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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01월12일 19시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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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통치권과 새벽별

얼마 전에 ‘의사가 싫어하는 환자들’이란 하버드 의대교수의 흥미로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교수는 대부분의 의사가 환자를 증오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아도 가끔씩 싫어하는 환자가 있는데 그런 환자는 자신의 병을 의사의 잘못으로 몰고 가는 환자, 불평하면서 의사 처방을 듣지 않는 환자, 내용도 모르고 질문하는 환자, 인터넷 정보를 잘못 알고 줄줄이 나열하는 환자, 별 것 아닌데도 수시로 전화해 메시지를 남기는 환자, 의사 간호사를 자기 소유물처럼 행동하는 환자 그리고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환자, 시간을 안 지키는 환자, 의심 많은 성격의 환자 마지막으로 상식이하의 사고방식과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못 돼먹은’ 성품의 환자들이라고 한다. 당신이 만일 이런 환자라면 치료에 지장을 받을 수 있으니 조심할 것이다. 환자가 병을 고치려면 의사 마음을 편안케 해주고 의사 말을 전적으로 믿고 따라야 하듯 하나님께 나오는 성도들도 하나님말씀에 토 달지 말고 전적으로 믿고 신뢰해야 한다.

세례 요한이 유대광야에서 첫 번째로 외친 설교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듯 성경에서 하나님은 ‘인간들의 회개’를 요구하셨는데 하나님이 요구하신 회개는 값싸고 쉬운 회개가 아니라 온전한 회개, 열매를 맺는 회개였다. 그리고 그것만이 우리가 사는 길, 우리의 구원의 길이라고 말씀하셨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낳은 첫 히트 작품은 부끄럽게도 성서가 아닌 면죄부였다. 면죄부는 죄를 짓고도 돈 몇 푼만 내면 징벌의 고난도, 지옥도 피해갈 수 있다는 성직자들의 판촉에 찍는 족족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아비뇽 교황청의 면죄부 가격표에 따르면 사람들의 죄질 따라 치러야하는 값도 달랐는데 “평민의 간음죄는 27리브르, 근친상간은 거기에 4리브르 추가, 남녀가 부적절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면 87리브르”등이다. 이 면죄부 거래로 성직자들은 떼돈을 벌었고 베드로 성당, 바오로 성당, 마리아 성당 등 처처에 거대 초호화판 성당들을 지어 가톨릭왕국을 세웠는데, 면죄부를 믿고 양심에 가책이나 거리낌 없이 너도나도 앞 다퉈 죄를 짓던 중세 기독교 암흑시대처럼 21세기 교회 안에도 너무 쉽고 값싼 회개가 판을 치고 있다. 면죄부 팔아 돈만 거두지 않을 뿐 ‘면죄부 타락’보다 더 타락한 시대다. 신하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은 다윗이 죄를 뉘우치며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 2-6)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Deliver me, from blood-guiltiness, O God,
Thou God of my salvation; 시 51: 9-11, 14)  

의 고백이 사라진 시대, 아무리 추악하고 더럽고 잔혹한 죄를 지었어도 말 몇 마디로 자백하고 회개하면 다 용서받는다는 쉽고 값싼 회개가 판치는 시대이다. 그래서 희대의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목사가 된 후 ‘고문은 예술이라’고 자랑하는 교회, 대도 조세형이 목사가 된 후에 남의 집 담 넘어 들어가 도적질을 해도 회개의 소리가 없는 교회시대가 됐다. 양탕지비(揚湯止沸)란 고사성어가 있다. “끓는 물을 퍼낸 뒤 그릇에 다시 부어 끓는 것을 멈추게 한다”는 뜻이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임시방편으로 처리함을 비유한 말이다. 회개를 적당히 하면 다시 죄를 거듭하게 된다는 말이다. 회개는 철저히 해야 하나님의 은혜도 철저하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예수님의 칭찬만 들었던 서머나, 필라델피아교회는 회개권면이 한 마디도 없었고 에.버.사.라(에베소 버가모 사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회개권면이 한 번씩 있었는데 일곱 교회 중에 가장 긴 편지를 받은 두아디라교회엔 회개란 단어가 직접으로 세 번(21, 22) 회개를 유도하는 경고권면까지는 무려 다섯 번이나 언급됐다. 그만큼 두아디라교회는 회개문제가 시급했던 교회였다.

