지 2주 만에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이 있어 기뻐하듯, 모두가 죽어있는 사데 교회에도 영적으로 산 사람,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 몇 명이 있었다는 것이다.

‘몇 명’을 A few people(몇 사람)이 아니라 A few names(몇 이름)로 기록한 것을  기억하라. 헬라어도 올 리가 오노마타로 “몇 이름들”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많진 않지만, 소수지만 사데 교회에서 하나님께 기억돼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만큼 하나님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성도를 귀중히 여긴다는 의미이다. 그렇다. 하나님께는 당신이 장로교인 감리교인 순복음 교회교인 침례교인 된 것이 중요치 않다. 당신이 교회찬양대 주일학교교사 집사 권사 장로된 것도 중요치 않다. 당신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됐느냐, 생명책에 이름이 없느냐가 중요하다. 생명책에 이름이 등록된 그 사람만이 종말에 있게 될 하나님과 예수님의 심판기준에 합당한 성도이고 그런 성도만이 이 세상에서 에녹과 노아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며(창 5: 21-24, 6: 9) 저 영원한 천국에서 세세토록 주님과 함께 다닐 자격이 있는 성도다.

사데 교회에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과 ‘장차 흰 옷을 입을 자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는 성도, 흰 옷을 입을 성도는 어떤 성도인가?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는 세 가지로 해석하는데 ① 단순한 도덕적 순결로 해석하는 것(Moffett) ② 성적인 불결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Zahn) ③ 구원받은 성도가 사회적인 풍조와 혼합에 물들지 않은 기독교적 성결(고후 7: 1)로 해석하는 것(Lenski, Johnson)이다. 세 번째 해석이 타당한 해석이다. 그렇다. 오늘 우리가 옷을 더럽히지 않는 것은 “성도로써 마땅히 행해야 하는 옳은 행실을 지키는 것”이다. 성도는 성도로써, 목사로 신학자로 선교사로 기도원 원장으로 장로와 권사와 집사로 찬양대로 주일학교교사로 자기에게 맞는 옳은 행실규범이 있다.

무엇보다도 거듭난 성도는 주일성수와 십일조성수, 구제와 기도와 금식의 교회생활을 바로 해야 한다. 이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성도의 의무다. 주일을 범하는 것은 날도둑질의 죄요, 십일조 불순종은 물질 도적질의 죄며(말 3: 8) 기도하기를 쉬는 것은 영적인 죄고(삼상 12: 23) 구제거절은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을 외면하는 죄(잠 17: 5, 19: 17)이며, 금식을 멀리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섭생을 파괴하고 건강을 돌보지 않는 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거절하는 무지몽매의 죄다. 그다음 성도는 교회에서 각자 자기 사명과 직분을 잘 감당해야 한다. 그 일이 크든 작든 중요하든 덜 중요하든 구역장으로, 남녀 선교회원으로, 기도와 찬양과 안내와 성화준비와 성찬위원 헌금위원의 예배위원으로, 각자 자기가 맡은 일과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히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생활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도록 모든 것에 거룩해야 한다. 가정의 부부관계와 직장의 상하관계와 이웃과의 대인관계와 물질관계에서 거룩하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나를 통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이것이 성도들이 마땅히 행할 옳은 행실이다. 옳은 행실로 우리들의 옷이 깨끗하게 지켜지는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선지자 이사야는 시온과 예루살렘에게 ‘힘을 입으라’(Clothe yourself in your strength: “강력한 힘을 입으라”)며 약해지지 말 것을 권면하면서 성도들이 힘을 입는 것이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이라고 했고(사 52: 1), 성도들이 구원의 감격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희락의 옷, 찬송의 옷을 입는 것이라 했으며(사 61: 3), 성도들이 하나님으로 인해 영혼이 크게 기뻐하는 것을 구원의 옷, 의의 옷을 입는 것(사 61: 10)이라 했다. 그리고 말라기는 “하나님은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는 것을 미워한다”고 하므로 부부가 서로 미워하거나 업신여겨 학대하는 것은 자기 옷을 더럽히는 것이라 했고, 공관복음 저자들은 군대귀신 들린 자가 귀신이 쫓겨나가자마자 자기 옷을 바로 고쳐 입었다(막 5: 15, 눅 8: 35)고 하므로 귀신에게 붙잡힌 자나 영적으로 귀신에게 지고 있는 자는 옷을 벗은 자(행 19: 16)로 가르쳤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영적으로 깨어있는 자는 자기 옷을 지키는 자(계 16: 15)로, 구원 받아 천국에 올라간 자들을 흰 옷 입은 자(계 4: 4)로, 큰 환난과 핍박을 이기고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을 ‘흰 옷 입은 무리’(계 7: 9-14)로, 적그리스도의 대환난을 믿음과 인내로 끝까지 이겨낸 성도를 ‘자기 옷을 지킨 자’(계 16: 15)로, 장차 예수님이 지상에 재림하실 때, 동행할 많은 부활성도와 휴거성도를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성도’(계 14)로, 그리고 날마다 순간마다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주의 보혈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용서받아 살다가 천국에서 생명나무에 나아가는 축복의 성도들을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계 22: 14)로 기록했다.

