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황이 학생회장 되면서 일어난 변화들 - 기독뉴스
모바일보기
기독뉴스 개편사이트 안...
2024년 04월 29일
 
뉴스 오피니언 방송사진 커뮤니티 2세뉴스
기사등록 I 독자마당 I 광고후원 로그인 회원가입
뉴스홈 > 뉴스 > 인물/기관 > 인물
2012년04월11일 19시43분
글자크기 기사내용 이메일보내기 뉴스프린트하기 뉴스스크랩하기
대니얼 황이 학생회장 되면서 일어난 변화들
<리더쉽 강연 후 고등학생 리더들과 함께 한 대니얼 황 대위 (왼쪽에서 4번째)>
<리더쉽 강연 후 고등학생 리더들과 함께 한 대니얼 황 대위 (왼쪽에서 4번째)>


5살 때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대니얼 황은 1998년 조지아 사우스귀넷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부모님들은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아이비리그 대학에 입학해 의사나 변호사가 되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공부 해라. SAT/GPA에 집중해라.’ 하지만 대니얼은 학생회장 선거가 다가오자 출마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때까지 회장 한번 해본 적이 없어 궁금하기도 했고 다른 애들도 하는데 나라고 못하겠냐는 오기와 좋은 대학에 가려면 학생회장을 해야 한다는 계산도 있었다. 도전했고 9학년 학생회장이 되었다. 이어 10학년,11학년,12학년까지 연거푸 4년동안 학생회장을 했다. 

“처음에는 이기적인 동기였습니다. 하지만 해보니까 다른 사람과 커뮤니티를 섬기는 것이 얼마나 보람이 큰 것인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맛본 것과 같았죠. 또 맛보고 싶어 계속했습니다”

대니엘은 레스링, 크로스컨트리 등 학교 스포츠팀에서 팀장으로 활동했고 태권도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11학년과 12학년 때는 학교 대표로 카운티에서 운영하는 학생리더쉽훈련(GSLT)을 받았다. 여름방학 때면 병원에 가서 자원봉사를 했고 일주일에 두번 요양원에서 가서 첼로를 연주했다.

“대학갈 때 필요하다고 해서 했지만 하다보니 그 이상으로 배운 것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나보다 다른 사람과 커뮤니티를 생각하고 우선하는 태도를 배우게 되었죠”

대니얼을 지켜본 말린 멜번이라는 학생회 후원자은 어느날 그에게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에 가라고 제안했다. “그게 뭔지도 몰랐습니다. 궁금해서 웨스트포인트 웹사이트를 보았는데 다른 학교와 다른 설립 목적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Duty, Honor, Country 세 단어였죠. ‘내가 이제 나라를 섬겨야 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늘 불렀던 노래가 생각났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부모님은 어떤 대학을 갈 것인지 물었다. 대니얼은 웨스트포인트라고 답했다. 부모님은 좋지만 입학해서 보병 하지 말고 의사공부를 하라고 말했다. 입학하기 어렵다는 웨스트포인트에 합격한 대니얼은 부모님의 말대로 2학년까지 의사공부를 했다.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보병 소대장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사람 중 유명한 사람들은 다 보병 출신입니다. 패튼, 아이젠하워, 맥아더 등이 대표적이죠. 웨스트포인트에 온 것은 의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부모님께 용기를 내어 말했다. 의사 공부하는 데 열정이 없다고, 한번 뿐인 인생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다고. 보병 소대장이 되겠다고. 부모님은 보병 소대장은 공무 못하는 아이들이나 하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대니얼은 그렇지 않다며 최고 우수생들이 보병 소대장으로 가야 소대원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그의 부모는 허락했다. 한번 해봐라, 해보고 안되면 공부하는 조건이었다. 