옛 이름은 펠로피아(Pelopia) 또는 유히삐아(Euhippia)고, 현재는 아키쌀(Akhissar)로 부르는 두아디라는 서머나와 버가모 중간지점에 위치한 도시로 직물과 도기와 피혁들을 생산하는 가내공업과 염색공장이 많았던 공업도시였고 도시중간을 국도가 가로 질러가는 상업도시이기도 했는데 원래 두아디라는 주전 300년경에 알렉산더에 의해 그리스의 도시가 됐다가 주전 190년경에 로마식민지가 된 도시로 그곳엔 태양신 아폴로 신전과 풍요와 생식의 신으로 많은 유방을 갖고 있어 어머니로 숭배되던 아데미(Artemis) 신전과 삼바다란 여자 무당이 관장하여 그녀의 점괘를 받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갔던 삼바다 신전이 있던 우상의 도시었다.

두아디라교회의 기원은 분명치 않지만 유력한 학설로는 바울이 에베소에 체재하는 중에 세운 교회 또는 바울의 전도를 듣고 회개한 자주장사 루디아의 전도로 세워진 교회라는 학설이 있다. 한 마디로 바울의 영향을 받아 세워진 교회다.

두아디라는 상업도시여서 많은 조합들이 있었는데 사업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의무적으로 조합에 가입해야 했는데 조합에 가입하지 않으면 물건을 사거나 팔수가 없었고 장사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조합에 가입한 사람은 정기적으로 공동식당에서 식사와 교제를 하며 공동회의를 해야 했는데 그 공동식당은 언제나 우상의 신전이었고 음식은 우상의 제물이었다. 그런데 두아디라교회에 자칭 여선지자라 하는 이세벨이 조합의 이름을 내세워 성도들을 꾀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심지어 성도들을 음행과 성적방종으로 타락케 하므로 두아디라 교인들은 우상의 제물 때문에 많은 시험을 당해야 했고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렇게 두아디라교회는 먹고 살기 위해 눈치 보느라 마귀의 앞잡이, 악녀 이세벨을 교회에서 쫓아내지 못하고 그를 용납하고 옹호했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책망하신 것이다.

                           만국 통치권과 새벽별

   1. 칭찬 받은 두아디라 교회의 사대사업

본문에서 예수님은 두아디라교회의 사업들을 칭찬하셨는데 사업(Works, 에르가)이란 에베소교회를 칭찬하신 행위(Works, 에르가)와 같은 말로 “전체적인 삶의 모습”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두아디라교회에게 ‘내가 너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안다’(I know your works, and your charity and service and faith and your patience)고 칭찬하시고 거듭해서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다’(The last to be more than the first)며 두 번씩이나 영적으로 성숙했던 두아디라 교회의 사업과 행위를 칭찬하셨다. 

   ⑴ 사랑이 넘치는 교회

에베소교회는 처음에 사랑이 있었으나 나중에 사랑을 잃어버리므로 책망을 받았는데 두아디라교회는 처음에도 사랑이 있었고 나중에는 사랑이 더 많았음을 칭찬 받았다. 아가페사랑은 기독교 공동체가 마땅히 지녀야 할 삶의 규범이요 덕목인데 두아디라교회는 처음보다 나중 사랑이 더 많았기에 칭찬을 받은 것이다.

   ⑵ 믿음이 있던 교회

믿음(Faith)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 되는 삶을 가리킨다. 그래서 두아디라교회는 모든 것이 믿음으로 운영되던 교회요 우상숭배가 강요됐을 때에도 믿음으로 이긴 교회였으며 심지어 여자 무당 삼바드가 교회 안까지 침투했을 때도 신실한 믿음으로 신앙을 지켰던 교회였다.

   ⑶ 섬김이 있던 교회

섬김(Service, 디아코니안)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을 가리킨다. 두아디라 교회는 교회 안과 교회 밖의 빈민과 병자들에게 자애를 베풀고 개인과 사회에 대하여 봉사정신과 섬기는 정신으로 살았음을 칭찬 받았다.

   ⑷ 인내하는 교회

교회와 성도들이 사랑과 믿음과 섬기는 일을 할 때, 당연히 시련과 어려움이 있는데 두아디라교회는 그런 고통 중에서 참고 인내하는 교회였다. 예수님은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다”고 칭찬했으니 이것은 에베소교회와는 정반대되는 현상으로 두아디라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상태가 현저하게 진보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에베소교회는 믿는 도리를 강조하다 처음 사랑을 잃었지만 두아디라교회는 사랑이 식지 않았고 계속해서 그 사랑의 사업이 날로 더 많아졌다. 이렇게 두아디라교회는 영적으로 성숙한 교회였고 발전하는 교회였으며 수준이 높은 교회였다. 그런데 모든 것을 덮어주는 사랑이 넘치다보니 교회의 집사 권사 장로의 중직들을 꼬여 행음케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자칭 여선지자 이세벨까지 용납하고 묵인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다. 건강하게 보이는 사람 속에 무서운 암이 자라고 있어 위험한 것처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넘쳐 부흥되는 두아디라교회는 교회 중직들의 신앙을 좀먹고 파괴하는 암 덩어리 이세벨을 덮어주고 용납한 무서운 죄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을 예수님께 책망 받았던 것이다. 