그다음, 예수님의 동생 유다는 말세에 주의 재림을 기롱하며 경건을 멀리하며 자기 정욕대로 살면서 당이나 짓고 육체에 속하고 성령이 없는 사람들을 육체로 더럽힌 옷을 입은 자들(유 18-23)이라고 했다. 이 모든 말씀으로 비춰볼 때, 김목사는 죄송하지만 21세기 작금의 세계교회 영적상태가 사데 교회처럼 영적으로 산 자보다 죽은 자들이 더 많은 교회시대, 죽음의 정막만이 흐르고 있는 공동묘지 교회시대,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성도가 많지 않은 시대, 세상종말에 있게 될 심판기준에 합당한 성도들이 많지 않을 시대라고 감히 지적한다. 이 세상에서도 흰 옷 입은 성도로, 저 천국에서도 흰 옷 입은 성도로 인정받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4. 흰 옷 입은 생명책에 성도(5절)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生命冊)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이기는 자들, 사데 교회에서 자신의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는 자들, 과거에 어떻게 복음과 은혜의 말씀을 받고 들은 것을 생각하고 그 마음을 지켜 회개하므로 자신을 일깨우는 성도에게 주실 축복의 약속이다

   ⑴ 흰 옷을 입는 축복이다.

흰 옷은 지상적인 옷과 천상적인 옷이 있는데, 지상적인 흰 옷은 세상에 살면서 성도에 합당한 옳은 행실을 가리키고, 천상의 흰 옷은 예수님의 속죄로 말미암은 의의 옷으로 성도들이 하늘나라에서 입고 영생복락을 누리며 하나님을 섬길 자격의 영광과 성결의 예복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흰 옷 입는 축복은 천국에서의 축복이다.

   ⑵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않는 축복이다

생명책에서 이름이 흐려진다(Blot out; 지우다. 없애다. 말소하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그렇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성도라 할지라도 그 옷이 더럽혀진 상태가 오래가면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질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 버리리라”(출 32; 33)고 하셨고, 에스겔을 통해서는 “의인이 자기 의를 스스로 믿고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하면 그가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않고 그가 범한 허물과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겔 18: 24, 33; 13)고 했다. 그러므로 회개하여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는 자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끝까지 지키시는 것은 천국을 보장하신다는 말씀이다.

   ⑶ 그 이름을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는 축복이다

‘시인하리라’(I will confess his name: “내가 그의 이름을 시인하리라”), 호몰로게소는 “법정에서 증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의 법정에서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하나님 앞에서와 천군천사들 앞에서 증언하심으로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임을 확인해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범죄한 이스라엘과 유다를 하늘법정에서 피고로 세워 증언하시던(사 1: 2-20) 야훼께서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데 교회에서 세속에 물들지 않고 끝까지 흰 옷을 입고 성결과 거룩함을 지킨 몇 명의 성도들과 자기들의 죽게 된 것을 회개하여 다시 일깨운 성도들 이름을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증언해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여러분의 이름 하나하나가 그날 저 천국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예수님이 직접 시인해주고 불러주는 영광스런 축복에 동참하기를 축원한다. 

예언적인 적용으로 사데 교회는 주후 1517년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에서 1821년까지인 근세 외국선교 교회시대를 가리킨다. 사데(Sardis, 자르데이스)란 “도망하는 자들 또는 탈출 해나온 자들”(Those escaping)이란 뜻이다. 마르틴 루터를 시작으로 존 낙스, 존 칼빈, 에라스무스, 쯔윙글리, 르파브르 등 가톨릭에서 도망한 자들에서 19세기 세계선교가 시작되는 시대까지를 가리키는데 이들은 죽은 사데 교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처럼 자기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시대의 흰 옷 입은 자들로 인정하시고 사데의 이긴 자들로 축복하셨다.

오늘 예수님은 사데 교회 같이 죽은 자들로 가득한 지구촌의 공동묘지 교회들에서 “탈출 해나오는 성도”, “회개하고 일깨워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므로 성결과 거룩함의 흰 옷을 지키는 성도”,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고 끝까지 지키는 성도”를 찾고 계신다. 그런 성도에게 천국에서 함께 다닐 것을 약속하신다. 그들의 이름을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겠다, 영원한 천국시민임을 증언하겠다고 하신다. 공동묘지에서 나오라. 안일과 방심과 게으름으로 더 이상 죽음의 자리에 머무르면 망한다.

회개하여 깨어있는 성도가 되자. 모든 죄에 더러워진 예복을 주 앞에 지금 다 벗어서, 샘물같이 솟아나는 보혈과 피 뿌린 옷인 하나님의 말씀(계 19: 13)으로 눈보다 더 희게 씻자. 허물과 죄로 누더기가 된 옷을 회개하므로 다시 새롭게 하자. 이 예배가 영적으로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는 예배, 지워져 가던 이름이 생명책에서 다시 새롭게 되는 예배, 더러운 옷을 새 옷으로 갈아입는 예배가 되어 다시 주님과 동행하는 신앙, 천국의 소망과 기쁨으로 채워지는 신앙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김엘리야 목사(워싱톤주기도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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