3학년 때 전공을 보병으로 바꾸면서 더 많은 수업을 들었지만 그는 1,000명의 생도를 인솔하는 연대장이 될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고 상위 3%에 드는 우수한 성적으로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했다. 첫 근무지는 하와이. 34명의 보병을 이끄는 소대장이었다. “하루에 3,4시간 밖에 자지 못했지만 정말 즐겼습니다. 이것 때문에 태어났구나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아래 사진. 맨 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가 황 대위)

2008년 8월 소대원을 이끌고 그는 이라크전에 참전했다. 같이 참전한 사관학교 룸메이트는 이라크에서 전사했다.

“인생은 짧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기 나라와 다른 사람을 섬기는 태도로 살면 언제 죽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2010년 12월 두번째로 이라크전에 참전했다.

대니얼의 이라크전 참전은 그의 아버지 제임스 황이 미국을 자신의 나라로 진심으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래 기사 참조)

황 씨는 “이민와서 살기 바빴죠. 이 나라는 백인들의 주인이고 나는 이민자로 밥 벌어먹는다고 정신없이 살았습니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 아이가 이라크를 가고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것을 보며 또 그 아이가 그러다가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까 사고가 바뀌더라구요. 나도 이 나라를 위해 싸우는 사람이다. 전쟁이 나면 총들고 나가서 싸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늘어났습니다”

25개월 간의 이라크 복무를 무사히 마친 대니얼은 후배 청소년들에게 리더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집에만 오면 자신이 훈련받았던 카운티 학생리더쉽프로그램과 고등학교, 상공회의소 등에서 초청강사로 청소년들에게 리더쉽에 대해 강연을 했다.

지난 3월 24일 한 고등학교에서 열린 리더쉽훈련에서 100여명의 학생들에게 그는 “리더쉽은 실제로 경험해봐야 개발되는 것”이라며 “실패를 두려워말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을 계속 해보라”고 말했다.

그는 한인 청소년들의 경우 공부만 하지말고 운동, 자원봉사, 학교활동 등 다양한 경험을 통한 리더쉽 개발로 균형잡힌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 대위는 자기가 여기까지 온 것은 부모님, 멘토, 선배들의 코칭 때문이었다며 특히, 부모님께 감사했다. 옷과 신발 수선업을 하시며 뒤바라지 해오신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자신은 없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 레슬링 시합을 하면 아무리 바빠도 엄마가 경기장에 오셨습니다. 부모님은 영어를 못하세요. 그래도 엄마는 겁없이 학교에 나타나십니다. ‘Hello’, ‘How are You?’ 밖에 못하시는데 학교에 나타나셨죠. 그러면 미국 엄마들이 존경합니다. 영어를 못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자기 아이를 사랑해서 이렇게 오는구나 감동하는 거죠. 그런 참석이 참 중요합니다”

황 대위는 일부 한인청소년들은 부모님이 영어를 못해 부끄럽다며 학교에 오는 것을 싫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말도 안된다고 말했다.

“부모님이 우리의 미래를 위해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미국에 오셨는데 영어못한다고 부끄럽게 생각하면 안되죠. 도와드리면 됩니다. 사실 엄마, 아빠를 보면 자신감도 생기고 힘이 납니다.”

황 대위는 오는 5월 제대를 한다. MIT를 졸업하고 현재 중국에서 교육사업을 하는 형과 사업을 같이 하기 위해서다. “이제는 가족을 섬기려고 합니다”

케이아메리칸 포스트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트위터로 보내기페이스북으로 보내기미투데이로 보내기 뉴스스크랩하기
인물섹션 목록으로
 

이름 비밀번호
 25209640  입력
댓글콘선택 : 댓글 작성시 댓글콘을 클릭하시면 내용에 추가됩니다.
[1]
뉴스홈 > 뉴스 > 인물/기관 > 인물
다음기사 : 김병종 첫 뉴욕 개인전 “봄-생명의 노래” (2012-04-11 19:58:09)
이전기사 : [인물]열방선교학교 선교목사 장현택선교사 (2012-04-06 10:47:04)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회사소개 보도지침 저작권 규약 이용약관 사업제휴 직원채용 광고후원 기사제보 연락처 don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