   2. 자칭 선지자 이세벨

구약에서 ‘이세벨’은 이방 여인 시돈의 공주(왕상 16: 31, 왕하 9: 7)였다가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의 왕비가 된 후, 이스라엘에 바알과 아세라 신을 가져와 우상숭배를 하게하고 이스라엘로 영적간음을 행하게 하므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자 개들이 그 시체를 먹어버린 비극의 여인이다. 구약의 이세벨은 악녀, 음녀의 대명사였다. 그렇다면 당시 두아디라교회의 중직들과 남녀종들과 성도들을 유혹해 죄를 짓게 한 이세벨은 누구인가?

아합의 왕비, 악녀 이세벨과 비교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과 마귀의 지혜로 두아디라 교회성도들을 타락시킨 여선지자 이세벨은 ① 시빌레란 말과 이세벨의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바벨론 신인 시빌레라고 하는 설(說)과 ② 두아디라교회 설립멤버인 자주장사 루디아가 타락해서 교회를 어지럽혔다는 학설, ③ 특정인물보단 상징적인 인물로 구약의 이세벨 같은 성격의 여인이나 그런 모임의 ‘이세벨 주의 공명자(共鳴者)’나 이세벨 같은 역할을 한 이단자를 의미한다는 설 ④ 실제로 있었던 두아디라교회 감독의 아내 설로, 다른 사본에 ‘이세벨’ 앞에 ‘너의’(수)란 말이 있으니, 이세벨은 당시 두아디라교회 목사부인이나 감독인 장로의 부인일 것이라 주장하는 학설이다. 네 가지 학설 중 세 번째인 이세벨 같은 상징적인 인물과 네 번째인 두아디라교회 목사부인이나 장로감독 부인이 설득력이 있는데 본문 내용을 볼 때, 당시 두아디라교회 목사의 부인이나 유력한 장로감독의 부인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이세벨은 여선지자로 인정받을 만큼 교회에서 높은 위치와 실력이 있었고 사회적으로도 신분과 지위가 뛰어난 여성도 직장인으로 그는 우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고전 8: 4)을 악용하고, 상업을 위한 조합을 내세워 교인들에게 우상의 제물을 먹을 것을 강요했고 심지어 성적방종과 음행에도 빠지게 했는데 그렇지 않을 때는 모든 조합원의 권리를 박탈케 하므로 목적을 달성했는데 이렇게 그녀는 여우같은 교활한 지혜와 실력을 인정받아 교회에서도 높은 자리를 지켰고 조합에서도 철 밥통을 지켰다. 그래서 많은 교인들이 먹고살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이세벨의 유혹과 강요에 넘어가 죄에 빠졌다. 문제는 두아디라교회가 이러한 이세벨의 정체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녀의 만행을 눈감아주고 용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책망이다. 18절에서 20절까지를 본다.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도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두아디라교회에게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분’으로 나타나 하나님의 종들을 잘못 가르쳐 유혹하여 간음케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 이세벨과 그를 용납한 두아디라교회를 무섭게 책망하셨다. 예수님은 ① 그 눈이 불꽃같은 분으로 나타나셨다. ‘불꽃같은 눈’은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의와 불의, 참과 거짓을 구분해 내는 통찰력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두아디라 교회가 숨기고 있고 묵인하고 용납하고 있는 이세벨의 간계를 파헤쳐서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동생 아벨을 감쪽같이 죽인 가인을 보셨고(창 4: 9)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탈취한 다윗의 완전범죄도 보셨으며(삼하 12) 배 밑창에 숨어서 하나님을 피해 도망가던 요나도 보셨고(욘 1: 4) 아무도 모르게 땅값 얼마를 감추고 헌금 드렸던 아나니아 부부를 보셨는데(행 5: 3) 그 눈으로 두아디라교회를 보고 계신다는 경고다. ②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분으로 나타나셨다. ‘발이 빛난 주석(朱錫)같은 분’은 죄인들을 가차 없이 징벌하고 심판하시는 견고한 발을 가진 분을 가리키는데 예수님은 성경대로 심판의 포도주 틀을 밟으실 분(계 14; 17-20, 19: 15)이다.

결국 두아디라교회는 주님의 심판으로 2세기 말에 없어져 버렸는데 예수님은 육신으로 계실 때, 부드러운 발로 평화와 축복, 용서와 치료의 소식을 전하러 땅 끝까지 걸어 다니셨고 마지막엔 그 발에 대못을 박히신 연약한 발이었다. 그러나 부활승천하신 후 세상에 다시 오실 예수님의 발은 더 이상 연약한 발이 아니다. 포도주 틀을 밟듯 원수들을 짓밟아 심판하실 주석같이 무섭고 견고한 발이다.

그러므로 두아디라교회에게 불꽃같은 눈과 주석 같은 발을 가진 분으로 나타나신 것은 두아디라교회에 우상숭배자들과 거짓 선지자 이세벨과 그의 가르침을 따라 간음하는 자들을 묵과하지 않고 반드시 심판하실 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말세에 적그리스도 우상숭배자들과 육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간음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큰 환난인 적그리스도의 칠년 대환난에 던져 넣으실 것이란 말씀이다.

두아디라(Thyatira, 뒤아티로이스)란 “계속적인 희생, 계속적인 미사”란 뜻이다. 이것은 끊임없이 드리는 가톨릭교회의 미사를 의미하는데 실제로 가톨릭에서는 사제가 매일 다섯 마디의 라틴말 ‘Hoc est enim corpus meum'을 외우면서 영성체를 행사하고 이것을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라 믿으며 계속적으로 미사를 드린다. 예수께서 십자가로 다 이뤄놓으신 구속의 은총을 믿어 구원받기보단 미사를 통해 구원 받고자 ’계속적인 미사‘를 실행하는 것이다.

예언적인 적용으로 두아디라 교회는 역사적으로 주후 590년 그레고리 법황 때부터 1517년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까지의 ‘이방교회시대, 종교 암흑시대’를 가리킨다. 그래서 이방교회시대 종교암흑시대는 기독교와 이방종교가 계속적으로 혼합되다가 마침내 기독교가 이방종교에 흡수돼 영적으로 암흑시대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두아디라교회가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있던 교회였지만 이세벨을 받아드림으로 타락했듯 기독교암흑시대 1000년은 끝이 없도록 타락하는 종교가 된다.

1517년,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까지 1000년간 이방종교 교리들이 교회에 침투해 성경에 없는 거짓 교리, 성경과 대치(代置)하고 상반(相反)되는 거짓 교리를 심어놓은 것들은 ① 주후 607년, 보니파스 3세가 교황을 처음 세움 ② 709년, 교황의 발에 입을 맞추기 시작함 ③ 786년, 화상(畵像: 사람 얼굴을 그린 그림)과 성자들의 유물을 섬김 ④ 850년, 성수(聖水)를 사용하기 시작함 ⑤ 998년, 금요일과 고난기간에 금식함 ⑥ 1079년, 사제의 독신생활 ⑦ 1090년, 기도용 묵주 ⑧ 1184년, 종교재판 ⑨ 1190년, 면죄부 판매 ⑩ 1215년, 화체설 주장 ⑪ 1220년, 성체 숭배 ⑫ 1229년, 평신도에게 성경읽기를 금지함 ⑬ 1414년, 성찬 시에 잔을 금함 ⑭ 1439년, 연옥의 법령을 선포하고 7성사 교리 선포함 ⑮ 1508년, 아베마리아의 기도가 용인됨 ⑯ 1534년, 제수잇(Jesuit) 교단 설립 ⑰ 1545년, 가톨릭교회 전통을 성서와 동일한 권위로 받아드림 ⑱ 1546년, 외경을 성경(정경)에 넣음 ⑲ 1854년, ‘정결한 마리아 수태’ 선포 ⑳ 1864년, 죄의 목록이 선포됨 ⓫ 1870년, 교황 무오무류(아무 잘못도 없고 이치에 틀리지도 않음)설 공포 ⓬ 1905년,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승인함 ⓭ 1930년, 공립학교를 비난함 ⓮ 1950년, 성모 마리아 승천 선언 ⓯ 2000년, 천국과 지옥을 부정함 등 수많은 해괴망측한 거짓 교리와 황당무계한 교리가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가톨릭은 신 이세벨주의를 받아드린 무서운 이단종파이다.

처음보다 나중이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의 행위가 더 많았던 것을 칭찬했지만 이세벨의 가르침을 묵인하고 동조하며 추종해 우상숭배와 음행을 따라간 두아디라 교인들을 ‘간음하는 자들’과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정죄하신 예수님은 그들을 ‘큰 환난에 던질 것이라(I will cast her into great tribulation)’고 선언했으니 오늘 우리들의 간음도 정죄하실 것이며 우상숭배와 간음을 회개치 않으면 휴거에서 낙오되는 성도와 큰 환난인 대환난에 던져지는 성도가 될 것을 선언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21세기 현대교회의 간음은 무엇인가?

현대교회에 침투해 들어와 교회를 병들게 하는 이세벨주의 간음은 ① 육신의 간음이다. 육체적인 간음은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떠나 불법적으로 이뤄지는 모든 부적절한 남녀관계(레 20: 10, 잠 6: 32, 요 8: 4), 음행의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거나 남편을 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과 버린 여자나 버린 남자와 결혼하는 것(마 5: 32, 19: 9, 막 10: 11-12), 결혼했거나 약혼한 남의 사람을 빼앗거나 도적질하는 것(출 20: 14, 신 5: 18)이다. ② 정신적 간음이다. 이것은 마음의 간음으로 순수한 짝사랑을 지나 이성을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마 5; 28)을 가리키는데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의 프로스 토 에피뒤메사이 아우텐은 “그 여자가 음욕을 품게 하려고”와 “그 여자에게 음욕을 품게 되는 것”이란 뜻이니 이성을 보고 그가 나를 향해 음욕을 품게 유혹하려고 색시하게 바라보는 것과 내가 상대방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와의 성적쾌락을 생각하고 마음이 두근거리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③ 영적인 간음이다. 이것은 신앙의 간음으로써 하나님과 원수가 되면서까지 세상의 것을 사랑하고 세상을 가까이 하며 친구가 되는 것(약 4: 4), 하나님을 멀리하여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겔 23; 11, 호 7: 1-4) 하나님보다 어떤 것(술, 마약, 오락, 쾌락, TV, 인터넷...)을 더 사랑하는 것(요일 5: 21), 참신이신 하나님보다 이방인이 추구하는 마술이나 마법에 탐닉하는 것(사 57: 4)을 가리킨다.

놀랍고 안타깝게도 현대교회는 육체적 간음과 정신적 간음, 영적간음에 관대하다. 이세벨 같은 악녀들이 교회에 들어오지 않았어도 이미 교회는 간음에 대해 무방비상태로 열려 있고 교인들의 마음은 무관심하며 무뎌있다. 육체적 간음과 정신적 간음에 감각이 없는 상태고 영적 간음에도 심각한 마음이 없다. 이럴 때일수록 경건한 성도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예비하여 모든 행실에 거룩한 성도가 돼야 한다. 그리하여 흠도 없고 점도 없이 깨끗한 성도로 영광중에 주님을 맞이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3. 회개할 기회(21-23)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 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내가 그의 음행을 회개할 기회를 주었다’(And I gave her space to repent of her fornication)에서 주었다(Gave, 에도카)는 부정과거형으로 “과거에 어떤 결정적인 경고의 기회를 주었었다”는 뜻이고 ‘아니하는 도다’(She repented not; She does not want to repent; 우 델레이)는 현재시상으로 “지금도 계속해서 회개하길 원치 않고 있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이세벨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었으나 두아디라교회는 회개하지 않았고 지금도 회개하길 원치 않고 있다는 말이다. 마침내 예수님은 회개를 거절하는 두아디라교회를 침상에 던지는 징벌과 큰 환난 가운데 던지는 징벌 그리고 그의 자녀를 죽이시는 사망으로 징벌하셨다.

① 침상에 던지신다(I will cast  her into a bed)에서 침상(Bed, 클리네)은 “환자용 침상”을 가리키니 이세벨과 두아디라교회의 우상숭배를 위한 침상과 음행을 위한 침상이 병상(病床)으로 바뀔 것이란 말이다. 회개치 않으면 병상에 던지신다, 여러 가지 질병으로 치신다는 말씀이다. ② 큰 환난 가운데 던지는 심판이다. 다윗이 범죄 했을 때, 그 가정엔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골육상쟁 환난이 있었고 아들과 측근신하들이 쿠데타(Coup d'Etat)를 일으켜 도전하는 환난이 있었다. 불순종하여 도망가던 요나에겐 회오리 광풍이 휘몰아쳐 왔었고 솔로몬과 르호보암이 범죄할 때 측근과 원수들의 반역과 환난들이 있었다. 오늘 개인과 가정과 사업, 교회와 국가에 큰 환난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이다. ③ 자녀를 사망으로 죽이는 징벌이다. 바로가 계속적인 하나님의 징계를 당하면서도 완강한 마음을 회개치 않을 때, 애굽의 모든 장자를 잃는 비극을 당했고, 아합과 이세벨이 끝까지 회개치 않았을 때, 본인들도 죽임을 당했고 아들 70명도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예수께서 두아디라교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듯, 역사적으로 종교암흑시대, 이방 교회시대 1000년 동안 교회들에게도 회개기회를 주셨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⑴ 타락한 가톨릭을 반대하고 일어선 알비겐스 운동이다. 12세기 가톨릭교회는 교회에 성경 한 권만 비치해 두고 일반 교인들에게 성경을 읽지 못하게 했다. 교회에 비치한 성경도 쇠고랑으로 강단에 묶어 놓았기 때문에 아무도 성경을 꺼내 읽을 수가 없었다. 이것을 항거해 1170년 프랑스 남부에서 일어난 알비겐스 운동은 신약성서를 교인들에게 배포하고 가톨릭 예배의식을 배격했으며 가톨릭 사제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세게 항거한 운동이었는데 교황 이노센트 3세가 1208년 용병을 일으켜 20년 동안에 알비겐스 운동가들을 전멸시켰다.

⑵ 왈덴스 운동. 리욜의 장사꾼 피터 왈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운동으로 모두를 장사꾼으로 가장해 행상을 하면서 신약성경을 공급하고 순수하게 기독교 복음을 전한 운동이다. 그러나 왈덴스 운동도 핍박 때문에 중도에서 끝나버렸다.

⑶ 요한 위클리프(John Wycliff, 1320-1384년) 운동. 옥스퍼드의 유능한 교수학자로 죽는 날까지 가톨릭신부였으나 “오직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를 주장하며 당시 가톨릭의 잘못된 교리들을 비판했고 검소하게 사는 설교자들을 전도단으로 조직해 전국적으로 복음을 증거했고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해 대대적으로 성서를 보급한 운동이다.

⑷ 영세농민으로 태어나 순수한 믿음과 재능으로 당시 파리, 옥스퍼드 다음가는 프라그대학(Prague University) 총장이던 요한 허스(John Hus, 1360-1415년)가 일으킨 요한 허스 운동이다. 그는 순수한 회심의 경험을 가진 후 불타는 열정으로 복음을 전했고 가톨릭의 타락과 부당성을 신랄히 비판했다가 감옥에 투옥돼 7개월 동안 모진 고문과 야만적인 대우를 받은 후 프라그에서 화형을 당했다.

당시 프라그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었는데 마귀상을 만들어 허스에게 붙인 후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질렀다. 군중들은 허스에게 변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취소하라. 그를 죽이라”는 소리만 계속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뜨거운 불에 그의 발이 타는데도 그리고 온 몸이 다 타서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허스는 찬송을 불렀다고 한다. 이 광경을 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고 마침내 요한 허스의 개혁운동을 지지했다고 한다.

⑸ 그 다음으로 일어난 종교개혁자는 이태리의 플로랜스와 도미니카 공화국의 로마가톨릭 수사였던 제롬 사바나욜라이다. 플로랜스는 위클리프와 허스의 가르침을 받아 드려 로마 가톨릭이단을 반대했는데 그가 플로랜스 광장에 가서 설교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어 그의 설교를 들었다. 그러나 가톨릭미사와 제사의식에서 벗어나 순수한 신앙을 되찾자는 설교 때문에 교황에게 잡혀 파문을 당하고 끝내는 플로랜스 광장에서 목 베임을 당하고 시체는 화장당했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끝내 회개하지 않았다. 이처럼 가톨릭이 영적인 음행을 회개치 않자 주님은 성경대로 가톨릭교회를 침상에 던지셨으니 그 침상이 바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주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1483년에 가난한 광부 아들로 태어난 루터가 34세 되던 1517년 10월 31일, 하나님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성공시켰는데 교황청이 루터를 다른 사람들처럼 죽이기로 했었지만 하나님은 수많은 어려움과 위험 중에서 그를 보호하여 종교개혁을 성공시키므로 1000년 동안의 암흑시대는 밝은 빛을 보게 됐다. 하나님이 회개기회를 주었지만 가톨릭은 끝내 회개치 않았고 지금도 회개를 거절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말씀대로 그날에 음녀를 심판하여 죽이시듯 지구촌의 초대형 이단집단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회개기회를 주실 때, 누구든지 회개하는 자는 용서와 구원의 기회를 누리지만 기회를 무시하고 거절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주께서 회개기회를 주실 때 회개하는 축복의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4. 만국통치권과 새벽별

당시 이세벨은 성도들이 우상숭배와 음행과 이교도들의 생활을 깊이 알아야 더 철저한 영적생활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의 깊은 세계도 알게 된다고 가르쳤는데 그 유혹을 받은 두아디라 교인들은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더 많다(롬 5: 20)는 말씀을 인용해 죄를 실제로 체험하면 은혜를 더욱 값지게 할 수 있다며 우상숭배와 음행 죄를 공공연하게 저질렀다. 그리고 그렇게 이세벨주의를 받아드린 사람들은 뻔뻔스럽게도 자기들은 하나님의 깊은 세계를 통달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이세벨의 유혹을 ‘사탄의 깊은 것’이라고 경계하시고 이세벨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순수한 성도들에게 ‘내가 올 때까지 너희에게 있는 것을 굳게 잡으라’(Nevertheless what you have, hold fast until I come; 25절)고 하셨다.

“내가 세상에 다시 올 때까지, 너희에게 있는 순수한 믿음과 참된 진리와 소망과 특권을 ‘굳게 잡으라’(Hold fast, 크라테사테: “단번에 진리를 굳게 붙잡고 변치 말라”), 다른 교인들은 이세벨의 유혹에 넘어가 음행과 우상숭배와 혼합주의에 빠진다하더라도 너희만은 이세벨의 유혹을 물리치고 오직 올바른 기독교의 진리를 굳게 잡고 변치 말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주님은 “이기는 자와 내 일을 끝까지 지키는 그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자(He who overcomes and keeps My works until the end)다. 학생이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은 공부 잘하는 것이고, 가게 경영자가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은 사업에 성공해 돈 잘 버는 것이며, 의사가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은 사람의 병을 잘 고치는 사람이 되는 것, 운동선수가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은 챔피언 되는 것이듯, 두아디라교회에서 이기는 자는 이세벨의 유혹을 물리치고 끝까지 주의 일을 지키는 자며 주께서 칭찬하신 교회사업과 일인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끝까지 지키는 것이다. 이런 성도에게 예수님은 ① 만국을 다스리는 철장권세와 ② 새벽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이기는 성도, 승리자에게

⑴ 만국통치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는 메시야의 주권사상을 노래한 시편 2; 8-9절의 반영으로 예수께서 세상에 재림하실 때, 하나님으로부터 주를 거역하고 반대하는 지상의 모든 나라를 철장으로 질그릇 깨뜨려 산산조각을 내버리듯 대적들을 파괴하고 심판하며 다스리는 권세를 받아 천년 동안 세상을 통치하실 것처럼 이기는 성도, 끝까지 주님의 일을 지키는 성도들이 천년왕국에서 그 권세에 참여하여 주와 함께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란 약속이다(계 1; 6, 3; 21, 9: 10, 11; 6, 20: 6, 22: 14, 마 28: 18. 요 5; 22, 27) 지금 당신이 주의 일을 붙잡고 충성하는 것처럼 흔들림이 없이 끝까지 주의 일을 붙잡고 이기는 자가 되어 만국을 통치할 권세에 동참하는 축복의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⑵ 새벽별(The morning star)을 주신다. 자연계에서 새벽별은 저녁에 서쪽하늘에서 반짝일 때, 태백성, 개밥바라기, 장경성이라고 부르고, 새벽에 동쪽하늘에서 반짝일 때는 샛별, 계명성, 명성이라고 부르는데 영적으로는 예수님을 새벽별이라고 부른다(벧후 1: 19, 계 2: 28, 22: 16) 이기는 자들에게 새벽별(톤 아스테라 톤 프로이논: “별(군성;群星) 중에 가장 빛나는 별”)을 주신다는 것은 ① 왕의 지배권(민 24: 17, 마 2: 2)을 주시는 것을 상징하고 ②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에 동참케 하심을 상징하며 ③ 생명과 영생과 빛이신 예수님 자신을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계 22: 16) 그렇다. 당신이 아가페사랑과 진실한 믿음과 이웃을 섬기는 것과 천국의 소망 안에서 인내를 지키고, 사탄의 깊은 것인 이세벨 같은 각종 이단들의 유혹을 물리치며 주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때까지(Until His 2nd coming; Till He comes) 주님의 일을 힘쓸 때, 만국을 다스릴 통치권과 새벽별을 주실 것이다. 우리 중에 만국통치권과 새벽별을 받는 성도들이 많게 되기를 축원한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도끼자루를 구하러 산으로 갔다. 따라오던 손자가 발이 아파오자 “여기도 나무가 많은데 왜 자꾸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느냐”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말없이 계곡 산길을 올랐다. 그리고 산 정상 가까이 있는 절벽 위에서 바위 틈새를 뚫고 나온 나뭇가지를 어렵사리 잘라냈다. 그것을 가지고 하산하는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절벽의 바위틈을 뚫고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으려면 얼마나 견뎌야 했겠느냐? 비바람도 폭설도 추위도 더위도 모두 견뎌낸 그놈을 잘라 도끼자루로 써야 평생 써도 부러지지 않는단다. 매사 모든 것이 견딤이 있은 연후에 쓰임이 있는 법이라”고 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6년간 계속된 세계 2차 대전 당시 나치 Holocaust에서 약 11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빅터 프랑클은 체코슬로바키아의 테레지엔슈타트,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독일의 카우페링과 튀르크하임 등 죽음의 수용소를 무려 네 군데나 거치고도 생존해 살아남았다. 그가 죽음의 문턱에서 네 번이나 생존할 수 이유는 무엇인가? ‘살아야 할 의미’를 잊지 않고 견뎠기 때문이다. 그렇다. 자기 미래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사람은 더 이상 살 수 없다. 그러나 ‘살아야 할 의미’를 가지고 견뎌낸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뚫고 다시 새로운 미래를 만든다.

1972년 10월 13일 금요일, 우루과이 올드 크리스천 럭비 팀 45명이 비행기를 타고 칠레로 가던 중 안데스산맥에 추락했다. 추락 당시 23명은 즉사하고 눈사태로 8명이 더 사망해 24명 만 살아남았다. 24명 생존자들은 영하 30도의 극한지대에서  동료사망자의 인육을 먹으며 버텼다. 그러나 그들이 살려면 구조를 요청해야 하는데 아무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의논 끝에 부상자 중 가장 건강한 난도 파라도와 로베르토가 자원해 눈 덮인 산을 타기 위한 아무 장비도 없이 몇 벌 옷만을 겹쳐 입고 운동화를 신은 채 해발 5000m의 겨울 안데스를 넘어 100km를 걸어서 극적으로 구조요청에 성공한다. 덕분에 안데스 산중에 남아있던 동료 선수들도 모두 구출됐다. 그들은 72일의 사투 끝에 살아서 돌아온 것이다.

생환자 파라도는 말한다. “안데스 산중에서 우리는 심장의 한 박동에서 다음 박동으로 근근이 이어가면서도 삶을 사랑했다. 놀랍게도 그 순간 인생의 매초 매초가 선물임을 깨달았다. 나는 생환 이래 그 처절했던 순간들을 잊지 않고 살아가려 애썼고 그 결과 내 인생은 더 많은 축복으로 채워졌다. 그때의 경험에서 말한다. 숨을 쉬어라. 다시 숨을 쉬어라. 숨을 쉴 때마다 당신은 살아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자신의 존재를 사랑하라. 매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가라. 단 한순간도 허비하지 말라”

그렇다. 견뎌내야 한다. 오늘과 지금이 아무리 힘들고 버거워도 포기하지 말고 버티며 견뎌라. 지금 포기하고 무너지면 당신이 시작한 거룩한 믿음과 사명, 당신 안의 영웅은 영영 빛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당신 안에 영웅적인 믿음과 종말사명이 놀랍게 빛을 발할 내일을 포기하지 말라. 말씀으로 지금을 버텨내고 성령으로 당신 안의 영웅을 살려내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의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사업을 끝까지 붙잡고 승리하라. 세상의 모든 유혹과 온갖 사탄의 깊은 이단사설들을 물리쳐라. 그리고 스스로에게 “버텨라. 견뎌라. 내일은 온다”, “그날에 주께서 만국을 다스릴 권세를 주시고 새벽별을 주신다!”고 외쳐라. 그날 그때 지금의 견딤이 영광스런 축복이 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천년왕국에서 만국통치권을 누리고 영원천국에서 새벽별을 받아 세세토록 영생복락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김엘리야 목사(워싱톤주기도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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